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삶

개역개정판 번역은 골치덩어리다.

 

개정판 번역이 나온지 벌써 시간이 꽤 흘러서 대다수 교단에서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있지만 개역한글판에 비해 번역오류가 있다. 

교단의 입장에 따라 교회 예배에 공식적으로 채택은 하지만 설교할 때 본문으로 사용하는데 많은 문제가 있다. 

그래서 개역개정의 현대적 번역을 존중하되 번역오류에 해당하는 부분은 개역한글판을 참고하고 있다.

 

개역개정이 시대적 상황과 현대적 표현에 맞추다 보니 국어적으로는 매끄러울지 모르니 성경적 의미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아서 문제가 많다.  너무 졸속으로 번역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설교시에도 반드시 번역오류를 지적하여 바로잡는다.

그래서 예전보다 더 영어성경을 더 자주 참고할 수 밖에 없다.  원어성경을 본다고 해도 어차피 영어번역과 비교할 수 밖에 없다. 

 

여러가지 영어성경 번역본이 어떤 직역과 의역 중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표로 나타낸 자료가 있다.

NIV 는 많이 알려진 영어성경인데 원문에 비해 정확도가 비교적 떨어져서 요즘에는 ESV 가 많이 추천된다.

 

https://www.chapter3min.org/bible-translations-comparison-charts/

 

Bible translations: Comparison charts - Chapter 3 Ministries

Picking out a new Bible or curious about different translation types? Below are a few comparison charts to help you make your decision or learn more. Reading and comparing the charts should give you a good idea of how different versions compare to each oth

www.chapter3mi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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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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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샘

 Richard Gamble (RTS), 개혁주의와 복음주의 상관성

 

[스크랩] 개혁주의 신학과 복음주의의 상관성

개혁주의 신학과 복음주의의 상관성                                                                             ..

blog.daum.net

개혁주의 신학과 복음주의의 상관성

                                

- Richard Gamble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번역: 안명준교수(평택대학교)

 

이 주제를 적절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들을 조심스럽게 정의해야만 한다. 개혁신학은 복음주의 신학보다도 더 오래되었으며, 복음주의 신학은 비교적 현대적 현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을 정의함으로써 시작해야 한다.

 

I.  복음주의 신학

 

A. 배경적 뿌리

 나는 미국인이기 때문에 미국 복음주의에 관심의 초점을 두고 영국 복음주의에 대한 논의를 피하려고 한다. 미국 복음주의 신학의 뿌리는 웨슬레 운동의 발생을 동반한 18세기 영국에서 발견될 수 있다. 또 아마도 복음주의 신학의 뿌리는 18세기 독일에서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에서도 발견된다. 두 개의 역사적 운동은 확실하게 현대 미국 복음주의를 형성 시켰다.

 

이 강연의 목적을 위하여 나는 복음주의 신학의 뿌리가 영국 감리교회나 독일 경건주의 보다도 시간적으로 오늘날에 더 가까운 것을 전제한다. 이 전제는 논쟁적이지만 나는 나의 강의를 좀더 짧게 하려고 한다!

 

복음주의 신학이 19세기 미국에서 그 시작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여 그 뿌리를 추적하는 것은 반드시 쉬운 작업은 아니다. 하나의 운동으로서 복음주의는 다른 방식들로 다루어 질 수 있다. 그것이 19세기 독일 자유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반작용으로 된 것으로 또침례교와 감리교의 신학과 교회학의 지속적인 성장으로 된 것으로 세 번째 견해는 처음의 두 가능성을 결합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미국 복음주의 신학은 독일 자유주의에 대한 반작용이며 동시에 침례교와 감리교의 신학과 교회학의 지속적인 발전으로 보는 견해이다.

 

B.  미국에서 근본주의의 발생

 

19세기의 말과 20세기의 초에 일반적으로 근본주의라고 불리우는 하나의 운동이 미국에서 일어났다. 이 운동은 분명한 가르침을 거부하는 주류 교회와 교단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났다. 많은 주류 교단들 안에서 동정녀 탄생이 의문시 되었고, 성경의 권위가 공격을 받았고, 기적의 실재가 부인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다.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붙잡은 사람들과 이런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근본주의자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들이 이 이름을 갖게된 이유는 20세기 초에 출판된 근본주의라는 책자의 이름 때문이다.

 

근본주의자라는 이름이 붙은 첫 번째 사람은 위대한 구 프린스톤 신학자인 그레함 메이천(J. Gresham Machen)이다. 그러나 종종 문화적으로 보수적이며 어떤 변화들에 대하여 반대하는 근본주의자들과 메이천과 같은 위대한 지적인 학자들과의 연대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지식인들과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부흥가들을 포함하는 미국 근본주의의의 발생은 메이첸과 다른 사람들에 의해 대표되는 신학적 현실에 이미 흘러들어 갔다. 두 운동의 일시적인 연합으로부터 우리는 실수 없이 우리가 “현대 복음주의 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의 발전을 구별한다.

 

C.  현대 복음주의 신학의 발생

 

1920년대 미국과 캐나다에 있는 신학교 인준기관인 신학협의회(the Association of Theological Schools, ATS)는 대학원들이나 큰 주류의 재정으로 기본 자산을 가진 신학교들과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2차 세계 대전이후에 첫 번째로 인가를 받은 복음주의 신학교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풀러 신학교였다. 그러므로 하나의 운동으로서 현대 복음주의 신학은 아마도 2차 대전 이후의 현상이다.  

 

D.  현대 복음주의신학의 특징들

 

20세기 초 미국에서 복음주의 신학은 놀랍게도 초 교파적이었다. 그 당시 미국의 교파적인 혼합에서 복음주의는 연합 감리교회, 연합 장로교회, 복음 루터교회 그리고 남 침례교회에서  발견된다. 이런 교단들은 주류로 간주되는데 근본주의와 복음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포함하고 있었다. 가끔 복음주의 신학의 운동은 특별한 교단 보다는 초교파적인 기구들과 밀접하게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2가지의 실례가 풀로 신학교와 달라스 신학교의 기관들이다.  복음주의 신학의 다른 실례의 본거지는 IVF, CCC, 네비게이토 그리고 크리스차니티 투데이와 같은 파라처치(para-church) 기관들 이다.

        현대 복음주의 신학은 근본주의의 교리를 붙잡고 있다.  그 기초와 함께 현대 복음주의 신학은 침례교회에서 널리 붙잡고 있으며 감리교회에서는 초기에 그리고 웨슬리 전통에는  지금도 계속 붙잡고 있다. 대부분의 근본주의자들은 전 천년의 종말론을 붙잡는다. 장로교회에서는 구파 장로교회와는 대조적인 신파 장로교회와 밀접하게 동조하고 있다.

 

II. 개혁신학

 

A.  일반적으로 쉬운 정의

 

일반적으로 개혁신학은 복음주의 신학보다도 쉽게 정의를 할 수 있다. 그것은 16세기의 종교개혁과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대륙에서는 존 칼빈과 영국에서는 존 낙스의 이름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미국에서 개혁신학은 보통 특별한 교단들과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은 큰 대륙의 개혁 교단들(CRC, RCA)과 많은 장로교회들을 포함한다.

 

B.  특별하게 까다로운 정의

 

비록 개혁주의라는 칭호를 주장하는 미국의 교단들이 있지만, 개혁주의라고 불리우는 모든 신학이 참된 개혁주의가 될 수 없다! 나는 구 프린스톤 신학자인 B. B. 워필드의 개혁신학의 정의로서 개혁신학이란 “성경적 기독교가 본래의 특성을 발휘하는 것(come into its own)”이라는 그의 정의를 사용하기를 싶다. 그러나 이런 정의는 뜨겁게 논쟁거리가 된다. 그러므로 나는 이 강연의 목적을 위하여 개혁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성경무오에 보다도 현대적인 생각과 더불어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요리 문답들, 벨직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그 문답, 그리고 돌트신조)을 붙잡는 개인들과 교파를 말한다.

 

III.  개혁신학과 복음주의 신학 사이의 긴장

 

A. 운동에 있어서 유사성과 차이성

 

1. 신학적 유사성

개혁주의 고백서들은 복음주의의 중요한 신학적 핵심을 지지한다. 이 점에서 복음주의와 개혁주의 신학은 동의한다. 복음주의와 개혁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고백이 한 개인의 삶에 영향을 주어야 하는 것에 동의한다. 우리가 개인주의적 경건이라고 부른 것이 두 운동의 신학에서 중요하다.

 

2. 교회와 국가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유사성

일반적으로 두 운동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한다. 복음주의 신학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 대한 방어 거점이다. 개혁주의 전통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 관한 문제에 강하지 않으며, 교회는 법인자격으로 정치적인 분야에 참여하는 것에 삼가야 한다고 제안한 그래함 메천으로 부터 그 견해를 지지 받는다. 그가 확신하는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31/4 조항과 일치한다. 메이첸이 믿는 것은 개개인 기독교인들은 국가 법률을 준수하지만 정치에 개개인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행위에서와 정치에 참여하는 것과 공동체 교회 기구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 사이에 강한 구별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3. 경건과 개인주의에 있어서 차이점

그러나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은 근본주의적이며 복음주의적이지 않다. 개혁주의 신앙고백서 복음주의가 아닌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신앙고백서들이 신학과 삶 사이에 특별한 관계를 분명하게 진술하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경건에 대하여 제한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고 그것은 오르지 개인들에게만 관계한다. 재 세례파와는 대조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자의 왕권으로 정치적, 문화적 그리고 교육적인 것을 포함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B. 각각의 운동은 다른 운동에 반대는 두려움

 

1. 사회복음에 대한 복음주의의 두려움

근본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사회복음에 대하여 연합하였다. 1917년 자유주의 신학자 월터 라우센부쉬(Walter Rauschenbuch)가 “사회복음을 위한 신학”(A Theology for the Social Gospel)을 출판하였다. 라우센우쉬 자신은 그 운동의 비판에서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보다도 보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복음주의 운동을 분류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의 실재와 노동의 복지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노력하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 나라는 사람들을 적절하게 사회화하기를 필요로 한다. 악한 사회구조들이 죄악의 상황을 지속하게 하기 때문에 그것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과 같은 건전한 신학을 잘라 줄이는 것으로 본다.

 

2. 금주에 대한 복음주의의 두려움

 복음주의 신학은 음료로서 술의 사용을 반대하는데 연합하였다. 심지어 복음주의자 시카고의 무디(Dwight Moody)도 금주운동을 주장하는데 동의하였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 문제에 대하여 복음주의 신학을 반드시 지지하지는 않았다. 금주운동은 14개 주가 술 소비를 금지하던 바로 그때 미국 시민전쟁에 시작하여 미국헌법 수정 제 18조 (금주법)가 비준되던 해인 1919년 최고점에 이르렀다. 이 수정은 취하게 하는 액체의 공장, 판매, 수송을 금하였다. 이것은 교회와 국가 관계에서 긴장이 있었던 한번의 시기였다.

 

금주에 대한 문제는 장로교회 안에서 대단히 많이 강조를 하였다. 예를 들면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 제 3차와 4차 총회에서 7명의 다른 장로들이 교회로 하여금 모든 목사들과 장로들이 절대 금주을 위하여 싸울 것을 촉구하는 건의들이 있었다. 제 4차 OPC 총회에서 그들은 당시에 조처를 취하지 않기 결정을 하였다. 이 문제는 또 그 다음 5년은 바로 그 교단에서 표면화되지는 않았다. 정통 장로교회가 주류에 대하여 다루는 문제는 복잡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총회는 위원을 선출하여 OPC 와 사회에 대한 관계를 일반적으로 그리고 다른 교회 기관들과는 특별하게 연구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다음 총회에서 우리 교회의 메시지와 방법이 이 세대의 필요를 채우고 OPC가 영향력을 증가시키고 오늘날 우리의 삶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추천할 만한 방법과 수단을 가져오도록 했다. 많은 노력과 모임을 가진 후에 위원회에서는 다수파의 보고서와 소수파의 보고서를 제출하였지만 위원회에서 계속하지 않도록 결론을 내렸다. 그 문제에 대한 어떤 공식적인 답변도 결코 없었다.

 

3. 개인과 사회에 대한 개혁주의의 두려움

비록 메이첸은 자신이 근본주의자임을 선언했지만, 심지어 출판에서, 그는 말하기를 근본주의자란 전 천년주의자들 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현대주의에 대항하여 초자연적 기독교를 분명하고도 논쟁적으로 믿는 자들이다라고 한다. 사회복음에 대한 복음주의의 두려움을 알고 있는 메이첸은 사회복음주의를 공격하였다. 비록 메이첸은 사회복음이란 문구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역사적 기독교란 그것이 사회적이기 보다는 개인적이기 때문에 모든 사회적 발전에 적대적인(inimical)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구 복음주의는 개인을 얻기를 추구하는 것으로 말해진다.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좋은 복음주의는 개인을 구원하고 세상을 운명에 맡기는 대신에 삶의 물리적 조건을 향상시키고, 여기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로 불리우는 것을 세우기 위하여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메이첸은 확신하기를 사회에 반대하는 개인의 구도는 이분법의 잘못된 전형이라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이다. 한 인간이 세상으로부터 영적으로 구원을 받았을 때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는 세상을 도피해서 신비한 묵상의 장소로 가서는 안되며, 오히려 정의를 위한 전투를 위해 다시 세상으로 보내져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다시 한번 그가 우리에게 상기 시키는 것은 기독교 그 자체는 개개인의 영혼에 우선권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는 근본주의 혹은 그가 부르는 역사적 기독교는 실제적이기 보다는 교리적이다 라는 보는 견해에 반대하면서 결론을 내린다. 그가 먼저 말하는 것은 반대 그 자체는 마음이 좁은 것을 상징하지만 교회는 믿음의 기초를 분석하는 것과 인간으로서 물리적인 고통을 완화시키는 것 사이의 이분법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고 한다. 사실상 교회는 두 개를 모두 해야 한다. 그중 하나를 무시하는 것은 분명히 재앙을 불러올 것이다. 후에 그는 말하기를 “만일 우리의 믿음의 지적인 방어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소홀하게 한다면, 우리는 스스로가 큰 죄를 범하는 것이다” 라고 한다. 그는 종교개혁 시대의 부흥처럼 기독교의 부흥을 고대한다. 그리고 그 시대가 올 때 훌륭하고, 이타적이며 고귀한 것을 파괴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촉진할 것이며, 보이는 것들을 구원하는데 방해를 하지 못하며 인간을 압박하지 못하게 하며 이 세상에서 조건들을 증진 시킬 것이다.

 

4. 분리에 대한 개혁주의의 두려움

1959년 헐버트 알리버(C. Herbert Oliver) 장로교회의 흑인 목사는 인종관계와 인종 차별에 대항하여 “육신은 결코 영광을 돌리지 못한다”(No Flesh shall Glory)라는 책을 썼다. 그는 그 책의 한 곳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종차별은 기본적으로 비인간적이며 비자연적인 것처럼 절대적 인종 차별의 철저한 제도는 인종 차별된 구룹을 다루는데 있어서 모든 도덕과 예의를 대담하게 버린다. 기독교 가르침에 의하여 영향을 받은 양심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지는 이해하기 힘들다. 인종 차별화된 집단의 지적이며 교육적인 표준을 개선하기를 원하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은 고통스런 딜레마에 직면하는데 교육과 인종차별은 섞여질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상호 배타적이다. 계몽주의가 번성하는 곳에서 인종차별은 있을 수 없다. 인종차별이 거의 완성된 곳에서는 지적인 성장이 효과적으로 억눌려  있다.

대부분의 미국 복음주의는 남부에 위치하기 때문에 인종차별은 복음주의 안에서 특별한 문제로서 인식되었다.

