신학과 삶

개역개정판 번역은 골치덩어리다.

 

개정판 번역이 나온지 벌써 시간이 꽤 흘러서 대다수 교단에서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있지만 개역한글판에 비해 번역오류가 있다. 

교단의 입장에 따라 교회 예배에 공식적으로 채택은 하지만 설교할 때 본문으로 사용하는데 많은 문제가 있다. 

그래서 개역개정의 현대적 번역을 존중하되 번역오류에 해당하는 부분은 개역한글판을 참고하고 있다.

 

개역개정이 시대적 상황과 현대적 표현에 맞추다 보니 국어적으로는 매끄러울지 모르니 성경적 의미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아서 문제가 많다.  너무 졸속으로 번역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설교시에도 반드시 번역오류를 지적하여 바로잡는다.

그래서 예전보다 더 영어성경을 더 자주 참고할 수 밖에 없다.  원어성경을 본다고 해도 어차피 영어번역과 비교할 수 밖에 없다. 

 

여러가지 영어성경 번역본이 어떤 직역과 의역 중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표로 나타낸 자료가 있다.

NIV 는 많이 알려진 영어성경인데 원문에 비해 정확도가 비교적 떨어져서 요즘에는 ESV 가 많이 추천된다.

 

https://www.chapter3min.org/bible-translations-comparison-charts/

 

Bible translations: Comparison charts - Chapter 3 Ministries

Picking out a new Bible or curious about different translation types? Below are a few comparison charts to help you make your decision or learn more. Reading and comparing the charts should give you a good idea of how different versions compare to each oth

www.chapter3min.org

 

Comparison Ch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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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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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샘

자료가 아닌 소개글입니다.

 

안드로이드 플레이에 SWORD 로 검색되는 앱들이 몇 개 있습니다.

그 중에서 CrossWire 에서 만든 the SWORD project 가 Bishop 입니다.

Study Bilble (AND Bible) 과 비슷하며 좀 다르네요. 

데이터는 AND bible 과 공유합니다. 

특이한 점은 주석보기 모드라는 것이 있어서 화면이 둘로 나누어지고

성경을 하나 선택하면 왼쪽에 성경, 그리고 오른쪽에는 설치된 주석을 모두 보여줍니다.

사용하기에 따라서 장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행화면.

 

모듈 설치 메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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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ORD 칼빈 주석

2021. 11. 9. 13:40 : 자료실

PC 에서 the SWORD project 용 칼빈 주석입니다. 영어로 되어 있습니다.

원래 안드로이드 앱 AND Bible (현 Bible study ) 에서 다운 받아 설치했습니다. 

안드로이드 앱에서는 다운 목록에 표시 되는데 SWORD project 에서는 잘 안 보이네요.

 

1. SWORD project

압축을 풀어주면 mods.d 와 modules 폴더가 생깁니다.

Install Manager - Options - Local Path 에서 위의 폴더를 지정해주면 SWORD 에서 인식합니다.

선택하여 설치하면 됩니다.

Calvincomm.part1.rar
10.00MB
Calvincomm.part2.rar
4.94MB

 

2. 안드로이드 앱 (AND Bible/Bible study)

10M 업드로 제한으로 한개의 zip 파일로 업로드가 안됩니다.

위에서 rar 형식의 파일을 풀어준 뒤에 zip 으로 두 폴더를 함께 압축한 뒤에 안드로이폰으로 옮긴 뒤에 압축을 풀지 않은 상태에서 Zip 으로 설치하기를 선택하여 찾아 설치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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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성경 속에 나타난 여성안수에 대한 이해 - 이관직 박사

이 글은 이관직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것으로 성경 속에 나타난 여성안수에 대한 이해를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정리한 글이다. 이에 요약 소개한다.

 

I. 창조질서 속에서 본 여성안수

 

먼저 성경 속에 나타난 여성안수를 이해하기 위해 남성과 여성의 관계성을 다루고 있는 창조기사에 나타난 창조의 원리와 질서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여성안수를 긍정적으로 보거나 찬성하는 이들은 창 1:27-28을 중심으로 창조시에 남자와 여자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동등하게 지음받았으며 남자와 여자 모두 다스리는 명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남자와 여자의 권위의 차등은 타락후 생긴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창 2:19-20에서 여자가 창조되기 이전에 이미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에게 이름을 지어준 것에서 창조사역에서의 아담의 리더십을 엿보게 하며 여자와의 역할의 차이가 있음을 시사한다. 23절에서 아담은 여자에게 이름을 칭함으로 그의 머리됨의 권위를 행사했다. 또 여자는 돕는 배필로 지음을 받았다(2:18, 20). 헬퍼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도우실 때 하나님을 지칭할 때도 사용된 단어이며 그 단어 자체가 열등한 것이라는 의미는 포함하지 않는다.

 

창조기사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남성과 여성이 각각 동등하면서도 나름대로의 독특한 특성과 역할을 감당하도록 창조하셨다는 사실이다. 동등하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이 똑같은 역할을 맡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현대의 페미니즘의 영향도 있다고 보여진다.

 

II. 신약에 나타난 여성안수

 

여성안수를 찬성하는 이들은 구약의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서 성취된 것으로 행 2:17-18에 인용되어 있는 것처럼 신약시대의 여성사역의 근거를 삼으려는 경향이 있다.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두 학자 존 파이퍼와 웨인 그루뎀은 초대교회에서 여성의 예언사역에 대해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예언 사역은 오늘날 설교나 특별계시 수준과는 다른 성격의 것이었다고 주장하며 여성 안수를 찬성하는 이들을 비평한다.

 

신약에서 여성안수와 관련되어 자주 언급되는 성경구절들로는 고전 11:2-6, 14:34-36, 딤전 2:11-15, 5:21-33, 3:28을 들 수 있다. 고전 11:3에서는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고 밝힌다. 여기서 머리에 대한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이 머리를 권위와 연결짓고 여성안수를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이 머리를 근원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레이몬드 오르트런드는 첫째 해석을 지지하여 남성의 머리됨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두 사람의 영적으로 동등한 인간의 동반자 관계에서 남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향으로 그 동반자관계를 이끌어가는 우선적인 책임성을 지는 것이다.” 그는 남성의 헤드십의 의미가 남성의 지배성의 개념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라 밝히고 남성의 지배성이라 여성의 영적인 동등성과 권리, 가치를 무시하고 여성의 의지에 반하여 남성의 의지를 주장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김의환 교수는 고전 11:5절을 근거로 교회 안에서 여자가 예언하였다는 점을 이야기하며 여자 안수를 주장하는 견해에 대해 고전 11:2-6의 문맥을 볼 때 여자의 예언을 강조하기보다는 남자가 여자의 머리됨을 강조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 비평하였다.

 

고전 14:34-35의 주석에서 박윤선 박사는 여자가 교회에서 잠잠하는 것을 남자를 지배하는 공적인 교훈을 하지 못하게 한 것으로 해석하면서 이 말은 무슨 말이든지 금지당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딤전 2:11-14에 대한 그의 주석에서 박윤선은 종용히라는 부사가 침묵만 의미하지는 않으며 부녀가 일반적으로 주장할 자가 아니라 순종할 자이며 소동할 자가 아니라 안정할 자며 남자들을 가르칠 자가 아니라 배울 자라고 말함으로 여성안수에 대한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도 여성의 필요한 역할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권성수 교수는 딤전 2:12에 대해 바울이 이 본문에서 여자가 가르치는 것 일체를 금지한 것으 아니며 여자가 공예배에서 남자(성인)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였다고 주석하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가르치는내용에 대해 더글라스 무의 해석에서 본문의 가르침은 성경이나 교리의 전승과 관계된 가르침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무리가 있음을 지적하고 그 가르침은 생활교육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이 본문을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남성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견해에 대해 문맥상 그같은 해석은 적합하지 않다고 비평하면서 주관한다는 동사는 여성의 남성 지배적인 주관을 포함하여 일체의 남성 주관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강조하였다.

 

권성수 교수는 고전 11:5에서 여자가 공예배에서 예언하는 것에 언급하면서 바울은 남성 헤드십에 순복하는 자세를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여자의 공예배시 예언을 인정했다고 하면서 바울에게 상호모순성이 없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그는 여성안수는 남성 헤드십을 무시한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여성사역의 제한은 남성 헤드십의 원리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3:28의 말씀 또한 여성안수를 찬성하는 이들이 자주 사용하고 있는 말씀이다. 하지만 이 말씀은 남자와 여자가 교회의 지도자들로서 맡게 되는 사역의 구분이 없다는 의미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구원에는 제한이 없이 모든 인간들에게 문이 열려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본문으로 보아야 한다고 존 파이퍼와 웨인 그루뎀은 주장한다. 아무튼 이 말씀은 노예들과 여자들에게 갖고 있는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 시각에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말씀이었을 것이다.

 

루이스 존슨은 갈 3:28에 관하여 역사적 인물들, 예를 들어 안디옥의 감독인 익나티우스, 져스틴 마터,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힙폴리투스, 닛사의 그레고리, 존 크리소스톰, 어거스틴, 마틴 루터, 존 칼빈의 주석들에서 살펴본 후에 결론 짓기를 그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갈 3:28이 결혼관계에서와 교회생활에서 남자, 여자의 역할의 구별을 폐지하고 있다고 본 사람은 없다고 결론짓고 있다.

 

권성수 교수도 그의 논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하나라는 갈 3:28의 말씀을 가지고 딤전 2:11-15의 본문에 나타나는 남녀의 역할 차이와 남성 헤드십의 원리를 부정하고 여성 사역의 완전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남녀의 역할 차이와 남성 헤드십의 원리는 타락 이전 창조의 원리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결론적으로 인간의 가치와 권리면에서 차별이 없이 동일하나 그 역할과 기능에 있어서 구별이 있는 것이라고 밝힌다.

 

박형룡 박사는 그의 교의신학전집 중 교회론에서 여성안수에 대한 견해를 언급한다. 그는 여성의 여러 가지 사역의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전체교회에 대해 가르치고 다스리는 것은 남자에게 속한 영역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통해 볼 때 박형룡 박사는 안수를 받는 직책 외에 있어서 여성의 다양한 사역과 교훈하는 사역에 대해서 매우 적극적인 시각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부친의 뒤를 이어 총시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쳐 온 박아론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여성의 목사안수를 반대하는 입장이 정통개혁신학의 입장이라고 분명히 못박고 있다.

