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삶

 Richard Gamble (RTS), 개혁주의와 복음주의 상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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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신학과 복음주의의 상관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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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신학과 복음주의의 상관성

                                

- Richard Gamble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번역: 안명준교수(평택대학교)

 

이 주제를 적절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들을 조심스럽게 정의해야만 한다. 개혁신학은 복음주의 신학보다도 더 오래되었으며, 복음주의 신학은 비교적 현대적 현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을 정의함으로써 시작해야 한다.

 

I.  복음주의 신학

 

A. 배경적 뿌리

 나는 미국인이기 때문에 미국 복음주의에 관심의 초점을 두고 영국 복음주의에 대한 논의를 피하려고 한다. 미국 복음주의 신학의 뿌리는 웨슬레 운동의 발생을 동반한 18세기 영국에서 발견될 수 있다. 또 아마도 복음주의 신학의 뿌리는 18세기 독일에서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에서도 발견된다. 두 개의 역사적 운동은 확실하게 현대 미국 복음주의를 형성 시켰다.

 

이 강연의 목적을 위하여 나는 복음주의 신학의 뿌리가 영국 감리교회나 독일 경건주의 보다도 시간적으로 오늘날에 더 가까운 것을 전제한다. 이 전제는 논쟁적이지만 나는 나의 강의를 좀더 짧게 하려고 한다!

 

복음주의 신학이 19세기 미국에서 그 시작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여 그 뿌리를 추적하는 것은 반드시 쉬운 작업은 아니다. 하나의 운동으로서 복음주의는 다른 방식들로 다루어 질 수 있다. 그것이 19세기 독일 자유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반작용으로 된 것으로 또침례교와 감리교의 신학과 교회학의 지속적인 성장으로 된 것으로 세 번째 견해는 처음의 두 가능성을 결합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미국 복음주의 신학은 독일 자유주의에 대한 반작용이며 동시에 침례교와 감리교의 신학과 교회학의 지속적인 발전으로 보는 견해이다.

 

B.  미국에서 근본주의의 발생

 

19세기의 말과 20세기의 초에 일반적으로 근본주의라고 불리우는 하나의 운동이 미국에서 일어났다. 이 운동은 분명한 가르침을 거부하는 주류 교회와 교단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났다. 많은 주류 교단들 안에서 동정녀 탄생이 의문시 되었고, 성경의 권위가 공격을 받았고, 기적의 실재가 부인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다.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붙잡은 사람들과 이런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근본주의자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들이 이 이름을 갖게된 이유는 20세기 초에 출판된 근본주의라는 책자의 이름 때문이다.

 

근본주의자라는 이름이 붙은 첫 번째 사람은 위대한 구 프린스톤 신학자인 그레함 메이천(J. Gresham Machen)이다. 그러나 종종 문화적으로 보수적이며 어떤 변화들에 대하여 반대하는 근본주의자들과 메이천과 같은 위대한 지적인 학자들과의 연대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지식인들과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부흥가들을 포함하는 미국 근본주의의의 발생은 메이첸과 다른 사람들에 의해 대표되는 신학적 현실에 이미 흘러들어 갔다. 두 운동의 일시적인 연합으로부터 우리는 실수 없이 우리가 “현대 복음주의 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의 발전을 구별한다.

 

C.  현대 복음주의 신학의 발생

 

1920년대 미국과 캐나다에 있는 신학교 인준기관인 신학협의회(the Association of Theological Schools, ATS)는 대학원들이나 큰 주류의 재정으로 기본 자산을 가진 신학교들과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2차 세계 대전이후에 첫 번째로 인가를 받은 복음주의 신학교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풀러 신학교였다. 그러므로 하나의 운동으로서 현대 복음주의 신학은 아마도 2차 대전 이후의 현상이다.  

 

D.  현대 복음주의신학의 특징들

 

20세기 초 미국에서 복음주의 신학은 놀랍게도 초 교파적이었다. 그 당시 미국의 교파적인 혼합에서 복음주의는 연합 감리교회, 연합 장로교회, 복음 루터교회 그리고 남 침례교회에서  발견된다. 이런 교단들은 주류로 간주되는데 근본주의와 복음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포함하고 있었다. 가끔 복음주의 신학의 운동은 특별한 교단 보다는 초교파적인 기구들과 밀접하게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2가지의 실례가 풀로 신학교와 달라스 신학교의 기관들이다.  복음주의 신학의 다른 실례의 본거지는 IVF, CCC, 네비게이토 그리고 크리스차니티 투데이와 같은 파라처치(para-church) 기관들 이다.

        현대 복음주의 신학은 근본주의의 교리를 붙잡고 있다.  그 기초와 함께 현대 복음주의 신학은 침례교회에서 널리 붙잡고 있으며 감리교회에서는 초기에 그리고 웨슬리 전통에는  지금도 계속 붙잡고 있다. 대부분의 근본주의자들은 전 천년의 종말론을 붙잡는다. 장로교회에서는 구파 장로교회와는 대조적인 신파 장로교회와 밀접하게 동조하고 있다.

 

II. 개혁신학

 

A.  일반적으로 쉬운 정의

 

일반적으로 개혁신학은 복음주의 신학보다도 쉽게 정의를 할 수 있다. 그것은 16세기의 종교개혁과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대륙에서는 존 칼빈과 영국에서는 존 낙스의 이름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미국에서 개혁신학은 보통 특별한 교단들과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은 큰 대륙의 개혁 교단들(CRC, RCA)과 많은 장로교회들을 포함한다.

 

B.  특별하게 까다로운 정의

 

비록 개혁주의라는 칭호를 주장하는 미국의 교단들이 있지만, 개혁주의라고 불리우는 모든 신학이 참된 개혁주의가 될 수 없다! 나는 구 프린스톤 신학자인 B. B. 워필드의 개혁신학의 정의로서 개혁신학이란 “성경적 기독교가 본래의 특성을 발휘하는 것(come into its own)”이라는 그의 정의를 사용하기를 싶다. 그러나 이런 정의는 뜨겁게 논쟁거리가 된다. 그러므로 나는 이 강연의 목적을 위하여 개혁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성경무오에 보다도 현대적인 생각과 더불어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요리 문답들, 벨직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그 문답, 그리고 돌트신조)을 붙잡는 개인들과 교파를 말한다.

 

III.  개혁신학과 복음주의 신학 사이의 긴장

 

A. 운동에 있어서 유사성과 차이성

 

1. 신학적 유사성

개혁주의 고백서들은 복음주의의 중요한 신학적 핵심을 지지한다. 이 점에서 복음주의와 개혁주의 신학은 동의한다. 복음주의와 개혁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고백이 한 개인의 삶에 영향을 주어야 하는 것에 동의한다. 우리가 개인주의적 경건이라고 부른 것이 두 운동의 신학에서 중요하다.

 

2. 교회와 국가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유사성

일반적으로 두 운동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한다. 복음주의 신학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 대한 방어 거점이다. 개혁주의 전통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 관한 문제에 강하지 않으며, 교회는 법인자격으로 정치적인 분야에 참여하는 것에 삼가야 한다고 제안한 그래함 메천으로 부터 그 견해를 지지 받는다. 그가 확신하는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31/4 조항과 일치한다. 메이첸이 믿는 것은 개개인 기독교인들은 국가 법률을 준수하지만 정치에 개개인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행위에서와 정치에 참여하는 것과 공동체 교회 기구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 사이에 강한 구별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3. 경건과 개인주의에 있어서 차이점

그러나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은 근본주의적이며 복음주의적이지 않다. 개혁주의 신앙고백서 복음주의가 아닌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신앙고백서들이 신학과 삶 사이에 특별한 관계를 분명하게 진술하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경건에 대하여 제한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고 그것은 오르지 개인들에게만 관계한다. 재 세례파와는 대조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자의 왕권으로 정치적, 문화적 그리고 교육적인 것을 포함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B. 각각의 운동은 다른 운동에 반대는 두려움

 

1. 사회복음에 대한 복음주의의 두려움

근본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사회복음에 대하여 연합하였다. 1917년 자유주의 신학자 월터 라우센부쉬(Walter Rauschenbuch)가 “사회복음을 위한 신학”(A Theology for the Social Gospel)을 출판하였다. 라우센우쉬 자신은 그 운동의 비판에서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보다도 보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복음주의 운동을 분류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의 실재와 노동의 복지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노력하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 나라는 사람들을 적절하게 사회화하기를 필요로 한다. 악한 사회구조들이 죄악의 상황을 지속하게 하기 때문에 그것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과 같은 건전한 신학을 잘라 줄이는 것으로 본다.

 

2. 금주에 대한 복음주의의 두려움

 복음주의 신학은 음료로서 술의 사용을 반대하는데 연합하였다. 심지어 복음주의자 시카고의 무디(Dwight Moody)도 금주운동을 주장하는데 동의하였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 문제에 대하여 복음주의 신학을 반드시 지지하지는 않았다. 금주운동은 14개 주가 술 소비를 금지하던 바로 그때 미국 시민전쟁에 시작하여 미국헌법 수정 제 18조 (금주법)가 비준되던 해인 1919년 최고점에 이르렀다. 이 수정은 취하게 하는 액체의 공장, 판매, 수송을 금하였다. 이것은 교회와 국가 관계에서 긴장이 있었던 한번의 시기였다.

 

금주에 대한 문제는 장로교회 안에서 대단히 많이 강조를 하였다. 예를 들면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 제 3차와 4차 총회에서 7명의 다른 장로들이 교회로 하여금 모든 목사들과 장로들이 절대 금주을 위하여 싸울 것을 촉구하는 건의들이 있었다. 제 4차 OPC 총회에서 그들은 당시에 조처를 취하지 않기 결정을 하였다. 이 문제는 또 그 다음 5년은 바로 그 교단에서 표면화되지는 않았다. 정통 장로교회가 주류에 대하여 다루는 문제는 복잡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총회는 위원을 선출하여 OPC 와 사회에 대한 관계를 일반적으로 그리고 다른 교회 기관들과는 특별하게 연구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다음 총회에서 우리 교회의 메시지와 방법이 이 세대의 필요를 채우고 OPC가 영향력을 증가시키고 오늘날 우리의 삶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추천할 만한 방법과 수단을 가져오도록 했다. 많은 노력과 모임을 가진 후에 위원회에서는 다수파의 보고서와 소수파의 보고서를 제출하였지만 위원회에서 계속하지 않도록 결론을 내렸다. 그 문제에 대한 어떤 공식적인 답변도 결코 없었다.

 

3. 개인과 사회에 대한 개혁주의의 두려움

비록 메이첸은 자신이 근본주의자임을 선언했지만, 심지어 출판에서, 그는 말하기를 근본주의자란 전 천년주의자들 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현대주의에 대항하여 초자연적 기독교를 분명하고도 논쟁적으로 믿는 자들이다라고 한다. 사회복음에 대한 복음주의의 두려움을 알고 있는 메이첸은 사회복음주의를 공격하였다. 비록 메이첸은 사회복음이란 문구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역사적 기독교란 그것이 사회적이기 보다는 개인적이기 때문에 모든 사회적 발전에 적대적인(inimical)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구 복음주의는 개인을 얻기를 추구하는 것으로 말해진다.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좋은 복음주의는 개인을 구원하고 세상을 운명에 맡기는 대신에 삶의 물리적 조건을 향상시키고, 여기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로 불리우는 것을 세우기 위하여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메이첸은 확신하기를 사회에 반대하는 개인의 구도는 이분법의 잘못된 전형이라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이다. 한 인간이 세상으로부터 영적으로 구원을 받았을 때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는 세상을 도피해서 신비한 묵상의 장소로 가서는 안되며, 오히려 정의를 위한 전투를 위해 다시 세상으로 보내져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다시 한번 그가 우리에게 상기 시키는 것은 기독교 그 자체는 개개인의 영혼에 우선권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는 근본주의 혹은 그가 부르는 역사적 기독교는 실제적이기 보다는 교리적이다 라는 보는 견해에 반대하면서 결론을 내린다. 그가 먼저 말하는 것은 반대 그 자체는 마음이 좁은 것을 상징하지만 교회는 믿음의 기초를 분석하는 것과 인간으로서 물리적인 고통을 완화시키는 것 사이의 이분법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고 한다. 사실상 교회는 두 개를 모두 해야 한다. 그중 하나를 무시하는 것은 분명히 재앙을 불러올 것이다. 후에 그는 말하기를 “만일 우리의 믿음의 지적인 방어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소홀하게 한다면, 우리는 스스로가 큰 죄를 범하는 것이다” 라고 한다. 그는 종교개혁 시대의 부흥처럼 기독교의 부흥을 고대한다. 그리고 그 시대가 올 때 훌륭하고, 이타적이며 고귀한 것을 파괴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촉진할 것이며, 보이는 것들을 구원하는데 방해를 하지 못하며 인간을 압박하지 못하게 하며 이 세상에서 조건들을 증진 시킬 것이다.

 

4. 분리에 대한 개혁주의의 두려움

1959년 헐버트 알리버(C. Herbert Oliver) 장로교회의 흑인 목사는 인종관계와 인종 차별에 대항하여 “육신은 결코 영광을 돌리지 못한다”(No Flesh shall Glory)라는 책을 썼다. 그는 그 책의 한 곳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종차별은 기본적으로 비인간적이며 비자연적인 것처럼 절대적 인종 차별의 철저한 제도는 인종 차별된 구룹을 다루는데 있어서 모든 도덕과 예의를 대담하게 버린다. 기독교 가르침에 의하여 영향을 받은 양심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지는 이해하기 힘들다. 인종 차별화된 집단의 지적이며 교육적인 표준을 개선하기를 원하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은 고통스런 딜레마에 직면하는데 교육과 인종차별은 섞여질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상호 배타적이다. 계몽주의가 번성하는 곳에서 인종차별은 있을 수 없다. 인종차별이 거의 완성된 곳에서는 지적인 성장이 효과적으로 억눌려  있다.