 

C.  낙태논쟁에 대한 복음주의와 개혁신학의 연대

 

미국 대법원이 1973년에 로(Row)와 와드(Wade)의 싸움에 대한 판정이 있기 전에 앞서, 보수적 장로교회의 지각 있는 지도자들은 낙태가 중요한 사회적 문제임을 알고 있었다. 1968년 OPC는 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문제를 조사하고 정책 방침서를 만들기로 하였다. 이 방침서에서 OPC는 낙태가 합법적으로 되기 전에 강한 반대를 보였다. 이 보고서의 시작의 문단은 실로 예언적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낙태가 살인이라면,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낙태 자유화로의 현재 걸음은 히틀러, 스탈린 그리고 헤롯 대제의 잔인성 보다도 더 나쁘며 보호받지 못한 인간들을 살인으로 인도할 수 있다.“

 

적절한 성경 본문들을 신학적으로 분석한 후에, 위원회는 그들의 분석에 대한 3가지 조치를 추천하였다. 그들이 제안한 것은 총회가 낙태 반대 결의를 받아들이고 그 문제에 대한 더 많은 연구가 회중들과 당회와 장로들에 의하여 있도록 하게 하며, 그런 질문들을  관련된 성경적 원리에 의하여 가르쳐주며, 현재 다루고 있는 법안과 관련하여 또 그들의 공동체에 적절한 상황과 관련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도록 제안을 하였다. 일년 후에 대법원은 미국에 전역에서 낙태를 찬성하는 것으로 판결했다.

 

다시 한번 사회적 문제에 대하여 교회가 교회적 선언을 만드는 문제에 대하여 보수적 장로교회에서 긴장이 있었다. 낙태 보고에 대한 소수파의 보고가 있었다. “소수파 보고서의 저자에게 나타난 것은 교회가 1937년 거절하기로 한 것을 해야하는 직전에 있고, 성경목록(scriptural catalog)에 부가적인 의미를 첨부해야할 직전에 있는 것이다. 후에 소수파 보고서는 진술하기를: 국가법률에 의해 종교적 원리를 강요하는 것에 대항하여 용기를 가지고 이것을 동반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운명을 이 길에 두는 것은 종교적 자유를 거부 당하며 사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견되는데 그것은 매우 위험한 진로이다. 역사의 연구가 많은 증거를 제공한다.” 

 

D. 결론: 미국 개혁신학은 지금도 문제들에 대답할 필요가 있다.

 

이 보고서는 거의 우리를 한 바뀌 돈다. 메이첸의 죽음 이후 보수적 장로교회는 절대금주 문제에 씨름하였고 그 주제에 열띤 토론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찬성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회원들에게 비 성경적인 요구로 간주되는 것을 강요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비록 절주는 찬양 되었고, 술취함은 정죄 되었으며, 많은 목사와 장로들이 주류를 금하기로 선택하였지만, 그러나 교회는 그 절주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낙태에 대한 소수 보고서는 오직 교회가 1970년에 같은 패턴을 따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낙태에 대한 소수 보고서는 두 번째 원리를 질문하였다. 국가 법에 의해서 만들어진 종교적 원리를 강행하는 것을 교회가 권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이었다? 소수파 보고서는 그 길은 위험한 진로라고 말한다.

 

우리가 간단하게 관찰하는 것은 메이첸의 시대부터 1970 년대까지 교회가 사회 문제에 대한 세세한 역할에 관한 의견의 변동이다. 원리적 질문에 대한 답변이 줄어질 때까지 가능한 장로교회에서 사회적 활동은 표면상 지그자그의 경로로 계속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개혁주의 신학과 복음주의 신학의 관계성에 대한 질문에 답변을 준비한다.

 

IV. 개혁주의 신학의 부흥 없이 복음주의 신학의 몰락

 

A.  명제

 

 이 발표의 나머지 명제는 개혁주의 신학의 부흥 없이는 복음주의 신학도 몰락한다는 것이다. 미국 복음주의의 몰락을 예측하는 것은 처음에 거만하고 시기 상조처럼 들릴 수 있다. 이 명제가 성급한 것이 아닌 것을 보이기 위하여 또 그 명제를 확증하기 위하여 복음주의 신학에게 몇 개의 어려운 질문을 물을 필요가 있다.

 

B.  복음주의 신학이 어디로 향할 것인가?

 

복음주의 신학 안에 몇 개의 어지럽게 하는 최근의 경향들이 있다.

 

1. 성경의 포기

자기의식이 있는 복음주의는 고의로 성경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성경이 오늘날 크리스천이 직면한 도전들을 위하여 충분하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을 포기하였다.

 

 a. 기독교상담과 교육에서 포기한 구체적인 예

보이스는 말하기를 “그들은 성경이 크리스천이 성장을 이루는데 충분하고 생각하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세속적 치료법으로 돌아갔다.

b. 예배에서 포기한 구체적 예

많은 목사들은 그들의 예배에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기 위하여 성경 진리의 아주 예리한 요소들을 허물었다. 보이스는 다시 말하기를 그들은 오락을 전공하고 있다고 한다.

 

2. 이 세대의 방식에 따르는 미국 복음주의.

바울 로마서 12 장 2절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고 말한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는 것과 같은 개인의 윤리적 문제를 포함 할 수도 있지만, 하지만 그가 단지 개인적인 경건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실수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마음의 전적인 개혁을 옹호하고 있다.

 

a.  순응에 예로서 세속화

세속화는 복음주의 신학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어서 그것이 교회를 어떻게 건축하며, 실내장식은 어떻게 하며 심지어 설교를 어떻게 하는지 까지 명령한다.

 

b. 물질주의와 학문적 존경의 일어남

 

물질주의

미국 복음주의에서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은 고액의 사례비를 받고 비교적 힘있는 사람들이다. 이 논문의 목적은 사례를 잘 받는 목회자를 깎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어떤 목회자들도 그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장로교회의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은 보통 목사의 사례비의 6 내지 7배를 받는다.

 

학문성에 대한 존경의 일어남

확실히 누구나 복음주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학문적 능력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보는 것에 대하여 논의를 원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대가를 치러서 미국 복음주의는 학문적 존경을 얻으려고 하는가? 이 문제는 성경론과 관련된다; 상위의 학문적 학위를 얻기 위하여 무오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복음주의자를 표명하는 저명한 자들은 지금 성경의 축자적 영감에 반대하고 있다. 잘 알려진 교수이며 정통 장로교회 장로인 마크 놀(Mark Noll)은 그의 책 “복음주의 정신의 스캔들“(Scandal of the Evangelical Mind)에서 주장하기를 (구)프린스톤학자들이 가졌던 성경 무오성은 잘못 지도되었으며, 그것은 기독교에 본질이 무엇인지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하며,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키는 것은 우리가 구주를 깊이 믿는 것이라고 한다. 영국 복음주의 신학자 맥그래스(Alistair McGrath)도 그것과 비슷한 주장을 받아 드린다. 맥그래스는 특별히 찰스 핫지(Charles Hodge)를 비판하면서 말하기를 “성경의 권위에 대한 핫지의 분석은 궁극적으로, 계몽주의 주제를 반영하는 것에서 비롯된 언어 본질의 고백적이며 맹목적 이론(an acknowledge and implicit theory of the nature of language)에 근거했다”고 한다.

 

3. 미국 복음주의는 무 분별화 되고 있다.

무분별화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철저한 방법으로 삶을 보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나의 요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현재 미국 사회와 19세기의 사회를 비교해 본다면 큰 차이점을 주목할 것이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19세기 동안 미국 사회는 노예제도나 연방정부의 제한과 같은 복잡한 문제에 대하여 여론을 형성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글을 읽을 수 있도록 교육을 받은 것이다. 이 무 분별화은 전 미국의 문제였으며 단지 복음주의의 문제만이 아니었고, 그들이 미국 사회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그들 역시 모든 질병으로부터 고통을 당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보이스(Boice)는 말하기를 슬프게도 우리 문화에서 텔레비전의 지배는 교회와 설교에 큰 충격을 주었다. 예배는 즐기는 쪽으로 확산되고 설교자는 사람들이 좋은 시간을 갖도록 도와 줌으로써 사람들을 얻으려고 한다.

 

1923년 미국 장로교회(남장로교회)에서는 14,000 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소요리 문답을 암송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언 머레이(Ian Murray)가 말하기를 오늘날은 “신학도들 가운데서도 성경에 대하여 무식하다”고 한다. 20년 이상을 미국에서 가르친 우리들이 경험하는 바이다. 나는 한국에 있는 여러분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4. 미국 복음주의는 실용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복음주의 운동에서 사람의 마음을 끄는 미국의 방법은 미국 실용주의와 선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교회 성장이론가들이 세미나를 주도한다”라고 보이스(Boice)는 다음과 같이 한탄한다“ 그 세미나에서 설교자들은 일반사람들을 그들의 시장으로 생각하도록 그리고 복음을 매력적으로 패케지로 팔 필요가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사회적 관심을 끌 수 있는 유명한 이름의 사람들과 함께 협회들을 장려하는데 갈망하고 있다.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에 대하여 우리는 듣는 것은 “그가 설교한 멧세지를 유리하게 만드는 최고의 유명인사와 함께 친목을 시도했다”고 한다. 이런 실천은 재앙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더군다나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 로마 카톨릭자들, 그리고 유대인들과 협력하기로 그들이 결정하는데 있어서 실용주의적이었다.

 

5. 복음주의자들은 예전의 오류를 새로운 형태로 받아 드리고 있다.

18세기에 어떤 스콧트랜드 신학자가 가르친 것은 “사람이 자신(혹은 그녀)의 삶의 어떤 변화에 관계없이 사도신경에 증언한 것처럼 예수께서 실제로 죄 때문에 죽으셨다 라는 것에 설득된 사람들은 의롭게 된다”고 했다. 이 오래 전 신학적 오류를 달라스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어떤 사람들을 통하여 새로운 활력을 찾았다. 이런 잘못된 가르침은 잔 핫지스(Zane C. Hodges)가 쓴 글들에서 나타나는데 다른 복음주의자들에 의하여 올바르게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그들이(달라스에서 가르치는 Zane Hodges와 다른 사람들) 회개, 치리, 그리고 내면의 영적 변화의 증거를 주는 행동의 필요성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들이 이것을 믿음에다 행위를 부가하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어떤 개신교나 복음주의자나 개혁주의자들이 구원적으로 믿음에 행위를 연결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복음주의자들은 믿음의 본질이 죄로부터 회개를 요구하며 그리스도와 동행하기 위하여 새롭게 갈망하기를 요구한다.

 

6.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 합류하고 있다.

1994년 “복음주의자들과 로마카톨릭주의자들이 함께: 3천년에 있어서 기독교 선교”(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 The Christian mission in the third millennium) 라는 제목의 25 페이지 분량의 문서가 뉴욕에서 출판되었다. 25명의 복음주의적 루터란 지도자들과  카톨릭 지도자들이 그리고 패커(J. I. Packer)를 포함하여 거기에 서명하였다. 크리스차니티 투데이 (Christianity Today)도 ECT를 지지했다. 존 맥아더(John F. MacArthur)는 즉시 ECT를 거절했다. 그의 책 “무모한 믿음“(Reckless Faith)은   ECT에 반대하고 있다. 이안 머래이(Ian Murray)는 판단하기를 이제 ”복음주의자들 가운에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고 한다.  잘 알려진 신학자 웰즈(David Wells)가 개탄한다. ”한때 복음주의의 영혼에 물을 주었던 역사적 정통주의의 시내는 이제 문화적 무식 때문에 사람들이 세속적인 것을 세속적인 것으로 알지 못하고 세속인 것으로 파멸을 받았다고 한다. . . . 과거 수십 년 동안 현대문화와 쉽게 연합한 기독교 신앙은 어리석은 천국에서 살고 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것에 관하여 그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다

. . . 그것이 영혼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면 그 특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

 

C. 결론

 

오늘 여러분에게 발표한 나의 논문은 개혁주의 신학의 부흥 없다면 미국 복음주의 신학은 스스로 그것을 파괴할 것이며 혹은 아마도 이미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임무는 미국 복음주의 신학의 존속을 위하여 필요한 대답들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에게 배당된 주제가 아니다.

 

그러나 내가 확신하는 것은 모든 올바른 신학은 하나님에게 궁극적인 영광을 돌려야 한다. 미국 복음주의 신학이 하나님께 올바른 영광을 드리지 못하는 한 그것은 실패하게 될 운명에 놓일 것이다. 미국의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만 인간의 능력을 그 영광에 혼합하고 있으며 그것은 그 영예를 잃고 있다. 그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개혁신학에 합류하여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라고 선포한다면 아마도 그들의 계승은 개탄 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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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샘

'아바(abba)'는 '아빠(daddy)'가 아니다!

막연한 추론이 낳은 지식, 하나님 '아빠'로 부르고 싶은 감상주의로

 

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2274

 

1.


먼 옛날에 생산된 성서를 오늘날의 교훈으로 풀어내는 작업이 '주석'의 최종 목표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훈에 급급한 나머지 본문이 자리한 당대적 맥락의 의미를 놓치는 경우가 있다. 해석적 기술의 결핍과 이로 인한 무지가 주된 원인이 되지만 독자들의 신앙 스타일에 얽매인 편향성과 특정 의미에의 집착도 무관치 않다. 때로 전문 학자들의 태만과 이에 따른 인습적인 통념의 반복 역시 그런 엉뚱한 의미 편취와 곡해의 사태에 적극적인 요인이 되기도 한다. 물론 성서 해석의 무지와 기만의 결과로 선포되는 메시지에 감동받을 수 있는 현실을 나는 이해한다. 이런 현실의 장벽을 뚫고 보다 순전한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대안적 성서 주석은 그래서 종종 피로하고 괴로운 노동이 된다. 그런 버거운 부담을 무릅쓰고 기존의 주석적 성벽을 허무는 뜨거운 감자 하나를 끄집어내 보기로 한다. 그것은 신약성서에 사용된 '아바(abba)'라는 아람어가 우리말의 '아빠'를 뜻한다는 오래 묵은 오해에 관한 것이다.

2.


내가 추적하기로 이러한 '아바=아빠'의 의미론적 등치의 계기를 제공한 사람은 요아킴 예레미아스라는 20세기 독일의 성서학자이다. 그는 불트만 우파 계열의 학자로 그의 몇몇 예수 연구의 저작들이 국내에 번역, 소개되면서 이 땅의 신약성서 이해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그중에서 예수의 비유와 기도에 대한 그의 해석은 그 영향의 비중이 꽤 컸다. 1965년에서 1971년에 생산된 그의 여러 저작들은 예수의 '아바' 기도를 큰 비중으로 다루면서 그것이 가족 관계의 친밀함을 드러내는 어린아이의 말로 하나님과 예수의 독특한 부자 관계를 특징짓는 호칭임을 주장하였다. 아버지를 호칭하는 친밀한 어린아이의 말이라는 암시는 곧 그것이 '아빠'로 이해되어야 할 근거를 제시하였고, 이러한 유추 및 확대해석은 감정적인 유착 관계를 중시하는 한국적 정서에 크게 호응하면서 이 땅에 무비판적으로 수입되었다.

하지만 예레미아스의 저작들에서 이 구절의 해석, 곧 '아바=아빠'의 등식은 하나님을 아버지라는 가족 관계의 친밀한 용어로 드러낸 예수의 표현을 과장되게 밀어붙인 추론이었을 뿐, 당시 이 아람어 용례를 언어학적으로 정밀하게 분석하여 연구해 낸 결과는 아니었다. 물론 그는 일관되게 '아바'에 집중하면서 꽤 쓸 만한 자료들을 수집하여 비교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아바가 어린아이의 말이라는 대전제가 워낙 완고하여 그는 그 검증 과정에서 드러난 여러 무리수를 논리적으로 치밀하게 해명하기에 앞서 그 대전제로 수렴시키는 안이한 선택을 했다. 그런데 그것이 이 땅에서는 이렇다 할 검증 절차도 없이 불변의 사실이 되었고 진리로 승화되었다. 서구의 추론적 지식에 대한 이 땅의 식자층이 바친 거의 맹목적이고 온전한 순종의 결과였다.

3.