 

바울이 비록 여성이 교회에서 다스리는 위치에 서 있는 것을 금하였지만 여성들의 다양한 사역의 가능성에 대해 높게 평가함을 그의 사신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울은 여성들의 이름들을 지적하며 문안하였고 그리고 겐그리아 교회의 사역자로서 뵈뵈를 추천한 후에 브리스길라에게 그의 남편에 앞서 이름을 들고 있다. 또 그가 빌립보 교회에 편지할 때 유오디오와 순두게를 권면하는 부분을 통해 보면 이들이 교회에서 차지한 사역의 영역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로마에 있는 교회에서 여성들의 활동이 가르치는 사역은 아니었다고 해도 이미 활발하게 있었고 바울 또한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많은 여성들이 초대교회에서 여러 가지 면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그들이 안수받은 자들이 아니더라도 그들의 사역은 과소평가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전한 자들도 여자들이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가장 가까이 따라간 자들도 여인들이었고 예수님의 공생에 사역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인물들 가운데는 여인들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보아 예수님의 사역에도 눈에 띄게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여성들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여성들이 교회를 다스리는 입장에서 안수를 받고 활동했다는 증거는 성경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III. 맺음말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신구약 66권의 말씀은 정확무오한 말씀이나 죄로 오염되어 있는 한계성을 가진 우리 인간들의 성경해석은 때로는 100% 완벽하게 오류가 없는 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이 여성안수 문제에 대해서도 여성안수를 찬성하는 이들의 견해를 비판하는 동시에 열려 있는 귀와 눈을 가지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을 해석하며 적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은 남성과 여성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소중한 존재로서 동등하지만 역할 면에 있어 차이가 있고 남성의 머리됨의 전제하에서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과 사역을 지지하고 있다.

 

끝으로 필자는 여성이 전체 교회에서 다스리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여성안수를 찬성하지 않지만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것이 역으로 여성이 보다 다양한 사역의 현장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제한하는 구실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현재의 한국교회와 미래의 한국교회에서 크리스챤 여성들의 사역의 장이 구체적으로 보다 넓혀지도록 교회와 교단이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Posted by 작은샘

http://www.reformednews.co.kr/9631

[논문] 교회 내 여성의 기능과 성직의 자격 -김의원 박사

이 글은 김의원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글로 교회 내에서 여성의 기능과 성직의 자격에 대해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논한 것이다. 이에 요약 소개한다.

 

199479회 통합측 총회에서 여성안수 문제에 대해 허용하는 결의를 하자 그 여파가 합동측에까지 확대되면서 이 문제에 대한 성경적 논의가 어떠한가를 살피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에 논의 일환으로 이번 신학지남 가을호에 여성 안수에 대한 신학적 논의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여성안수를 결정하기 전에 장로회신학대학 다원화목회연구원(1992)에서 교역과 여성안수라는 책을 발간하였고 이 책은 어느 면에서 교단 내의 흐름을 여성 안수 허용으로 흘러가도록 학문적인 배경을 제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의 권두언에서 이 문제를 다루면서 여성이 안수받는 것이 성경적이요 오늘 한국교회의 선교를 위해 필요한 것인가?”라고 두 가지를 함께 묻고 있는데 이 둘은 순차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후자인 여성 안수가 한국교회의 선교 사역에 매우 필요한 것인가?”는 이차적인 문제로 전적으로 전자의 문제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전자의 문제를 해결함이 없이 단지 현장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직분을 세웠다면 이는 교회를 일종의 사회단체쯤 여긴 결과가 될 것이다. 또 전자의 문제 곧 여성이 안수받는 것이 성경적인가?”라는 질문도 자세히 검토하면 여기에도 여성과 안수 사이의 어떤 연관성을 논의하거나 정의함이 없이 이를 혼합시킨 우를 범하였다. 오히려 문제를 정확하게 보려면 이렇게 질문해야 했다. “여성은 성경적 교회구조내에서 성직에 참여할 수 있는 기능이 있는가?”

 

1. 여성안수를 찬성하는 학자들이 여성 안수 문제를 논의하면서 초점을 성직인 안수보다는 여성에 두고 여성이 그 직책을 담당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묻고 있다. 기실 여기에도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여성 안수를 여성이 지닌 능력 혹은 기능의 문제로 보아야 하는가에 있다. 곧 여성이 그 직분을 담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아니면 여성이 교회 내에서 그 직분을 담당하도록 성경적 기능과 자격을 갖추었는가?

 

(1) 여성의 능력적 측면

 

여성 안수를 찬성하는 자들은 여성의 능력이 남성의 능력에 비해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는데서 출발하였다. 이들은 안수문제를 여성과 남성 사이의 성차별과 대결의 관점에서 접근함으로 이 문제의 답을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 내지는 가부장 문화의 남존여비사상의 전제하에서 찾으려 한다. 이들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오랜동안 성직은 남성만이 향유하는 특권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문화가 발전되면서 새 성경해석법이 개발되어 문자적 해석이 얽매던 전통적 개념에 변화를 가져다 주어 한두 어구보다는 전체의 문맥과 맥락에서 메시지를 찾게 되었고 그 결과 여성안수를 금기시 했던 교회들도 성의 장벽을 넘어 성직을 남녀가 공유하게 되었다. 과거 성적 차별이 이제는 없어졌기에 성직을 포함한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출발점은 갈 3:28인 것 같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남녀간의 성차별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본문의 문맥은 교회의 구조적 측면보다는 구원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민족이나 신분, 그리고 성의 차별이 없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기에 그리스도 옷 입혀져 하나님의 구원백성이 되는 것과 같이 여자도 구원백성 가운데 속하였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이 본문으로 여성의 안수문제의 논의를 시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2) 여성의 기능적 측면

 

여성의 기능을 가정 내에서의 기능들을 비교해보면 크게 차이가 주어진다. 남녀의 가능상의 구별은 신체적 생리적 차이가 주어짐과 동시에 이미 창조질서의 가정의 개념에 드러난다. 여자는 창조규례를 통해 가정 내에서 남자에 대한 종속성을 부여받았다. 그렇다면 여자의 종속성은 가정에만 국한되어 있는가? 가정구조에서 확장된 교회구조 내에서도 여자의 종속성을 연속된다고 보아야 하는가? 이 문제는 다음에 다룰 안수의 상관관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었으며 이는 교회의 구조적 측면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2. 여성 안수 문제의 초점은 여성 능력의 문제가 아닌 안수로 나타나는 성직의 개념과 성직을 감당할 수 있는 기능에 있다. 안수는 안수받는 사람의 머리에 손을 얹음으로 교회의 직책을 맡을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남성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여성도 할 수 있는데 왜 하필 성직만 못하는가에서 출발한다면 성직을 일반 직능의 범주 속에 포함시키는 우리를 범하게 된다.

  

안수로 주어지는 성직을 여자가 취할 수 있는 기능과 자격을 지니는가? 이는 성직의 문제이기에 남녀의 성적 구별에 의해 결정될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소명의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여성안수 문제는 남녀 차별의 관점이 아니라 그 기능과 자격에 있어 남녀 구별이 지켜져야 하며 그것이 성경적인가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성직을 부여하는 교회구조와 이에 대한 여성의 기능 사이의 문제이다.

 

교회구조내에서 여성이 성직을 감당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1) 성직을 구원사적 하나님의 은사의 직무로 보는가?

 

(2) 성직을 가정구조가 확장된 교회구조의 직능으로 보는가에 달려 있다. 전자에 따르면 성직도 여러 은사들 중의 하나로 보아 다른 모든 은사를 남녀가 공유하였다는 이유로 여성도 성직을 담당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의 직분을 논의하면서 다른 은사들과 연결시키지 않았다. 예를 들면 장로의 직분을 논하면서 장로들이 행정이나 재정을 담당할 것이기에 그들의 행정과 재정능력을 보라는 구절이 없다. 직분을 언급한 구절은 모두 직분을 담당할만한 자격만을 논의할 따름이다. 성직은 후자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교회구조내의 성직은 가정구조내의 직무와 연결되어 있다. 곧 창조질서에 정해진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적 기능 때문에 여성은 성직을 담당할 수 없는 것이다.

 

이같이 교회 안에서의 여자의 역할을 한정시킨 구절로 고전 11:3-5, 14:34-35, 딤전 2:11-15을 들 수 있다. 이 구절들은 당시의 사회적이고 사상적 배경에서 주어진 한정적 규례가 아니고 성경적이고 영구적인 원리이다. 이 구절들은 교회 내에서의 여자의 종속성을 가르치고 또 창조규례를 통해 정해진 가정구조라는 테두리 내에서 여자들의 기능적 측면을 말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성경이 교회 특히 교회의 지도자를 논의할 때 항상 가정의 영역과 결부시킨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를 다스리고 목양한다. 바울은 교회의 지도자인 장로의 직분을 논의하면서 가정 내에서의 아버지 역할과 연결시킨다. 장로는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여야 한다(딤전 3:4). 이 개념을 활용하여 교회에 적용하였다.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딤전 3:5). 여기서 몇 가지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1) 가정단위와 지역교회는 서로 상관관계를 가진다. 곧 가정은 교회의 가장 작은 단위이다.

 

(2) 바울은 이 유추를 통해 다스린다라는 단어의 기능적 정의를 내린다. 곧 다스림이란 가정과 교회에 대한 온전한 돌봄이다. 하나님은 아버지가 가정에서 모든 지도력을 책임지도록 지키신 것처럼 하나님은 장로가 교회에서 이와 같은 일을 하도록 지키신다.

 

(3) 이 관계 유추에 나타난 주요 원리는 교회에서 통하는 진리가 곧 가정에서 통하는 진리라고 본다. 가정의 원리와 교회의 원리를 구분해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원리는 가정의 원리에서 교회의 원리로 확장된 것인 것만큼 가정에 세워지는 지도자 원리도 그대로 교회에서의 지도자 원리와 연결되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여성안수 문제는 여성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성직에 대한 문제로 교회구조상 여자가 성직의 기능에 참여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남녀는 동등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므로 존재론적 동등성을 인정하지마 가정구조내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고 여기서 확장된 교회구조내에서 여자는 남자를 가르치거나 다스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여자는 성경적으로 볼 때 경륜적 또는 기능적 종속성을 가지며 여자가 교히에서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것 또는 집사나 행정직은 맡을 수 있으나 남자를 가르치거나 다스려서는 안되며 여자는 이런 관점에서 목사나 장로나 전도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Posted by 작은샘

http://www.reformednews.co.kr/9615

[논문] 교회 내 여성 사역의 제한성과 중요성 - 김의환 박사

이 글은 김의환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글로 교회 내 여성 사역의 제한성과 중요성을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다. 이에 요약 소개하여 본다.

 

I. 서론 

 

교회 내에서 여성 사역의 성격과 범위의 문제가 20세기 교회의 커다란 관심사가 되고 있다지난 2000년간의 교회적 전통을 깨고 여성의 목사, 장로 안수 문제가 적극적으로 토론되고 있으며 이미 가톨릭교회와 일부 보수적인 교회를 제외한 많은 교회들이 여성 안수를 단행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오래전에 감리교회와 기독교 장로교회들이 여성 안수를 시행하여 왔으나 통합측 장로교회만은 여성 안수 문제를 놓고 장기간 의견 대립현상을 유지하다 드디어 수년전에 여성 안수를 가결하여 시행 중에 있다.