대부분의 미국 복음주의는 남부에 위치하기 때문에 인종차별은 복음주의 안에서 특별한 문제로서 인식되었다.

 

C.  낙태논쟁에 대한 복음주의와 개혁신학의 연대

 

미국 대법원이 1973년에 로(Row)와 와드(Wade)의 싸움에 대한 판정이 있기 전에 앞서, 보수적 장로교회의 지각 있는 지도자들은 낙태가 중요한 사회적 문제임을 알고 있었다. 1968년 OPC는 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문제를 조사하고 정책 방침서를 만들기로 하였다. 이 방침서에서 OPC는 낙태가 합법적으로 되기 전에 강한 반대를 보였다. 이 보고서의 시작의 문단은 실로 예언적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낙태가 살인이라면,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낙태 자유화로의 현재 걸음은 히틀러, 스탈린 그리고 헤롯 대제의 잔인성 보다도 더 나쁘며 보호받지 못한 인간들을 살인으로 인도할 수 있다.“

 

적절한 성경 본문들을 신학적으로 분석한 후에, 위원회는 그들의 분석에 대한 3가지 조치를 추천하였다. 그들이 제안한 것은 총회가 낙태 반대 결의를 받아들이고 그 문제에 대한 더 많은 연구가 회중들과 당회와 장로들에 의하여 있도록 하게 하며, 그런 질문들을  관련된 성경적 원리에 의하여 가르쳐주며, 현재 다루고 있는 법안과 관련하여 또 그들의 공동체에 적절한 상황과 관련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도록 제안을 하였다. 일년 후에 대법원은 미국에 전역에서 낙태를 찬성하는 것으로 판결했다.

 

다시 한번 사회적 문제에 대하여 교회가 교회적 선언을 만드는 문제에 대하여 보수적 장로교회에서 긴장이 있었다. 낙태 보고에 대한 소수파의 보고가 있었다. “소수파 보고서의 저자에게 나타난 것은 교회가 1937년 거절하기로 한 것을 해야하는 직전에 있고, 성경목록(scriptural catalog)에 부가적인 의미를 첨부해야할 직전에 있는 것이다. 후에 소수파 보고서는 진술하기를: 국가법률에 의해 종교적 원리를 강요하는 것에 대항하여 용기를 가지고 이것을 동반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운명을 이 길에 두는 것은 종교적 자유를 거부 당하며 사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견되는데 그것은 매우 위험한 진로이다. 역사의 연구가 많은 증거를 제공한다.” 

 

D. 결론: 미국 개혁신학은 지금도 문제들에 대답할 필요가 있다.

 

이 보고서는 거의 우리를 한 바뀌 돈다. 메이첸의 죽음 이후 보수적 장로교회는 절대금주 문제에 씨름하였고 그 주제에 열띤 토론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찬성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회원들에게 비 성경적인 요구로 간주되는 것을 강요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비록 절주는 찬양 되었고, 술취함은 정죄 되었으며, 많은 목사와 장로들이 주류를 금하기로 선택하였지만, 그러나 교회는 그 절주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낙태에 대한 소수 보고서는 오직 교회가 1970년에 같은 패턴을 따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낙태에 대한 소수 보고서는 두 번째 원리를 질문하였다. 국가 법에 의해서 만들어진 종교적 원리를 강행하는 것을 교회가 권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이었다? 소수파 보고서는 그 길은 위험한 진로라고 말한다.

 

우리가 간단하게 관찰하는 것은 메이첸의 시대부터 1970 년대까지 교회가 사회 문제에 대한 세세한 역할에 관한 의견의 변동이다. 원리적 질문에 대한 답변이 줄어질 때까지 가능한 장로교회에서 사회적 활동은 표면상 지그자그의 경로로 계속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개혁주의 신학과 복음주의 신학의 관계성에 대한 질문에 답변을 준비한다.

 

IV. 개혁주의 신학의 부흥 없이 복음주의 신학의 몰락

 

A.  명제

 

 이 발표의 나머지 명제는 개혁주의 신학의 부흥 없이는 복음주의 신학도 몰락한다는 것이다. 미국 복음주의의 몰락을 예측하는 것은 처음에 거만하고 시기 상조처럼 들릴 수 있다. 이 명제가 성급한 것이 아닌 것을 보이기 위하여 또 그 명제를 확증하기 위하여 복음주의 신학에게 몇 개의 어려운 질문을 물을 필요가 있다.

 

B.  복음주의 신학이 어디로 향할 것인가?

 

복음주의 신학 안에 몇 개의 어지럽게 하는 최근의 경향들이 있다.

 

1. 성경의 포기

자기의식이 있는 복음주의는 고의로 성경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성경이 오늘날 크리스천이 직면한 도전들을 위하여 충분하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을 포기하였다.

 

 a. 기독교상담과 교육에서 포기한 구체적인 예

보이스는 말하기를 “그들은 성경이 크리스천이 성장을 이루는데 충분하고 생각하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세속적 치료법으로 돌아갔다.

b. 예배에서 포기한 구체적 예

많은 목사들은 그들의 예배에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기 위하여 성경 진리의 아주 예리한 요소들을 허물었다. 보이스는 다시 말하기를 그들은 오락을 전공하고 있다고 한다.

 

2. 이 세대의 방식에 따르는 미국 복음주의.

바울 로마서 12 장 2절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고 말한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는 것과 같은 개인의 윤리적 문제를 포함 할 수도 있지만, 하지만 그가 단지 개인적인 경건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실수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마음의 전적인 개혁을 옹호하고 있다.

 

a.  순응에 예로서 세속화

세속화는 복음주의 신학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어서 그것이 교회를 어떻게 건축하며, 실내장식은 어떻게 하며 심지어 설교를 어떻게 하는지 까지 명령한다.

 

b. 물질주의와 학문적 존경의 일어남

 

물질주의

미국 복음주의에서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은 고액의 사례비를 받고 비교적 힘있는 사람들이다. 이 논문의 목적은 사례를 잘 받는 목회자를 깎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어떤 목회자들도 그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장로교회의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은 보통 목사의 사례비의 6 내지 7배를 받는다.

 

학문성에 대한 존경의 일어남

확실히 누구나 복음주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학문적 능력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보는 것에 대하여 논의를 원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대가를 치러서 미국 복음주의는 학문적 존경을 얻으려고 하는가? 이 문제는 성경론과 관련된다; 상위의 학문적 학위를 얻기 위하여 무오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복음주의자를 표명하는 저명한 자들은 지금 성경의 축자적 영감에 반대하고 있다. 잘 알려진 교수이며 정통 장로교회 장로인 마크 놀(Mark Noll)은 그의 책 “복음주의 정신의 스캔들“(Scandal of the Evangelical Mind)에서 주장하기를 (구)프린스톤학자들이 가졌던 성경 무오성은 잘못 지도되었으며, 그것은 기독교에 본질이 무엇인지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하며,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키는 것은 우리가 구주를 깊이 믿는 것이라고 한다. 영국 복음주의 신학자 맥그래스(Alistair McGrath)도 그것과 비슷한 주장을 받아 드린다. 맥그래스는 특별히 찰스 핫지(Charles Hodge)를 비판하면서 말하기를 “성경의 권위에 대한 핫지의 분석은 궁극적으로, 계몽주의 주제를 반영하는 것에서 비롯된 언어 본질의 고백적이며 맹목적 이론(an acknowledge and implicit theory of the nature of language)에 근거했다”고 한다.

 

3. 미국 복음주의는 무 분별화 되고 있다.

무분별화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철저한 방법으로 삶을 보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나의 요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현재 미국 사회와 19세기의 사회를 비교해 본다면 큰 차이점을 주목할 것이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19세기 동안 미국 사회는 노예제도나 연방정부의 제한과 같은 복잡한 문제에 대하여 여론을 형성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글을 읽을 수 있도록 교육을 받은 것이다. 이 무 분별화은 전 미국의 문제였으며 단지 복음주의의 문제만이 아니었고, 그들이 미국 사회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그들 역시 모든 질병으로부터 고통을 당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보이스(Boice)는 말하기를 슬프게도 우리 문화에서 텔레비전의 지배는 교회와 설교에 큰 충격을 주었다. 예배는 즐기는 쪽으로 확산되고 설교자는 사람들이 좋은 시간을 갖도록 도와 줌으로써 사람들을 얻으려고 한다.

 

1923년 미국 장로교회(남장로교회)에서는 14,000 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소요리 문답을 암송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언 머레이(Ian Murray)가 말하기를 오늘날은 “신학도들 가운데서도 성경에 대하여 무식하다”고 한다. 20년 이상을 미국에서 가르친 우리들이 경험하는 바이다. 나는 한국에 있는 여러분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4. 미국 복음주의는 실용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복음주의 운동에서 사람의 마음을 끄는 미국의 방법은 미국 실용주의와 선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교회 성장이론가들이 세미나를 주도한다”라고 보이스(Boice)는 다음과 같이 한탄한다“ 그 세미나에서 설교자들은 일반사람들을 그들의 시장으로 생각하도록 그리고 복음을 매력적으로 패케지로 팔 필요가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사회적 관심을 끌 수 있는 유명한 이름의 사람들과 함께 협회들을 장려하는데 갈망하고 있다.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에 대하여 우리는 듣는 것은 “그가 설교한 멧세지를 유리하게 만드는 최고의 유명인사와 함께 친목을 시도했다”고 한다. 이런 실천은 재앙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더군다나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 로마 카톨릭자들, 그리고 유대인들과 협력하기로 그들이 결정하는데 있어서 실용주의적이었다.

 

5. 복음주의자들은 예전의 오류를 새로운 형태로 받아 드리고 있다.

18세기에 어떤 스콧트랜드 신학자가 가르친 것은 “사람이 자신(혹은 그녀)의 삶의 어떤 변화에 관계없이 사도신경에 증언한 것처럼 예수께서 실제로 죄 때문에 죽으셨다 라는 것에 설득된 사람들은 의롭게 된다”고 했다. 이 오래 전 신학적 오류를 달라스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어떤 사람들을 통하여 새로운 활력을 찾았다. 이런 잘못된 가르침은 잔 핫지스(Zane C. Hodges)가 쓴 글들에서 나타나는데 다른 복음주의자들에 의하여 올바르게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그들이(달라스에서 가르치는 Zane Hodges와 다른 사람들) 회개, 치리, 그리고 내면의 영적 변화의 증거를 주는 행동의 필요성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들이 이것을 믿음에다 행위를 부가하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어떤 개신교나 복음주의자나 개혁주의자들이 구원적으로 믿음에 행위를 연결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복음주의자들은 믿음의 본질이 죄로부터 회개를 요구하며 그리스도와 동행하기 위하여 새롭게 갈망하기를 요구한다.

 

6.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 합류하고 있다.

1994년 “복음주의자들과 로마카톨릭주의자들이 함께: 3천년에 있어서 기독교 선교”(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 The Christian mission in the third millennium) 라는 제목의 25 페이지 분량의 문서가 뉴욕에서 출판되었다. 25명의 복음주의적 루터란 지도자들과  카톨릭 지도자들이 그리고 패커(J. I. Packer)를 포함하여 거기에 서명하였다. 크리스차니티 투데이 (Christianity Today)도 ECT를 지지했다. 존 맥아더(John F. MacArthur)는 즉시 ECT를 거절했다. 그의 책 “무모한 믿음“(Reckless Faith)은   ECT에 반대하고 있다. 이안 머래이(Ian Murray)는 판단하기를 이제 ”복음주의자들 가운에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고 한다.  잘 알려진 신학자 웰즈(David Wells)가 개탄한다. ”한때 복음주의의 영혼에 물을 주었던 역사적 정통주의의 시내는 이제 문화적 무식 때문에 사람들이 세속적인 것을 세속적인 것으로 알지 못하고 세속인 것으로 파멸을 받았다고 한다. . . . 과거 수십 년 동안 현대문화와 쉽게 연합한 기독교 신앙은 어리석은 천국에서 살고 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것에 관하여 그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다

. . . 그것이 영혼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면 그 특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

 

C. 결론

 

오늘 여러분에게 발표한 나의 논문은 개혁주의 신학의 부흥 없다면 미국 복음주의 신학은 스스로 그것을 파괴할 것이며 혹은 아마도 이미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임무는 미국 복음주의 신학의 존속을 위하여 필요한 대답들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에게 배당된 주제가 아니다.

 

그러나 내가 확신하는 것은 모든 올바른 신학은 하나님에게 궁극적인 영광을 돌려야 한다. 미국 복음주의 신학이 하나님께 올바른 영광을 드리지 못하는 한 그것은 실패하게 될 운명에 놓일 것이다. 미국의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만 인간의 능력을 그 영광에 혼합하고 있으며 그것은 그 영예를 잃고 있다. 그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개혁신학에 합류하여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라고 선포한다면 아마도 그들의 계승은 개탄 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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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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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섭(가족관계연구소장: 전 침신대 교수; 사이비종교피해대책연맹 총재; Ph.D.)