저명한 학자의 영향력은 매우 강고했다. 더구나 그는 유구한 신학 전통을 지닌 서구 선진국의 학자였다. '아바=아빠'의 간단한 등식은 이후 17년간 확고부동한 해석학적 권위를 차지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던 중 이러한 지당한 공식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abba'를 관련 자료에 비추어 재차 치밀하게 비교 분석하여 논증한 학자는 밴더빌트대학의 교수이자 근동의 셈족 언어 전문가였던 제임스 바(James Barr)였다. 그는 1988년 영문학술지 (1988, April) 28~47쪽에 "Abba Isn't Daddy"라는 제목의 획기적인 논문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그는 다양한 'abba' 관련 자료들을 언어학적으로 정밀하게 분석하면서 예레미아스가 범한 논증의 오류와 허방을 예리하게 지적하였다. 그의 이런 연구 결과 밝혀진 핵심적인 사실은 예수와 당대 유대인들에게 아람어 'abba'라는 어휘 속에 우리말의 '아빠(영어의 애칭 daddy)'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레미아스의 추론에 대한 제임스 바의 비판은 그의 장기인 언어학적 분석을 동원하여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게 제출되었다.

첫째, '아바(abba)' 어형의 언어학적 기원은 기존 연구에 의하면 1) 강조적 상태 2) 호격 3)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 등의 세 종류로 설명되는데 예레미아스는 오로지 3)의 사례에만 집착했다는 것이다.

둘째, 설사 그 어원이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에 있었다손 치더라도(그럴 가능성에 회의적이지만) 예수 당시 이 단어는 이미 '아버지'를 호칭하는 모든 연령대의 공통된 용어로 정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약성서 시대에 '아바' 호칭을 어린아이의 재잘거리는 '아빠'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은 난센스라는 것이다.

셋째, 예레미아스 자신이 이 '아바' 호칭이 어린아이만의 용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예수를 비롯한 당대의 경건한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유아처럼 '아빠'로 호칭한다는 것이 '용납할 수 없는 나이브함'의 증표라는 점을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바의 어린아이 용례에 집착했던 자가당착이 지적된다.

넷째, 만일 '아바'가 '아빠'의 함의를 지닌 아람어였다면 이 단어가 사용된 마가복음 14:36, 로마서 8:15, 갈라디아서 4:6에서 그것의 병행구인 희랍어에 그 세밀한 뜻이 반영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이 문구(abba ho patēr)에서 '아바'를 번역한 희랍어는 '아빠'가 아닌 그냥 '아버지'이다. 희랍어에도 아버지를 가리키는 유아스런 애칭이 있었다. 호머 시대 사용된 atta라든가,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사용한 patridion도 있지만, 가장 유력한 후보는 papas이다. 실제로 이 희랍어 papas는 제우스신이나 아티스신을 호칭하는 어휘로 사용된 용례가 있다. 그런데 이 아람어의 뜻을 가장 잘 알았을 마가복음의 저자와 사도 바울조차 papas가 아닌 patēr를 abba의 병립 어휘로 삼았다. 그들에게 '아바'는 그냥 '아버지'였기 때문에 그렇게 자연스럽게 표기한 것이리라.

다섯째, 그레코-로마 전통에서 제우스신 등을 아버지/아빠라고 부른 용례들이 탐지된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경우를 예수와 당시 경건한 일부 유대인들에 국한된 유별나고 독특한 예외적인 사례로 못 박아 버리는 것도 공정한 판단이 못된다. 우리 전통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어 예외적인 가치를 독점했으면 하는 환상적 욕구의 간절함이야 왜 모르겠는가.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러한 배타적인 시야의 협량함이 앎과 깨달음의 반경에 심근경색을 가져올 수 있다는 교훈을 얻는다.

4.

어쨌든 국내의 성서학자들은 제임스 바의 저 유명한 논문을 읽어보지 못했거나 읽어 보았더라도 굳이 '아바=아빠'의 도식이 정착되어 개역개정번역에도 반영된 상태에서 소란을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았는지 이후 잠잠했다. 그래서 그의 연구로 창출된 새로운 지식은 별반 호응을 얻지 못한 채 이 땅의 아카데미아에서 실종되어 버렸다. 혹여 이 사실을 아는 일부 소수의 침묵 속에 갇혀버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 하나님을 친밀하게 '아빠'로 어린애처럼 부르고 싶은 신앙의 감상주의는 더 부추겨졌고, 이와 함께 미성숙한 자아를 감성일변도의 신앙 취향으로 땜질하려는 나이브한 '하나님/아빠/낭만주의'도 더욱 견고하게 이 땅의 신앙 풍토 속에 뿌리내려 갔다.

1960년대의 막연한 추론이 낳은 허술한 앎의 소문이 이 땅에 아무런 학문적 검증 없이 허술하게 유통된 나머지 그것은 이 땅의 예배당에서 수많은 목사들과 교인 대중에 의해 복창되어 왔다. 너무 순진하게 서구의 지식을 받아먹고 너무 빨리 소화시켜 버리는 이 땅의 신학적 풍토 역시 그러한 복창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그리하여 신학적 아카데미아와 교회의 방기 가운데 유통된 그와 같은 태만한 인습적 통념은 하나님과의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유착관계를 강화하였고 가족주의적으로 연성화된 신앙의 사유화를 촉진하는 데 적잖이 이바지했다. 1960년대의 고리타분한 인식의 틀에 우리의 신학적 지성이 꽁꽁 묶여 1980년대의 정밀한 분석과 연구를 통한 견고한 앎의 열매를 방기한 대가는 이토록 혹독했다.

5.

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의 백성들은 애·어른 구별 없이 다들 미욱한 자녀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아바'가 '아빠'가 아니라고 해서 이런 해석적 권위로써 모종의 어른스러움을 과시하며 어린애 같은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성도를 타박하려 한다면 이는 과잉 적용이다. 그러나 아버지-자녀로 맺어진 '하나님의 가족' 관계가 미숙함과 유치함이 아닌 성숙함을 전제로 하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하나님=아빠'로 표상되는 신앙적 나이브함의 승승장구는 종종 성도를 우민화 이데올로기에 볼모로 붙잡아두려는 유혹을 조장하기 쉽다. 애·어른 구별 없이 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며 자신을 낮추고 구원을 갈망하는 것이 신앙의 본령일 터이다. 그렇다면 애와 어른 사이의 세밀한 차이를 구별하여 어린아이의 말과 생각과 버릇을 버리게 하고 장성한 사람의 성숙한 사고력과 판단력을 독려하는 것은 신학의 의무이다. 제대로 된 성서 주석이 그 신학의 밑자리에 깔려 있어야 한다.

[출처: 뉴스앤조이] '아바(abba)'는 '아빠(daddy)'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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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샘

[펌] 예슈아

2021. 6. 5. 16:22 : 신학/신학일반

예수, 예슈아

 

www.reformanda.co.kr/theoJournal/89786

 

'예수'를 '예슈아'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가 아니라 '예슈아'라고 불러야 옳다고 한다. 예수 믿는 유대인들 곧 메시아닉쥬만이 아니라 세대주의 종말론에 기초한 백투예루살렘 운동 지지자들,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지지하는 기독교인들, 흩어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귀환하도록 재정지원을 하는 운동을 펼치는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한다. 메시아닉기독교라는, 유대교 풍습을 따르는 신종 교파가 한국과 중국에도 형성되고 있다. 이들이   "예슈아 이름으로" 기도한다. 

 

 '예수'가 옳은가, '예슈아'라고 불러야 하는가?

 

'예수'는 '여호수아'(יהושוע)에서 유래했다. 여호수아의 본명은 호세아(הושע)였다(민 13:8). '호세아'가 '여호수아'가 된 것은 모세가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16절). '여호수아'(יהושוע)를 음가 대로 읽으면 "예호슈아"이다. 그리스어 성경은 이것을 Ἰησοῦς(이에수스)라고 기록했고, 라틴어로 Iesus(이에수스)가 되었다.  'I'가 영어로 바뀌는 과정에서 'Jesus'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선교 초기 '야소'(耶蘇)라고 했다가 '예수'라는 본래 음가로 개정되었다.

 

'예슈아'는 어디서 온 말인가? 메시아닉쥬들이  '예수'를 현대 히브리어로 대체(substitute)시켜 얻은 명칭이다. ישֵׁוּעַ (예슈아). 야소(耶蘇)라고 불러도 랑그(langue)에 아무 변화 없듯이 빠롤(parole)에서 예슈아를 쓰는 것은 크게 탓할 게 못 된다. 랑그를 뒤집어 억지로 가공하려는 의도가 문제이다.

 

랑그와 빠롤은 언어학 용어들이다. 스위스 제네바대학교의 언어학자 소쉬르가 정의를 내린 바 있다. 장기놀이에 비유하면 랑그는 규칙에 해당하고 빠롤은 그 규칙에 따라 장기를 두는 자의 구체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전자는 보편적이고 추상적이며 언어사용의 사회적 규칙과 관행을 뜻한다. 후자는 개별 상황에서 각자가 하는 구체적인 말, 언어이다.

 

'예수'가 아니라 '예슈아'라고 불러야 한다는 사람들은 '예수'라는 이름이 '저주 받은 자'라는 뜻이며, 진째 발음과 같지 않으며, 거짓 이름이라는 까닭을 댄다. 진짜 이름의 발음이  '예슈아'였다고 한다.

 

'예수'라는 이름이  '저주 받은 자'를 의미함은 사실이다. 이러한 시각으로 보는 전통은 역사적으로 3단계에 걸쳐 진행되어 왔다.

 

첫째, 유대인 전통이다. 신명기 법전에 따르면 나무에 달린 자는 메시야가 될 수 없다. 유대인에게 율법은 예언이기도 하므로, 이 주장은 타당하다. 인류의 구원자는  저주 받아 나무에 달려 죽었다(신 21:23).

 

둘째, 바울은 이 개념을 뒤집어엎었다. "그렇다. 신명기 법전 대로 그리스도는 저주 받아 죽은 자이다. 지당한 말이다." 바울은 이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면서 그리스도의 저주를 받은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했다.

 

셋째, 반유대주의(안티세미티즘)이다. 기독교가 세계를 뻗어나가면서 '예수'를 앞세워 유대인을 핍박했다. 예수교의 피해를 본 유대인들은 '예수'라는 이름에 치를 떨었다. 현재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위 1단계 전통을 철저히 교육시키고, 자신들의 게토 중심으로 그 전통을 관철시켜 왔다. 현대 히브리어 사전은 '예수=저주 받은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메시아닉쥬는 예수 믿는 유대인이다. 메시아닉기독교라는 종파 교회가 여러 나라에 형성되고 있는 것 같다. 유대인 규례를 따라 안식일을 지키고 쪽발 동물과 비늘없는 물고기를 먹지 않는 등 규례를 지킨다. 바울이 반대한 유대 율법주의적 기독교 종파로 발전하고 있는 듯하다.

 

메시아닉쥬들에게는 '예수'라는 이름이 신성하지 않을 수 있다. '예수' 이름을 앞세운 유럽 기독교 정치세력의 폭력에 시달려 온 그들이 '예수'라는 이름에 혐오감을 가진다는 것은 이해된다.  '예수'가 기독교와 안티세미티즘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어느 미국 메시아닉쥬는 'Jesus'가 제우스(Zeus)를 연상시킨다고 하여 싫다고 한다.

 

다음 몇 가지를 유념하자.

 

1) 호세아에서 모세에 의해 여호수아로 바뀐 이름 '여호수아'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모세/율법의 예언에 "나 같은 선지자"(신 18:15, 18)를 세운다고 했다. 그는 다름 아닌 여호수아였으다. 초대교회 설립자들은 이 예언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율법서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2) 예수 생존 당시에 '예수'는 너무나 일반적 이름이었고 인기가 없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모두들 이 이름을 회피했다. 저주 받은 자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버려진 이름이었다.

 

3) 야웨 신앙은 히브리 전통에 속하지만, 헬레니즘은 이것을 세계로 파급시켜 기독교 세계화의 중요한 물결을 일으켰다. 히브리 문화 또는 헤브라이즘은 엄밀한 의미에서 헬레니즘을 포함한다. 히브리어 본문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구약성경 셉투아진트는 작은 규모의 히브리인들이 문명이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는 터미널 역할을 했다. 유대인에게도 셉투아진트는 중요한 문헌이다. 신약성경이 언급하는 '성경(에)'라는 말의 배후에는 셉투아진트 성경이 자리 잡고 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그리스어 번역판 구약성경을 참조했다.

 

4) '예수'만큼이나 중요한 '크리스토스'는 신약성경 저자들이 지어낸 말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의 독창적 용어가 아니다.  셉투아진트는 히브리어 '메시야'(마쉬아흐, 렘 42:2)를 '크리스토스'로 번역했다..

 

5)  '예수'를 '예슈아'로 불러야 한다면, 우리는 '예슈아 크리스토스'라고 불러야 하는가? 아니면 '예슈아 마쉬아흐'라고 해야 하는가?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름들을 현대 히브리어로 바꿔야 하는가?

 

6) 우리의 가슴이 벅차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보배로운 이름 '예수'는 성경에 그리스어로 기록되어 있다. 구원자 그 분의 고유한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라고 발음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예슈아'는 예수 시대의 발음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현대 히브리어는 구약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언어가 아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고대 히브리 문자는 모음을 표기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몇 천년 1800년 동안 자기의 언어를 잃어버렸다. 모음을 알 수 없고 자음 글자만 있는 히브리어 문서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의 네 글자(YHWH)를 어떻게 발음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한국 기독인들은 여호와라고도 하고 야웨라고도 발음한다.

 

 

벤 예후다 기념우표, 이스라엘

 

현대 히브리어는 러시아령 벨로루시 리투아니아 태생 벤 예후다(Ben-Yehuda, Eliezer, 1858-1922)가 일상어로 재생시킨 언어이다. 그는 1886년에 이스라엘로 이주한 유태인이다. 파리대학교(솔본느)에서 공부를 했다. 히브리어 재생에 정열을 쏟다가 폐결핵으로 죽었다. 이 구약학자와 그의 부인은 자기 자녀에게 자신이 만든 현대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가르쳤다. 히브리어만 사용하게 했다. 그 언어가 오늘날 이스라엘의 공용어인 현대 히브리어이다.

 

벤 예후다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이 독립을 했을 때 영어, 독일어, 불어, 이디시(Yiddish)라는 언어가 모두 공용어가 될 뻔 했다. 이스라엘 국가 독립을 추구한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팔레스타인에 새로운 이스라엘 국가를 세우면 무슨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두고 논쟁을 했다. 벤 예후다는 모세가 다섯 권의 책을 기록할 때에 썼던 히브리어 문자와 말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서 히브리어 복원에 삶을 바쳤다.

 

이스라엘로 이민 간 뒤, 아들 벤 시온(Ben Zion)이 태어나자, 아버지 벤 예후다는 그의 아내와 함께 아이에게 영어, 독일어, 불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등을 가르치지 않았다. 자신이 복원한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아이는 4살 때 말을 했다. 이 아이는 주변의 다른 아이들과 대화를 할 수 없었다.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은 전 세계에 한 명 뿐이었다.

 

여러 지역에서 팔레스틴으로 귀환한 유태인들은 말이 통하지 않아 불편을 겪었다. 국가적 민족적 난제인 언어 때문에 고통을 당하던 유대인들은 재생된 히브리어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벤 예후다에게 저희들에게도 히브리어를 알려 주세요" 하고 요청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확산된 현대 히브리어는 모세 시대나 예수 시대의 히브리어와 똑같지는 않다. 재생, 복원했다고 하는 히브리어의 발음이 모세나 예수 당시의 말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가를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예루살렘은 전쟁과 불화와 갈등이 그치지 않은 도시이다. 그런데도 이름은  '평화의 도성'이다. 예루살렘 시내에는 현대 히브리어를 만든 벤 예후다를 기념하는 거리가 있다. 다시 그곳에 가볼 기회가 으면 이스라엘의 영웅 벤 예후다 거리를 산책하고 싶다.