 

20세기 후반기에 접어들며 일어난 여권운동이 기독교 내에도 혁명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일부 복음적 교회들도 이러한 세속적 여권운동의 압력에 굴복하여 여성의 목사 장로 안수를 개방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랫동안 미국 내에서 개혁주의 정통파 교회로 알려진 크리스챤 개혁파 교회도 20년간의 총회적 논란 끝에 개방 압력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제는 여성의 성직 개방이 하나의 도도한 흐름처럼 인식되어 가고 있다. 이제 여성 안수에 반대하는 신학자나 교회는 시대 착오적이며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으로 지목되어 가고 있다. 일부 복음주의 신학자는 성경에 대한 새 해석을 시도하며 정당화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동등하게 지음받은 남녀가 왜 성직에 있어서만은 구별되어야 하는가 하고 반문한다.

 

그러나 구원에 있어서 구별없이 동등한 취급을 받는다는 영적 특권이 사역에 있어서도 동등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발전할 때 여성 안수 문제로 연결된다.

 

과연 오늘의 교회는 지난 2000년간의 관행이나 침묵을 깨고 여성에게 성직 부여를 위해 안수를 해야 하는가의 문제에 직면하여 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여성의 교회 내의 사역을 확대시키기 위해 여성안수를 허락하는가 아니하는가의 문제에 있지 않고 성경의 권위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의 문제로 집약된다. 여성 안수 자체는 하나의 의식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성의 성직 개방은 성경의 가르침과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가르침이 잘못된 것을 시인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성경에 비추어 교회가 2000년간 잘못 가르쳐 왔다면 반드시 고쳐야 한다. 그러나 정말 여성안수는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인가? 아니면 시대적 압력에 굴복하고 마는 것인가의 문제로서 오늘의 교회가 당면한 최대의 이슈 중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여성 안수 문제를 다루려 할 때 이 문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일은 오늘의 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

 

II. 구약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실 때 남자와 여자를 함께 지으신 사실(1:27)은 남자와 여자가 인격적으로 동등하다는 진리를 가르쳐 준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형상 차원에서 동등할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함께 다스리는 문화적 사명도 함께 받았다(1:26, 28).

 

이 문화적 사명을 이행함에 있어 창세기 2장은 보다 자세한 설명을 제공한다. 창세기 2:18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위해 돕는 배필을 지으실 때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무엇을 위한 돕는 배필인가?

 

그것은 땅을 정복하기 위함이요 문화적 사명의 보다 완벽한 수행을 위함이었다. 1:28절에서 땅을 정복하라고 명하실 때 그 방편으로 생육하고 번성하여야 함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여성은 남성의 갈빗대로 지음받은 이차적 피조물이므로 창조 순서 자체에서부터 남자의 종속성을 면치 못한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사실은 여자가 남자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2:23)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함이요 곧 연합하여 둘이 한 몸(2:24)을 이룬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아담과 하와는 인격적으로 동등하며 한 몸이며 한 사명을 받은 동역자이다.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은 남편에게 땀 흘려 일하게 하였고 아내에게 아이를 낳는 수고를 하게 하시므로 사역 분담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 사역 분담에 있어 여자에게는 돕는 자의 역할이 주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의 돕는 자의 위치가 오늘날 교회에서 여성들의 적극적 사역을 금하는 성경적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구속사적 경륜 속에서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이미 여성들의 사역을 활용하셨다. 여성들이 사사로, 선지자로 쓰임 받기도 하였다.

 

요엘 선지자는 장차 여자들도 예언할 것을 일찍이 예언하였다(2:28). 미리암은 모세와 아론과 함께 이스라엘 출애굽 운동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12:4). 그의 여선지자로서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모세의 사역의 보조적 역할임을 망각한 미리암이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였느냐(12:2)”고 비방하며 모세의 리더십에 도전하는 실수를 범하였고 여호와의 징벌이 따랐다(12:9-10).

 

드보라는 사사시대에 여선지자로 활약했다(4:4-6). 드보라는 선지자로만 아니라 사사의 사역도 감당했다(4:5). 이스라엘은 드보라의 리더십 아래 40년 동안 태평성대를 구가하였다(5:31). 훌다도 여선지자로 활약했다. 에스더 역시 이방 포로 가운데서 극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출하였다. 이렇듯 구약의 여자들도 선지자로, 사사로 구속역사의 과정 속에 중요한 한 몫을 감당했다.

 

III. 신약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

 

신약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은 마태복음 첫 장에서부터 나타난다. 예수의 족보에서도 돋보이고 예수의 탄생 기사에서는 더욱 그렇다. 예수의 생애와 십자가 수난 그리고 부활사건 주변에 여자들의 활동상은 눈부실 정도이다. 사도 요한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십자가 현장에서 도망칠 때 예수의 어머니를 비롯해 많은 여인들이 끝까지 지켜 보았다. 죽음을 예비하여 나드 가름을 예수의 몸에 바른 자도 마리아였다. 주님의 복음이 전파될 때마다 마리아의 도움을 함께 전하여 그의 기념비적 신앙을 본받으라고 극찬하셨다(26:13). 무덤에 맨 먼저 찾아간 사람들도 갈릴리에서 온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이었다.

 

누가는 사도행전 18장에서 바울의 복음 사역을 도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의 헌신적 봉사를 언급하며 유명한 아볼로를 전도하여 개종시킨 사실을 밝히고 있다. 바울은 16장에서 그들을 소개할 때 그의 목숨을 대신해 목숨을 바치기를 각오한 특별한 동역자로 부르고 있다. 주목할 일은 유대적 관례를 깨고 바울은 브리스길라를 아굴라보다 먼저 기명한 사실이다. 여성의 위치가 남성의 위치보다 단순히 여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확인되는 경우이기도 하다.

 

로마서 16장에 나타난 바울의 많은 여자 동역자들의 이름은 주목할만 하다. 특히 루포의 어머니는 바울의 어머니라고까지 언급하였다(16:13).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바울은 여성의 사역이 그의 선교운동에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담당했는가라는 사실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4:3)

 

빌립보교회에 있어 두 여성 지도자들인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중요한 위치에서 사역한 사실이 명시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마음을 품고(4:2) 사역을 할 것을 권면하였다. 이처럼 바울의 선교 사역에 있어 여성의 파트너로서의 비중을 기대했으며 그가 세운 교회들이 여성 지도자들의 적극적 참여와 봉사에 의존한 바가 컸음을 알 수 있다.

 

주의 일을 함께 있어서 남녀가 상호의존 관계에 있음을 바울은 이렇게 지적한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12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전 11:11-12)

 

신약이 가르치는 교회 안에서의 여성 위치는 구약시대에 레위인 중심의 성전 사역에 비하면 훨씬 개방적이고 진취적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여자들의 공중기도 하는 것이나 예언하는 것을 인정하였다(고전 11:5). 빌립의 네 딸도 예언하는 자로 활동하였다(21:9).

 

IV. 여성 사역의 제한에 관한 고찰

 

여성 사역은 신구약에 공히 인정한 바이나 그것은 모든 영역에 있어서 남성과 동등한 입장에서 인정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여성들이 남성들과 함께 교회에서 참여는 하였으나 그것은 남성들의 사역에 대한 보조적인 참여임을 가르친다. 성경은 교회 내의 여성 사역의 중요성과 함께 제한성을 강조하고 있다.

 

1. 딤전 2:12-14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여기에 여자의 가르침에 대한 금지의 범위가 문제시 된다. 여자는 일체 교회에서 가르칠 수 없다는 말인가? 아니면 남자를 가르칠 수 없다는 말인가? 후자의 뜻으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남자를 주관할 수 없다는 다음 명령에서 주관의 대상이 남자인 것처럼 가르침의 대상도 남자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디도서 2:3-4에서 여자가 다른 여자를 가르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바울이 금하는 것은 여자가 교회에서 남자를 가르치는 일이다.

 

다음으로 주관할 수 없다는 뜻은 남자 위에 권위로 다스릴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두 가지 제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딤전 5:17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이 교회 내 여성사역을 제한하는 것은 다스리는 장로직과 가르치는 목사직임이 분명하다. 바울은 이어서 여성 사역의 제한에 관한 이유를 2:13-14에서 밝힌다.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14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바울은 여자의 가르침을 금한 이유를 단순히 그 당시 가부장적인 남성 위주 사회였기 때문이 아니라 창조에 있어 우선순위가 남자가 먼저이고 여자는 남자를 돕는 자로 창조하였음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바울이 여성의 가르치는 사역에 대한 금기 이유를 창조에 있어 남녀간의 역할의 차이에 두었기 때문에 금기의 성격은 일시적이 아니라 영구적임을 알 수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창조 후 타락의 원인 제공자가 아담이 아니라 여자였다는 사실을 밝힘으로 바울은 창조 질서면에서만 아니라 타락과 구속역사 차원에서 여자와 남자의 역할 차이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어서 15절에 여성의 역할이 독특한 영역 해산이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 여성의 가정 사역에 있어 주역성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2. 고전 11:2-10

 

고전 11:5에 바울이 교회 안에서 여자가 예언하는 것을 허락하였다는 사실이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의 가르치는 것을 허락한 것으로 해석하여 여자 목사를 세워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본문 전체 문맥을 살피면 여자의 예언에 강조가 있지 않고 여자의 예언은 은사활용까지도 남자와 여자의 머리됨에 강조가 있음을 알 수 있다(고전 11:3).

 

여자가 머리에 반드시 모자를 써야 할 이유는 여자의 머리는 남자(11:3)일 뿐만 아니라 여자는 남자의 영광(11:7)이 되기 때문이다. 여자가 머리에 모자를 씀으로 남자의 머리됨을 예언하는 중에도 나타내야 한다는 논리이다. 여자도 예언할 수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자의 머리됨을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예언의 은사를 활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흔히들 구약의 여선지자 드보라의 사역을 들어 여성 목사 안수의 타당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사사기 4:2-16까지 전말을 자세히 살피면 드보라의 선지활동도 고전 11:3-7까지의 교훈에서 보는 남자의 머리됨을 전제하고 있다. 드보라는 다만 예언의 은사를 받아 그것을 공적으로 활용하기보다 종려나무 아래 거하여 조용히 사역하였고 그에게 찾아오는 자를 상대하였다(4:4-5).

 

이 점에서 구약시대의 다른 남자 선지자와 차이가 있다. 드보라가 바락에게 여호와의 계시를 알릴 때에도 개인적으로 상대했다. 그리고 사사로서의 드보라는 전쟁 수행에 있어 남자 사사들처럼 전쟁의 지휘관으로서의 지도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락을 따라 갔을 뿐이고 전쟁의 공은 바락이 세웠다(4:15-16). 드보라는 다볼산 전투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개인적으로 바락에게 전하는 일만 했다(4:6-7).

 

예언은 이처럼 하나님께 받은 바를 그대로 전하는 일만 하는데 그친다. 그러나 가르치는 일은 받은 계시를 설명하는 일이다. 이 두 가지 은사는 서로 상이하다. 오늘날 여선지자요 사사였던 드보라의 경우를 들어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직을 여성에게도 적용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그릇된 것이다. 오히려 드보라의 선지 활동 자세는 신약의 남자의 머리됨의 가르침을 잘 설명하여 주는 본보기가 되기도 한다.