▲ 정동섭 목사

 

1. 세대주의 신학이란 무엇인가?
세대주의 신학은 영국의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형제교회(Separatist Plymouth Brethren) 지도자 달비(John Nelson Darby: 1800-1882)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19세기 중반에 영국 성공회가 부패했다면서, 교파를 떠나 형제운동을 시작하며 세대주의를 체계화한 사람이다. Darby의 지도하에 형제교회는 급성장했는데, 세대주의는 영국과 미국의 근본주의에 유입되면서 가시적인 기성교회의 제도와 충돌하였다. 신학적으로, 교회적으로 편협한 노선을 주창하면서, 뉴톤(B.W. Newton)과 심한 논쟁 끝에 달비는 배타적 형제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영미에는 개방적인 형제교회Open Brethren도 있는데,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형제교회다).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시스템에 따라서 신학이 크게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루터와 칼빈이 가르친 개신교 ‘언약신학’에 기초한 ‘개혁주의 신학’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세대주의 신학’이다. 세대(dispensation)는 세계역사를 관통하는 여러 세대 속에 하나님의 프로그램이 전개되는 것을 가리킨다.

초기 선교사들은 대부분 세대주의 신학에 근거한 복음을 우리나라에 전파했다. 형제교회 창시자 달비와 성경주석자 스코필드는 역사를 일곱 세대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각 세대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구속적 계획을 마련하였다고 보았다. 세대주의에서는 성경 역사를 무죄(innocence)시대, 양심(conscience)시대, 인간통치(human government)시대, 약속(promise: Patriarchal Rule)시대, 율법(Law)시대, 은혜(grace)시대, 천년왕국(Kingdom: Millennium)시대 등 일곱 가지 시대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각 시대마다 하나님이 새로운 구원의 길을 제시해주셨다고 주장하였다.

세대주의 신학에 의하면, 각 시대마다 구원 얻는 방법이 다르다. 양심시대는 양심에 따라 살면 구원을 받고, 율법시대에는 율법을 따라 구원받는다는 식이다. 시대마다 다른 구원의 길을 주셨다는 교리였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면 구원받는다는 주장이 나왔다. 모세와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킬 것을 언약하였지만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실패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주장은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적대적인 관계로 만들어 버렸다. 따라서 지금 성도들은 은혜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에 십계명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유일한 법칙이 될 수 없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세대주의 종말론은 “더 이상 율법이 필요 없다”는 율법폐기론(antinominianism)으로 이어졌고, 기독교의 윤리성은 무너지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오대양 사건과 구원파라 할 수 있다. 이 신학에 영향을 받은 많은 정통교회도 은혜를 누린다면서 율법을 무시하는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기독교의 큰 문제 중에 하나는 바로 율법과 은혜를 원수처럼 생각한 것이다. 세대주의적 사고에 따라,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주었고, 우리는 율법과 관계가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은혜만이 우리가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율법폐기론이다. 세대주의 율법관과 종말론이 한국기독교를 망치고 있고, 많은 이단을 양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리교 사회학자 이원규 교수는 “한국교회는 교파분열이 심하고, 사이비 이단종파가 많으며, 품위 없는 성직자가 많다”고 지적하였다. 예수님은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하셨다. 물질주의로 나타나는 탐심과 성적 타락은 그 배후에 개혁주의 언약신학의 반대 입장에 서 있는 세대주의 신학이 한 몫을 하고 있다고 본다.

달비는 유럽과 뉴질랜드, 미국과 캐나다를 여행하면서 세대주의를 보급하였고 많은 사람을 형제교회(Brethrenism)로 회심시키려 시도하였다. 그의 세대주의 종말론은 1883~1897에 연례적으로 열렸던 Niagara Bible Conference를 통해 전파되었다. 많은 침례교인과 감리교인, 그리고 장로교인들이 그의 신학적 전제를 수용하였지만 기존교단에 대한 비판으로 교단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정통교단을 떠나지는 않았다.

1920년대 당시 자유주의가 성경적 가르침을 거부한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세대주의자들과 프린스톤 칼빈주의자와 같은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달비의 세대주의 신학을 수용하면서 그의 종말론은 미국 근본주의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C.I. Scofield Reference Bible은 50년 동안 3백만 부가 팔렸는데, 그 영향으로 Biola, Moody, Dallas, Grace와 같은 신학교가 세대주의 신학에 근거한 종말론을 가르쳤다.

달비는 개신교 교리의 핵심이 되는 두 가지를 부인하였다. ⑴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아서 의인이 된다는 ‘전가설’, 즉 이신칭의의 교리를 부인하였다. 죄인이 예수를 믿으면 ‘놀라운 교환’(wonderful exchange)이 일어나는데, 우리가 가진 죄를 예수님께 드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의를 주신다는 교리이다. 신학자들은 이 교환을 전가(imputation)라고 부른다. ⑵성도의 성화과정에 필요한 십계명의 규범적 기능을 부인하였다. 칼빈이 말한 ‘율법의 제3용도’를 부인하였다. 결국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세대주의 종말론과 근본주의신학을 바탕으로 사역하였다. 결국 십계명을 무시하는 도덕률폐기론, 즉 율법폐기론이 만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신학의 극단적 열매가 구원파의 회개무용론, 도덕률폐기론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한국의 개신교는 세대주의 신학의 지배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세대주의 영향으로 한국교회는 이스라엘과 교회, 그리고 율법과 복음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하였다. 점진적 계시와 관련하여, 한 세대는 하나님의 경륜 안의 한 단계다. 1960년대 초부터 세대주의적 성경해석으로 회개없는 잘못된 구원과 임박한 종말을 강조하며 나타난 이단은 다미선교회나 구원파만이 아니다. 기존교회 안에서도 특히 극단적 세대주의 신학(ultradispensationalism)에 따라 성경을 해석해 이스라엘이 독립하던 해 1948년으로부터 한 세대되는 1988년 전후에 예수가 재림하고 신자들은 휴거된다고 가르치던 대형교회 목사들이 있었다.

2. 세대주의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언약신학)은 어떻게 다른가?
세대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어떤 특별한 계시에 순종하는 것과 관련해 인간이 시험받는 기간”이다. 세대주의는 구약은 율법시대, 신약은 은혜시대로 구분하기를 좋아한다.

세대의 수: 바울은 적어도 세 개의 세대를 언급한다. 현재 이전의 세대(골 1:25-26), 현 세대(엡 3:2), 그리고 장래 세대(엡 1:10). 이 세 세대는 네 번째 세대를 요구하는데, 율법 이전 세대다. 그리고 율법 이전 세대는 다시 두 개로 분류되는데, 타락 이전과 타락 이후로 구분된다. 성경의 전천년설적 이해의 관점에서는 적어도 다섯 세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7세대는 노아홍수 이후의 한 세대와 아브라함의 부름을 계기로 한 또 한 세대를 상정하고 있다.

세대주의신학은 문자적 해석원리를 따른다. 이 해석원리를 적용하다보면,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구분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구약시대에 시작된 것이 아니고 오순절 날 시작된 것으로 본다.

유병언, 이요한, 박옥수 등도 구원받은 사람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되었다는 말의 의미를 오해하여 가르쳤다. 그러나 성도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말은 율법의 정죄와 저주에서 해방된 것이지 율법의 도덕적 교훈, 즉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이 세대주의 신학의 맹점이다. 예수님은 간음 중에 잡혀 온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외면하고 은혜만을 강조하다 보니, 유병언과 구원파 교인들의 삶에서 보듯이, 양심의 가책이 없이 도적질하고, 간음하고, 거짓말하고, 남의 것을 속여서 빼앗고 탐내고 살인을 저지르는 결과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새대주의의 우산 아래서 수 많은 이단이 독버섯처럼 생겨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개혁주의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세대주의를 이단이라 할 수는 없지만 유사기독교의 나쁜 신학이 틀림없다.

언약신학: 하나님은 행위언약에 실패한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은혜언약(covenant of grace)을 준비해 주셨다. 은혜언약의 핵심내용은 누구든지 자기의 노력이나, 자기의 선이나, 자기의 의를 의지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죄사함을 얻고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어 영생을 소유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은혜언약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영생과 부활의 축복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언약을 맺고 노아와 언약을 맺고 최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언약을 맺으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고, 이삭, 야곱과 모세, 다윗과 언약을 맺고 점진적으로 그 뜻을 계시하셨는데, 모든 언약에 보면, ‘아브라함의 후손,’ ‘이삭의 후손’, ‘야곱의 후손’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단수 ‘자손’(seed)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단수로 적혀 있는 ‘자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결국 이 모든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천하 만민이 영생의 복을 얻게 되리라는 은혜언약에 대한 점진적 계시이다.

구약시대에는 그림자와 예표를 통해 구원을 받았지만, 신약시대에는 실체를 보고 믿고 구원받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약시대에는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이 그림자였고 예표였지만, 새언약은 실체이신 그리스도의 현현으로 죄사함과 영생을 주신다는, 그림자를 폐한 언약이다(피영민, 2015). 그리스도의 법과 모세의 법은 다른 법이 아니다. 신약과 구약에는 연속성이 있다. 각 법은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다; 그리고 두 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종용하는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의 법은 모세의 법을 더 심화시켰을 뿐이다.

개혁신학(Reformed Tradition)은 멜랑히톤, 루터, 칼빈과 쯔빙글리의 신학적 전통을 따르는 것으로, 모세의 법에는 도덕적이고, 의식적이며, 시민적 측면이 있는데, 도덕법에는 ①시민적, ②영적, ③규범적 3가지 용도가 있는 것으로 본다. 언약신학은 타락 이후 하나님은 하나의 은혜 언약 아래 역사하신 것으로 본다. 통일된 특징은 은혜의 언약이며 그 언약 아래 있는 구원적 계획이 있다. 구약에서는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는 것으로 구약의 언약은 기대적 성격이 있고, 신약에서는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성취된 구원으로 그 언약의 성격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세대주의 신학은 율법과 복음을 대립적으로 이해했다. 율법의 세 가지 용도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면서 이단집단과의 논쟁을 하면서 정리된 것이다. 교회역사를 보면, ‘율법’(말씀)과 ‘성령’, 그리고 ‘나’ 사이에 세 가지 역학적 관계를 찾아볼 수 있다.

⑴말씀을 무시하고 성령의 역사만 강조하는 경우; ⑵말씀은 강조하는데 성령의 역사를 무시되는 경우; 그리고 ⑶말씀과 성령이 조화를 이루는 경우이다. 첫째는 율법을 배격하고 성령의 직통계시만을 강조하는 율법폐기론자의 경우로 율법을 폐하고 마음대로 살려던 이원론에 빠진 영지주의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지금 한국에는 성령 사역의 이름으로 다락방 운동(가계저주론, 조상 죄), 신사도운동(제3의 물결과 같은 현상적인 집회), 알파코스와 은사남용, G-12와 견고한 진, 쓴 뿌리, Soul Tie, 귀신론에 기초한 내적치유 운동이 행해지고 있으나 계명과 율법을 지키는 것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다. 

둘째는 말씀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우로서 율법주의 오류에 빠진 이들이다. 율법주의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려는 사고방식을 의미한다. 이런 율법주의자의 문제점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선을 행한 다음 자기 의(義) 사상에 빠지는 데 있다. 성령의 도움 없이 율법을 지키려는 왜곡된 보수주의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말씀을 따라 생활하려는 노력이 강조되는 것에 비해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는 배제되는 성향이 있다. 세 번째는 받은 바 이신득의의 은혜에 감사해서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에 따라 생활하는 복음주의자들이 있다.

약 130년에 이른 한국교회사 속에서 대부분의 교역자들과 부흥사들은 세대주의 신학에 근거하여 종말론을 가르쳤는데, 매우 극적인 내용들 때문에 듣는 자들은 쉽게 거기에 빠져들어갔다. 예수의 재림을 왜곡되게 가르치는 이단집단들이 세대주의 종말론에 뼈대를 둔 것은 그 매혹적인 극적인 정황 설명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세대주의 사상은 한국교인들의 심성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권호덕). 세대주의 사상에서 탈피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무천년 왕국설이 본격적으로 우라나라에 소개되면서부터이다.

3. 율법이란 무엇인가?
존 파인버그(John Feinberg)에 의하면, 율법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주신 “삶의 규칙(rule of life),” 순종하고 지켜야 하는 계명들(commandments)이다. 율법은 넒은 의미로 성경전체, 중간적 의미로 모세 오경, 좁은 의미로 십계명을 가리킨다. 가장 좁은 의미에서 율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인 십계명이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계명은 두 돌비에 새겨졌다. 첫 번째 돌비에는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 나와 있고, 두 번째 돌비에는 제5계명에서 제10계명까지 나와 있다. 전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대신(對神)관계가 기록돼 있고, 두 번째 돌비에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 대인(對人)관계가 기록되어 있다.
율법의 기원은 출애굽 사건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은 억압받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참된 관계를 누릴 수 있는 지침서, 즉 율법을 주셨다.

하나님은 그의 언약백성에게 영속적 관계를 위해서 항상 율법을 주신다. 율법에는 제사법적(ceremonial) 차원과 시민법적(civil) 차원, 그리고 도덕법적(moral) 차원이 있다. 세 차원은 유기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레위기는 주로 제사법(번제, 소제, 화목제, 속건제, 속죄제)을 다루고, 신명기는 도덕법을 기록하고 있다. 의식적인 제사법은 금식과 침례(세례), 할례, 유월절, 정결법, 십일조 등과 관계되는 것이고, 시민법은 소송문제, 안식일, 결혼, 노동과 같은 신자들의 국가에 대한 책임을 다룬다. 도덕법은 안식일을 제외한 십계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것으로 거룩하고 선하며 의로운 것이다.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도덕법은 구약시대에나 신약시대나 언제든지 타당하게 적용되는 영구불변의 항존법(standing law)이다. 제사의식법은 신약시대에 적용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번에 영원한 희생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신약시대라 해서 십계명이 폐해진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세대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신약에 와서 도덕법은 더욱 굳게 세워지고 있다(마 5:19; 롬 3:31). 신약에서 율법은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으로 흡수, 통합되었다. 모든 율법은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을 한 데 묶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순종하고 지키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구원파는 성경과는 너무 거리가 먼, 매우 위험한 율법이해를 하고 있다. 율법을 너무나 좁게 이해하고 있다. 율법을 설명할 때, 성령과 인간 사이의 역학적 관계 속에서 이해하지 않고 존재론적으로 설명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성화를 위해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 29:18). 율법은 어떤 기능을 하며, 어떤 가치가 있는가? 율법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까다로운 조건이 아니다. 율법은 우리를 살리고, 교육시키며, 마음을 정화시키고, 백성들을 하나로 묶으며, 사회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피영민, 2008).