 

 

예루살렘의 명소 벤 예후다 거리 풍경

 

손가락이 아닌 태양을 보라. 심볼보다 그것이 의미하는 에쎈스를 보라. '예수,' 버려지고 저주받은 이름, 나무 위에 달려 우리의 추악한 죄를 담당하고 하나님과 화해에 필요한 제물이 되어 주신 그 분의 이름, 구원의 길을 열어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  '예수'는 참으로 존귀하고 거룩하고 영광스럽다. "천지에 있는 이름 중 귀하고 높은 이름 주 나시기 전 지으신 구주의 이름 예수, 주 앞에 내가 엎드려 그 이름 찬송함은 내 귀에 들린 말씀 중 귀하신 이름 예수.". 예수는 영원히 어제나 오늘이나 그 이름으로 우리게 복을 내린다(찬송가 80장).

 

필자의 글에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으면 알려주기 바란다. 시작 부분은 Young Jin Lee 님의 글 일부를 참고했다.

 

 

최덕성

 

쓴이 최덕성 신학자이다.  미국 예일대학교(STM), 에모리대학교(Ph.D.)를 졸업했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로부터 '신학자대상'(2001)을 수상했다.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 <빛나는 논지 신나는 논문쓰기>, <에큐메니칼 운동과 다원주의>, <정통신학과 경건>, <신학충돌>, <교황신드롬>, <KOREAN CHRISTIANITY> 등 약 20권을 저술했다. 고려신학대학원-고신대학교 교수(1989-2009)였다. 하버드대학교 객원교수(1997-1998)였다. 현재 브니엘신학교 총장(2013-), 교의학 석좌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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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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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섭(가족관계연구소장: 전 침신대 교수; 사이비종교피해대책연맹 총재; Ph.D.)

▲ 정동섭 목사

 

1. 세대주의 신학이란 무엇인가?
세대주의 신학은 영국의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형제교회(Separatist Plymouth Brethren) 지도자 달비(John Nelson Darby: 1800-1882)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19세기 중반에 영국 성공회가 부패했다면서, 교파를 떠나 형제운동을 시작하며 세대주의를 체계화한 사람이다. Darby의 지도하에 형제교회는 급성장했는데, 세대주의는 영국과 미국의 근본주의에 유입되면서 가시적인 기성교회의 제도와 충돌하였다. 신학적으로, 교회적으로 편협한 노선을 주창하면서, 뉴톤(B.W. Newton)과 심한 논쟁 끝에 달비는 배타적 형제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영미에는 개방적인 형제교회Open Brethren도 있는데,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형제교회다).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시스템에 따라서 신학이 크게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루터와 칼빈이 가르친 개신교 ‘언약신학’에 기초한 ‘개혁주의 신학’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세대주의 신학’이다. 세대(dispensation)는 세계역사를 관통하는 여러 세대 속에 하나님의 프로그램이 전개되는 것을 가리킨다.

초기 선교사들은 대부분 세대주의 신학에 근거한 복음을 우리나라에 전파했다. 형제교회 창시자 달비와 성경주석자 스코필드는 역사를 일곱 세대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각 세대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구속적 계획을 마련하였다고 보았다. 세대주의에서는 성경 역사를 무죄(innocence)시대, 양심(conscience)시대, 인간통치(human government)시대, 약속(promise: Patriarchal Rule)시대, 율법(Law)시대, 은혜(grace)시대, 천년왕국(Kingdom: Millennium)시대 등 일곱 가지 시대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각 시대마다 하나님이 새로운 구원의 길을 제시해주셨다고 주장하였다.

세대주의 신학에 의하면, 각 시대마다 구원 얻는 방법이 다르다. 양심시대는 양심에 따라 살면 구원을 받고, 율법시대에는 율법을 따라 구원받는다는 식이다. 시대마다 다른 구원의 길을 주셨다는 교리였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면 구원받는다는 주장이 나왔다. 모세와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킬 것을 언약하였지만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실패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주장은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적대적인 관계로 만들어 버렸다. 따라서 지금 성도들은 은혜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에 십계명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유일한 법칙이 될 수 없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세대주의 종말론은 “더 이상 율법이 필요 없다”는 율법폐기론(antinominianism)으로 이어졌고, 기독교의 윤리성은 무너지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오대양 사건과 구원파라 할 수 있다. 이 신학에 영향을 받은 많은 정통교회도 은혜를 누린다면서 율법을 무시하는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기독교의 큰 문제 중에 하나는 바로 율법과 은혜를 원수처럼 생각한 것이다. 세대주의적 사고에 따라,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주었고, 우리는 율법과 관계가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은혜만이 우리가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율법폐기론이다. 세대주의 율법관과 종말론이 한국기독교를 망치고 있고, 많은 이단을 양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리교 사회학자 이원규 교수는 “한국교회는 교파분열이 심하고, 사이비 이단종파가 많으며, 품위 없는 성직자가 많다”고 지적하였다. 예수님은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하셨다. 물질주의로 나타나는 탐심과 성적 타락은 그 배후에 개혁주의 언약신학의 반대 입장에 서 있는 세대주의 신학이 한 몫을 하고 있다고 본다.

달비는 유럽과 뉴질랜드, 미국과 캐나다를 여행하면서 세대주의를 보급하였고 많은 사람을 형제교회(Brethrenism)로 회심시키려 시도하였다. 그의 세대주의 종말론은 1883~1897에 연례적으로 열렸던 Niagara Bible Conference를 통해 전파되었다. 많은 침례교인과 감리교인, 그리고 장로교인들이 그의 신학적 전제를 수용하였지만 기존교단에 대한 비판으로 교단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정통교단을 떠나지는 않았다.

1920년대 당시 자유주의가 성경적 가르침을 거부한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세대주의자들과 프린스톤 칼빈주의자와 같은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달비의 세대주의 신학을 수용하면서 그의 종말론은 미국 근본주의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C.I. Scofield Reference Bible은 50년 동안 3백만 부가 팔렸는데, 그 영향으로 Biola, Moody, Dallas, Grace와 같은 신학교가 세대주의 신학에 근거한 종말론을 가르쳤다.

달비는 개신교 교리의 핵심이 되는 두 가지를 부인하였다. ⑴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아서 의인이 된다는 ‘전가설’, 즉 이신칭의의 교리를 부인하였다. 죄인이 예수를 믿으면 ‘놀라운 교환’(wonderful exchange)이 일어나는데, 우리가 가진 죄를 예수님께 드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의를 주신다는 교리이다. 신학자들은 이 교환을 전가(imputation)라고 부른다. ⑵성도의 성화과정에 필요한 십계명의 규범적 기능을 부인하였다. 칼빈이 말한 ‘율법의 제3용도’를 부인하였다. 결국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세대주의 종말론과 근본주의신학을 바탕으로 사역하였다. 결국 십계명을 무시하는 도덕률폐기론, 즉 율법폐기론이 만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신학의 극단적 열매가 구원파의 회개무용론, 도덕률폐기론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한국의 개신교는 세대주의 신학의 지배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세대주의 영향으로 한국교회는 이스라엘과 교회, 그리고 율법과 복음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하였다. 점진적 계시와 관련하여, 한 세대는 하나님의 경륜 안의 한 단계다. 1960년대 초부터 세대주의적 성경해석으로 회개없는 잘못된 구원과 임박한 종말을 강조하며 나타난 이단은 다미선교회나 구원파만이 아니다. 기존교회 안에서도 특히 극단적 세대주의 신학(ultradispensationalism)에 따라 성경을 해석해 이스라엘이 독립하던 해 1948년으로부터 한 세대되는 1988년 전후에 예수가 재림하고 신자들은 휴거된다고 가르치던 대형교회 목사들이 있었다.

2. 세대주의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언약신학)은 어떻게 다른가?
세대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어떤 특별한 계시에 순종하는 것과 관련해 인간이 시험받는 기간”이다. 세대주의는 구약은 율법시대, 신약은 은혜시대로 구분하기를 좋아한다.

세대의 수: 바울은 적어도 세 개의 세대를 언급한다. 현재 이전의 세대(골 1:25-26), 현 세대(엡 3:2), 그리고 장래 세대(엡 1:10). 이 세 세대는 네 번째 세대를 요구하는데, 율법 이전 세대다. 그리고 율법 이전 세대는 다시 두 개로 분류되는데, 타락 이전과 타락 이후로 구분된다. 성경의 전천년설적 이해의 관점에서는 적어도 다섯 세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7세대는 노아홍수 이후의 한 세대와 아브라함의 부름을 계기로 한 또 한 세대를 상정하고 있다.

세대주의신학은 문자적 해석원리를 따른다. 이 해석원리를 적용하다보면,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구분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구약시대에 시작된 것이 아니고 오순절 날 시작된 것으로 본다.

유병언, 이요한, 박옥수 등도 구원받은 사람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되었다는 말의 의미를 오해하여 가르쳤다. 그러나 성도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말은 율법의 정죄와 저주에서 해방된 것이지 율법의 도덕적 교훈, 즉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이 세대주의 신학의 맹점이다. 예수님은 간음 중에 잡혀 온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외면하고 은혜만을 강조하다 보니, 유병언과 구원파 교인들의 삶에서 보듯이, 양심의 가책이 없이 도적질하고, 간음하고, 거짓말하고, 남의 것을 속여서 빼앗고 탐내고 살인을 저지르는 결과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새대주의의 우산 아래서 수 많은 이단이 독버섯처럼 생겨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개혁주의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세대주의를 이단이라 할 수는 없지만 유사기독교의 나쁜 신학이 틀림없다.

언약신학: 하나님은 행위언약에 실패한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은혜언약(covenant of grace)을 준비해 주셨다. 은혜언약의 핵심내용은 누구든지 자기의 노력이나, 자기의 선이나, 자기의 의를 의지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죄사함을 얻고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어 영생을 소유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은혜언약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영생과 부활의 축복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언약을 맺고 노아와 언약을 맺고 최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언약을 맺으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고, 이삭, 야곱과 모세, 다윗과 언약을 맺고 점진적으로 그 뜻을 계시하셨는데, 모든 언약에 보면, ‘아브라함의 후손,’ ‘이삭의 후손’, ‘야곱의 후손’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단수 ‘자손’(seed)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단수로 적혀 있는 ‘자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결국 이 모든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천하 만민이 영생의 복을 얻게 되리라는 은혜언약에 대한 점진적 계시이다.

구약시대에는 그림자와 예표를 통해 구원을 받았지만, 신약시대에는 실체를 보고 믿고 구원받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약시대에는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이 그림자였고 예표였지만, 새언약은 실체이신 그리스도의 현현으로 죄사함과 영생을 주신다는, 그림자를 폐한 언약이다(피영민, 2015). 그리스도의 법과 모세의 법은 다른 법이 아니다. 신약과 구약에는 연속성이 있다. 각 법은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다; 그리고 두 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종용하는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의 법은 모세의 법을 더 심화시켰을 뿐이다.

개혁신학(Reformed Tradition)은 멜랑히톤, 루터, 칼빈과 쯔빙글리의 신학적 전통을 따르는 것으로, 모세의 법에는 도덕적이고, 의식적이며, 시민적 측면이 있는데, 도덕법에는 ①시민적, ②영적, ③규범적 3가지 용도가 있는 것으로 본다. 언약신학은 타락 이후 하나님은 하나의 은혜 언약 아래 역사하신 것으로 본다. 통일된 특징은 은혜의 언약이며 그 언약 아래 있는 구원적 계획이 있다. 구약에서는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는 것으로 구약의 언약은 기대적 성격이 있고, 신약에서는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성취된 구원으로 그 언약의 성격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세대주의 신학은 율법과 복음을 대립적으로 이해했다. 율법의 세 가지 용도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면서 이단집단과의 논쟁을 하면서 정리된 것이다. 교회역사를 보면, ‘율법’(말씀)과 ‘성령’, 그리고 ‘나’ 사이에 세 가지 역학적 관계를 찾아볼 수 있다.

⑴말씀을 무시하고 성령의 역사만 강조하는 경우; ⑵말씀은 강조하는데 성령의 역사를 무시되는 경우; 그리고 ⑶말씀과 성령이 조화를 이루는 경우이다. 첫째는 율법을 배격하고 성령의 직통계시만을 강조하는 율법폐기론자의 경우로 율법을 폐하고 마음대로 살려던 이원론에 빠진 영지주의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지금 한국에는 성령 사역의 이름으로 다락방 운동(가계저주론, 조상 죄), 신사도운동(제3의 물결과 같은 현상적인 집회), 알파코스와 은사남용, G-12와 견고한 진, 쓴 뿌리, Soul Tie, 귀신론에 기초한 내적치유 운동이 행해지고 있으나 계명과 율법을 지키는 것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다. 

둘째는 말씀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우로서 율법주의 오류에 빠진 이들이다. 율법주의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려는 사고방식을 의미한다. 이런 율법주의자의 문제점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선을 행한 다음 자기 의(義) 사상에 빠지는 데 있다. 성령의 도움 없이 율법을 지키려는 왜곡된 보수주의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말씀을 따라 생활하려는 노력이 강조되는 것에 비해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는 배제되는 성향이 있다. 세 번째는 받은 바 이신득의의 은혜에 감사해서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에 따라 생활하는 복음주의자들이 있다.

약 130년에 이른 한국교회사 속에서 대부분의 교역자들과 부흥사들은 세대주의 신학에 근거하여 종말론을 가르쳤는데, 매우 극적인 내용들 때문에 듣는 자들은 쉽게 거기에 빠져들어갔다. 예수의 재림을 왜곡되게 가르치는 이단집단들이 세대주의 종말론에 뼈대를 둔 것은 그 매혹적인 극적인 정황 설명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세대주의 사상은 한국교인들의 심성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권호덕). 세대주의 사상에서 탈피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무천년 왕국설이 본격적으로 우라나라에 소개되면서부터이다.

3. 율법이란 무엇인가?
존 파인버그(John Feinberg)에 의하면, 율법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주신 “삶의 규칙(rule of life),” 순종하고 지켜야 하는 계명들(commandments)이다. 율법은 넒은 의미로 성경전체, 중간적 의미로 모세 오경, 좁은 의미로 십계명을 가리킨다. 가장 좁은 의미에서 율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인 십계명이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계명은 두 돌비에 새겨졌다. 첫 번째 돌비에는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 나와 있고, 두 번째 돌비에는 제5계명에서 제10계명까지 나와 있다. 전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대신(對神)관계가 기록돼 있고, 두 번째 돌비에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 대인(對人)관계가 기록되어 있다.
율법의 기원은 출애굽 사건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은 억압받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참된 관계를 누릴 수 있는 지침서, 즉 율법을 주셨다.

하나님은 그의 언약백성에게 영속적 관계를 위해서 항상 율법을 주신다. 율법에는 제사법적(ceremonial) 차원과 시민법적(civil) 차원, 그리고 도덕법적(moral) 차원이 있다. 세 차원은 유기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레위기는 주로 제사법(번제, 소제, 화목제, 속건제, 속죄제)을 다루고, 신명기는 도덕법을 기록하고 있다. 의식적인 제사법은 금식과 침례(세례), 할례, 유월절, 정결법, 십일조 등과 관계되는 것이고, 시민법은 소송문제, 안식일, 결혼, 노동과 같은 신자들의 국가에 대한 책임을 다룬다. 도덕법은 안식일을 제외한 십계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것으로 거룩하고 선하며 의로운 것이다.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도덕법은 구약시대에나 신약시대나 언제든지 타당하게 적용되는 영구불변의 항존법(standing law)이다. 제사의식법은 신약시대에 적용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번에 영원한 희생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신약시대라 해서 십계명이 폐해진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세대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신약에 와서 도덕법은 더욱 굳게 세워지고 있다(마 5:19; 롬 3:31). 신약에서 율법은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으로 흡수, 통합되었다. 모든 율법은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을 한 데 묶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순종하고 지키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구원파는 성경과는 너무 거리가 먼, 매우 위험한 율법이해를 하고 있다. 율법을 너무나 좁게 이해하고 있다. 율법을 설명할 때, 성령과 인간 사이의 역학적 관계 속에서 이해하지 않고 존재론적으로 설명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성화를 위해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 29:18). 율법은 어떤 기능을 하며, 어떤 가치가 있는가? 율법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까다로운 조건이 아니다. 율법은 우리를 살리고, 교육시키며, 마음을 정화시키고, 백성들을 하나로 묶으며, 사회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피영민, 2008).