 

VI. 여성 사역의 중요성

 

성경은 교회 내에서의 여성 사역의 제한을 분명히 밝힘과 동시에 여성 사역의 중요성도 동시에 강조한다. 비록 여성 사역의 제한이 있기는 하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요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장차 유업을 함께 이어 받는데는 동일함에 틀림없다(3:28-29).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다 함께 구원받을 후속자로 천국운동의 경쟁자가 아닌 동역자로 세우셨다. 선교와 교육, 봉사면에서 여성에게 남성을 돕는 동역자로서 무한한 활동의 은사와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오늘 한국교회의 현실 속에서 중요한 여성 사역의 영역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1. 전도와 선교운동

 

아볼로를 전도한 브리스길라와 같이 전도에 앞장 서서 개교회 부흥에 기여할 수 있다. 남성이 파고들이 어려운 아파트 전도는 여성의 전도가 효과적이라 하겠다. 전도주일에 1등인 대상이 대부분 여성들의 몫이 되어 있는 사례들은 여성들에게 전도의 활로가 열려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여 준다. 교회 여전도회에 가입하여 전도와 선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하나님 나라 확장에 직접 공헌하게 된다.

 

2. 기도 운동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전 1903년 원산에서 여자 선교사들의 기도회 모임에서 일어난 기도의 열기가 평양으로 점화된 사실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오늘 새벽기도회, 철야기도회, 산기도회의 모임에서 절대적 다수를 이루는 여자 성도들의 기도의 힘을 한국교회 부흥의 밑거름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일찍이 화란 자유주의 신학자요 목회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가 복음적인 목회자요 신학자로 변하게 되는데는 처음 담임하였던 교회 여성도들의 끈질긴 기도의 힘이 작용한 사실은 교훈하는 바가 크다. 어거스틴을 개종시킨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는 초대교회 역사를 움직인 동인이 되었다.

 

3. 성경공부 운동 및 주일학교 운동

 

2:3-5가 가르치는대로 성숙한 여인은 어리고 성숙하지 못한 여인들을 가르칠 책임과 사명이 있다. 한국교회 안에 여성도가 많은 사실은 성숙한 여성도들의 교육적 사명을 더욱 일깨워준다. 특히 한국 사회처럼 낮에는 집안에 여성만 남아 있는 상황에서 여자들 중심의 성경공부와 구역 예배에서 여성 리더의 필요성과 책임은 지대하다 할 것이다.

 

오늘 크게 부흥한 교회일수록 여전도사, 여성구역장, 여성권찰들이 활발한 봉사를 안하는 교회가 없다. 또 각종 주일학교 교사로서의 봉사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 여전도사에게는 전교회 성도들을 위한 심방의 문이 항상 열려 있다. 여전도회 주관으로 여자 강사를 초청하여 교회적 부흥회를 개최하여 함께 은혜의 잔치에 동참할 수도 있다. 일찍이 명향식 전도사는 안수를 받지 않았어도 여자 부흥사로 크게 활동한 사실이 있다. 그 때에 많은 남편들도 참석하여 함께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선교지에 가서 선교하는 여자 선교사는 많은 남녀를 개종시킨 전례들을 남겼다. 순교한 남편 선교사의 뒤를 따라 남미 에콰도르의 아우카 토인들에게 가서 선교한 엘리사벳 엘리옷이라는 여선교사는 전체부족을 전도하여 개종시킨 후 교육한 교육사적인 사표를 남기기도 했다.

 

4. 문서 선교운동

 

성경 번역, 기독교 철학이 담긴 문학작품 창작, 경건과 전도를 위한 저술, 테이프 제작, 복음서점 사업 등을 통해 효과있는 문서 선교를 할 수 있다. 이밖에도 여성이 교회 안에서의 창의적 사역의 길은 널리 열려 있다. 다만 목회자를 돕는 동역자의 자세에서 교회 봉사를 위해 헌신할 때 루디아, 뵈뵈 그리고 브리스길라가 걸어갔던 같은 길을 따라가게 될 것이다.

 

VII. 결론

 

오늘 여성 안수 문제는 교회가 당면한 중대한 이슈이다. 그러나 안수문제는 단순한 교회의 한 이슈문제에 그치지 않고 성경 권위 문제와 직결된다. 과거 한국교회가 여성 안수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부정적 반응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교회가 그만큼 성경의 권위를 높이고 성경대로 믿는 정통신학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자유주의 신학의 득세로 인해 새로운 성경해석이라는 미명 아래 오늘의 상황에 비추어 성경 해석을 시도하여 여성 안수를 점차 허용하여 가고 있다. 성경이 분명히 명시하는 금기도 시대에 비추어 허용할 수 있다는 주장은 분명 성경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다. 성경의 가르침보다 현실 상황을 더 중시하는 경향 때문이다. 여성 안수가 새 해석으로 허용되면 그 다음은 동성연애에 대한 새 해석이 뒤따른다. 이어서 하나님의 호칭을 바꾸어 남성, 여성이 공히 만족할 수 있는 중성 명사 채용을 주장하는 운동이 뒤따른다. 이 추세는 미국교회에서 그대로 나타나는 실정이다. 어디서나 이 연결고리는 뗄 수 없는 새 해석의 공식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제 우리는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보루에서 안주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이 가르치는 남성의 머리됨의 일관된 대 주제와 범위 안에서 여성 사역의 교회 내에서의 성경적 제한을 인정하면서 여성 사역의 극대화를 추진해야 한다. 과거에 가부장적 남성 위주의 유교문화에 영향을 입은 한국교회가 여성 사역의 활성화를 충분히 추진하지 못한 점을 개선하여 여성사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전반적인 여성사역의 적극적 추진에 힘써야 한다.

Posted by 작은샘

[논문] 여성안수 시비  - 서철원 박사

http://www.reformednews.co.kr/9608

 

≪리폼드뉴스≫ [논문] 여성안수 시비

  이 글은 서철원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것으로 여성안수 문제에 대한 성경적이고 개혁주의적 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요약 소개해 본다.  

www.reformednews.co.kr

이 글은 서철원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것으로 여성안수 문제에 대한 성경적이고 개혁주의적 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요약 소개해 본다.

 

 

여성 해방운동이 전세계적인 조류가 되어 사회전반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사회는 여성운동의 주장과 언어들을 대부분 미국언어에 수용하였다. 가령 남자를 표기하는 manperson으로 바꾸고 남자 3인칭 대명사 he로 표기했던 것을 he/she로 바꾸었다. 그리고 성차별을 나타내는 모든 표현들을 다 공동표현으로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여성을 표기하는 말을 더욱 선호하게 되었다. 가령 he 대신에 she로 바꾸어 쓰는 경향이 강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사회의 갈등 요인을 제거하고 시빗거리를 없애 버렸다.

 

여성해방운동이 한국에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전통적이 가족 구성법인 호주제를 폐지하였고 자녀들의 성도 여자의 성을 따라서 할 수 있게 법을 바꾸었다. 그전부터서도 한국의 부인들이 가정의 경제권을 다 장악하고 있었다. 서양의 관습을 따라 한국의 호주제를 폐지했겠지만 서양에서는 여자가 결혼 전까지는 아버지의 성을 따랐다가 결혼하면 남자의 성을 따르고 비록 이혼하더라도 그 성만은 버리지 못하게 되었다. 호주제를 폐지한 국회의원들이 왜 그 성에 관한 법은 바꾸지 않았는지 의아심이 많다.

 

여성해방운동은 교회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개신교회의 대부분의 대교단들이 여성을 목사로 안수하였다. 대교파인 로마 가톨릭교회는 아직은 여성 사제를 세우지 않고 있다. 작은 교단으로서 보수신학을 지키는 교회는 여성안수를 반대하고 심지어 여집사도 세우지 않고 있다.

  

한국에도 많은 교단들이 여성을 목사로 안수하였다. 한국교회에서 여자 목사안수를 비교적으로 늦게 시작한 통합측 교회는 한국교회에서 가장 많은 여자 목사들을 안수한 교회가 되었다. 소수의 보수교회들만이 여성안수의 강한 조류에 맞서있다.

 

세계 교회상황이 이러하더라도 우리 합동측 교회는 여성목사안수와는 무관할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목회자들 중에서 유력한 분들이 비록 소수이기는 하나 여성안수의 당연성을 제기하였고 신학교에서도 여성안수 지지가 나왔다. 그리고 최근에는 우리 총신을 졸업한 여전도사들의 상당수와 재학생들의 상당수가 여성안수를 강력하게 희망하였다.

 

이런 와중에 K교수가 기독신문에 성경에 나타난 여성의 역할이라는 제하에 글을 실어 여성안수가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 것같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가 여성안수를 하지 않는 것은 복음에 반하여 결국은 그 길로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란 암시를 강하게 하고 있다. 아마도 우리 교회도 신학적으로 넓은 길로 가기로 하면 세계의 대교단들이 하는 여성안수를 하게 될지 모른다. 또 교회에서 남성지도권을 유지하기 위해 여자를 굴종시키고 비하시키고 있다고 책망하였다. 이런 주장과 책망이 성경적 근거를 갖는가?

  

K교수는 갈라디아서 3:28절의 남녀동등성을 가르치는 바울의 본문에 근거해서 여성안수의 성경적 근거를 설명하고 제시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14:34-35절이 1세기 말엽에 첨가된 것으로 단정하다. 거의 같은 명령을 담고 있는 디모데전서 2:11-15절도 바울이 쓴 것이 아니라 1세기 말엽에 편집한 것으로 주장한다. 이렇게 주장하여 평소 그가 취하고 있는 편집비평의 입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더 나아가서 이 두 본문은 바울의 율법주의적 본문인데 이것을 복음의 핵심을 담는 본문보다 더 금과옥조로 여겨 남성들의 지도권 독점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여성의 굴종을 정당화하고 영속화한다고 강조한다. 바울의 복음의 국면과 율법주의의 단계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일이다.

  

우리가 여기서 K교수의 제시에 어리둥절하고 이해하기 힘든 것은 두 본문 고전 14:34-35와 딤전 2:11-15절은 1세기 말에 추가되거나 기록되었다고 하여 바울의 글이 아니라고 단정하고서는 바울의 율법주의적인 언명이라고 주장하는 점이다. 이로써 자기 스스로 자기 해석과 설명이 모순임을 드러낸다.

 

또 갈 3:28은 남녀동등성을 가르치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을 드러내고 있다고 제시한다. 그런데 이 본문에 대한 K의 관점과 주장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갈 3:28은 남녀동등성을 가르치면서 그 동등성에 근거해서 여성안수의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도 않고 암시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이해나 주입과는 본문은 천리도 멀다. 3:28은 남녀동등성과 상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구원 얻음에는 유대인이나 자유인이나 심지어 노예나 자유인에게 아무런 차이나 차별이 없음을 말한다. 남자나 여자도 아무 차이가 없어서 다 주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고 의에 이름을 강조하고 있다. 갈라디아서는 구원얻고 완전해지기 위해 꼭 해야 한다고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율법준수를 예수 믿음에 더해야 한다는 것을 바울이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다.