개혁주의 신학 전통에 따르면, 비신자는 율법을 순종하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실패한 것으로 인해 저주 아래 있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은혜에 의한 구원에 감사드릴 길을 마련해주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보여줄 기본적인 방법을 제공한다. 성령은 또한 율법을 통해 죄를 책망하시며 회개케 하신다. 모세의 율법의 규범적이고 일차적인 용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다. 거룩한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모든 법의 근간이 된다.

출애굽기에서는 십계명을 계속 ‘증거판’(Testimony)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계시하신 것이라는 의미이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대한 계시다. 따라서 이 뜻에 순종하면 축복을 받고 거역하면 진노하신다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드러난 것이다. 다음의 ‘율법의 3가지 용도’는 멜랑히톤, 루터와 칼빈 같은 종교개혁가들의 이신칭의(이신득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율법의 3가지 용도: 하나님은 어떤 목적으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는가? 첫째로 율법의 용도 가운데는 악을 제어하는 시민적 용도(civil function)가 있는데 죄인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 있다.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 율법은 자기를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십계명의 10가지 계명 중 8가지가 “하지 말라”는 부정적 명령의 형태를 갖고 있다. 그래서 칼빈은 “십계명은 말을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재갈과 같다”고 했다.

인간이 하나님과 같지 않다는 것과 인간이 선하지 않다는 것, 인간은 저주와 정죄를 받기에 마땅하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하는 데 율법의 목적이 있다. 우리는 율법에서 저주와 정죄 소리만 듣는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롬 3:20).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 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인간은 구원파에서는 율법의 죄를 인식하고 깨닫게 하는 기능만을 주로 강조하고 있다.

둘째는 신학적, 영적 용도(spiritual function)로서 우리의 죄와 비참함을 인식하도록 가르치는 용도로서, 율법은 죄를 책망하고 예수를 찾도록 하는 몽학(蒙學)선생의 기능을 한다. 율법은 절망에 빠진 죄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도록 만들기 위해 주어졌다는 것이다. 율법은 인간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엄격한 교사(몽학선생)인 것이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24).

셋째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하는 세 번째 규범적 용도(normative function)가 있는데, 누구든지 중생하면 율법을 지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을 수 있도록 기능한다는 것이다. 율법은 중생인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 죄인은 회개한 후에도 여전히 죄인이고 또 죄인으로 남는다. 율법은 칭의함을 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토록 하기 위해 주신 것이다. 율법의 제3용도는 중생자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하는 것이다. 중생한 후에도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만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도움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다. 이 성령은 성화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특별히 십계명을 판단의 잣대로 이용한다.

성경은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고 신령하다(롬 7:12, 14)고 말하고, 율법을 ”하나님의 법“(롬 7:22, 25)이라고 부르고 있다.

4. 성도의 행복을 위해 주신 율법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언하고 있다: “내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율법은 원래 구원받은 선민을 괴롭히고 억압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다. 명령과 규례를 지키면 우리는 행복해진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하고 있다. 하나님을 참으로 인격적으로 경험하게 되면, 율법폐기론이나 불순종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고, 은혜와 사랑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삶이 따르게 되어 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서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2:3).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히브리서 저자는 구원받은 성도는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히 12:1-3).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죄와 악이다. 이 세상에 있는 악의 세력의 근원은 마귀이고 내 안에 있는 악은 바로 죄성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세력, 즉 밖에서 성도를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사단의 세력과 안에서 거룩과 경건을 방해하고 성령의 소욕을 방해하는 죄성, 이 두 가지 세력과 싸우는 가운데 성화를 이뤄야 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그들의 사랑을 표현하고 그들의 하나님과의 관계와 서로의 관계를 관장하는 수단으로 삼으라고 주신 것이다. 율법은 구원의 방법이 아니고 언약적 관계 안에서 질서 있는 삶과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율법을 지키고 순종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그런데 이단 구원파는 율법과 종교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기존교회에서 하는 것은 종교요, 자기들이 전하는 것은 복음이라고 주장한다. 일단 구원을 받으면 율법과 종교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한국의 모든 정통교단은 구원파를 율법폐기론자(도덕률폐기론자들)로 규정한 것이다. 우리는 율법의 형벌과 저주로부터 해방된 것이지, 그 교훈과 도덕률로부터 해방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시지 않았다. 바울은 사랑으로 율법의 구체적 계명을 준수할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약속 있는 첫 계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엡 6:2).

권신찬은 로마서 7장의 남편과 아내로 비유된 율법과 성도의 관계에 대하여 설교하면서, “이제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으니”의 내용을 들어, 구원받은 성도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주일성수, 십일조, 금식, 새벽기도, 기도생활까지도 율법이라고 하여 이러한 규범에 매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자신이 과거에 장로교 목사로서 이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으려 노력했던 것이 소용이 없었음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그는 이제 자기를 괴롭혔던 무서운 폭군인 율법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게 되었다면서 은혜를 누리면서 자유롭게 살자는 무서운 자기복음을 만들었다(종교에서의 해방, p.43).

구원받은 후에는 율법이 필요 없게 되었다고 하니 구원받은 후에 짓는 죄는 무엇으로 죄인지 알 수 있겠는가? 알 필요도 없는가. 아니면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고 할 것인가? 도둑질, 간음, 부모거역, 탐심, 살인 등의 죄를 무엇으로 어떻게 알겠는가, 그리고 구태여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할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성경에서 율법이 폐해졌다고 말씀할 때는 그 율법이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해당하는 경우에 한해서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모든 율법과 법도 즉 모세의 율법은 십자가로 폐한 것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 할례나 제사제도나 절기 등의 제사법이나 시민법에 관련된 율법이 폐해졌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그러한 규례를 따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신자는 율법에서 자유하다.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못함으로 인해서 정죄 아래 있지 않다는 뜻이다. 바울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임을 상기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선언하고 있다(갈 3:11-13).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신자는 율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신자는 자신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데 깊은 관심을 가져야 마땅하다. 예를 들어, 시내산 율법을 주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 20:2)고 소개하신 후에, 즉 죄의 굴레에서 속량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자 이제 너에게 보여준 자비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시편 1편은 복있는 사람은 “주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말하고, 시편 19편에서는 율법의 완전함을 노래하며, 119편에 와서는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35절)고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율법의 정죄와 형벌과 저주에서 구원한 것이지 율법의 교훈과 윤리적 규범에서마저 해방시킨 것이 아니다. 모세 율법의 일부분인 도덕적인 윤리규범은 신약에 와서 다시 강조된다. 도덕적 율법은 폐한 것이 아니라 새 계명으로 주신 것이다. 사도 요한은 구원받은 성도가 율법(계명)을 지킬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고 말씀하신 후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2절)고 가르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2-3). 사단은 인생의 목적이 죄를 안 지으려 피 흘려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일 인생의 목적이 죄를 안 지으려 피 흘려 노력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지 않고 율법을 강화시켰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은혜를 경험해서 죄를 안 짓게 되길 원하신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원치 않는 것은 하고 싶지 않은 게 정상이다. 친밀하게 사랑하는 관계가 이루어지면, 율법과 죄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행하는 것과 율법을 지키는 것은 같은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로 생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다(윤동일, 2008).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시기 전에는 자기 자신을 의롭게 하려는 노력이 율법의 반역을 초래하였고 죄의 노예가 되게 할 뿐이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율법에 순종하여 의를 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성경은 율법이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고 선언한다(롬 7:12). 바울은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이 선한 것인 줄 안다고 말했다(딤전 1:8).

5. 율법과 은혜의 관계
그리스도인은 구원받기 위해 율법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에 율법을 행하는 것이다. 율법의 핵심은 십계명이다. 십계명을 주신 시기는 출애굽 후, 즉 구원받은 후이다. 율법은 구원받은 백성의 삶의 지침서이다. 은혜가 감사해서 주를 위해 율법을 지키며 생활하는 것이다. 최고의 경건은 계명 준수를 즐기는 삶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순종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불순종으로부터의 자유다.” 율법을 무시하고 준수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유도하는 종교는 하등종교, 사이비종교가 분명하다.

율법과 은혜. “한국기독교의 큰 문제 중 하나는 바로 율법과 은혜를 원수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주었고, 우리는 율법과 관계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은혜만이 우리가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율법폐기론’이다. 세대주의 종말론이 한국기독교를 망쳐놓은 원인 중 하나다...하나님의 십계명이 한국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고 그 영향력은 미미하다. 한국의 기독교는 은혜만 강조했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율법폐기론에 빠졌기 때문이다. 모세 언약의 모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된다는 은혜 언약으로 가는 예표요, 단계다”(피영민, 2007).

성경에는 아브라함 언약, 모세언약, 다윗언약, 등 많은 언약이 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다. 그것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 언약이 여러 가지 언약들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에베소서 2장 13절에는 “약속의 언약들”(Covenants of the Promise)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약속은 단수로 되어 있고 언약은 복수로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 한 가지를 이루는 여러 가지 언약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모세의 가르침(언약)이나 나의 가르침은 동일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내가 준 언약과 모세언약은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율법과 은혜를 대립적으로 볼 수 없다는 확실한 근거가 된다.

율법은 하나님이 택하여 구원하신 백성들에게 삶의 원리가 된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땅히 따라가야 할 삶의 원리이며 규칙이다. 십계명을 요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모세언약은 구원받은 백성이 어떻게 사는 것이 마땅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삶의 원리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마음에 두고 십계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키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명을 우리 수준으로 끌어내릴 수는 없다. 항상 거룩하고 완전한 계명을 늘 기준으로 삼아 우리 자신을 비추어보고, 죄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또 죄가 있으면 회개하고 자복함으로써 죄씻음을 받고 구원을 이루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은혜가 공짜라고? 은혜란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는 호의이다. 우리는 흔히 은혜는 공짜로 아무 조건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에 조건 없는 은혜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호의는 철저한 청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씨뿌림은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열매를 목적으로 하는 투자다(마 13:1-7). 베풀어진 은혜에 대한 합당하 반응과 철저한 청산이 강조된다. 은혜는 자격이라곤 전혀 없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호의적인 투자다.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이 있다”는 우리 속담은 성경의 은혜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관계중심적인 체면사회에서 반대급부를 요구하지 않는, 거저 주어지는 공짜 선물이란 개념의 은혜는 없다. 선물은 자발적인 순환을 요구한다. 선물(은혜)을 받은 사람은 자발적인 고마움과 부채의식을 갖게 된다. 은혜의 조건은 먼저 우리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고(엡 2:9), 다음 조건은 선한 일을 행하게 하려는 것이다(10절). 신약성경은 구원이 은혜의 선물이니까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는 충성스런 삶을 요구한다. 은혜는 하나님의 투자이기 때문에 배은망덕한 자는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다(이민규, 2014).

갈라디아서는 신실함과 순종의 삶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한다(갈 5:16). 성령을 따라 살지 않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다(갈 5:21).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24).

은혜로 구원받은 신자도 이후 지속적으로 죄와 싸우며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구원받은 신자의 특징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고,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죄를 싫어하게 되고, 죄에 대해서 저항하게 되는 새로운 성향을 보이는 것이다. 구원받은 신자에게서는 죄와 투쟁하는 거룩한 삶의 새 질서가 시작된다. 존 웨슬리가 가르친 것처럼 ‘완전성화’란 신자의 삶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동안 그 어떤 위대한 그리스도인도 완전하게 자신의 죄를 정복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전처럼 죄를 즐거워하거나, 무방비 상태로 죄에 끌려가거나, 편안한 마음으로 죄를 즐기고 사랑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시면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요 16:8).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로 알려져 있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처럼 크게 오해되고 있는 말씀도 드물다. 이 말씀을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율법과 상관이 없다거나 율법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고, 읽을 필요도, 더 이상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고 이해하는 이들이 있다. 이것은 심각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말은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도덕적인 율법과 그 도덕적 요구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가장 위험한 도덕률폐기론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율법에 작별인사를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더 이상 구원의 수단으로 율법 아래 있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을 지키고 존귀히 여겨야 할 것이며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이를 행해야 한다“(로마서 7장 강해, p.27).

회개와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진정으로 구원받은 신자는 그 결과로 삶 가운데 선한 행위를 보이게 되어 있다. 우리의 선행은 우리를 의롭게 해주지 못한다. 우리의 선행은 어디까지나 이미 우리를 새롭게 해주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행위다. 선한 일에는 거창한 일만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 삶의 모든 영역 중 만물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가 ‘내 것!’이라고 선포하시지 않은 영역은 단 하나도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세속적인 일’과 ‘신성한 일’(거룩한 일)이 따로 있지 않다. 마틴 루터도, 교회에서 하는 일만이 아니라 설거지와 빨래하기, 낙엽치우기, 기저귀 갈기도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5.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들: 예수님의 재림과 세대주의 종말론
사도 요한이 본 천년왕국 비전에 대한 정확한 해석문제는(계 20:1-10) 2세기 이래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많은 흥분과 논란을 일으켜왔다. 그 과정에서 세 가지 기본적 입장이 확고해졌다. 그 세 가지 입장은 각각 재림이후에 천년왕국이 온다는 ‘전천년설(premillennialism),’ 천년왕국 후에 재림이 있다는 ‘후천년설,’(postmillennianism) 그리고 재림 이전이나 이후나 천년왕국이 없다는 ‘무천년설’(amillennialism)이다.