개혁주의 신학 전통에 따르면, 비신자는 율법을 순종하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실패한 것으로 인해 저주 아래 있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은혜에 의한 구원에 감사드릴 길을 마련해주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보여줄 기본적인 방법을 제공한다. 성령은 또한 율법을 통해 죄를 책망하시며 회개케 하신다. 모세의 율법의 규범적이고 일차적인 용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다. 거룩한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모든 법의 근간이 된다.

출애굽기에서는 십계명을 계속 ‘증거판’(Testimony)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계시하신 것이라는 의미이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대한 계시다. 따라서 이 뜻에 순종하면 축복을 받고 거역하면 진노하신다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드러난 것이다. 다음의 ‘율법의 3가지 용도’는 멜랑히톤, 루터와 칼빈 같은 종교개혁가들의 이신칭의(이신득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율법의 3가지 용도: 하나님은 어떤 목적으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는가? 첫째로 율법의 용도 가운데는 악을 제어하는 시민적 용도(civil function)가 있는데 죄인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 있다.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 율법은 자기를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십계명의 10가지 계명 중 8가지가 “하지 말라”는 부정적 명령의 형태를 갖고 있다. 그래서 칼빈은 “십계명은 말을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재갈과 같다”고 했다.

인간이 하나님과 같지 않다는 것과 인간이 선하지 않다는 것, 인간은 저주와 정죄를 받기에 마땅하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하는 데 율법의 목적이 있다. 우리는 율법에서 저주와 정죄 소리만 듣는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롬 3:20).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 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인간은 구원파에서는 율법의 죄를 인식하고 깨닫게 하는 기능만을 주로 강조하고 있다.

둘째는 신학적, 영적 용도(spiritual function)로서 우리의 죄와 비참함을 인식하도록 가르치는 용도로서, 율법은 죄를 책망하고 예수를 찾도록 하는 몽학(蒙學)선생의 기능을 한다. 율법은 절망에 빠진 죄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도록 만들기 위해 주어졌다는 것이다. 율법은 인간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엄격한 교사(몽학선생)인 것이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24).

셋째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하는 세 번째 규범적 용도(normative function)가 있는데, 누구든지 중생하면 율법을 지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을 수 있도록 기능한다는 것이다. 율법은 중생인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 죄인은 회개한 후에도 여전히 죄인이고 또 죄인으로 남는다. 율법은 칭의함을 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토록 하기 위해 주신 것이다. 율법의 제3용도는 중생자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하는 것이다. 중생한 후에도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만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도움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다. 이 성령은 성화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특별히 십계명을 판단의 잣대로 이용한다.

성경은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고 신령하다(롬 7:12, 14)고 말하고, 율법을 ”하나님의 법“(롬 7:22, 25)이라고 부르고 있다.

4. 성도의 행복을 위해 주신 율법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언하고 있다: “내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율법은 원래 구원받은 선민을 괴롭히고 억압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다. 명령과 규례를 지키면 우리는 행복해진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하고 있다. 하나님을 참으로 인격적으로 경험하게 되면, 율법폐기론이나 불순종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고, 은혜와 사랑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삶이 따르게 되어 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서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2:3).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히브리서 저자는 구원받은 성도는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히 12:1-3).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죄와 악이다. 이 세상에 있는 악의 세력의 근원은 마귀이고 내 안에 있는 악은 바로 죄성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세력, 즉 밖에서 성도를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사단의 세력과 안에서 거룩과 경건을 방해하고 성령의 소욕을 방해하는 죄성, 이 두 가지 세력과 싸우는 가운데 성화를 이뤄야 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그들의 사랑을 표현하고 그들의 하나님과의 관계와 서로의 관계를 관장하는 수단으로 삼으라고 주신 것이다. 율법은 구원의 방법이 아니고 언약적 관계 안에서 질서 있는 삶과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율법을 지키고 순종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그런데 이단 구원파는 율법과 종교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기존교회에서 하는 것은 종교요, 자기들이 전하는 것은 복음이라고 주장한다. 일단 구원을 받으면 율법과 종교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한국의 모든 정통교단은 구원파를 율법폐기론자(도덕률폐기론자들)로 규정한 것이다. 우리는 율법의 형벌과 저주로부터 해방된 것이지, 그 교훈과 도덕률로부터 해방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시지 않았다. 바울은 사랑으로 율법의 구체적 계명을 준수할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약속 있는 첫 계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엡 6:2).

권신찬은 로마서 7장의 남편과 아내로 비유된 율법과 성도의 관계에 대하여 설교하면서, “이제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으니”의 내용을 들어, 구원받은 성도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주일성수, 십일조, 금식, 새벽기도, 기도생활까지도 율법이라고 하여 이러한 규범에 매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자신이 과거에 장로교 목사로서 이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으려 노력했던 것이 소용이 없었음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그는 이제 자기를 괴롭혔던 무서운 폭군인 율법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게 되었다면서 은혜를 누리면서 자유롭게 살자는 무서운 자기복음을 만들었다(종교에서의 해방, p.43).

구원받은 후에는 율법이 필요 없게 되었다고 하니 구원받은 후에 짓는 죄는 무엇으로 죄인지 알 수 있겠는가? 알 필요도 없는가. 아니면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고 할 것인가? 도둑질, 간음, 부모거역, 탐심, 살인 등의 죄를 무엇으로 어떻게 알겠는가, 그리고 구태여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할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성경에서 율법이 폐해졌다고 말씀할 때는 그 율법이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해당하는 경우에 한해서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모든 율법과 법도 즉 모세의 율법은 십자가로 폐한 것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 할례나 제사제도나 절기 등의 제사법이나 시민법에 관련된 율법이 폐해졌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그러한 규례를 따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신자는 율법에서 자유하다.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못함으로 인해서 정죄 아래 있지 않다는 뜻이다. 바울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임을 상기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선언하고 있다(갈 3:11-13).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신자는 율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신자는 자신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데 깊은 관심을 가져야 마땅하다. 예를 들어, 시내산 율법을 주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 20:2)고 소개하신 후에, 즉 죄의 굴레에서 속량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자 이제 너에게 보여준 자비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시편 1편은 복있는 사람은 “주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말하고, 시편 19편에서는 율법의 완전함을 노래하며, 119편에 와서는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35절)고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율법의 정죄와 형벌과 저주에서 구원한 것이지 율법의 교훈과 윤리적 규범에서마저 해방시킨 것이 아니다. 모세 율법의 일부분인 도덕적인 윤리규범은 신약에 와서 다시 강조된다. 도덕적 율법은 폐한 것이 아니라 새 계명으로 주신 것이다. 사도 요한은 구원받은 성도가 율법(계명)을 지킬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고 말씀하신 후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2절)고 가르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2-3). 사단은 인생의 목적이 죄를 안 지으려 피 흘려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일 인생의 목적이 죄를 안 지으려 피 흘려 노력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지 않고 율법을 강화시켰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은혜를 경험해서 죄를 안 짓게 되길 원하신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원치 않는 것은 하고 싶지 않은 게 정상이다. 친밀하게 사랑하는 관계가 이루어지면, 율법과 죄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행하는 것과 율법을 지키는 것은 같은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로 생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다(윤동일, 2008).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시기 전에는 자기 자신을 의롭게 하려는 노력이 율법의 반역을 초래하였고 죄의 노예가 되게 할 뿐이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율법에 순종하여 의를 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성경은 율법이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고 선언한다(롬 7:12). 바울은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이 선한 것인 줄 안다고 말했다(딤전 1:8).

5. 율법과 은혜의 관계
그리스도인은 구원받기 위해 율법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에 율법을 행하는 것이다. 율법의 핵심은 십계명이다. 십계명을 주신 시기는 출애굽 후, 즉 구원받은 후이다. 율법은 구원받은 백성의 삶의 지침서이다. 은혜가 감사해서 주를 위해 율법을 지키며 생활하는 것이다. 최고의 경건은 계명 준수를 즐기는 삶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순종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불순종으로부터의 자유다.” 율법을 무시하고 준수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유도하는 종교는 하등종교, 사이비종교가 분명하다.

율법과 은혜. “한국기독교의 큰 문제 중 하나는 바로 율법과 은혜를 원수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주었고, 우리는 율법과 관계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은혜만이 우리가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율법폐기론’이다. 세대주의 종말론이 한국기독교를 망쳐놓은 원인 중 하나다...하나님의 십계명이 한국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고 그 영향력은 미미하다. 한국의 기독교는 은혜만 강조했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율법폐기론에 빠졌기 때문이다. 모세 언약의 모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된다는 은혜 언약으로 가는 예표요, 단계다”(피영민, 2007).

성경에는 아브라함 언약, 모세언약, 다윗언약, 등 많은 언약이 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다. 그것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 언약이 여러 가지 언약들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에베소서 2장 13절에는 “약속의 언약들”(Covenants of the Promise)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약속은 단수로 되어 있고 언약은 복수로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 한 가지를 이루는 여러 가지 언약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모세의 가르침(언약)이나 나의 가르침은 동일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내가 준 언약과 모세언약은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율법과 은혜를 대립적으로 볼 수 없다는 확실한 근거가 된다.

율법은 하나님이 택하여 구원하신 백성들에게 삶의 원리가 된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땅히 따라가야 할 삶의 원리이며 규칙이다. 십계명을 요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모세언약은 구원받은 백성이 어떻게 사는 것이 마땅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삶의 원리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마음에 두고 십계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키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명을 우리 수준으로 끌어내릴 수는 없다. 항상 거룩하고 완전한 계명을 늘 기준으로 삼아 우리 자신을 비추어보고, 죄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또 죄가 있으면 회개하고 자복함으로써 죄씻음을 받고 구원을 이루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은혜가 공짜라고? 은혜란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는 호의이다. 우리는 흔히 은혜는 공짜로 아무 조건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에 조건 없는 은혜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호의는 철저한 청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씨뿌림은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열매를 목적으로 하는 투자다(마 13:1-7). 베풀어진 은혜에 대한 합당하 반응과 철저한 청산이 강조된다. 은혜는 자격이라곤 전혀 없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호의적인 투자다.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이 있다”는 우리 속담은 성경의 은혜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관계중심적인 체면사회에서 반대급부를 요구하지 않는, 거저 주어지는 공짜 선물이란 개념의 은혜는 없다. 선물은 자발적인 순환을 요구한다. 선물(은혜)을 받은 사람은 자발적인 고마움과 부채의식을 갖게 된다. 은혜의 조건은 먼저 우리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고(엡 2:9), 다음 조건은 선한 일을 행하게 하려는 것이다(10절). 신약성경은 구원이 은혜의 선물이니까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는 충성스런 삶을 요구한다. 은혜는 하나님의 투자이기 때문에 배은망덕한 자는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다(이민규, 2014).

갈라디아서는 신실함과 순종의 삶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한다(갈 5:16). 성령을 따라 살지 않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다(갈 5:21).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24).

은혜로 구원받은 신자도 이후 지속적으로 죄와 싸우며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구원받은 신자의 특징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고,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죄를 싫어하게 되고, 죄에 대해서 저항하게 되는 새로운 성향을 보이는 것이다. 구원받은 신자에게서는 죄와 투쟁하는 거룩한 삶의 새 질서가 시작된다. 존 웨슬리가 가르친 것처럼 ‘완전성화’란 신자의 삶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동안 그 어떤 위대한 그리스도인도 완전하게 자신의 죄를 정복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전처럼 죄를 즐거워하거나, 무방비 상태로 죄에 끌려가거나, 편안한 마음으로 죄를 즐기고 사랑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시면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요 16:8).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로 알려져 있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처럼 크게 오해되고 있는 말씀도 드물다. 이 말씀을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율법과 상관이 없다거나 율법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고, 읽을 필요도, 더 이상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고 이해하는 이들이 있다. 이것은 심각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말은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도덕적인 율법과 그 도덕적 요구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가장 위험한 도덕률폐기론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율법에 작별인사를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더 이상 구원의 수단으로 율법 아래 있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을 지키고 존귀히 여겨야 할 것이며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이를 행해야 한다“(로마서 7장 강해, p.27).

회개와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진정으로 구원받은 신자는 그 결과로 삶 가운데 선한 행위를 보이게 되어 있다. 우리의 선행은 우리를 의롭게 해주지 못한다. 우리의 선행은 어디까지나 이미 우리를 새롭게 해주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행위다. 선한 일에는 거창한 일만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 삶의 모든 영역 중 만물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가 ‘내 것!’이라고 선포하시지 않은 영역은 단 하나도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세속적인 일’과 ‘신성한 일’(거룩한 일)이 따로 있지 않다. 마틴 루터도, 교회에서 하는 일만이 아니라 설거지와 빨래하기, 낙엽치우기, 기저귀 갈기도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5.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들: 예수님의 재림과 세대주의 종말론
사도 요한이 본 천년왕국 비전에 대한 정확한 해석문제는(계 20:1-10) 2세기 이래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많은 흥분과 논란을 일으켜왔다. 그 과정에서 세 가지 기본적 입장이 확고해졌다. 그 세 가지 입장은 각각 재림이후에 천년왕국이 온다는 ‘전천년설(premillennialism),’ 천년왕국 후에 재림이 있다는 ‘후천년설,’(postmillennianism) 그리고 재림 이전이나 이후나 천년왕국이 없다는 ‘무천년설’(amillennialism)이다.

각 견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에 대하여 나름의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전천년설이 대세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지만, 현재는 천년왕국의 천년을 교회역사에 대한 상징으로 보는 무천년설을 추종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천 년을 지금 천국에서 이뤄지는 죽은 성도들의 통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에 전쟁과 기근, 지진과 같은 징조가 있고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증거되며, 배도와 함께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있고 7년 대환란이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대환란과 천년왕국을 교회가 아니라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되는 장으로서 본다. 교회시대의 정점은 휴거이며, 이때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신실한 제자들은 ‘공중에서’ 만나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여실 것이다. 이렇게 참된 교회가 지상에서 사라지면, 적그리스도가 7년 동안 악마적 통치를 시작하며, 이때 하나님의 진노가 땅위에 쏟아진다. 이러한 대환란 기간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것이며, 이 와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천국의 군대와 함께 재림하셔서 주님의 원수를 모두 처부순다. 그 때 이스라엘은 비로소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할 것이며, 지상에 천년왕국이 세워질 것이다.

세대주의 종말론은 기독인들로 하여금 미래의 어떤 시점(예수의 재림시점)에만 집착하도록 만듦으로서 현실의 삶을 등한시하도록 만들었다. 1992년 10. 28. 휴거설을 주창했던 다미선교회나 현재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은혜로교회는 소속교인들이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현실을 무시한 채, 강제적으로 또는 인위적으로 회개하게 만들었다.

연대기적 해석을 하게 된 세대주의는 이스라엘과 교회를 분리시키고, 율법과 은혜를 대립적 개념으로 분리시켰다. 율법은 모세와 행위와 연관된 반면, 은혜는 그리스도와 믿음에 연관되어 이해되고 있다. 이들은 “율법은 결코 구원이나 칭의의 수단으로 주어지지 않았다”고 말하는가 하면, 스코필드(Scofield)에 의하면, “율법은 죄인을 칭의하지도 않고 신자를 성화시키지도 않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세대주의 성향은 영적인 것과 실제적인 삶을 분리시킨다. 이런 이원론적 사고방식은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을 등한시하고 확실하지도 않은 환상적인 이상에 몰두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미래의 어떤 유토피아나 지상천국을 약속한 이단종파에 미혹되어 현실의 삶을 망친 경우를 많이 목격하고 있다.