 

남녀간의 인격적 동등성에서 남녀의 목회직임의 동등성에 대해 결코 암시도 없고 그런 것에는 아무런 의도도 없었다. 갈라디아서의 어느 한 본문이나 전체 본문에서 바울이 남녀의 동등성에서 남녀직분의 동등성에로 나아가야 함을 마음에라도 담고 있음을 암시라도 하는가?

  

또 고전 7:2-16도 남녀의 동등성을 말하므로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다고 K는 주장한다. 이 본문의 내용이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는가? 고전 7:2-16은 결혼한 부부가 서로의 몸을 나누는 것에 한쪽에 독점되어 있지 않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인가?

  

또 고전 11:2-11도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남녀동등이 복음의 핵심인가? 이 본문은 교회가 기도할 때 여자가 머리를 어찌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오히려 이 본문은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고 말하고 있는데 오히려 바울이 남녀동등성을 스스로 깨뜨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11절에 가정에서 남녀가 함께 있고 함께 생활하며 남녀가 동등하게 결혼생활을 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5:21-31에는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이 있으므로 남녀동등성과 상호주의 원칙을 담고 있다고 K는 보는데 이것이 바른 독법인가? 이 본문은 교회의 성도들이 상호복종하는 것을 말하지 남녀간 피차 복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자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오히려 22-28절에 나와 있다. 여자가 남편에게 복종하되 교회가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여자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할 것을 권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남녀동등성과 상호주의 원칙을 끌어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여성안수의 정당을 도출할 수 있는가? 그런 해석은 너무 견강부회이고 자기 의도로 성경을 먹칠하는 행위이다. 성경을 본문대로 이해하고 지키는 것이 복음을 훼손하고 서로 모순되게 하는 것이라고 힐난하는데 이 힐난이 누구에게 적용되어야 하는가?

 

보수주의자들은 혹은 보수주의 칼빈주의자들은 성경을 임의로 선정하여 편향되게 읽고 남자들의 권위독점을 위해 복음에 배치되는 구약적 율법주의의 여성비하에 호소한다고 K는 힐난한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고 가르치면 안된다고 한 말을 살리기 위해 바울이 정죄한 율법주의적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고 정죄한다.

 

이런 율법주의적 태도를 고수함으로 보수주의자들은 부활을 처음 전한 막달라 마리아와 여성들을 범법자로 만들고 그들이 설교한 복음을 무효화하며 심지어 주 예수까지 교회에서 여자의 잠잠함을 어기도록 교사한 분으로 만들고 있다고 정죄한다. 도대체 이런 해석과 주장은 바른 정신을 가지고 하는 말인가?

  

K의 주장과 진술을 종합하면 신약성경은 여성 안수에 대한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한다. 그래서 나온 변명이 성경을 글자적으로 이해하지 말고 정신을 따라 이해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또 남성지도권 주창자들의 주장을 타도해야 복음을 더욱 잘 전하고 여성들이 안수를 받아 복음을 전하므로 여성을 노예화하는 이슬람과 힌두교의 도전을 이겨낼 수 있다고 권고한다. 오히려 여성안수를 한 대교단들의 신학이 너무 넓고 현대신학이 되어서 기독교서의 존립이 어렵게 되어 있는 상황을 K의 눈은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K 교수는 복음의 내용을 제시하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함으로 인종적 차별, 신분적 차별, 성적 차별을 철폐하여 만인에게 자유와 정의와 평화를 확대해야 하는 것으로 제시하였다.

  

복음이 선포되므로 인종적 차별과 신분적 차별과 성적 차별을 다 제거하였고 또 제거하고 있다. 복음선포로 이루어진 결과를 복음으로 결코 혼동하면 안된다. 복음은 주 예수께서 피 흘려 죽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와 사망에서 구출하신 것을 말한다. 이 복음선포가 인류의 역사에 기적들을 산출하였다. 기적들을 복음의 핵심으로 혼동하면 안된다. 우리는 복음선포자의 자격에다 성별간의 차이를 결코 부과하지 않는다. 남녀가 다 복음의 전사들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단지 여자들이 목사가 되어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 성경에서 아무런 근거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3:28을 아무리 강조해도 거기에는 남녀동등성에서 여성안수에로 나아가도록 하는 제시나 당위가 전혀 제시되어 있지 않다는 것만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 본문에는 모든 사람들이 어떤 신분에 있든지 간에 다 동일하게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입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여성안수를 지상의 목표로 삼으면 이 본문을 여성안수의 근거로 볼 수 있게 되는가? 그런 해석법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보수주의자들에게 향했던 권고와 힐난은 오히려 K에게로 향해야 한다. 성경본문을 읽을 때 안경을 벗고 성경본문대로 읽기를 권고한다.

  

교회에서 여성을 굴종시키고 비하한다고 하는데 여성안수를 안 하는 것을 그렇게 보는 모양이다. 우리는 유교의 전통에서 살아왔으므로 여성하대의 관습이 남아 혹은 여성들을 남자이상으로 존중하지 못하는 면이 있을 수 있다. 그런 면을 여성안수문제와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여자의 인격을 존귀한 인격으로 존중한다. 여기에 무슨 남녀차별이 있을 수 있는가? 여성안수시비를 여성인격의 비하로 연결하는 우리를 범하지 말기를 권한다.

Posted by 작은샘

 Richard Gamble (RTS), 개혁주의와 복음주의 상관성

 

[스크랩] 개혁주의 신학과 복음주의의 상관성

개혁주의 신학과 복음주의의 상관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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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신학과 복음주의의 상관성

                                

- Richard Gamble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번역: 안명준교수(평택대학교)

 

이 주제를 적절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들을 조심스럽게 정의해야만 한다. 개혁신학은 복음주의 신학보다도 더 오래되었으며, 복음주의 신학은 비교적 현대적 현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을 정의함으로써 시작해야 한다.

 

I.  복음주의 신학

 

A. 배경적 뿌리

 나는 미국인이기 때문에 미국 복음주의에 관심의 초점을 두고 영국 복음주의에 대한 논의를 피하려고 한다. 미국 복음주의 신학의 뿌리는 웨슬레 운동의 발생을 동반한 18세기 영국에서 발견될 수 있다. 또 아마도 복음주의 신학의 뿌리는 18세기 독일에서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에서도 발견된다. 두 개의 역사적 운동은 확실하게 현대 미국 복음주의를 형성 시켰다.

 

이 강연의 목적을 위하여 나는 복음주의 신학의 뿌리가 영국 감리교회나 독일 경건주의 보다도 시간적으로 오늘날에 더 가까운 것을 전제한다. 이 전제는 논쟁적이지만 나는 나의 강의를 좀더 짧게 하려고 한다!

 

복음주의 신학이 19세기 미국에서 그 시작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여 그 뿌리를 추적하는 것은 반드시 쉬운 작업은 아니다. 하나의 운동으로서 복음주의는 다른 방식들로 다루어 질 수 있다. 그것이 19세기 독일 자유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반작용으로 된 것으로 또침례교와 감리교의 신학과 교회학의 지속적인 성장으로 된 것으로 세 번째 견해는 처음의 두 가능성을 결합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미국 복음주의 신학은 독일 자유주의에 대한 반작용이며 동시에 침례교와 감리교의 신학과 교회학의 지속적인 발전으로 보는 견해이다.

 

B.  미국에서 근본주의의 발생

 

19세기의 말과 20세기의 초에 일반적으로 근본주의라고 불리우는 하나의 운동이 미국에서 일어났다. 이 운동은 분명한 가르침을 거부하는 주류 교회와 교단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났다. 많은 주류 교단들 안에서 동정녀 탄생이 의문시 되었고, 성경의 권위가 공격을 받았고, 기적의 실재가 부인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다.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붙잡은 사람들과 이런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근본주의자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들이 이 이름을 갖게된 이유는 20세기 초에 출판된 근본주의라는 책자의 이름 때문이다.

 

근본주의자라는 이름이 붙은 첫 번째 사람은 위대한 구 프린스톤 신학자인 그레함 메이천(J. Gresham Machen)이다. 그러나 종종 문화적으로 보수적이며 어떤 변화들에 대하여 반대하는 근본주의자들과 메이천과 같은 위대한 지적인 학자들과의 연대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지식인들과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부흥가들을 포함하는 미국 근본주의의의 발생은 메이첸과 다른 사람들에 의해 대표되는 신학적 현실에 이미 흘러들어 갔다. 두 운동의 일시적인 연합으로부터 우리는 실수 없이 우리가 “현대 복음주의 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의 발전을 구별한다.

 

C.  현대 복음주의 신학의 발생

 

1920년대 미국과 캐나다에 있는 신학교 인준기관인 신학협의회(the Association of Theological Schools, ATS)는 대학원들이나 큰 주류의 재정으로 기본 자산을 가진 신학교들과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2차 세계 대전이후에 첫 번째로 인가를 받은 복음주의 신학교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풀러 신학교였다. 그러므로 하나의 운동으로서 현대 복음주의 신학은 아마도 2차 대전 이후의 현상이다.  

 

D.  현대 복음주의신학의 특징들

 

20세기 초 미국에서 복음주의 신학은 놀랍게도 초 교파적이었다. 그 당시 미국의 교파적인 혼합에서 복음주의는 연합 감리교회, 연합 장로교회, 복음 루터교회 그리고 남 침례교회에서  발견된다. 이런 교단들은 주류로 간주되는데 근본주의와 복음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포함하고 있었다. 가끔 복음주의 신학의 운동은 특별한 교단 보다는 초교파적인 기구들과 밀접하게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2가지의 실례가 풀로 신학교와 달라스 신학교의 기관들이다.  복음주의 신학의 다른 실례의 본거지는 IVF, CCC, 네비게이토 그리고 크리스차니티 투데이와 같은 파라처치(para-church) 기관들 이다.

        현대 복음주의 신학은 근본주의의 교리를 붙잡고 있다.  그 기초와 함께 현대 복음주의 신학은 침례교회에서 널리 붙잡고 있으며 감리교회에서는 초기에 그리고 웨슬리 전통에는  지금도 계속 붙잡고 있다. 대부분의 근본주의자들은 전 천년의 종말론을 붙잡는다. 장로교회에서는 구파 장로교회와는 대조적인 신파 장로교회와 밀접하게 동조하고 있다.

 

II. 개혁신학

 

A.  일반적으로 쉬운 정의

 

일반적으로 개혁신학은 복음주의 신학보다도 쉽게 정의를 할 수 있다. 그것은 16세기의 종교개혁과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대륙에서는 존 칼빈과 영국에서는 존 낙스의 이름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미국에서 개혁신학은 보통 특별한 교단들과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은 큰 대륙의 개혁 교단들(CRC, RCA)과 많은 장로교회들을 포함한다.