각 견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에 대하여 나름의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전천년설이 대세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지만, 현재는 천년왕국의 천년을 교회역사에 대한 상징으로 보는 무천년설을 추종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천 년을 지금 천국에서 이뤄지는 죽은 성도들의 통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에 전쟁과 기근, 지진과 같은 징조가 있고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증거되며, 배도와 함께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있고 7년 대환란이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대환란과 천년왕국을 교회가 아니라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되는 장으로서 본다. 교회시대의 정점은 휴거이며, 이때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신실한 제자들은 ‘공중에서’ 만나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여실 것이다. 이렇게 참된 교회가 지상에서 사라지면, 적그리스도가 7년 동안 악마적 통치를 시작하며, 이때 하나님의 진노가 땅위에 쏟아진다. 이러한 대환란 기간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것이며, 이 와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천국의 군대와 함께 재림하셔서 주님의 원수를 모두 처부순다. 그 때 이스라엘은 비로소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할 것이며, 지상에 천년왕국이 세워질 것이다.

세대주의 종말론은 기독인들로 하여금 미래의 어떤 시점(예수의 재림시점)에만 집착하도록 만듦으로서 현실의 삶을 등한시하도록 만들었다. 1992년 10. 28. 휴거설을 주창했던 다미선교회나 현재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은혜로교회는 소속교인들이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현실을 무시한 채, 강제적으로 또는 인위적으로 회개하게 만들었다.

연대기적 해석을 하게 된 세대주의는 이스라엘과 교회를 분리시키고, 율법과 은혜를 대립적 개념으로 분리시켰다. 율법은 모세와 행위와 연관된 반면, 은혜는 그리스도와 믿음에 연관되어 이해되고 있다. 이들은 “율법은 결코 구원이나 칭의의 수단으로 주어지지 않았다”고 말하는가 하면, 스코필드(Scofield)에 의하면, “율법은 죄인을 칭의하지도 않고 신자를 성화시키지도 않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세대주의 성향은 영적인 것과 실제적인 삶을 분리시킨다. 이런 이원론적 사고방식은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을 등한시하고 확실하지도 않은 환상적인 이상에 몰두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미래의 어떤 유토피아나 지상천국을 약속한 이단종파에 미혹되어 현실의 삶을 망친 경우를 많이 목격하고 있다.

무천년설에서는 천 년을 문자 그대로 볼 수 없고 완전수인 10을 세 번 곱한 충만 수로 봐야 한다는 확고한 입장이다. 무천년주의자들은 천년왕국의 천 년을 교회역사에 대한 상징으로 본다. 천 년이란 교회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승리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칼빈과 어거스틴도 이 입장을 취했다. 천년이라는 숫자는 상징적인 숫자로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을 한 사람도 남김 없이 모두 구원하시는 충만한 기간을 천 년으로 보는 것이다. 천 년은 단지 택한 백성을 전부 구원할만한 충분한 기간이다.

20세기 한국의 많은 부흥사들이 전했던 세대주의전천년설은 성경을 벗어난 매우 불건전한 해석이다(피영민). 종말론과 관련된 이단들은 대부분 이 세대주의전천년설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공통적으로 7년 대환난, 휴거, 천년왕국, 144000, 666이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종말에 대해 강박적 관심을 갖고 있는 구원파와 같은 집단의 행태를 지적하면서 균형 있는 신앙생활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예언적 교훈에 대한 지나친 관심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현재의 세계정세에 있어서는 특히 그렇다. 어떤 사람들은 차츰 이 주제에 마음을 빼앗겨 정복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예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설교도 하지 않는다. 이 예언적 교훈에 대한 지나친 몰두 이상으로 영혼의 건강에 위험한 것은 없다. 러시아, 이집트, 이스라엘 및 그 밖의 나라들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에스겔서 37,38장이나 다니엘서 7-12장 그밖의 예언적 관점에서 여러 시기나 경우를 계산하는 데 모든 시간을 소비하며 전생애를 투입하게 되기가 쉽다. 한편 영적 의미에서는 당신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 점점 무관심하고 등한히 될 수 있다. 물론 예언적 교훈은 성경의 중요한 일부이고 크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장래 세계에서 일어날 사건들에 너무 관심을 가지는 나머지 우리가 지금 살아야 하는 생애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음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 점에서 우리들의 일차적인 위험은 균형이나 조화의 감각을 상실하는 데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나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14:36).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 13). “때와 기한은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 1: 7). 우리는 복된 소망을 갖고 현실에 더욱 더 충실하고 주어진 사명을 더 충실히 감당하며 충성하고 봉사할 때 약속된 하나님의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날과 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성도로서의 거룩한 삶이다(마 24:36; 벧후 3:11,12).

우리는 특별한 ‘종말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는 마지막 때로서, 세상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 절정에 이르기 직전의 시기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이 얼마나 될지도 알 수 없다. 우리는 선견자 요한처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때가 가까우니라.”(계 22:10).

우리가 지금 요한계시록에서 경고하는 말세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말세에는 네 가지 징조가 있다: ①사람의 징조 “미혹”이다(마 24:4); ②환란의 징조 “난리”이다(마 24:6); ③자연의 징조 “재난”이다(마 24: 7-8); ④종교적 징조 “이단”이다(마 24: 11, 23-24). 우리 모두는 기름을 준비한 지혜로운 다섯 처녀처럼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을 준비를 갖춰야 한다.

우리는 재림이 가까워진다는 핑계로 나태하고 게으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살전 4:11). 성도들은 재림하시는 주를 맞아 영접하여 영원히 주와 함께 살게 될 것이다. 불신자처럼 슬퍼해서는 안 된다. 시간과 시기에 대해 성도들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 매일 경건하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참고서적
권호덕. [율법의 세 가지 용도와 그 사회적 적용]. 그리심, 2003.
김민규. [신앙, 그 오해와 진실]. 새물결플러스, 2014.
스탠리 그렌츠. [누구나 쉽게 배우는 신학]. CUP, 2000.
피영민. [신약개론]. 검과흙손, 2015.
Walter Elwell.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Baker Book House, 1984.

출처 : 기독교포털뉴스(http://www.kportalnews.co.kr)

Posted by 작은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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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주의의 기원과 문제점 - 기독교포털뉴스

한국교회에는 세대주의적 입장이 매우 뿌리 깊습니다. 특히 세대주의적 입장은 이장림 씨의 1992년 10월 28일 시한부 종말론을 전후해 한국교회를 강타했고, 그 악영향을 경험했음에도 세대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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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주의의 기원과 문제점

 

한국교회에는 세대주의적 입장이 매우 뿌리 깊습니다. 특히 세대주의적 입장은 이장림 씨의 1992년 10월 28일 시한부 종말론을 전후해 한국교회를 강타했고, 그 악영향을 경험했음에도 세대주의 사상은 우리들 속에 아직도 잔재해 있습니다. 최근에는 ‘베리칩=666 짐승의 표’라고 주장을 하는 세대주의적 입장에 기초한 종말론이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에 본 사이트 기독교포털뉴스(www.kportalnews.co.kr)는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란 무엇인가?’란 주제로 김명도 교수(미국 칼빈신학대학(CTS) 및 국제개혁대학(IRUS) 변증학)가 정리한 내용을 게재합니다. 김 교수는 이 글에서 한국교회에 세대주의의가 기원하게 된 이유, 세대주의와 개혁주의의 차이, 개혁신학적 관점에서 본 세대주의의 문제점 등을 짧고 간결하게 정리했습니다. 원고 게재를 허락해 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편집자주>

1. 세대주의의 기원
세대주의의 기원은 1820년대의 영국 Dublin 이라는 마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John Nelson Darby (1800-1882) 라는 사람은 기성교회에서 목사만이 안수 받은 특수층인 성직자만 설교하고 성례식을 집례하는 것이 종교개혁 사상인 “만인사제 (priesthood of all believers" 에 위배된다하여 교회를 박차고 나와서 따로 몇몇 모여서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모든 잘못된 사람들은 기성교회를 비난하고 따로 모여서 새로 <성경공부> 라는 미명으로 모여서 정통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가르치지 않고 나름대로 ”새로운 진리“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교파>를 만든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통일교나 모르몬교나, 지금은 활동이 약화되었지만 옛날 박태선의 전도관이나 ”영생교단“ 등이 모두 이렇게 시작되어 사람들을 오도해 간다. 세대주의를 이런 이단교파들과 대등시 하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전에 기성 교회가 몰랐건 진리를 새로 발견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필연코 문제를 일으킨다는 말이다. 성경의 가르침 즉 기독교의 정통적 교리는 이미 초대교회 때부터 <니케아 신경>이나 <아타나시우스 신경>이나 <콘스탄티노물 신경>이나 <갈게돈 신경>에 잘 정립되어 있고, 그 후 <벨직 신앙고백>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 <제2스위스 신앙고백>, <프랑스 신앙고백>, <도르트 신경>, <웨스트민스터 싱앙고백> 등에 모두 잘 정리되어 있고 현대에 와서는 <케임브릿지 선언 Cambridge Declaration, 1996>으로 더 이상 수정하거나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새로운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새로운 진리>를 발견했다고 야단이지만 이는 크게 잘 못된 것이다. 이미 나타난 <역사적 신앙 고백서들>을 받아들이고 성경을 성경대로 믿으면 되는 것이며 <별도로 다른 진리>를 도입할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John Nelson Darby 라는 <세대주의 창시자> 에 관하여 몇 마디 말한다면 그는 귀족의 집안에 태어나서 영국 Dublin 에 있는 명문 대학 Trinity College에서 수학했고 목사로 안수 받고 Church of Ireland 에서 다년간 목회하면서 기성교회의 <허점>들을 발견하고 기성교회의 잘못을 비난하는 「On the Nature and Unity of the Church of Christ」 라는 책을 1827년에 쓰고 나서 그해 그가 목회하던 교회를 사임하고 나름대로 그의 독특한 목회 스타일로 그의 추종자 몇 사람과 같이 개인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매주 한 번씩 성찬식을 거행했고 교인들이 돌아가면서 교대로 설교하면서 전혀 기도에 힘쓰며 그의 온화한 인품과 탁월한 교수 능력으로 나름대로 그 모임을 잘 인도해나갔다.

같이 동시 목회하던 B.W. Newton 과 결별하고, 영국 서남단 Plymouth 라는 항구에서 처음으로 생겨난 교단에 합류했다. Darby는 Newton을 <예언> 문제와 <교회론, 특히 성찬문제> 문제 등으로 그와 사상을 달리한다 하여 이단으로 규정하여 결국은 1848년에는 <개방파> 와 <폐쇄파> 로 교단이 둘로 분리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Darby는 어학지식이 대단하여 성경을 불어, 독어로 번역했다. 그는 <세대주의 신학의 창시자> 라고 불리운다.

이 세대주의는 미국에 상륙했다. 1900년도 초기에 미국의 Cyrus Ingerson Scofield(1843-1921)에게 전수되어 1909년 이른바 Scofield Reference Bible (스코필드 성경)이 미국에서 처음으로 발행되어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급속도로 세대주의가 전파되게 되었다 Scofield는 군인 출신 법률가로 성경 원어에 능통한 사람이 아니었고 신학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나름대로 KJV(제임스왕판 성경, 1611)에 여기 저기 나름대로 생각해 낸 주석을 기입했다. 그래서 Scofield의 성경을 읽는 사람은 나중에 다른 사람과 토론할 때 어떤 구절을 놓고 그것이 성경 본문에 있는 말인지 아니면 스코필드가 한 말인지 혼동을 가져 올 때가 있다고 토로(吐露) 한다.

미국에서 이 성경이 급물살을 타고 빨리 펴져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이 미국에 상륙하여 이상한 비성경적 성경해석 바람이 불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건너온 “자연신교, Deism" 이나 독일에서 건너온 ”종교사학파, Religionsgeschichtliche Schule, 宗敎史學派" 등이 미국 Princeton 신학교에 상륙하면서 미국의 정통적 개혁주의 신학은 침식되었고 많은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신신학(新神學) 에 빠져들어 갔기 때문이다. 이런 암흑기에 Scofield의 성경은 새로운 oasis 로 받아져서 너도 나도 사서 읽었고, Darby의 신학을 전수 받은 Scofield는 그의 성경을 통해서 세대주의 신학을 널리 펴나갔으며 한국에 나와서 평양 신학교를 설립한 미국 북장로교 (UPCUSA)목사 Allen Clark (곽안련)도 이런 세대주의 신학자였으므로 그에게 지도 받은 문하생들이 모두 세대주의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한국의 세대주의 일변도의 신학이 <개혁주의> 로 돌아선 것은 해방되고 나서 특히 6.25 사변을 전후하여 화란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박윤선 목사님 같은 몇몇 학자들의 영향에 기인한다.

그러면 세대주의와 개혁주의는 어떻게 다른가?

II. 세대주의와 개혁주의의 차이점
세대주의와 오순절 계통의 교리가 전혀 다른 것처럼 세대주의와 개혁주의는 전혀 다르다. 오순절 계통의 교리가 개혁주의와 다른 것은 “지금도 하나님이 계시가 온다” 고 믿는 오순절의 가르침을 개혁주의는 부인하기 때문이다. 개혁주의는 종교개혁기의 신앙고백서인 Belgic Confession (1561), Heidelberg Catechism (1563), French Confession (1559), Second Helvetic Confession (1566) 과, 성경 히 1:1; 계 22:18-·19 등에 나타난 계시의 종결을 못 박고 있다.