무천년설에서는 천 년을 문자 그대로 볼 수 없고 완전수인 10을 세 번 곱한 충만 수로 봐야 한다는 확고한 입장이다. 무천년주의자들은 천년왕국의 천 년을 교회역사에 대한 상징으로 본다. 천 년이란 교회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승리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칼빈과 어거스틴도 이 입장을 취했다. 천년이라는 숫자는 상징적인 숫자로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을 한 사람도 남김 없이 모두 구원하시는 충만한 기간을 천 년으로 보는 것이다. 천 년은 단지 택한 백성을 전부 구원할만한 충분한 기간이다.

20세기 한국의 많은 부흥사들이 전했던 세대주의전천년설은 성경을 벗어난 매우 불건전한 해석이다(피영민). 종말론과 관련된 이단들은 대부분 이 세대주의전천년설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공통적으로 7년 대환난, 휴거, 천년왕국, 144000, 666이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종말에 대해 강박적 관심을 갖고 있는 구원파와 같은 집단의 행태를 지적하면서 균형 있는 신앙생활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예언적 교훈에 대한 지나친 관심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현재의 세계정세에 있어서는 특히 그렇다. 어떤 사람들은 차츰 이 주제에 마음을 빼앗겨 정복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예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설교도 하지 않는다. 이 예언적 교훈에 대한 지나친 몰두 이상으로 영혼의 건강에 위험한 것은 없다. 러시아, 이집트, 이스라엘 및 그 밖의 나라들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에스겔서 37,38장이나 다니엘서 7-12장 그밖의 예언적 관점에서 여러 시기나 경우를 계산하는 데 모든 시간을 소비하며 전생애를 투입하게 되기가 쉽다. 한편 영적 의미에서는 당신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 점점 무관심하고 등한히 될 수 있다. 물론 예언적 교훈은 성경의 중요한 일부이고 크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장래 세계에서 일어날 사건들에 너무 관심을 가지는 나머지 우리가 지금 살아야 하는 생애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음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 점에서 우리들의 일차적인 위험은 균형이나 조화의 감각을 상실하는 데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나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14:36).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 13). “때와 기한은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 1: 7). 우리는 복된 소망을 갖고 현실에 더욱 더 충실하고 주어진 사명을 더 충실히 감당하며 충성하고 봉사할 때 약속된 하나님의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날과 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성도로서의 거룩한 삶이다(마 24:36; 벧후 3:11,12).

우리는 특별한 ‘종말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는 마지막 때로서, 세상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 절정에 이르기 직전의 시기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이 얼마나 될지도 알 수 없다. 우리는 선견자 요한처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때가 가까우니라.”(계 22:10).

우리가 지금 요한계시록에서 경고하는 말세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말세에는 네 가지 징조가 있다: ①사람의 징조 “미혹”이다(마 24:4); ②환란의 징조 “난리”이다(마 24:6); ③자연의 징조 “재난”이다(마 24: 7-8); ④종교적 징조 “이단”이다(마 24: 11, 23-24). 우리 모두는 기름을 준비한 지혜로운 다섯 처녀처럼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을 준비를 갖춰야 한다.

우리는 재림이 가까워진다는 핑계로 나태하고 게으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살전 4:11). 성도들은 재림하시는 주를 맞아 영접하여 영원히 주와 함께 살게 될 것이다. 불신자처럼 슬퍼해서는 안 된다. 시간과 시기에 대해 성도들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 매일 경건하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참고서적
권호덕. [율법의 세 가지 용도와 그 사회적 적용]. 그리심, 2003.
김민규. [신앙, 그 오해와 진실]. 새물결플러스, 2014.
스탠리 그렌츠. [누구나 쉽게 배우는 신학]. CUP, 2000.
피영민. [신약개론]. 검과흙손, 2015.
Walter Elwell.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Baker Book House, 1984.

출처 : 기독교포털뉴스(http://www.kportalnews.co.kr)

Posted by 작은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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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주의의 기원과 문제점 - 기독교포털뉴스

한국교회에는 세대주의적 입장이 매우 뿌리 깊습니다. 특히 세대주의적 입장은 이장림 씨의 1992년 10월 28일 시한부 종말론을 전후해 한국교회를 강타했고, 그 악영향을 경험했음에도 세대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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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주의의 기원과 문제점

 

한국교회에는 세대주의적 입장이 매우 뿌리 깊습니다. 특히 세대주의적 입장은 이장림 씨의 1992년 10월 28일 시한부 종말론을 전후해 한국교회를 강타했고, 그 악영향을 경험했음에도 세대주의 사상은 우리들 속에 아직도 잔재해 있습니다. 최근에는 ‘베리칩=666 짐승의 표’라고 주장을 하는 세대주의적 입장에 기초한 종말론이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에 본 사이트 기독교포털뉴스(www.kportalnews.co.kr)는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란 무엇인가?’란 주제로 김명도 교수(미국 칼빈신학대학(CTS) 및 국제개혁대학(IRUS) 변증학)가 정리한 내용을 게재합니다. 김 교수는 이 글에서 한국교회에 세대주의의가 기원하게 된 이유, 세대주의와 개혁주의의 차이, 개혁신학적 관점에서 본 세대주의의 문제점 등을 짧고 간결하게 정리했습니다. 원고 게재를 허락해 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편집자주>

1. 세대주의의 기원
세대주의의 기원은 1820년대의 영국 Dublin 이라는 마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John Nelson Darby (1800-1882) 라는 사람은 기성교회에서 목사만이 안수 받은 특수층인 성직자만 설교하고 성례식을 집례하는 것이 종교개혁 사상인 “만인사제 (priesthood of all believers" 에 위배된다하여 교회를 박차고 나와서 따로 몇몇 모여서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모든 잘못된 사람들은 기성교회를 비난하고 따로 모여서 새로 <성경공부> 라는 미명으로 모여서 정통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가르치지 않고 나름대로 ”새로운 진리“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교파>를 만든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통일교나 모르몬교나, 지금은 활동이 약화되었지만 옛날 박태선의 전도관이나 ”영생교단“ 등이 모두 이렇게 시작되어 사람들을 오도해 간다. 세대주의를 이런 이단교파들과 대등시 하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전에 기성 교회가 몰랐건 진리를 새로 발견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필연코 문제를 일으킨다는 말이다. 성경의 가르침 즉 기독교의 정통적 교리는 이미 초대교회 때부터 <니케아 신경>이나 <아타나시우스 신경>이나 <콘스탄티노물 신경>이나 <갈게돈 신경>에 잘 정립되어 있고, 그 후 <벨직 신앙고백>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 <제2스위스 신앙고백>, <프랑스 신앙고백>, <도르트 신경>, <웨스트민스터 싱앙고백> 등에 모두 잘 정리되어 있고 현대에 와서는 <케임브릿지 선언 Cambridge Declaration, 1996>으로 더 이상 수정하거나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새로운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새로운 진리>를 발견했다고 야단이지만 이는 크게 잘 못된 것이다. 이미 나타난 <역사적 신앙 고백서들>을 받아들이고 성경을 성경대로 믿으면 되는 것이며 <별도로 다른 진리>를 도입할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John Nelson Darby 라는 <세대주의 창시자> 에 관하여 몇 마디 말한다면 그는 귀족의 집안에 태어나서 영국 Dublin 에 있는 명문 대학 Trinity College에서 수학했고 목사로 안수 받고 Church of Ireland 에서 다년간 목회하면서 기성교회의 <허점>들을 발견하고 기성교회의 잘못을 비난하는 「On the Nature and Unity of the Church of Christ」 라는 책을 1827년에 쓰고 나서 그해 그가 목회하던 교회를 사임하고 나름대로 그의 독특한 목회 스타일로 그의 추종자 몇 사람과 같이 개인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매주 한 번씩 성찬식을 거행했고 교인들이 돌아가면서 교대로 설교하면서 전혀 기도에 힘쓰며 그의 온화한 인품과 탁월한 교수 능력으로 나름대로 그 모임을 잘 인도해나갔다.

같이 동시 목회하던 B.W. Newton 과 결별하고, 영국 서남단 Plymouth 라는 항구에서 처음으로 생겨난 교단에 합류했다. Darby는 Newton을 <예언> 문제와 <교회론, 특히 성찬문제> 문제 등으로 그와 사상을 달리한다 하여 이단으로 규정하여 결국은 1848년에는 <개방파> 와 <폐쇄파> 로 교단이 둘로 분리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Darby는 어학지식이 대단하여 성경을 불어, 독어로 번역했다. 그는 <세대주의 신학의 창시자> 라고 불리운다.

이 세대주의는 미국에 상륙했다. 1900년도 초기에 미국의 Cyrus Ingerson Scofield(1843-1921)에게 전수되어 1909년 이른바 Scofield Reference Bible (스코필드 성경)이 미국에서 처음으로 발행되어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급속도로 세대주의가 전파되게 되었다 Scofield는 군인 출신 법률가로 성경 원어에 능통한 사람이 아니었고 신학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나름대로 KJV(제임스왕판 성경, 1611)에 여기 저기 나름대로 생각해 낸 주석을 기입했다. 그래서 Scofield의 성경을 읽는 사람은 나중에 다른 사람과 토론할 때 어떤 구절을 놓고 그것이 성경 본문에 있는 말인지 아니면 스코필드가 한 말인지 혼동을 가져 올 때가 있다고 토로(吐露) 한다.

미국에서 이 성경이 급물살을 타고 빨리 펴져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이 미국에 상륙하여 이상한 비성경적 성경해석 바람이 불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건너온 “자연신교, Deism" 이나 독일에서 건너온 ”종교사학파, Religionsgeschichtliche Schule, 宗敎史學派" 등이 미국 Princeton 신학교에 상륙하면서 미국의 정통적 개혁주의 신학은 침식되었고 많은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신신학(新神學) 에 빠져들어 갔기 때문이다. 이런 암흑기에 Scofield의 성경은 새로운 oasis 로 받아져서 너도 나도 사서 읽었고, Darby의 신학을 전수 받은 Scofield는 그의 성경을 통해서 세대주의 신학을 널리 펴나갔으며 한국에 나와서 평양 신학교를 설립한 미국 북장로교 (UPCUSA)목사 Allen Clark (곽안련)도 이런 세대주의 신학자였으므로 그에게 지도 받은 문하생들이 모두 세대주의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한국의 세대주의 일변도의 신학이 <개혁주의> 로 돌아선 것은 해방되고 나서 특히 6.25 사변을 전후하여 화란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박윤선 목사님 같은 몇몇 학자들의 영향에 기인한다.

그러면 세대주의와 개혁주의는 어떻게 다른가?

II. 세대주의와 개혁주의의 차이점
세대주의와 오순절 계통의 교리가 전혀 다른 것처럼 세대주의와 개혁주의는 전혀 다르다. 오순절 계통의 교리가 개혁주의와 다른 것은 “지금도 하나님이 계시가 온다” 고 믿는 오순절의 가르침을 개혁주의는 부인하기 때문이다. 개혁주의는 종교개혁기의 신앙고백서인 Belgic Confession (1561), Heidelberg Catechism (1563), French Confession (1559), Second Helvetic Confession (1566) 과, 성경 히 1:1; 계 22:18-·19 등에 나타난 계시의 종결을 못 박고 있다.

세대주의와 개혁주의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세대주의 (Dispensationalism)는 역사의 시대를 7가지로 구분하여 그때그때 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이 다르다고 가르친다. 세대주의 신학은 인류역사를 7세대로 구분하는데 그 일곱 세대란:
1. 무죄시대 (Innocence, 창조부터 인류 타락 전까지)
2. 양심시대 (Conscience, 인류타락부터 노아까지)
3. 인간통치 시대 (Human Government, 노아부터 아브라함 까지)
4. 약속시대 (Promise, 아브라함부터 모세까지)
5. 율법시대 (Law, 모세부터 그리스도까지)
6. 은혜시대 (Grace, 교회시대)
7. 왕국시대 (Kingdom, 천년왕국)

이렇게 구분하여 그때그때 마다 하나님이 다르게 인간을 다스린다는 것이 세대주의자들의 신학이다. 모든 세대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하지만 율법과 은혜를 엄격히 구분한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7가지 세대에서 각각 인간에게는 다른 책임이 주어지며 하나님은 7시대에 각각 다르게 인간을 통치한다고 가르치며 우리는 지금 “은혜시대” 에 살고 있는데 율법인 십계명을 존중은 하지만 우리 생활과 신앙의 유일한 법칙으로 지킬 의무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들 세대주의에 의하면 우리는 지금 은혜시대에 살고 있는데 우리는 십계명을 지키는 것 보다 “단지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는 것뿐” 이라고 가르친다. 여기에 대해서는 전에 세대주의를 따르다가 개혁주의로 돌아온 William Cox가 쓴 작은 소책자 (pamphlet) 인 「Why I Left Dispensationalism」 이나 그의 책 「An Examination of Dispensatinalism」(P&R 1961, 1963)을 참고할 것. 이 책자들은 지금도 New Jersey주 Phillipsburg 에 있는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약자로 P&R)에서 구입할 수 있다. 아니면 Christian Book Distributors (Lynn, MA) 혹은 online 으로 www.amazon.com 에서 구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오직 한 가지 방법 즉 하나님의 은혜로 인류를 구원해 주신다고 가르친다. 구약은 오실 메시야이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예언하고 있고 신약은 그 메시야 즉 그리스도가 예언대로 임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Immanuel) 그가 구약에서 예언한 그대로 그의 택하신 백성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대속의 죽음을 죽어 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고 믿는다. 구약에서 행위계약에 실패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위하여 “은혜계약”을 주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는 것이 개혁주의 구원관이다. 세대주의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세대주의 신학은 두 번째로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을 하나님의 구속사적 측면 (In the perspective of God's Redemptive History)에서 해석한다. 옛날 교부 Origen(Alexandria 에서 활동하던 Clement of Alexandria 의 제자)은 성경해석의 원칙을 말하면서 “모든 성경은 네 가지 방법으로 해석해야 한다” 고 주장했는데 그 네 가지란 1. 문자적 해석 2 풍유적 해석, 3. 도덕적 해석, 그리고 4, 신학적 해석 이렇게 네 가지로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 ”오리겐의 4중 해석“ 이라고 한다.

그러나 Origen 자신도 교리사적 측면에서 볼 때 실수를 많이 한 분이었다. 성경의 해석은 항상 문맥을 통해서 바른 해석이 나온다. 성경의 해석의 원칙은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 (Scriptura Scripturae Interpres)>이다. 성경이 성경을 해석 한댜는 말이다. 성경을 해석할 때는 항상 Historico-Grammatico-Theological Interpretation(역사적, 문법적, 신학적 해석)이 바른 해석 방법임을 알아두자.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되 역사적 배경을 알고 문법적으로 분석하고 그리고 신학적인 의미를 유도하는 방법이다.

세대주의자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렇게 주장하면 온갖 해석상 오류에 빠지게 된다. 가령 예를 들면, 요한복음 2장의 말씀 중 “성전을 헐라 삼일 만에 내가 다시 지으리라” 란 말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문자 그대로 라면 46년간 걸려서 지은 예루살렘의 성전을 문자 그대로 단 3일 만에 재건한다는 말이니 예수님은 그런 의미로 말씀한 것이 아니다. 그 다음절 (요 2:21)에 보면 문자 그대로의 성전을 말함이 아니고,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말함이 분명하다. 이렇듯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면 큰 낭패를 당하며 진리에 도달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알자.

세대주의 신학은 구약과 신약은 관계가 없고 구약은 이스라엘만 말한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말하기를 “이스라엘”은 어디까지나 <육적인 이스라엘> 나라(지금의 유대민족) 만을 말한다고 가르친다. 믿는 성도가 모두 영적인 이스라엘임을 그들은 부인한다.