 

B.  특별하게 까다로운 정의

 

비록 개혁주의라는 칭호를 주장하는 미국의 교단들이 있지만, 개혁주의라고 불리우는 모든 신학이 참된 개혁주의가 될 수 없다! 나는 구 프린스톤 신학자인 B. B. 워필드의 개혁신학의 정의로서 개혁신학이란 “성경적 기독교가 본래의 특성을 발휘하는 것(come into its own)”이라는 그의 정의를 사용하기를 싶다. 그러나 이런 정의는 뜨겁게 논쟁거리가 된다. 그러므로 나는 이 강연의 목적을 위하여 개혁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성경무오에 보다도 현대적인 생각과 더불어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요리 문답들, 벨직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그 문답, 그리고 돌트신조)을 붙잡는 개인들과 교파를 말한다.

 

III.  개혁신학과 복음주의 신학 사이의 긴장

 

A. 운동에 있어서 유사성과 차이성

 

1. 신학적 유사성

개혁주의 고백서들은 복음주의의 중요한 신학적 핵심을 지지한다. 이 점에서 복음주의와 개혁주의 신학은 동의한다. 복음주의와 개혁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고백이 한 개인의 삶에 영향을 주어야 하는 것에 동의한다. 우리가 개인주의적 경건이라고 부른 것이 두 운동의 신학에서 중요하다.

 

2. 교회와 국가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유사성

일반적으로 두 운동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한다. 복음주의 신학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 대한 방어 거점이다. 개혁주의 전통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 관한 문제에 강하지 않으며, 교회는 법인자격으로 정치적인 분야에 참여하는 것에 삼가야 한다고 제안한 그래함 메천으로 부터 그 견해를 지지 받는다. 그가 확신하는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31/4 조항과 일치한다. 메이첸이 믿는 것은 개개인 기독교인들은 국가 법률을 준수하지만 정치에 개개인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행위에서와 정치에 참여하는 것과 공동체 교회 기구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 사이에 강한 구별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3. 경건과 개인주의에 있어서 차이점

그러나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은 근본주의적이며 복음주의적이지 않다. 개혁주의 신앙고백서 복음주의가 아닌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신앙고백서들이 신학과 삶 사이에 특별한 관계를 분명하게 진술하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경건에 대하여 제한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고 그것은 오르지 개인들에게만 관계한다. 재 세례파와는 대조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자의 왕권으로 정치적, 문화적 그리고 교육적인 것을 포함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B. 각각의 운동은 다른 운동에 반대는 두려움

 

1. 사회복음에 대한 복음주의의 두려움

근본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사회복음에 대하여 연합하였다. 1917년 자유주의 신학자 월터 라우센부쉬(Walter Rauschenbuch)가 “사회복음을 위한 신학”(A Theology for the Social Gospel)을 출판하였다. 라우센우쉬 자신은 그 운동의 비판에서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보다도 보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복음주의 운동을 분류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의 실재와 노동의 복지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노력하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 나라는 사람들을 적절하게 사회화하기를 필요로 한다. 악한 사회구조들이 죄악의 상황을 지속하게 하기 때문에 그것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과 같은 건전한 신학을 잘라 줄이는 것으로 본다.

 

2. 금주에 대한 복음주의의 두려움

 복음주의 신학은 음료로서 술의 사용을 반대하는데 연합하였다. 심지어 복음주의자 시카고의 무디(Dwight Moody)도 금주운동을 주장하는데 동의하였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 문제에 대하여 복음주의 신학을 반드시 지지하지는 않았다. 금주운동은 14개 주가 술 소비를 금지하던 바로 그때 미국 시민전쟁에 시작하여 미국헌법 수정 제 18조 (금주법)가 비준되던 해인 1919년 최고점에 이르렀다. 이 수정은 취하게 하는 액체의 공장, 판매, 수송을 금하였다. 이것은 교회와 국가 관계에서 긴장이 있었던 한번의 시기였다.

 

금주에 대한 문제는 장로교회 안에서 대단히 많이 강조를 하였다. 예를 들면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 제 3차와 4차 총회에서 7명의 다른 장로들이 교회로 하여금 모든 목사들과 장로들이 절대 금주을 위하여 싸울 것을 촉구하는 건의들이 있었다. 제 4차 OPC 총회에서 그들은 당시에 조처를 취하지 않기 결정을 하였다. 이 문제는 또 그 다음 5년은 바로 그 교단에서 표면화되지는 않았다. 정통 장로교회가 주류에 대하여 다루는 문제는 복잡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총회는 위원을 선출하여 OPC 와 사회에 대한 관계를 일반적으로 그리고 다른 교회 기관들과는 특별하게 연구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다음 총회에서 우리 교회의 메시지와 방법이 이 세대의 필요를 채우고 OPC가 영향력을 증가시키고 오늘날 우리의 삶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추천할 만한 방법과 수단을 가져오도록 했다. 많은 노력과 모임을 가진 후에 위원회에서는 다수파의 보고서와 소수파의 보고서를 제출하였지만 위원회에서 계속하지 않도록 결론을 내렸다. 그 문제에 대한 어떤 공식적인 답변도 결코 없었다.

 

3. 개인과 사회에 대한 개혁주의의 두려움

비록 메이첸은 자신이 근본주의자임을 선언했지만, 심지어 출판에서, 그는 말하기를 근본주의자란 전 천년주의자들 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현대주의에 대항하여 초자연적 기독교를 분명하고도 논쟁적으로 믿는 자들이다라고 한다. 사회복음에 대한 복음주의의 두려움을 알고 있는 메이첸은 사회복음주의를 공격하였다. 비록 메이첸은 사회복음이란 문구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역사적 기독교란 그것이 사회적이기 보다는 개인적이기 때문에 모든 사회적 발전에 적대적인(inimical)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구 복음주의는 개인을 얻기를 추구하는 것으로 말해진다.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좋은 복음주의는 개인을 구원하고 세상을 운명에 맡기는 대신에 삶의 물리적 조건을 향상시키고, 여기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로 불리우는 것을 세우기 위하여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메이첸은 확신하기를 사회에 반대하는 개인의 구도는 이분법의 잘못된 전형이라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이다. 한 인간이 세상으로부터 영적으로 구원을 받았을 때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는 세상을 도피해서 신비한 묵상의 장소로 가서는 안되며, 오히려 정의를 위한 전투를 위해 다시 세상으로 보내져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다시 한번 그가 우리에게 상기 시키는 것은 기독교 그 자체는 개개인의 영혼에 우선권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는 근본주의 혹은 그가 부르는 역사적 기독교는 실제적이기 보다는 교리적이다 라는 보는 견해에 반대하면서 결론을 내린다. 그가 먼저 말하는 것은 반대 그 자체는 마음이 좁은 것을 상징하지만 교회는 믿음의 기초를 분석하는 것과 인간으로서 물리적인 고통을 완화시키는 것 사이의 이분법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고 한다. 사실상 교회는 두 개를 모두 해야 한다. 그중 하나를 무시하는 것은 분명히 재앙을 불러올 것이다. 후에 그는 말하기를 “만일 우리의 믿음의 지적인 방어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소홀하게 한다면, 우리는 스스로가 큰 죄를 범하는 것이다” 라고 한다. 그는 종교개혁 시대의 부흥처럼 기독교의 부흥을 고대한다. 그리고 그 시대가 올 때 훌륭하고, 이타적이며 고귀한 것을 파괴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촉진할 것이며, 보이는 것들을 구원하는데 방해를 하지 못하며 인간을 압박하지 못하게 하며 이 세상에서 조건들을 증진 시킬 것이다.

 

4. 분리에 대한 개혁주의의 두려움

1959년 헐버트 알리버(C. Herbert Oliver) 장로교회의 흑인 목사는 인종관계와 인종 차별에 대항하여 “육신은 결코 영광을 돌리지 못한다”(No Flesh shall Glory)라는 책을 썼다. 그는 그 책의 한 곳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종차별은 기본적으로 비인간적이며 비자연적인 것처럼 절대적 인종 차별의 철저한 제도는 인종 차별된 구룹을 다루는데 있어서 모든 도덕과 예의를 대담하게 버린다. 기독교 가르침에 의하여 영향을 받은 양심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지는 이해하기 힘들다. 인종 차별화된 집단의 지적이며 교육적인 표준을 개선하기를 원하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은 고통스런 딜레마에 직면하는데 교육과 인종차별은 섞여질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상호 배타적이다. 계몽주의가 번성하는 곳에서 인종차별은 있을 수 없다. 인종차별이 거의 완성된 곳에서는 지적인 성장이 효과적으로 억눌려  있다.

대부분의 미국 복음주의는 남부에 위치하기 때문에 인종차별은 복음주의 안에서 특별한 문제로서 인식되었다.

 

C.  낙태논쟁에 대한 복음주의와 개혁신학의 연대

 

미국 대법원이 1973년에 로(Row)와 와드(Wade)의 싸움에 대한 판정이 있기 전에 앞서, 보수적 장로교회의 지각 있는 지도자들은 낙태가 중요한 사회적 문제임을 알고 있었다. 1968년 OPC는 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문제를 조사하고 정책 방침서를 만들기로 하였다. 이 방침서에서 OPC는 낙태가 합법적으로 되기 전에 강한 반대를 보였다. 이 보고서의 시작의 문단은 실로 예언적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낙태가 살인이라면,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낙태 자유화로의 현재 걸음은 히틀러, 스탈린 그리고 헤롯 대제의 잔인성 보다도 더 나쁘며 보호받지 못한 인간들을 살인으로 인도할 수 있다.“

 

적절한 성경 본문들을 신학적으로 분석한 후에, 위원회는 그들의 분석에 대한 3가지 조치를 추천하였다. 그들이 제안한 것은 총회가 낙태 반대 결의를 받아들이고 그 문제에 대한 더 많은 연구가 회중들과 당회와 장로들에 의하여 있도록 하게 하며, 그런 질문들을  관련된 성경적 원리에 의하여 가르쳐주며, 현재 다루고 있는 법안과 관련하여 또 그들의 공동체에 적절한 상황과 관련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도록 제안을 하였다. 일년 후에 대법원은 미국에 전역에서 낙태를 찬성하는 것으로 판결했다.

 

다시 한번 사회적 문제에 대하여 교회가 교회적 선언을 만드는 문제에 대하여 보수적 장로교회에서 긴장이 있었다. 낙태 보고에 대한 소수파의 보고가 있었다. “소수파 보고서의 저자에게 나타난 것은 교회가 1937년 거절하기로 한 것을 해야하는 직전에 있고, 성경목록(scriptural catalog)에 부가적인 의미를 첨부해야할 직전에 있는 것이다. 후에 소수파 보고서는 진술하기를: 국가법률에 의해 종교적 원리를 강요하는 것에 대항하여 용기를 가지고 이것을 동반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운명을 이 길에 두는 것은 종교적 자유를 거부 당하며 사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견되는데 그것은 매우 위험한 진로이다. 역사의 연구가 많은 증거를 제공한다.” 