세대주의와 개혁주의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세대주의 (Dispensationalism)는 역사의 시대를 7가지로 구분하여 그때그때 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이 다르다고 가르친다. 세대주의 신학은 인류역사를 7세대로 구분하는데 그 일곱 세대란:
1. 무죄시대 (Innocence, 창조부터 인류 타락 전까지)
2. 양심시대 (Conscience, 인류타락부터 노아까지)
3. 인간통치 시대 (Human Government, 노아부터 아브라함 까지)
4. 약속시대 (Promise, 아브라함부터 모세까지)
5. 율법시대 (Law, 모세부터 그리스도까지)
6. 은혜시대 (Grace, 교회시대)
7. 왕국시대 (Kingdom, 천년왕국)

이렇게 구분하여 그때그때 마다 하나님이 다르게 인간을 다스린다는 것이 세대주의자들의 신학이다. 모든 세대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하지만 율법과 은혜를 엄격히 구분한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7가지 세대에서 각각 인간에게는 다른 책임이 주어지며 하나님은 7시대에 각각 다르게 인간을 통치한다고 가르치며 우리는 지금 “은혜시대” 에 살고 있는데 율법인 십계명을 존중은 하지만 우리 생활과 신앙의 유일한 법칙으로 지킬 의무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들 세대주의에 의하면 우리는 지금 은혜시대에 살고 있는데 우리는 십계명을 지키는 것 보다 “단지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는 것뿐” 이라고 가르친다. 여기에 대해서는 전에 세대주의를 따르다가 개혁주의로 돌아온 William Cox가 쓴 작은 소책자 (pamphlet) 인 「Why I Left Dispensationalism」 이나 그의 책 「An Examination of Dispensatinalism」(P&R 1961, 1963)을 참고할 것. 이 책자들은 지금도 New Jersey주 Phillipsburg 에 있는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약자로 P&R)에서 구입할 수 있다. 아니면 Christian Book Distributors (Lynn, MA) 혹은 online 으로 www.amazon.com 에서 구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오직 한 가지 방법 즉 하나님의 은혜로 인류를 구원해 주신다고 가르친다. 구약은 오실 메시야이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예언하고 있고 신약은 그 메시야 즉 그리스도가 예언대로 임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Immanuel) 그가 구약에서 예언한 그대로 그의 택하신 백성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대속의 죽음을 죽어 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고 믿는다. 구약에서 행위계약에 실패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위하여 “은혜계약”을 주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는 것이 개혁주의 구원관이다. 세대주의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세대주의 신학은 두 번째로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을 하나님의 구속사적 측면 (In the perspective of God's Redemptive History)에서 해석한다. 옛날 교부 Origen(Alexandria 에서 활동하던 Clement of Alexandria 의 제자)은 성경해석의 원칙을 말하면서 “모든 성경은 네 가지 방법으로 해석해야 한다” 고 주장했는데 그 네 가지란 1. 문자적 해석 2 풍유적 해석, 3. 도덕적 해석, 그리고 4, 신학적 해석 이렇게 네 가지로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 ”오리겐의 4중 해석“ 이라고 한다.

그러나 Origen 자신도 교리사적 측면에서 볼 때 실수를 많이 한 분이었다. 성경의 해석은 항상 문맥을 통해서 바른 해석이 나온다. 성경의 해석의 원칙은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 (Scriptura Scripturae Interpres)>이다. 성경이 성경을 해석 한댜는 말이다. 성경을 해석할 때는 항상 Historico-Grammatico-Theological Interpretation(역사적, 문법적, 신학적 해석)이 바른 해석 방법임을 알아두자.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되 역사적 배경을 알고 문법적으로 분석하고 그리고 신학적인 의미를 유도하는 방법이다.

세대주의자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렇게 주장하면 온갖 해석상 오류에 빠지게 된다. 가령 예를 들면, 요한복음 2장의 말씀 중 “성전을 헐라 삼일 만에 내가 다시 지으리라” 란 말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문자 그대로 라면 46년간 걸려서 지은 예루살렘의 성전을 문자 그대로 단 3일 만에 재건한다는 말이니 예수님은 그런 의미로 말씀한 것이 아니다. 그 다음절 (요 2:21)에 보면 문자 그대로의 성전을 말함이 아니고,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말함이 분명하다. 이렇듯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면 큰 낭패를 당하며 진리에 도달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알자.

세대주의 신학은 구약과 신약은 관계가 없고 구약은 이스라엘만 말한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말하기를 “이스라엘”은 어디까지나 <육적인 이스라엘> 나라(지금의 유대민족) 만을 말한다고 가르친다. 믿는 성도가 모두 영적인 이스라엘임을 그들은 부인한다.

그렇다면 갈 3:29 말씀은 어떻게 해석하나?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란 말은 분명히 우리들 이방인들을 말하며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이 됨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이는 로마서 2장 28절 말씀이 입증한다. 세대주의는 모든 예언의 말씀이 이스라엘 즉 육적인, 다시 말하면 지금의 이스라엘 나라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예언이라고 가르치면서 갈 3:29 말씀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세대주의 신학자인 Louis Sperry Chafer 가 쓴 조직신학 책 8권에는 로마서 4장에서 인용하는 글이 없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선지자가 예언한 예언은 이 땅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것이므로 이 세상에서 성취된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에스겔서 40장에서 48장에 나오는 <성전>은 문자 그대로 이 세상에서 유대인들을 위한 성전이며 이 세상에서 이뤄진다고 가르친다. 세대주의자는 계시록 22장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도 문자 그대로 <이 땅에서의 성전으로 앞으로 이 땅에 살게 될 성도들이 영원히 살게 될 곳> 이라고 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은 이스라엘이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음을 믿는다. 즉, 1. 유대민족, 2 야곱이 변하여 이스라엘, 3. 솔로몬이 죽은 후 나라가 양분되어 10개 지파로 만들어진 여로보암 왕의 북국 (사마리아 중심) 이스라엘, 4. 영적 아브라함의 자녀 즉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믿는 모든 무리 (갈 3:29) 등 이렇게 이스라엘의 의미가 많은 것을 세대주의 신학은 부인한다. 이것은 그들의 맹점(盲點)이다.

세대주의 신학은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 관계를 부인하며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말하기를 “구약에는 교회에 대한 예언은 한 마디도 없다” 고 주장하며 모든 예언은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 나라 백성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세대주의자들의 신학이다.

세대주의자는 말하기를 예수님이 말한 <하나님의 나라> 는 유대인들을 위함이었는데 유대인들을 위하여 영적이 아닌 이 지구위에서 이루어질 다윗의 왕국이 이뤄지는 것을 말한다고 가르친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자 이 왕국은 장래 왕국시대가 되어야 이루어 질 것이라고 그들은 가르치며 그 어간에 하나님은 <괄호속> 에 “교회시대”를 임시로 주었다고 가르친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구약의 이스라엘이 신약의 교회임> 을 철저하게 부인한다. 여기에서 온갖 그릇된 그들의 신학이 나온다. 그러므로 세대주의는 말하기를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도래했다는 말을 믿지 않으며 그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 말대로라면 항상 미래에 되어질 일이며 현재와는 관계가 없다고 가르친다. 이에 반하여 개혁주의는 <구약의 이스라엘이 바로 교회> 라고 믿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도래 했고 그 마지막 완성은 미래에 이루어진다고 가르친다.

세대주의는 주장하기를, 성도는 환난을 당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대 환란이 오기 전에 교회는 휴거되어 성도는 환란을 면하게 되고 (pre-tribulation rapture) 휴거(rapture)가 있은 후에는 유대인들중 남은 자 (remnant) 가 교회를 맡게 되며 이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나라와 이빙민족을 회심시키는 도구로 사용된다고 가르친다. 좀 더 여기에 관해 알고자하면 세대주의 신학자인 Charles C. Ryrie 가 쓴 Dispensationalism Today (Moody, 1965, pp.132-135를 참고할 수 있다. 성경은 분명히 성도들도 환난을 당한다고 말하며 마태복음 24장 22절 이하에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세대주의와 개혁주의는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매우 다르다.
가장 눈 여겨 보아야 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는 것.
예를 들면, 다윗의 보좌가 영원하리라 (삼후 7:13)은 이 땅에서의 다윗의 나라가 부활된다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임한다는 말로 성경은 로마서 1:3 이나 행 2:29-32 등에서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항상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는 원칙은 무리가 있다.

2. 이스라엘 문제에 관하여, 누가 이스라엘인가? 성경은 <교회가 새로운 이스라엘> 이라고 가르친다.(롬 9:6; 갈 6;16). 세대주의가 주장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무조건 항상 이스라엘 나라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유대나라를 말할 때도 있고, 영적인 이스라엘 즉 믿는 성도들을 말할 때도 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예수의 피로 죄를 씻음 받은 자들이 새로운 12 지파가 되었다>고 야고보 1:1에 말하지 않는가?

3.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7 가지 시대로 나누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죄인은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다> 는 (엡 2:8) 말씀을 모르는 소치이다. 구약 노아 홍수 때도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구원을 얻었다고 (창 6:8)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한 결 같이 같다.

4. 세대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와는 관계가 없고 항상 미래에 속하며 이 지구위에서 성취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를 통해서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지금 도래 했다 (마 12:28; 눅 17:21).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며 살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중심>이거늘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이스라엘 나라 중심> 인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세대주의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있고 (눅 17장) 그 마지막 완성 (final consummation)은 미래에 속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개혁주의적 신국관 (view of the Kingdom of God)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도래했지만 아직도 미래에 속한다> 미래에 속한다는 말은 마지막 사탄이 불 못에 던져지는 대 심판날에 사탄이 완전히 제거되고 영원한 신천지가 도래할 것을 내다 본 것이다. 지금은 아직도 성도는 사탄의 유혹을 받으며 거듭난 영혼은 거듭나지 못한 육신 (sarks) 과 부단히 싸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현상을 잘 그린 것이 로마서 7장이다. 부활한 바울의 영혼이 아직 부활하지 못한 그의 육신의 생각과 싸우는 모습이며 그 모습은 바로 우리 성도들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다..

5. 휴거에 관해서도 세대주의자는 <장차 다가올 “대 환란, Great Tribulation" 전에 믿는 성도는 모두 휴거 되어 절대로 환난을 당하지 않는다> 고 가르치지만 성경은 이 땅에서 환난을 당한다고 마태복음 (마24:21-22) 이나 베드로전서에 말한다.

그리고 몰래 ”휴거“ 한다는 말은 언어도단이다. 어떻게 예수님이 쥐도 새도 모르게 몰래 재림할 수 있는가? 물론 세대주의자는 베드로후서 3장10절을 근거로 말하지만 성경 한 군데만 보지 말고 다른 곳도 보아야 한다. 데살로니가 전서 5:4 에는 “결코 도적같이 올 수 없다” 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우리는 빛의 자녀로 옮겨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가르침은 빛 가운데 행치 아니하고 아직도 어두움 속에, 즉 예수를 믿지 않는 자에게는 벧후 3:10 말씀처럼 도적같이 임할 것이지만 예수를 믿고 있는 성도에게는 도적같이 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늘 그날을 고대하며 살기 때문이다. 이 성경해석이 정확한 증거는 데살로니가 전서 4장에는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천사장의 호령소리로 주님이 강림>하시면 죽은 사람들이 그 나팔소리에 무덤에서 일어난다고 했는데 죽은 사람도 듣는 그 나팔 소리를 살아남은 우리가 못 듣겠는가?

주님의 재림은 몰래 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온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속지 말자. <교회가 휴거한다>고 가르치는 이들의 이유는 <교회와 하나님의 구원을 분리하는> 데서 기인한다. 그들의 말은 이 땅에 다윗 왕국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임시 변통으로 주어젔던 교회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았듯, 세대주의는 성경의 무오성을 믿고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믿지만 그들의 구원관은 성경에서 벗어난 Darby 나 특히 Scofield 가 만들어낸 <인위적인 교리> 에 기초를 둔 것으로 개혁주의 신학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세대주의는 상당히 많이 교회에 파급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 목사들 80-90%가 세대주의를 신봉한다.

III. 어떤 분들이 세대주의를 믿는 지도자들인가?
이미 세상을 뜬 사람들로는 앞서 언급한 John Nelson Darby, Cyrus Ingerson Scofield, Louis Sperry Chafer(Dallas 신학교 창시자, 세대주의 신학인 조직신학 8권 저자), 등이 있고, 현존하는 인물로는 Charles C. Ryie, John Warvoord, Charles Swindol 등이 머리에 떠오르고, 세대주의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는 Dallas, Texas의 Dallas 신학교, Philadelphia, Pennsylvania 의 Philadelphia College of Bible, Winona Lake, Indiana 의 Grace Theological Seminary, 그리고 La Mirada, California 의 Talbot신학교 등을 들 수 있다.

출처 : 기독교포털뉴스(http://www.kportal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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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샘

2011. 12. 26. 19:04

 

합동신학교 신복윤 교수의 '복음주의, 근본주의, 개혁주의 비교' 

 

복음주의, 근본주의, 개혁주의 비교

 

graced.egloos.com

복음주의, 근본주의, 개혁주의 비교
  
신복윤 교수 

 
이 글에서는 복음주의, 근본주의, 개혁주의 등 몇몇 운동들의 용어, 역사적 배경, 사상적 특징들을 돌아보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활동한 상황, 평가, 그리고 한국 교회와의 관계 등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Ⅰ. 복음주의


1. 복음주의의 발단
근본주의가 20세기초 미국에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동으로 생긴 신학이라고 한다면, 복음주의(福音主義, Evangelicalism)는 17세기 이후 독일 루터교회의 '죽은 전통'에 불만을 품은 경건주의(敬虔主義)운동에서 파생된 운동이다.