그렇다면 갈 3:29 말씀은 어떻게 해석하나?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란 말은 분명히 우리들 이방인들을 말하며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이 됨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이는 로마서 2장 28절 말씀이 입증한다. 세대주의는 모든 예언의 말씀이 이스라엘 즉 육적인, 다시 말하면 지금의 이스라엘 나라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예언이라고 가르치면서 갈 3:29 말씀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세대주의 신학자인 Louis Sperry Chafer 가 쓴 조직신학 책 8권에는 로마서 4장에서 인용하는 글이 없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선지자가 예언한 예언은 이 땅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것이므로 이 세상에서 성취된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에스겔서 40장에서 48장에 나오는 <성전>은 문자 그대로 이 세상에서 유대인들을 위한 성전이며 이 세상에서 이뤄진다고 가르친다. 세대주의자는 계시록 22장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도 문자 그대로 <이 땅에서의 성전으로 앞으로 이 땅에 살게 될 성도들이 영원히 살게 될 곳> 이라고 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은 이스라엘이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음을 믿는다. 즉, 1. 유대민족, 2 야곱이 변하여 이스라엘, 3. 솔로몬이 죽은 후 나라가 양분되어 10개 지파로 만들어진 여로보암 왕의 북국 (사마리아 중심) 이스라엘, 4. 영적 아브라함의 자녀 즉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믿는 모든 무리 (갈 3:29) 등 이렇게 이스라엘의 의미가 많은 것을 세대주의 신학은 부인한다. 이것은 그들의 맹점(盲點)이다.

세대주의 신학은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 관계를 부인하며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말하기를 “구약에는 교회에 대한 예언은 한 마디도 없다” 고 주장하며 모든 예언은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 나라 백성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세대주의자들의 신학이다.

세대주의자는 말하기를 예수님이 말한 <하나님의 나라> 는 유대인들을 위함이었는데 유대인들을 위하여 영적이 아닌 이 지구위에서 이루어질 다윗의 왕국이 이뤄지는 것을 말한다고 가르친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자 이 왕국은 장래 왕국시대가 되어야 이루어 질 것이라고 그들은 가르치며 그 어간에 하나님은 <괄호속> 에 “교회시대”를 임시로 주었다고 가르친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구약의 이스라엘이 신약의 교회임> 을 철저하게 부인한다. 여기에서 온갖 그릇된 그들의 신학이 나온다. 그러므로 세대주의는 말하기를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도래했다는 말을 믿지 않으며 그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 말대로라면 항상 미래에 되어질 일이며 현재와는 관계가 없다고 가르친다. 이에 반하여 개혁주의는 <구약의 이스라엘이 바로 교회> 라고 믿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도래 했고 그 마지막 완성은 미래에 이루어진다고 가르친다.

세대주의는 주장하기를, 성도는 환난을 당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대 환란이 오기 전에 교회는 휴거되어 성도는 환란을 면하게 되고 (pre-tribulation rapture) 휴거(rapture)가 있은 후에는 유대인들중 남은 자 (remnant) 가 교회를 맡게 되며 이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나라와 이빙민족을 회심시키는 도구로 사용된다고 가르친다. 좀 더 여기에 관해 알고자하면 세대주의 신학자인 Charles C. Ryrie 가 쓴 Dispensationalism Today (Moody, 1965, pp.132-135를 참고할 수 있다. 성경은 분명히 성도들도 환난을 당한다고 말하며 마태복음 24장 22절 이하에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세대주의와 개혁주의는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매우 다르다.
가장 눈 여겨 보아야 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는 것.
예를 들면, 다윗의 보좌가 영원하리라 (삼후 7:13)은 이 땅에서의 다윗의 나라가 부활된다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임한다는 말로 성경은 로마서 1:3 이나 행 2:29-32 등에서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항상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는 원칙은 무리가 있다.

2. 이스라엘 문제에 관하여, 누가 이스라엘인가? 성경은 <교회가 새로운 이스라엘> 이라고 가르친다.(롬 9:6; 갈 6;16). 세대주의가 주장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무조건 항상 이스라엘 나라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유대나라를 말할 때도 있고, 영적인 이스라엘 즉 믿는 성도들을 말할 때도 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예수의 피로 죄를 씻음 받은 자들이 새로운 12 지파가 되었다>고 야고보 1:1에 말하지 않는가?

3.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7 가지 시대로 나누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죄인은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다> 는 (엡 2:8) 말씀을 모르는 소치이다. 구약 노아 홍수 때도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구원을 얻었다고 (창 6:8)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한 결 같이 같다.

4. 세대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와는 관계가 없고 항상 미래에 속하며 이 지구위에서 성취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를 통해서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지금 도래 했다 (마 12:28; 눅 17:21).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며 살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중심>이거늘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이스라엘 나라 중심> 인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세대주의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있고 (눅 17장) 그 마지막 완성 (final consummation)은 미래에 속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개혁주의적 신국관 (view of the Kingdom of God)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도래했지만 아직도 미래에 속한다> 미래에 속한다는 말은 마지막 사탄이 불 못에 던져지는 대 심판날에 사탄이 완전히 제거되고 영원한 신천지가 도래할 것을 내다 본 것이다. 지금은 아직도 성도는 사탄의 유혹을 받으며 거듭난 영혼은 거듭나지 못한 육신 (sarks) 과 부단히 싸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현상을 잘 그린 것이 로마서 7장이다. 부활한 바울의 영혼이 아직 부활하지 못한 그의 육신의 생각과 싸우는 모습이며 그 모습은 바로 우리 성도들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다..

5. 휴거에 관해서도 세대주의자는 <장차 다가올 “대 환란, Great Tribulation" 전에 믿는 성도는 모두 휴거 되어 절대로 환난을 당하지 않는다> 고 가르치지만 성경은 이 땅에서 환난을 당한다고 마태복음 (마24:21-22) 이나 베드로전서에 말한다.

그리고 몰래 ”휴거“ 한다는 말은 언어도단이다. 어떻게 예수님이 쥐도 새도 모르게 몰래 재림할 수 있는가? 물론 세대주의자는 베드로후서 3장10절을 근거로 말하지만 성경 한 군데만 보지 말고 다른 곳도 보아야 한다. 데살로니가 전서 5:4 에는 “결코 도적같이 올 수 없다” 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우리는 빛의 자녀로 옮겨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가르침은 빛 가운데 행치 아니하고 아직도 어두움 속에, 즉 예수를 믿지 않는 자에게는 벧후 3:10 말씀처럼 도적같이 임할 것이지만 예수를 믿고 있는 성도에게는 도적같이 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늘 그날을 고대하며 살기 때문이다. 이 성경해석이 정확한 증거는 데살로니가 전서 4장에는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천사장의 호령소리로 주님이 강림>하시면 죽은 사람들이 그 나팔소리에 무덤에서 일어난다고 했는데 죽은 사람도 듣는 그 나팔 소리를 살아남은 우리가 못 듣겠는가?

주님의 재림은 몰래 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온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속지 말자. <교회가 휴거한다>고 가르치는 이들의 이유는 <교회와 하나님의 구원을 분리하는> 데서 기인한다. 그들의 말은 이 땅에 다윗 왕국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임시 변통으로 주어젔던 교회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았듯, 세대주의는 성경의 무오성을 믿고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믿지만 그들의 구원관은 성경에서 벗어난 Darby 나 특히 Scofield 가 만들어낸 <인위적인 교리> 에 기초를 둔 것으로 개혁주의 신학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세대주의는 상당히 많이 교회에 파급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 목사들 80-90%가 세대주의를 신봉한다.

III. 어떤 분들이 세대주의를 믿는 지도자들인가?
이미 세상을 뜬 사람들로는 앞서 언급한 John Nelson Darby, Cyrus Ingerson Scofield, Louis Sperry Chafer(Dallas 신학교 창시자, 세대주의 신학인 조직신학 8권 저자), 등이 있고, 현존하는 인물로는 Charles C. Ryie, John Warvoord, Charles Swindol 등이 머리에 떠오르고, 세대주의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는 Dallas, Texas의 Dallas 신학교, Philadelphia, Pennsylvania 의 Philadelphia College of Bible, Winona Lake, Indiana 의 Grace Theological Seminary, 그리고 La Mirada, California 의 Talbot신학교 등을 들 수 있다.

출처 : 기독교포털뉴스(http://www.kportal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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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샘

org date: 2020-01-06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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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예슈아  (0) 2021.06.05
Posted by 작은샘

출처: https://www.fingerofthomas.org/모세-장인의-이름은-르우엘-이드로-호밥/

 

모세 장인의 이름은 르우엘인가? 이드로인가? 호밥인가? – 성경의 오류?

2017.02.26  Posted by Fingerofthomas

 

모세 장인의 이름은 르우엘인가? 이드로인가? 호밥인가?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의 소위 토라를 쓴 모세는  거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이끈 위대한 지도자이자 하나님의 선지자 입니다. 심지어 모세는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며 나와 같은 선지자라는 표현을 썼을 정도 입니다.

 

주 네 하나님께서 네 한가운데서 곧 네 형제들 중에서 나와 같은 대언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니라. <신명기 18:15>

 

그런데 성경에 소개되는 모세 장인의 이름이 세 개나 됩니다.

 

르우엘, 이드로, 호밥 – 모세 장인의 세 이름

 

그들이 자기들의 아버지 르우엘에게 이르렀을 때에 그가 이르되, 너희가 어떻게 오늘은 이같이 빨리 돌아왔느냐? 하니 <출애굽기 2:18>

 

이제 모세는 자기 장인 곧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지키더라. 그가 그 떼를 사막의 뒤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곧 호렙에 이르매 <출애굽기 3:1>

 

모세가 자기의 장인 미디안 족속 르우엘의 아들 호밥에게 이르되, 주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그것을 주리라, 한 곳으로 우리가 이동하니 당신은 우리와 함께 가소서. 우리가 당신을 선대하리이다. 주께서 이스라엘에 관하여 선하게 말씀하셨나이다, 하매 <민수기 10:29>

 

고대 사람들에게 이름이 두 개가 있는 경우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꾼 야곱이구요. 아브라함 역시 원래 이름은 아브람이었습니다. 사사 시대의 기드온 역시 여룹바알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고, 솔로몬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자 라는 의미의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름이 세개 인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불신자들이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를 성경의 오류라고 공격합니다.

 

이는 정말 설명의 여지가 없는 성경의 오류일까요?

 

저는 이에 대해 크게 두 가지의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는 모세의 아내 십보라와 자매들의 아버지라고 해석 된 르우엘이 아버지가 아닌 할아버지인 경우!

두번째는 르우엘의 아들이라고 소개 된 호밥이 모세의 처남인 경우 입니다.

 

두 가지 시나리오를 설명드리겠습니다.

 

첫번째 시나리오: 르우엘이 십보라의 아버지가 아닌 할아버지인 경우

사실 저는 이 시나리오가 더 현실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분명하게 이드로는 모세 장인의 이름인데, 그가 모세를 찾아와 여러가지 조언을 하며 모세를 돕기 때문입니다. 또 이드로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십보라를 비롯한 딸 들이 다른 목자들의 무시를 당하면서 양떼를 쳐야할 이유가 없었을 것 입니다. 다시 말해 이드로에게는 아들이 없었다고 보는 것 즉 저는 호밥은 이드로이며 모세의 장인인 것이 성경 문맥에 더 자연스럽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는 어떻게 설명이 가능한 것일까요?

 

성경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있다면 아시겠지만, 유대인들이 족보를 적을 때 모든 세대를 다 적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중요한 인물들 위주로 적어 친아들이 아니라 손자나 증손인데도 자신의 아들처럼 소개하기도 합니다. 예를들어 야곱도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기 소유 즉 자기 아들이라고 얘기합니다.

 

내가 이집트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이집트 땅에서 네게 태어난 네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이제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그들이 내 것이 되리라. <창세기 48:5>

 

이런 문화 속에서 아버지라는 히브리어 아바(אָב) 역시 할아버지 심지어는 조상이란 뜻으로 사용됩니다. 성경 안에서도 아바(אָב)는 조상, 할아버지란 의미로 사용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르우엘의 이름이 나오는 출애굽기 2:18의 르우엘은 모세의 아내가 될 십보라의 할아버지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또 민수기 10:29에서 모세의 장인 호밥은 르우엘의 아들이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르우엘이 모세의 장인 이드로 즉 호밥의 아버지라고 이해하면 자연스럽게 모세 장인의 이름에 오류나 모순이 없음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두번째 시나리오: 호밥이 모세의 처남인 경우

 

사실 많은 분들이 첫번째 시나리오보다 이 시나리오를 더 많이 소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르우엘은 십보라의 아버지가 맞으며 그의 다른 이름은 이드로란 것입니다. 그리고 르우엘이자 이드로의 아들 호밥은 십보라의 오빠라는 것 입니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고대 히브리어에는 모음이 없이 자음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즉 장인이란 뜻의 히브리어는 호텐(חֹתֵ֣ן) 이고 사위 또는 결혼으로 맺어진 남자 친척이란 뜻으로 사용되는 히브리어는 하탄(חָתַן) 입니다. 그리고 그 둘은 같은 어원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야곱의 딸 디나를 강간한 히위 족속의 족장 세겜이 야곱의 아들들과 결혼을 제안하면서 사용했던 단어가 워히하테누(וְהִֽתְחַתְּנ֖וּ) 인데 이 단어의 어원도 하탄 입니다. 즉 이를 통해 민수기 10:29에 르우엘의 아들 호밥은 처남이라고 해석하는 것 입니다. 즉 르우엘의 다른 이름은 이드로이고 호밥은 그의 아들이란 것 입니다. 이런 해석에 의해 NIV나 NLT 등의 번역본은 호밥을 처남(Brother in law)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모세 장인의 이름이 3개나 되며 심지어 르우엘의 아들이 호밥으로 소개 됨으로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은 충분히 제시 된 것 같습니다. 물론 잘못된 반론이 있기도 합니다. 킹제임스 흠정역에는 민수기 10:29에서 라구엘의 아들 호밥으로 번역 되어서 르우엘과 라구엘은 다른 사람이라고 설명하려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어는 출애굽기 2:18과 민수기 10:29 모두 르우엘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등장 합니다. KJV가 라구엘이라고 번역한 이유는 히브리어 아인(ע) 이 모음처럼 사용될 수도 g 발음으로 사용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라구엘이 다른 사람이란 주장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또 특이한 점은 출애굽기 4:18에서는 한 절 안에서 이드로란 이름이 두번 나오는데, 예테르 (יֶ֣תֶר) 라고도 적혀져 있고, 이드로(יִתְר֛וֹ) 라고 적혀져 있기도 하단 것 입니다.

 

모세가 가서 자기 장인 이드로 (예테르)에게 돌아가 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가서 이집트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 돌아가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 보게 하소서, 하니 이드로 (이드로) 가 모세에게, 평안히 가라, 하니라. <출애굽기 4:18>

 

이는 마치 James라는 이름을 줄여서 Jim 이라고 부르거나 Elizabeth 라는 이름을 줄여서 Liz라고 부르는 것 처럼 이드로의 줄인 이름입니다. 2

 

이드로는 미디안 사람인가? 겐 사람인가? 

모세의 장인에 관해서 또 다른 논란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드로를 미디안 사람으로 설명하지만 사사기 1:16에선 모세의 장인이 겐 사람이라고 얘기하는 것 입니다.

 

이제 모세는 자기 장인 곧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지키더라. 그가 그 떼를 사막의 뒤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곧 호렙에 이르매 <출애굽기 3:1>

 

모세의 장인 겐 족속의 자손이 유다 자손과 함께 종려나무 도시에서 올라가 아랏의 남쪽에 있는 유다 광야에 이르러 그 백성 가운데 거하니라. <사사기 1:16>

 

이에 대해서도 무리 없는 설명이 가능합니다.

 

겐 족속이 미디안 족속의 소부족(Sub-Group) 일 가능성

 

구약학자  Gordon Wenham은 호밥의 후손인 겐 족속이 미디안 족의 소부족 중 하나라고 단언 합니다. 3  예를들어 나이지리아에 수 많은 부족들이 있는데, 이 부족은 나이지리아 사람이기도 하지만 특정한 부족 사람이기도 한 것 처럼 말입니다. 혹은 조선이 일본의 통치 아래 있을 때에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딴 고 손기정 옹은 분명히 조선 사람이지만 IOC의 기록에는 일본 사람으로 기록된 것 처럼 모세의 장인은 미디안 족속이자 겐 족속이었을 수 있습니다.