 

D. 결론: 미국 개혁신학은 지금도 문제들에 대답할 필요가 있다.

 

이 보고서는 거의 우리를 한 바뀌 돈다. 메이첸의 죽음 이후 보수적 장로교회는 절대금주 문제에 씨름하였고 그 주제에 열띤 토론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찬성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회원들에게 비 성경적인 요구로 간주되는 것을 강요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비록 절주는 찬양 되었고, 술취함은 정죄 되었으며, 많은 목사와 장로들이 주류를 금하기로 선택하였지만, 그러나 교회는 그 절주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낙태에 대한 소수 보고서는 오직 교회가 1970년에 같은 패턴을 따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낙태에 대한 소수 보고서는 두 번째 원리를 질문하였다. 국가 법에 의해서 만들어진 종교적 원리를 강행하는 것을 교회가 권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이었다? 소수파 보고서는 그 길은 위험한 진로라고 말한다.

 

우리가 간단하게 관찰하는 것은 메이첸의 시대부터 1970 년대까지 교회가 사회 문제에 대한 세세한 역할에 관한 의견의 변동이다. 원리적 질문에 대한 답변이 줄어질 때까지 가능한 장로교회에서 사회적 활동은 표면상 지그자그의 경로로 계속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개혁주의 신학과 복음주의 신학의 관계성에 대한 질문에 답변을 준비한다.

 

IV. 개혁주의 신학의 부흥 없이 복음주의 신학의 몰락

 

A.  명제

 

 이 발표의 나머지 명제는 개혁주의 신학의 부흥 없이는 복음주의 신학도 몰락한다는 것이다. 미국 복음주의의 몰락을 예측하는 것은 처음에 거만하고 시기 상조처럼 들릴 수 있다. 이 명제가 성급한 것이 아닌 것을 보이기 위하여 또 그 명제를 확증하기 위하여 복음주의 신학에게 몇 개의 어려운 질문을 물을 필요가 있다.

 

B.  복음주의 신학이 어디로 향할 것인가?

 

복음주의 신학 안에 몇 개의 어지럽게 하는 최근의 경향들이 있다.

 

1. 성경의 포기

자기의식이 있는 복음주의는 고의로 성경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성경이 오늘날 크리스천이 직면한 도전들을 위하여 충분하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을 포기하였다.

 

 a. 기독교상담과 교육에서 포기한 구체적인 예

보이스는 말하기를 “그들은 성경이 크리스천이 성장을 이루는데 충분하고 생각하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세속적 치료법으로 돌아갔다.

b. 예배에서 포기한 구체적 예

많은 목사들은 그들의 예배에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기 위하여 성경 진리의 아주 예리한 요소들을 허물었다. 보이스는 다시 말하기를 그들은 오락을 전공하고 있다고 한다.

 

2. 이 세대의 방식에 따르는 미국 복음주의.

바울 로마서 12 장 2절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고 말한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는 것과 같은 개인의 윤리적 문제를 포함 할 수도 있지만, 하지만 그가 단지 개인적인 경건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실수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마음의 전적인 개혁을 옹호하고 있다.

 

a.  순응에 예로서 세속화

세속화는 복음주의 신학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어서 그것이 교회를 어떻게 건축하며, 실내장식은 어떻게 하며 심지어 설교를 어떻게 하는지 까지 명령한다.

 

b. 물질주의와 학문적 존경의 일어남

 

물질주의

미국 복음주의에서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은 고액의 사례비를 받고 비교적 힘있는 사람들이다. 이 논문의 목적은 사례를 잘 받는 목회자를 깎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어떤 목회자들도 그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장로교회의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은 보통 목사의 사례비의 6 내지 7배를 받는다.

 

학문성에 대한 존경의 일어남

확실히 누구나 복음주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학문적 능력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보는 것에 대하여 논의를 원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대가를 치러서 미국 복음주의는 학문적 존경을 얻으려고 하는가? 이 문제는 성경론과 관련된다; 상위의 학문적 학위를 얻기 위하여 무오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복음주의자를 표명하는 저명한 자들은 지금 성경의 축자적 영감에 반대하고 있다. 잘 알려진 교수이며 정통 장로교회 장로인 마크 놀(Mark Noll)은 그의 책 “복음주의 정신의 스캔들“(Scandal of the Evangelical Mind)에서 주장하기를 (구)프린스톤학자들이 가졌던 성경 무오성은 잘못 지도되었으며, 그것은 기독교에 본질이 무엇인지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하며,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키는 것은 우리가 구주를 깊이 믿는 것이라고 한다. 영국 복음주의 신학자 맥그래스(Alistair McGrath)도 그것과 비슷한 주장을 받아 드린다. 맥그래스는 특별히 찰스 핫지(Charles Hodge)를 비판하면서 말하기를 “성경의 권위에 대한 핫지의 분석은 궁극적으로, 계몽주의 주제를 반영하는 것에서 비롯된 언어 본질의 고백적이며 맹목적 이론(an acknowledge and implicit theory of the nature of language)에 근거했다”고 한다.

 

3. 미국 복음주의는 무 분별화 되고 있다.

무분별화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철저한 방법으로 삶을 보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나의 요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현재 미국 사회와 19세기의 사회를 비교해 본다면 큰 차이점을 주목할 것이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19세기 동안 미국 사회는 노예제도나 연방정부의 제한과 같은 복잡한 문제에 대하여 여론을 형성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글을 읽을 수 있도록 교육을 받은 것이다. 이 무 분별화은 전 미국의 문제였으며 단지 복음주의의 문제만이 아니었고, 그들이 미국 사회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그들 역시 모든 질병으로부터 고통을 당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보이스(Boice)는 말하기를 슬프게도 우리 문화에서 텔레비전의 지배는 교회와 설교에 큰 충격을 주었다. 예배는 즐기는 쪽으로 확산되고 설교자는 사람들이 좋은 시간을 갖도록 도와 줌으로써 사람들을 얻으려고 한다.

 

1923년 미국 장로교회(남장로교회)에서는 14,000 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소요리 문답을 암송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언 머레이(Ian Murray)가 말하기를 오늘날은 “신학도들 가운데서도 성경에 대하여 무식하다”고 한다. 20년 이상을 미국에서 가르친 우리들이 경험하는 바이다. 나는 한국에 있는 여러분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4. 미국 복음주의는 실용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복음주의 운동에서 사람의 마음을 끄는 미국의 방법은 미국 실용주의와 선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교회 성장이론가들이 세미나를 주도한다”라고 보이스(Boice)는 다음과 같이 한탄한다“ 그 세미나에서 설교자들은 일반사람들을 그들의 시장으로 생각하도록 그리고 복음을 매력적으로 패케지로 팔 필요가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사회적 관심을 끌 수 있는 유명한 이름의 사람들과 함께 협회들을 장려하는데 갈망하고 있다.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에 대하여 우리는 듣는 것은 “그가 설교한 멧세지를 유리하게 만드는 최고의 유명인사와 함께 친목을 시도했다”고 한다. 이런 실천은 재앙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더군다나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 로마 카톨릭자들, 그리고 유대인들과 협력하기로 그들이 결정하는데 있어서 실용주의적이었다.

 

5. 복음주의자들은 예전의 오류를 새로운 형태로 받아 드리고 있다.

18세기에 어떤 스콧트랜드 신학자가 가르친 것은 “사람이 자신(혹은 그녀)의 삶의 어떤 변화에 관계없이 사도신경에 증언한 것처럼 예수께서 실제로 죄 때문에 죽으셨다 라는 것에 설득된 사람들은 의롭게 된다”고 했다. 이 오래 전 신학적 오류를 달라스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어떤 사람들을 통하여 새로운 활력을 찾았다. 이런 잘못된 가르침은 잔 핫지스(Zane C. Hodges)가 쓴 글들에서 나타나는데 다른 복음주의자들에 의하여 올바르게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그들이(달라스에서 가르치는 Zane Hodges와 다른 사람들) 회개, 치리, 그리고 내면의 영적 변화의 증거를 주는 행동의 필요성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들이 이것을 믿음에다 행위를 부가하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어떤 개신교나 복음주의자나 개혁주의자들이 구원적으로 믿음에 행위를 연결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복음주의자들은 믿음의 본질이 죄로부터 회개를 요구하며 그리스도와 동행하기 위하여 새롭게 갈망하기를 요구한다.

 

6.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 합류하고 있다.

1994년 “복음주의자들과 로마카톨릭주의자들이 함께: 3천년에 있어서 기독교 선교”(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 The Christian mission in the third millennium) 라는 제목의 25 페이지 분량의 문서가 뉴욕에서 출판되었다. 25명의 복음주의적 루터란 지도자들과  카톨릭 지도자들이 그리고 패커(J. I. Packer)를 포함하여 거기에 서명하였다. 크리스차니티 투데이 (Christianity Today)도 ECT를 지지했다. 존 맥아더(John F. MacArthur)는 즉시 ECT를 거절했다. 그의 책 “무모한 믿음“(Reckless Faith)은   ECT에 반대하고 있다. 이안 머래이(Ian Murray)는 판단하기를 이제 ”복음주의자들 가운에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고 한다.  잘 알려진 신학자 웰즈(David Wells)가 개탄한다. ”한때 복음주의의 영혼에 물을 주었던 역사적 정통주의의 시내는 이제 문화적 무식 때문에 사람들이 세속적인 것을 세속적인 것으로 알지 못하고 세속인 것으로 파멸을 받았다고 한다. . . . 과거 수십 년 동안 현대문화와 쉽게 연합한 기독교 신앙은 어리석은 천국에서 살고 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것에 관하여 그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다

. . . 그것이 영혼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면 그 특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

 

C. 결론

 

오늘 여러분에게 발표한 나의 논문은 개혁주의 신학의 부흥 없다면 미국 복음주의 신학은 스스로 그것을 파괴할 것이며 혹은 아마도 이미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임무는 미국 복음주의 신학의 존속을 위하여 필요한 대답들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에게 배당된 주제가 아니다.

 

그러나 내가 확신하는 것은 모든 올바른 신학은 하나님에게 궁극적인 영광을 돌려야 한다. 미국 복음주의 신학이 하나님께 올바른 영광을 드리지 못하는 한 그것은 실패하게 될 운명에 놓일 것이다. 미국의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만 인간의 능력을 그 영광에 혼합하고 있으며 그것은 그 영예를 잃고 있다. 그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개혁신학에 합류하여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라고 선포한다면 아마도 그들의 계승은 개탄 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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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샘

'아바(abba)'는 '아빠(daddy)'가 아니다!

막연한 추론이 낳은 지식, 하나님 '아빠'로 부르고 싶은 감상주의로

 

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2274

 

1.