종교개혁 이후 독일교회에는 점점 신앙의 고정화 현상이 나타나 교리적 정통주의가 만연케 되자, 슈페너(P.Spener 1635~1705)와 후랑케(Francke, 1663~1727)를 중심으로 종교적 정열과 내적 생명을 되살리려는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 독일교회에 커다란 각성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 "기독교는 생활이요 체험이다"라는 표어를 가지고 성경의 생활화를 강조하였다. 이들의 경건주의 운동이 바로 독일과 영국, 그리고 기타 유럽의 복음주의의 모체가 된 것이다(복음주의,신학사전, 개혁주의 신행협회 pp. 204~205).


복음적이란 용어는 복음에 기초하려는 모든 개신교 교회에 붙여졌다. '복음주의'란말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에도 적용되고, 영국에서는 웨슬리파 감리교회에도 사용되었다. 이렇게 사용된 복음주의는 기독교회 기본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한편, 성경의 권위와 완전영감설을 강조하고, 의식적 예배보다는 설교의 우위성을 주장하며, 로마가톨릭에 대해서는 짙은 회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

2. 복음주의의 역사
위에서 말한대로 복음주의는 17세기 이후에 생긴 운동이지만, 그러나 초대교회의 신경(信經)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초대교회는 그것을 성경의 교훈과 관련하여 그 의미를 파악하고 변증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복음주의 신학은 이 시대의 사상과 손을 잡고 다음 내용들을 확인하였다.


즉 성경은 하나님의 참된 계시이며, 그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음성으로 말씀하신다는 것,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요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라는 것,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구속적으로 역사속에 들어오셨다는 것,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 시라는 것, 죄의 권세와 심판은 모든 인류에게 다같이 실재(實在)한다는 것, 하나님은 자비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먼저 찾아오셨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세우고 계신다는 것, 역사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일반적 부활, 최후의 심판, 천국과 지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등이다.


복음주의 신학은 또한 초기 중세교회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캔터베리의 안셀름(Anselm)이 주장한 속죄론에서 만족설(滿足說)을 비중있게 취하였으며, 끌레르보의 버나드(Bernard)가 주장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하여도 강조하였다.


특히 복음주의 신학은 종교개혁의 특징들과 특별한 관계를 갖고있다. 복음주의는 철저하게 성경 중심성을 강조하고, 특별히 설교와 관련하여 성경의 능력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온다는 것, 교리와 생활의 모든 문제에 대하여 성경은 최종적인 권위를 갖는다는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성령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고 그것을 자국어로 번역하여 널리 보급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 등에 깊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복음주의는 또한 이신칭의(以信稱義)교리를 강조하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자기계시(自己啓示)를 신뢰함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복음주의는 역시 교회는 성령으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아버지를 직접적으로, 개인적으로, 또는 항상 가까이 나아가는 모든 신자들로 구성된다는 것을 기쁘게 고백하였다.


종교개혁은 제도화된 여러 구조들과 민족주의적 충동의 결과로 나타났으며, 이 속에서 복음주의 신학의 다양성이 발생하였다. 그들 가운데는 성례의 본질, 개인의 구원과 관련된 하나님의 작정(作定)의 위치, 천년 왕국의 시기, 교회의 정치형태, 성경영감의 정확한 성격, 구원의 확신에 도달하는 방법, 문화와 국가에 대한 관계 등에 대하여 이해의 차이가 있었다. 오늘의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이런 문제들 가운데 대부분은 약간 이차적인 중요성을 가진 문제로 생각될지도 모르는 것들이다.


복음주의 신학은 또한 대략 18세기 중엽에 일어난 복음주의적 각성운동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이때 복음주의는 위대하고 표준적인 전통신학을 재차 확인하고, 크리스챤 삶의 신학에 특별한 역점을 두었다. 구원에 이르는 신앙이나 회심의 성질에 대한 논의는, 비록 회심의 시간에 대한 차이는 있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식과 이에 따르는 성질의 변화 문제와 함께 계속 전면에 나타났다.
성화의 수단과 그 가능성도 역시 강조되었는데, 성화의 시간과 성취에 대하여 약간의 차이가 다시 한번 있었다. 공동의 영적 삶의 신학이 또한 강조되었는데, 교회의 갱신과 세계의 복음화, 그리고 사회의 개선을 특별히 강조했다.


1980년대에 와서 복음주의 신학은 크리스챤 삶의 신학에서 벗어나 진지한 성경해석 작업과 이를 반영하는 사상을 통하여 다시 한번 중세 초기와 종교개혁 시대처럼 정통신학의 유산을 활기차게 선택하려는 증거를 보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바로 그 당시에 복음주의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과 충돌하고 있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옛 계몽주의 운동의 합리주의와 신지식(神知識)에 이르는 다리로서 인간의 자각을 강조하는 후기 칸트 철학의 결합이었으며, 이 신학은 낭만주의 시대에 호소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한 배경 가운데서 복음주의 신학은 그 새로운 견해들과 타협함으로 약화되거나 후퇴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그 침체를 변호하려는 노력도 일어나고 있었다.


이들은 정통신학의 정수를 옹호하는데 눈부신 활약을 하면서도, 자주 그 당시 사상의 많은 부분을 버리고, 크리스챤 삶의 신학에 대한 독특한 복음주의적인 강조점을 약화시켰다. 따라서 모든 신학의 최종적인 형성을 종교개혁시대의 신앙고백에 끼워넣은 인상을 주었다.


이때 복음주의 신학의 빛을 희미하게나마 비추어 주던 학파가 있는데 바로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ayper) 이후에 나타난 화란학파(the Dutch School)이다. 이들은 정통신학의 전통을 확인하고, 모든 부분에서 크리스챤 삶의 신학에 대한 중요성을 깊이 깨닫고 있었으며, 동시에 많은 문제점들을 느끼고 그 당시 발생되는 문제들에 접근하고 있었다.


19세기 후반에 자유주의 신학의 압력은 계속 증대되고, 복음주의는 약화되었기 때문에, 더욱 더 방어적인 복음주의 신학이 근본주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 가장 중요한 보루는, 교회와 사회가 파멸을 향하여 돌진한다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천년왕국설이었다. 그리스도교는 '현재'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모든 것을 '미래'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20세기 중반에는 복음주의 신학 안에 어떤 활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영국 학자들이 진지하고 학문적인 성경해석 방법의 접근에 공헌하였고, 미국 학자들은 조직신학, 변증학, 윤리학같은 조직신학의 보조학문 영역에서 열심히 연구하였다. 화란학파와 메노나이트파(Mennonites)는 중요한 여러 종류의 출발점부터 사회적 행동의 신학들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오순절파의 카리스마 운동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교회를 통해 강하게 그리고 초자연적으로 나타나신다는 성령의 신학을 선언하였다.

3. 영적신학
마지막으로, 복음주의 신학은 영적신학(Spiritual Theology)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위대한 신학 전통의 일부분인 삶의 신학의 방법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정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신학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명상하고 기도하며 연구해야 할 대상이다. 신학연구의 목표는 신학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학문적인 만족에 대한 유혹은 극복되어야 한다. 즉 신학은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결산의 날이 가깝다는 자각에서 행해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복음주의 신학의 작업 전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다.

4. 한국교회와 복음주의
한국교회는 일반적으로 '복음주의적'이다. 복음주의는 요약해서 말한다면, 경건주의에 개혁주의가 가미된 운동이라고 하겠다. 복음주의자는 그러기 때문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대원칙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한국의 복음주의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의 복음주의는 현재 여러 교파에 속해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회장:전호진, 총무:박형용)가 있고,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김준곤, 총무:김영혁)가 있고, 복음주의사상·신앙·사업 확장에 힘쓰고 있다. 비록 사상과 교파의 배경은 다르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복음의 정열을 가지고, 경건하게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복음주의자라고 한다면, 한국복음주의 운동은 소망스러운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 경계할 것은 복음주의가 경건주의에 흐르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최근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에 비해 유럽의 복음주의 신학이 약세에 있는 것은 경건주의 운동의 영향 때문이다. 경건주의가 내세운 생활위주의 기독교는 얼마 안가서 교리적으로 이질화의 염려가 있다.

II. 근본주의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독일과 영국에서 일어난 자유주의는 19세기말 미국에서 강한 세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성경의 객관적 계시와 정확무오한 권위에 정면 도전하고, 그리스도의 처녀탄생,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대속교리, 육체부활 등에 대하여 회의를 느꼈다. 모세오경의 저작권, 구약의 연대적 순서, 복음서 기록의 정확성, 바울신서의 저작권 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신학적인 공격만이 아니라, 과학적인 공격도 아울러 퍼부었다. 다윈의 진화론이 인류와 세계에 대한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견해를 불신하는데 사용되기 시작했다. 인간은 부패하고 타락한 존재가 아니라, 완성을 향하여 진보하여 가는 것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이와같은 비평에 대하여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 즉 초자연적인 복음의 변호와 전파를 위하여 일어난 것이 곧 근본주의(根本主義, Fundamentalism)운동이었다. 그러나 신학적인 배경은 다양하여, 이 운동에는 칼빈주의자, 알미니안파, 침례교도, 장로교도, 그리고 세대주의자(世代主義者)들이 한데 뭉쳐 있었는데, 그들은 20세기초까지 공동의 적인 자유주의를 대항해서 싸웠다.

1. '근본주의'라는 말
'근본주의'라는 말은 1920년 침례교기관지 「The Watchman Examiner」의 편집인 커티스 리 로우즈(Curtis Lee Laws 1868~1946)가 북침례교 총회안의 반현대주의자들을 가리켜 사용한데서 비롯된다. 이 용어는 현대주의 신학과 현대문화의 세속화 양상에 대항하여 싸우는 복음주의 개신교도들을 총체적으로 넓은 의미에서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예를 들자면, 이 용어는 첫째로 복음주의적 개신교도들에게요, 둘째는 반현대주의자들에게다. 그들은 전통적, 초자연적, 성경적인 기독교의 원리에 동의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앞에서도 말한 바 있는 반현대주의자나 혹은 세속화에 대항하여 싸우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 이 용어는 넓은 의미에서도 사용되고, 좁은 의미에서도 사용되기 때문에 그 묘사는 다소 복잡하다.


때때로 이 말은 일반적으로 어떤 종교상의 반현대주의자를 가리키는데 사용된다. 혹은 근본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남미에서 흔히 볼 수 있는대로, 복음적 부흥운동에서 도를 지나치거나 반(反)지성주의적인 사람들을 가리켜 막연하게 사용하기도 한다. 이 말을 그렇게 사용하게 될 때, 근본주의와 부흥운동을 혼동하게 되고, 따라서 부흥운동가들의 뿌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몇몇 운동들과 혼동을 초래하게 된다.


예를 들면, 19세기 후반기에 일어난 '성결운동(聖潔運動)'은 완전무죄생활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체험을 강조하였다. 20세기 초에 일어난 '오순절운동'은 영적능력을 극적으로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들은 반현대주의자인 근본주의자들의 호전성을 채택하였기 때문에 근본주의적이 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들은 교회와 관계에서는 독립성을 유지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이 모든 운동들의 공동 기원을 19세기 미국 부흥운동의 다양한 유산에 두고 있는 것이 확실하며, 그래서 그들은 보통 근본주의자로 불려졌지만,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부흥운동가들이었다.


영국에서 근본주의라는 말은 더 넓은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서 근본주의는 성경의 고등한 견해와 근본적인 주장들을 가지는 복음주의적 보수주의를 가리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제임스 팩커(J. I. Packer)는 이런 의미에서 그의 저서 「Fundamentalism and the Word of God」(London, 1958)에서 근본주의를 변호했으며, 제임스 바르(James Barr)는 「Fundamentalism」(London, 1977)라는 저서에서 근본주의운동을 비판하면서 보수주의적 복음주의의대부분의 분파들을 하나로 묶어 말하였다.


한편 미국에서는 근본주의가 호전적인 반현대주의적 백인 복음주의자들을 가리켜 좁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미국의 흑은 복음주의자들은 흔히 스타일에서는 부흥사이고, 교리면에서는 근본주의이며, 윤리면에 있어서는 반현대주의에 속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근본주의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2. 근본주의의 역사(曆史)와 특징
근본주의 운동의 특징들은 그 역사에서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다. 에네스트 샌딘(Ernest. R. Sandeen)은 그의 중요한 연구서 「The Roots of Fundamentalism:British and American Millenarianism 1800~1930」(Chicago, 1970)에서, 근본주의의 주요한 근원은 다비(J. N. Darby)와 그밖의 사람들의 저작에서 볼 수 있는 천년기전 재림예언운동(千年期前再臨豫言運動)이라고 지적하였다. 비록 영국에서 이 운동이 전통적인 교회를 떠난 플리머스 형제단(The Plymouth Brethren)을 만들어내기는 하였으나, 19세기 후반 미국의 장로교와 침례교같은 중요한 교파 안에서도 근본주의의 표현들이 나타났다.


세대주의(世代主義, Dispensationalism)가 이 운동의 특징이었으며, 스코필드(C. I. Scofield)의 관주성경(Reference Bible)은 거의 정경(正經)처럼 인정되었다. 또한 미국의 많은 세대주의자들은 영국의 케직사경회의 온건한 성결운동의 교리를 채택하였다. 세대주의는 이 시대에 교회의 파멸을 예고하면서, 20세기 초의 공격적인 현대주의 신학의 발생에 대하여 투쟁할 것을 고무하였다.