 

겐 족속은 유목민이였기에 돌아다니면서 여러 부족들과 동맹 관계 혹은 그 아래에 위치한 부족으로써 살았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무엘상 15:6에는 아말렉을 공격하려는 사울이 겐 족속에게 아말렉에게서 떠나라는 경고를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둘이 구별되는 다른 부족이지만 함께 있었다는 증거 입니다.

 

또 미디안 족과 함께 지내면서 호밥의 모친이 겐 사람이었을수도 있습니다. 한국인과 중국인이 자녀를 낳아 이중 국적을 가지면 한국인이기도 하고 중국인일 수 있듯이, 호밥 역시 그런 상황일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결론은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오류를 찾아내려고 하지만 이는 당시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에 의한 것이지, 설명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 입니다. 많은 불신자들이 성경의 오류라고 주장하는 모세 장인의 이름에 대한 지적도 큰 무리 없이 설명이 가능 합니다.

 

References

1.  Clarke, Adam, Commentary on The Holy Bible, Abingdon Press, Nashville, vol. 1, pp. 300–301

2. Jewish Virtual Library, Jethro

3. Gordon Wenham, Tremper. Old Testament Commentary Survey, 2nd ed. 1999

 

[출처] https://www.fingerofthomas.org/모세-장인의-이름은-르우엘-이드로-호밥/

Posted by 작은샘

org date: 2018-01-02 19:51

 

고고학적으로 고대문명의 출발이라고 여겨지는 수메르인의 기원이 고고학적으로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수메르 언어와 우리 말과의 유사성으로 한민족이 기원이 되는 민족이 

수메르로 건너가서 문명을 일으켰다는 주장도 있다.  수메르(<-소머리)인 이라는 소설도 있다.

 

수메르 문명이 10진법, 60진법, 수레이용, 상하수도 시설 등 고도로 발전된 문명인데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에 기원을 알기가 어렵다고 한다.  외부, 특히 동방에서 왔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수메르 언어가 우리말과 같거나 비슷한 것이 많다면 우리 민족의 기원이 수메르인과 관련

있다는 근거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유사점이 있고 수메르 지역에서 점진적인 문명발전

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우리가 원조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수메르 문명이 발전하는 점진적 과정의 유물이 별로 없어서 기원을 알기 어렵다는 것은 

오히려 노아의 대홍수의 사실성을 뒷받침한다.

 

성경에 의하면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고 홍수가 일어나서 방주에서 나오기까지는 1년이 좀 

넘는 기간이다.  홍수로 인류가 대부분 멸망하고 노아와 그 가족은 살아남았다.  

홍수이전의 문명이 노아와 그 가족을 통해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성경에 의하면 아담이 930세에 죽고 그 후 80년 쯤 후에 노아가 태어났다.  노아가 태어나기

까지 천 년의 시간이 흘렀다.  

 

홍수가 일어난 것은 노아가 600세 되던 해이다.  그리고 바벨탑 사건이 있기 전이므로 언어가 

하나였다.  1600년의 시간 동안 가까운 곳에 모여 살았으니 노아의 홍수 이전에 도시 문명이 

충분히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창 4장에 라멕의 자손 두발가인이 기계를 만드는 자라고 소개되어 있다.  이미 문명이 발달하

기 사작한 것이다.  노아는 큰 방주를 만들었다.  그만한 목재 기술이 있었다.  치수를 재고 

큰 배를 만들만한 기술이 발전했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노아의 홍수로 대부분 사람이 죽었고 노아의 자손을 통해서 그 시대의 문명이 계속 

지속되었을 것이다.  

 

수메르인의 홍수신화는 과장과 모순이 많다.  성경에 기록된 노아의 방주의 크기와 규격이 

큰 파도와 큰 비를 견디도록 잘 설계되어 있다.  노아의 약점과 잘못이 가감없이 기록되어 있다.  

성경의 기록이 더 원전일 가능성이 높다. 

 

노아의 홍수에 대해 모세가 성경에 기록한 것은 나중이었을지라도 그 때까지 이어져 내려온 

노아의 홍수에 대한 이야기가 어떤 형태로든 그 이전부터 존재하였을 것이다.  

모세가 노아의 홍수를 기록했다고 해서 노아의 홍수가 그 때 일어났을 리가 없지 않은가?

 

수메르의 홍수신화가 그 내용을 각색한 것이라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수메르인이 노아의 아들인 셈과 함의 자손이라고 알려져있다.  바벨탑 사건 이후 언어가 

달라지면서 언어가 같은 계통의 족속들이 흩어져서 살았을 것이다.  수메르 언어를 쓰는 사람

들의 한 줄기가 멀리 동방으로 이주했을 것이고 그로부터 우리 민족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성경을 근거로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Posted by 작은샘

http://www.kangnam.or.kr/ksk/sub4/sub4_02_read.asp?accountid=36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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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인은 노아의 후손인 함족, 셈족 "

  - 성경이 수메르신화를 베꼈다는 잘못된 상식

 

성경의 "시날"(Shinar), 이집트의 "신그르"(Sngr), 히타이트의 "산하르"(Sanhar)는 모두 "수메르" 의 서방 방언으로 볼 수 있다. 일부 안티기독교인들이 성경의 기록연대가 수메르의 홍수신화 기록연대보다 늦는다는점을 들어 성경이 수메르신화를 베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상식입니다. 여러가지 많은 자료를 참고 분석한결과 수메르인은 노아의 자손이며 노아의 홍수사건이 구전으로 전승되어오다 "길가메쉬의 서사시"로 각색되어 쐐기문자로 점토판에 기록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게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1. 성경은 기록된 역사이고 수메르신화는 신화일뿐이다.

역사는 과거에 있어서의 인간의 행위를 대상으로 한다. 그 대상은 직접 우리들이 지각(知覺)할 수 없는것이므로 과거부터 현재까지 남아 있는 기록문서, 즉 사료(史料)를 매개로 하여 인식된다. 역사학의 사료는 기록된문서, 유물, ·집터, 언어 등이 모두가 사료이다. 그러나 사료 가운데서 문자에 의한 기록문서가 가장 우위를 점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인류 역사상 성경외에는 BC3000 년 이전의 사건기록은 없다. 따라서 사실관계의 확인에서 기록된 역사로써의 성경의 권위가 가장높다고 볼수있다. 그 이전의 선사시대사건들은 고고학적 유물의 특성및 연관관계를 통하여 추정할수있을 뿐이다. 따라서 역사 이전의 사건 즉 선사시대의 일들은 기록된 역사를 뒤집을수 없다. 성경은 BC1500 년경에 수메르신화는 BC2250 년경에 쓰여졌으며 수메르의기록이 750년 앞선다. 그러나 수메르신화가 기록된 점토판의 연대측정이 정확하다고 볼수가 없고 점토판에 수메르신화가 쓰여진 연대가 기록되지도 않았다. 유물의 연대측정은 학자에 따라서 몇천년 씩이나 차이가 나는 경우도있기때문에 수메르의 신화기록이 성경보다 앞선다고 할수도없다. 또한 점토판의 기록내용이 역사적 기록으로 볼수없고 단순한 신화를 기록하고 있을뿐이다. 반면에 성경은 역사적으로 매우 구체적이며 자세히 기록되어있다. 인물의 자세한 족보, 이름, 수명, 사건, 거주지, 이동경로등 수메르신화에 비교해 볼때 성경은 너무 사실적이고 현실적이다.

2. 역사학자, 고고학자들이 연구한 수메르 역사와 성경내용을 비교분석 (유물연대측정 오차로인해 선사시대의 연대는 성경의 연대와 일치하지 않을수있다)

<선사시대-유물을 가지고 추정한 고고학적 연대및 사건>

BC5000 할라프 문화 (선사시대~아시리아) 북시리아에서 이라크 남부에 걸쳐분포

(성경: 노아의 아들 함의 자손인 구스의 아들 "니므롯" 이 북시리아와 시날 (슈메르) 에 걸친 나라를 세웠음을 기록하고있다. 창세기 10:1~12)
BC4000~3500 우바이드 문화. 셈계 유목민이 우바이드인과 섞인다.

(성경: 노아의 아들 셈의 자손 역시 시날 (슈메르) 평지에 옮겨와서 성읍과 도시를 건설. 창세기 10:21~32, 11:1~9)

BC3500 수메르 문화 시작.
BC3000 수메르어와 셈족의 아카드어와 혼용.
BC2800 길가메쉬가 태어나 126 년동안 우르크를 통치했고 신화와 역사의 중간선상에 있는인물이었다.

<역사시대-기록된 문서>

BC2250 쐐기문자 체계가 완성되었다. 기원전 2000년대가 끝나기 전에 수메르인들이 점토판, 기둥, 원주 등에 당시까지 구전되어 내려오던 문학적 창작물들을 새겼다-"길가메쉬의 서사시"

 

BC2600 최초의 셈어 아카드어 출현.
BC2335 최초의 셈족국가인 아카드 탄생.
BC2123 셈족의 히브리 최초의 족장 아브라함 탄생.
(성경: 셈에서 부터 아브라함까지의 족보가 기록. 창세기 11:10~26)

BC2004 셈족계열 아모리 이씬왕조 성립하고 수메르는 멸망. 함족계열 아모리계 라르싸.

(성경: 아모리는 노아의 자식인 함의 후손임을 기록. 창세기 10:16)
BC1792 바빌론 함무라비왕에 의해 아모리계 라르싸 멸망.


3. 수메르인은 노아의 후손인 함족, 셈족이다.

수메르의 역사는 할라프문화시대-우바이드문화시대-수메르시대로 연결된다. 선사시대인 BC5000 할라프시대는 북시리아에서 이라크 남부에 걸쳐분포되었는데 성경에는 노아의 아들 함의 자손인 구스의 아들 "니므롯" 이 북시리아와 시날 (슈메르) 에 걸친 나라를 세웠음을 기록하고있다. (창세기 10:1~12) 따라서 수메르인의 조상은 노아의 후손임이 틀림없다. 역시 선사시대인 BC4000~3500 우바이드 문화시대에는 셈계 유목민이 우바이드인과 섞인다. 성경에는 노아의 아들 셈의 자손 역시 시날 (슈메르) 평지에 옮겨와서 성읍과 도시를 건설했다고 기록하고있다. (창세기 10:21~32, 11:1~9) BC2335 최초의 셈족국가인 아카드가 탄생되는데 BC2123 셈족의 히브리 최초의 족장 아브라함이 탄생한다. 성경에는 셈에서 부터 아브라함까지의 족보가 기록되어있다. (창세기 11:10~26) 성경의 아브라함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는 수메르지방이다. BC2004 셈족계열 아모리 이씬왕조가 성립하고 함족계열 아모리계 라르싸와 대립하다 수메르는 바빌론에의해 멸망한다. 성경에는 아모리는 노아의 자식인 함의 후손임을 기록. (창세기 10:16) 역사학자가 증명하지못한 수메르인의 조상이 노아의 후손인 함족, 셈족임을 성경이 증명하고있다.


4. 노아홍수의 내용적 측면에서 볼때 성경이 진실이다.

성경이 진실이라는 또하나의 증거는 길가메쉬 서사시는 길가메쉬란 인물과 홍수를 지나치게 과장하고 신화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반면 성경 속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훨씬 더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길가메쉬 서사시에서는 길가메시를 신인 (2/3는 신, 1/3은 인간) 으로 표현하고 있고 여신 아루루 (Aruru)가 그의 몸을 고안했으며 완벽한 외모로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길가메시는 완전무결하며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심지어 신들마저도 그에게 쩔쩔맬 정도로... 또한 죽지 않는 우샤나비(Urshanabi) 에게 암석을 묶어서 바다 깊은 곳에 던져 넣고 나왔다고도 하고 또 하늘에서 한 황소가 내려왔는데 이 황소가 숨을 쉴 때마다 땅이 열리면서 수백명의 사람들이 빠져 죽었다고 한다. 숨쉴 때마다 땅이 열린다는 황당한 이야기이다. 길가메시, 지우수드라 모두 수메르의 왕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즉 두 왕의 행적을 기리고 찬양하는 목적으로 쓰여졌다. 모세가 기록한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보면, 노아가 별볼일 없는 사람으로 나온다. 물론 가장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하나님께 택함을 받지만, 홍수가 끝나자마자 포도농사하다가 포도주 먹고 벌거벗고 잔다. 950살씩이나 살았지만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고, 명예로운 것도 아니고, 힘이라도 센 것도 아니고... 앞의 두 수메르왕에 비하면 너무나 형편없는 설정이 아닐 수 없다. 모세가 어떤 허무맹랑한 거짓 이야기를 지어 국민들을 우롱하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예인 것이다. 즉 길가메쉬 신화는 환타지 소설로써 그들 조상대대로 구전되어 내려오던 성경내용을 토대로 각색하여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5. 노아의 방주의 모양이나 설계가 성경이 원전이라는 또 다른 증거가 된다.

길가메시 서사시 속 홍수 이야기의 가장 큰 오류가 무엇일까? 바로 "방주의 모양" 이다. 서사시에 나오는 방주의 모양은 가로세로 120규빗 정사각형이다. 가로세로 모두 15피트되는 정사각형인데 높이만 200피트이다. 아마도 이걸 쓴 사람은 평생 배를 본 적도, 타 본 적도 없는 사람인것같다. 이러한 구조는 홍수때의 엄청난 파도에의해 쉽게 뒤집어지는 구조이다. 길가메시 서사시 속 노아의 방주는 물에 들어가자마자 난리가 난다. 배가 쓰러져서 안에 있는 생물들이 다 압사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는 어떻게 생겼을까?

보잉 747 비행기를 두 대 늘어놓은 크기이다. 모양은 수메르의 것보다 훨씬 상식적이고 현실적이지만, 과연 이 길쭉한 모양이 과학적으로도 타당한 근거가 있는 형태일까? 노아의 방주모양은 오늘날의 유조선과 흡사한 형태이다. 파도에 가장 안정적인 구조인것이다.

과학자들이 분석한 노아의 방주는 매우 안정적 구조이다. 60도 까지 기울어져도 오뚜기처럼 다시 돌아오는 매우 안정적인 구조이다. 대홍수라면 정말 파도가 무시무시한 수준일텐데 하나님이 직접설계하신 방주는 거친파도를 충분히 극복하는 신기한 구조이다.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와 그의 조상 아브라함은 유목민으로써 평생 배를 타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배에대한 아무런 지식도없이 고의적으로 배의 구조를 이렇게 과학적으로 꾸며서 기록하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방주의 모양과 설계를 보면 성경이 원전이라는 또 다른 증거가된다.

이상과같은 역사적, 고고학적, 성경적, 과학적사실을 토대로 결론을 내리면 성경이 원전이라는것이다.

1) 인류 역사상 성경외에는 BC3000 년 이전의 사건기록은 없다. 따라서 사실관계의 확인에서 기록된 역사로써의 성경의 권위가 가장높다고 볼수있다.
2) 언어학적으로 성경의 "시날"(Shinar) 은 "수메르" 의 서방 방언으로 볼 수 있다. "수메르" 의 뜻은 "셈의 자손" 이고, 셈은 곧 노아의 아들이며, 동시에 유대민족의 선조로서 일치한다.
3) 유물의 연대측정은 오차가 크기때문에 750년 차이를 가지고 수메르의 신화기록이 성경보다 앞선다고 할수도없다.
4) 수메르의 역사이전 할라프문화시대-우바이드문화시대는 노아의 자손인 함족, 셈족에 의해 이루어진것임 이 성경에 기록.
5) 노아홍수의 내용적 측면에서 볼때 성경이 사실적이며 길가메쉬 신화는 환타지 소설로써 왕을 찬양하기위해 그들 조상대대로 구전되어 내려오던 성경내용을 토대로 각색하여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6) 노아의 방주의 모양이나 설계를 볼때 성경이 원전이라는 또 다른 증거가 된다.


<출처> 성경, 최조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김산해저, 인류역사의 회고/ 유종호저, 위키백과, 네이버백과,두산백과

 

Posted by 작은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