먼 옛날에 생산된 성서를 오늘날의 교훈으로 풀어내는 작업이 '주석'의 최종 목표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훈에 급급한 나머지 본문이 자리한 당대적 맥락의 의미를 놓치는 경우가 있다. 해석적 기술의 결핍과 이로 인한 무지가 주된 원인이 되지만 독자들의 신앙 스타일에 얽매인 편향성과 특정 의미에의 집착도 무관치 않다. 때로 전문 학자들의 태만과 이에 따른 인습적인 통념의 반복 역시 그런 엉뚱한 의미 편취와 곡해의 사태에 적극적인 요인이 되기도 한다. 물론 성서 해석의 무지와 기만의 결과로 선포되는 메시지에 감동받을 수 있는 현실을 나는 이해한다. 이런 현실의 장벽을 뚫고 보다 순전한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대안적 성서 주석은 그래서 종종 피로하고 괴로운 노동이 된다. 그런 버거운 부담을 무릅쓰고 기존의 주석적 성벽을 허무는 뜨거운 감자 하나를 끄집어내 보기로 한다. 그것은 신약성서에 사용된 '아바(abba)'라는 아람어가 우리말의 '아빠'를 뜻한다는 오래 묵은 오해에 관한 것이다.

2.


내가 추적하기로 이러한 '아바=아빠'의 의미론적 등치의 계기를 제공한 사람은 요아킴 예레미아스라는 20세기 독일의 성서학자이다. 그는 불트만 우파 계열의 학자로 그의 몇몇 예수 연구의 저작들이 국내에 번역, 소개되면서 이 땅의 신약성서 이해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그중에서 예수의 비유와 기도에 대한 그의 해석은 그 영향의 비중이 꽤 컸다. 1965년에서 1971년에 생산된 그의 여러 저작들은 예수의 '아바' 기도를 큰 비중으로 다루면서 그것이 가족 관계의 친밀함을 드러내는 어린아이의 말로 하나님과 예수의 독특한 부자 관계를 특징짓는 호칭임을 주장하였다. 아버지를 호칭하는 친밀한 어린아이의 말이라는 암시는 곧 그것이 '아빠'로 이해되어야 할 근거를 제시하였고, 이러한 유추 및 확대해석은 감정적인 유착 관계를 중시하는 한국적 정서에 크게 호응하면서 이 땅에 무비판적으로 수입되었다.

하지만 예레미아스의 저작들에서 이 구절의 해석, 곧 '아바=아빠'의 등식은 하나님을 아버지라는 가족 관계의 친밀한 용어로 드러낸 예수의 표현을 과장되게 밀어붙인 추론이었을 뿐, 당시 이 아람어 용례를 언어학적으로 정밀하게 분석하여 연구해 낸 결과는 아니었다. 물론 그는 일관되게 '아바'에 집중하면서 꽤 쓸 만한 자료들을 수집하여 비교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아바가 어린아이의 말이라는 대전제가 워낙 완고하여 그는 그 검증 과정에서 드러난 여러 무리수를 논리적으로 치밀하게 해명하기에 앞서 그 대전제로 수렴시키는 안이한 선택을 했다. 그런데 그것이 이 땅에서는 이렇다 할 검증 절차도 없이 불변의 사실이 되었고 진리로 승화되었다. 서구의 추론적 지식에 대한 이 땅의 식자층이 바친 거의 맹목적이고 온전한 순종의 결과였다.

3.

저명한 학자의 영향력은 매우 강고했다. 더구나 그는 유구한 신학 전통을 지닌 서구 선진국의 학자였다. '아바=아빠'의 간단한 등식은 이후 17년간 확고부동한 해석학적 권위를 차지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던 중 이러한 지당한 공식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abba'를 관련 자료에 비추어 재차 치밀하게 비교 분석하여 논증한 학자는 밴더빌트대학의 교수이자 근동의 셈족 언어 전문가였던 제임스 바(James Barr)였다. 그는 1988년 영문학술지 (1988, April) 28~47쪽에 "Abba Isn't Daddy"라는 제목의 획기적인 논문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그는 다양한 'abba' 관련 자료들을 언어학적으로 정밀하게 분석하면서 예레미아스가 범한 논증의 오류와 허방을 예리하게 지적하였다. 그의 이런 연구 결과 밝혀진 핵심적인 사실은 예수와 당대 유대인들에게 아람어 'abba'라는 어휘 속에 우리말의 '아빠(영어의 애칭 daddy)'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레미아스의 추론에 대한 제임스 바의 비판은 그의 장기인 언어학적 분석을 동원하여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게 제출되었다.

첫째, '아바(abba)' 어형의 언어학적 기원은 기존 연구에 의하면 1) 강조적 상태 2) 호격 3)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 등의 세 종류로 설명되는데 예레미아스는 오로지 3)의 사례에만 집착했다는 것이다.

둘째, 설사 그 어원이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에 있었다손 치더라도(그럴 가능성에 회의적이지만) 예수 당시 이 단어는 이미 '아버지'를 호칭하는 모든 연령대의 공통된 용어로 정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약성서 시대에 '아바' 호칭을 어린아이의 재잘거리는 '아빠'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은 난센스라는 것이다.

셋째, 예레미아스 자신이 이 '아바' 호칭이 어린아이만의 용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예수를 비롯한 당대의 경건한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유아처럼 '아빠'로 호칭한다는 것이 '용납할 수 없는 나이브함'의 증표라는 점을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바의 어린아이 용례에 집착했던 자가당착이 지적된다.

넷째, 만일 '아바'가 '아빠'의 함의를 지닌 아람어였다면 이 단어가 사용된 마가복음 14:36, 로마서 8:15, 갈라디아서 4:6에서 그것의 병행구인 희랍어에 그 세밀한 뜻이 반영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이 문구(abba ho patēr)에서 '아바'를 번역한 희랍어는 '아빠'가 아닌 그냥 '아버지'이다. 희랍어에도 아버지를 가리키는 유아스런 애칭이 있었다. 호머 시대 사용된 atta라든가,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사용한 patridion도 있지만, 가장 유력한 후보는 papas이다. 실제로 이 희랍어 papas는 제우스신이나 아티스신을 호칭하는 어휘로 사용된 용례가 있다. 그런데 이 아람어의 뜻을 가장 잘 알았을 마가복음의 저자와 사도 바울조차 papas가 아닌 patēr를 abba의 병립 어휘로 삼았다. 그들에게 '아바'는 그냥 '아버지'였기 때문에 그렇게 자연스럽게 표기한 것이리라.

다섯째, 그레코-로마 전통에서 제우스신 등을 아버지/아빠라고 부른 용례들이 탐지된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경우를 예수와 당시 경건한 일부 유대인들에 국한된 유별나고 독특한 예외적인 사례로 못 박아 버리는 것도 공정한 판단이 못된다. 우리 전통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어 예외적인 가치를 독점했으면 하는 환상적 욕구의 간절함이야 왜 모르겠는가.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러한 배타적인 시야의 협량함이 앎과 깨달음의 반경에 심근경색을 가져올 수 있다는 교훈을 얻는다.

4.

어쨌든 국내의 성서학자들은 제임스 바의 저 유명한 논문을 읽어보지 못했거나 읽어 보았더라도 굳이 '아바=아빠'의 도식이 정착되어 개역개정번역에도 반영된 상태에서 소란을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았는지 이후 잠잠했다. 그래서 그의 연구로 창출된 새로운 지식은 별반 호응을 얻지 못한 채 이 땅의 아카데미아에서 실종되어 버렸다. 혹여 이 사실을 아는 일부 소수의 침묵 속에 갇혀버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 하나님을 친밀하게 '아빠'로 어린애처럼 부르고 싶은 신앙의 감상주의는 더 부추겨졌고, 이와 함께 미성숙한 자아를 감성일변도의 신앙 취향으로 땜질하려는 나이브한 '하나님/아빠/낭만주의'도 더욱 견고하게 이 땅의 신앙 풍토 속에 뿌리내려 갔다.

1960년대의 막연한 추론이 낳은 허술한 앎의 소문이 이 땅에 아무런 학문적 검증 없이 허술하게 유통된 나머지 그것은 이 땅의 예배당에서 수많은 목사들과 교인 대중에 의해 복창되어 왔다. 너무 순진하게 서구의 지식을 받아먹고 너무 빨리 소화시켜 버리는 이 땅의 신학적 풍토 역시 그러한 복창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그리하여 신학적 아카데미아와 교회의 방기 가운데 유통된 그와 같은 태만한 인습적 통념은 하나님과의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유착관계를 강화하였고 가족주의적으로 연성화된 신앙의 사유화를 촉진하는 데 적잖이 이바지했다. 1960년대의 고리타분한 인식의 틀에 우리의 신학적 지성이 꽁꽁 묶여 1980년대의 정밀한 분석과 연구를 통한 견고한 앎의 열매를 방기한 대가는 이토록 혹독했다.

5.

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의 백성들은 애·어른 구별 없이 다들 미욱한 자녀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아바'가 '아빠'가 아니라고 해서 이런 해석적 권위로써 모종의 어른스러움을 과시하며 어린애 같은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성도를 타박하려 한다면 이는 과잉 적용이다. 그러나 아버지-자녀로 맺어진 '하나님의 가족' 관계가 미숙함과 유치함이 아닌 성숙함을 전제로 하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하나님=아빠'로 표상되는 신앙적 나이브함의 승승장구는 종종 성도를 우민화 이데올로기에 볼모로 붙잡아두려는 유혹을 조장하기 쉽다. 애·어른 구별 없이 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며 자신을 낮추고 구원을 갈망하는 것이 신앙의 본령일 터이다. 그렇다면 애와 어른 사이의 세밀한 차이를 구별하여 어린아이의 말과 생각과 버릇을 버리게 하고 장성한 사람의 성숙한 사고력과 판단력을 독려하는 것은 신학의 의무이다. 제대로 된 성서 주석이 그 신학의 밑자리에 깔려 있어야 한다.

[출처: 뉴스앤조이] '아바(abba)'는 '아빠(daddy)'가 아니다!

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2274

Posted by 작은샘

저작권 만료된 개역한글성경(1961) 의 SWORD 모듈을 올립니다.

crosswire.org 에 올라와 있는 성경 KorRV 버전은 '세례'가 '침례'로 되어 있습니다.  아마 침례교인이 편집하여 올린 듯합니다.  그래서 '세례'로 표기된 개역한글 성경 버전을 올립니다.

KorRV 와 구별하기 위해 korHRV (Hangeul Revised Version) 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대한성서공회 홈페이지에 올라온 본문이 절 표시에 있어서 인쇄판 성경본문과 조금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한글성경의 절 수를 영어 성경과 맞추기 위해 절을 통합하거나 수정한 곳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한국교회가 사용했던 개역한글 인쇄판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혹시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SWORD project 에 성경을 제출하려고 하니 제출하는 형식이 너무 어려워서 포기했습니다.  압축한 zip 파일을 직접 설치하면 됩니다.

 

안드로이드 앱 Bible study (AND Bible) 에서는 Zip 으로 설치하기를 선택하여 설치하면 됩니다. 

 

korhrv.zip
1.38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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