특히 현대주의가 강했던 미국에는 현대주의에 대항하여 신앙의 근본원리들을 옹호하고자 하는 세대주의자들이 많이 있었다. 북장로교에서는, 보수주의자 프린스톤 신학교의 지성적인 지도자들 찰스 핫지(Charles Hodge), A. A. 핫지(A. A. Hodge), 워필드(B. B. Warfield), 메이첸(J. G. Machen)에 의해 강하게 유지되었다.


보수주의적 장로교인들은 우선 근본교리를 옹호하는 전략을 전개하였다. 특히 1909년부터 1915 년까지 12권으로 된 근본주의 총서 「근본원리들(The Fundamentals)」이 출판되어 전통적인 교리들이 옹호되었다. 이 총서는 라이만 스튜어드(Lyman Steward)와 밀턴 스튜어드(Milton Steward) 형제가 희사한 25만불과 무디기념교회 딕슨(A. C. Dixon) 목사의 편집으로 이루어졌고, 집필자들은 당시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미국과 영국의 보수주의 신학자들이었으며, 전국적으로 300만권 이상이 무료로 배부되었다(George M. Marseden,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 Oxford University Press, 1980, p. 118).


이 총서는 성경의 축자영감과 무오성을 강조하는 29편의 논문들을 중심으로,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을 변호하는 총 90편의 논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많은 근본주의 단체들이, 비록 한가지도 표준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근본주의적' 교리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가장 공통된 요점은 성경의 무오성(無誤性).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동정녀 탄생, 대리속죄,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이었다.


1920년대에, 현대주의자들을 대항하여 열심히 싸운 근본주의자들은 주요한 북장로교와 침례교 교단들 안에서 세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작은 규모의 근본주의 논쟁들이 다른 교파들 안에서도 발생하였으며,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사이에 이와 비슷한 분열들이 미국과 캐나다에 있는 교회 안에서 발생하기도 하였다. 한편 근본주의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도덕적 부패를 공격함과 동시에, 교회와 문화의 부패도 공격하였다. 윌리엄 브라이언(William J. Bryan, 1860~1925)이 주도한 바 있는, 미국공립학교에서의 진화론 교육 금지운동은 그러한 관심사의 주요한 표현이었다.


그런데 1925년 테네시주 데이튼(Dayton)시의 고등학교 생물교사인 존 스코우프스(John Scopes)는 이 법을 어기고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100불 벌금형의 유죄판결을 받은 바 있다. 근본주의자들은, 진화론 교육의 보급은 미국인의 생활에서 성경의 권위를 손상시키며, 도덕적 상대주의로 조장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공산주의, 로마교회, 술, 담배, 춤, 도박과 극장구경도 근본주의자들이 공격하는 또 다른 중요한 표적들이었다. 이러한 투쟁속에서 근본주의는 미국의 남북부전역과 그밖의 영어권 나라들, 그리고 그들의 선교지역에서, 여러가지 전통을 가진 반현대주의 크리스챤들의 연합으로 성장하였다. 그 연합의 중심에 미국의 세대주의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근본주의는 다른 전통들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았다.


1930년대에 와서 근본주의는 어떤 특수한 교회적인 표현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가장 효과적인 근본주의자들은 점차로 현대주의자들이 들어있는 단체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교회나 교파로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들 대부분이 침례교 도와 세대주의자들이었다. 분리주의가 참된 신앙의 시금석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20년대의 호전적 반현대주의자들의 광범한 연합은 1940년대에 와서는 분열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에서 한 주요한 집단은 호전성을 완화하고, 중요한 교파들과의 접촉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집단은 해롤드 J. 오켄가(Harold John Ockenga), 칼 F. H. 헨리(Carl F. H. Henry), 에드워드 J. 카넬 (Edward J. Carnell)과 같은 대변자들이 주로 이끌어왔으며, 그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을 '신복음주의자 (Neo-Evangelicals)'라고 불렀다. 그들이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의 협력을 얻은 것은 복음주의적 전(前) 근본주의자들의 발전을 알려주는 신호가 되었다.


한편 존 R. 라이스(John. R. Riee, 1895~1980), 밥 존스(Bob Jones, 1883~1968), 그리고 칼 맥킨타이어(Carl Mcintire1906~)와 같은 호전적인 분리주의자들은 자신들만이 참된 '근본주의자'라고 주장하였다. 초기의 근본주의 운동과 달라진 이 분리주의적 근본주의 운동을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간하배(Harvie Conn)교수는 '신근본주의'라고 불렀다(ContemporaryWorld Theolog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77. p. 120).


1960년대 이후의 미국의 '근본주의'는 이 소수의 분리주의적 근본주의자들이 아니라, 넓은 복음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넓은 복음주의에는 전 근본주의자들과 여러가지 전통의 성경을 믿는 크리스챤들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1980년대에 침례교의 근본주의자인 제리 포웰(Jerry Fawell)의 Moral Majority의 시작과 함께, 미국인의 공적생활에서 전통주의적 크리스챤의 관습을 그대로 보존하려는 근본주의자들의 정치적 관심은 1920년대에서처럼 다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근본주의자들의 정치운동은 역시 현재 세대주의적 예언 해석에 중요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강력하게 지원하고 있다.

3. 근본주의와 한국교회
한국장로교회는 처음부터 청교도적 개혁주의를 선교사들에게서 전수받았다. 그러나 역사가 흐르는 동안에 이 청교도적 개혁주의 전통 속에는, 경건주의, 신비주의, 세대주의와 함께 근본주의 등, 성경사상에 미흡한 요소들이 들어와 사상적 혼란을 가져왔다. 특히 근본주의적 요소를 한국장로교회 안에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일반 은총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개혁주의적 한국장로교회는 세상학문에 대한 노력을 강조하지 않았고, 그러다보니 반(反)지식주의에 흐르는 경향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계시종교와 과학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칼빈은 계시종교를 알게될 때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바로 알게 된다고 하였다. 우리는 영원적인 것만이 아니라, 시간적인 것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으로 믿고 아울러 존중하며 강조하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또한 잘못된 경건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자라왔다는 것도 근본주의의 영향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크리스챤이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마땅하나, 그것이 경건생활이 못되고, 경건주의에 빠지게 될 때, 형식주의가 되고 율법주의가 된다. 경건주의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성경에 없는 생활표준을 세우고, 그 표준이 마치 성경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고, 마침내는 논쟁을 일으켜 덕을 세우지 못하게 된다.

4. 근본주의에 대한 평가
근본주의가 초자연주의를 강조하고, 성경의 권위, 처녀탄생, 그리스도의 신성, 대속교리, 부활, 재림 등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을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나, 거기서 몇가지 약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첫째로, 근본주의는 하나님의 주권교리를 강조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주권은 다른 모든 교리를 싸고 도는 중심 태양이다. 하나님은 우주의 절대적인 최고의 통치자이시며, 작정과 창조와 섭리와 구속에서 주권적으로 일하시는 것이다.


둘째로 근본주의의 약점은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깊이 보지 못하는 점이다. 구약시대의 신자들 가운데는 율법으로 구원을 얻고, 신약시대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은 다같이 은혜언약에 속하는 구원방법의 계시이다. 구약이 은혜의 약속에 대해 계약이라고 한다면, 신약은 그 성취에 대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양자는 연속성과 통일성은 갖는 것이다.


셋째로, 근본주의의 약점은 위에서도 말했지만, 일반은총(자연은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세속 학문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하여 마침내는 반(反)지식주의로 흘러가고 말았다.


넷째로, 근본주의는 개인의 종교경험을 강조하는 경건주의적 경향을 보이면서 기독교의 사회적, 문화적 명령을 무시한다. 종교는 개인의 기도생활과 성경공부, 그리고 교회출석에 국한되고, 경제학이나 사회학, 그리고 자연과학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하여는 무관한 생활을 한다. 그러므로 문화·과학은 성경신학에 의하여 지도받지 못하고 오히려 한정되고 제약을 받는다.


다섯째로, 초기 근본주의와 후기(신) 근본주의가 다같이 복음을 전파하고 옹호하려는 열심은 대단하나, 옹호하려는 면이 전파하려는 면보다 더 우세하다. 적극적 자세에서 부정적 자세로, 당당한 싸움에서 사사로운 다툼으로, 은혜로움과 예절에서 비난의 언어로, 그리고 운동에서 인물로 그 호전성을 나타낸다(간하배, 현대신학 해설, p. 165).

III. 개혁주의(改革主義)
'개혁'이라는 말은 본래 16세기 로마 카톨릭교회의 오류와 폐단에 대항하여 일어난 교회들의 성격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이다. 그러므로 개혁이라는 말은 더 넓은 의미에서 종교개혁의 모든 교회에 적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가 교회생활과 개인생활에서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 것을 고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매우 제한된 의미를 갖는다. 이 말 루터의 사상에서 그 자체를 구별짓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개혁주의라는 용어는 또한 칼빈주의라는 말로 불리워지기도 한다.

1. 개혁주의의 사상적 특징
개혁주의는 칼빈으로부터 전해진 사상체계이다. 창시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 사상 체계의 중요한 해설가이다. 칼빈의 신학사상은 개혁운동에 이바지한 다른 위대한 지도자들의 사상과 함께 어거스틴 사상의 부흥이요, 어거스틴의 사상은 그보다 몇세기 전의 바울사상의 부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사상들을 조직적으로 설명하고, 특수하게 적용하여 현대를 위하여 제시한 사람이 바로 칼빈이다. 이때부터 이 사상체계를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라 부른다(H. Henry Meeter, The basic Ideas of Calvinism, Grand Rapids:Baker Book House, 1975, p. 29).


개혁주의는 신학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사상체계이다. 여기에는 신학과 함께 정치, 사회, 과학, 예술 등에 대한 사상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 사상체계는 인생관, 우주관, 세계관을 제공한다(상게서 p. 30). 개혁주의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사상적 특징을 가진다.

(1) 성경관
개혁주의에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성경관이다. 미국 칼빈신학교의 클로스터 교수(Fred H. Klooster)는 그의 논문에서 개혁주의의 독특성을 성경관(sola and tota scriptura)에서 찾았다(The Uniqueness of Reformed Theology:A Preliminary Attempt at Description, Grand Rapids:The Reformed Ecumenical Synod, 1979).


종교개혁은 성경의 권위를 재발견하고, 그것을 새롭게 강조하였다. 종교개혁은 부패한 교권제도의 횡포를 버리고, 그 자체의 기초를 하나님의 말씀 위에 두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하게 취급되었던 교회 전통의 권위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새로 발견한 진리에서 활기를 찾아,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인이라는 것, 그는 말씀을 통하여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신다는 것, 그 말씀이 죄인을 부르시는 수단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권위로 그들을 다스리시며 순종케 하신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오늘날 성경의 영감(靈感)과 무오(無誤)에 관한 문제로 광범위한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말씀을 주셨는지는 정확하고 상세하게 알지 못한다. 사실 하나님은 성경의 어떤 부분을 우리에게 주시되, 다른 부분과는 다르게 주셨다. 예를 들면, 십계명은 하나님 자신의 손으로 쓰시는 방법으로 주셨는가하면, 복음서들은 목격자들을 사용하여 영감으로 회상케하여 쓰도록 하였다. 누가는 역사를 조사하는 특별한 방법으로 누가복음을 기록하였다. 성경 저자의 인간성과 개성이 영감의 과정에서 성령(聖靈)에 의하여 충분히 인정되고 고려되었다는 것도 완전히 명백하다.


그러나 이사야와 아모스는 전혀 다른 문체(文體)와 다른 배경에서 각각 다른 책들을 썼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울과 요한은 비슷하게 그들 자신의 마음의 특성들을 보여 주었으며, 진리를 각각 다른 견지에서 표현하였다. 그들은 놀랍도록 서로 다른 문체로 쓰고, 예리하고 고상하게 나타내면서도 다같이 그들 자신의 독특한 지성과 경험을 가지고 기록하였던 것이다.


개혁파 전통에서는 영감의 방법이나, 성경의 여러가지 특성의 의미에 관한 기술적인 정의(定義)보다는 오히려 성경의 권위(權威)에 대하여 더 많이 강조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성경에 접근하면, 성경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다양한 형용사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성경은 권위가 있으되, 궁극적이며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책이다. 성경은 잘못이 있을 수도 없고, 잘못을 범할 수도 없으며, 우리를 나쁜 길로 인도하지는 더욱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교훈을 의지하고, 전적으로 신뢰하며, 우리가 행복하게 살고 죽기 위하여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을 바로 이 성경에서 찾는다(Inst. I. 7, 8, 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 인간의 구원, 신앙,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필요한 중요성에 따라 그것들을 성경에서 추론할 수 있다. 성령의 새로운 계시나 인간의 전통이나를 불문하고, 성경에는 어떤 것이라도 다른 무엇을 첨가해서는 안된다"(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I/6). 그러므로 성경이 말할 때 우리는 이에 순종하고 성경이 진리를 증언할 때,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그 진리에 굴복한다.


그러나 어떤 근거에서 우리는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성령(聖靈)의 신학자라 불리우는 칼빈은 이에 대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도움을 우리에게 주었다. 칼빈의 열차(列車)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담겨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특수한 책이라고 믿으며, 여기서 감동을 받는다. 여러 세기를 걸쳐서 기록되었으나, 그 비상한 통일성, 위엄있는 문체, 영광스러운 내용, 놀랄만한 일관성, 예언의 놀라운 기록과 그 성취,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속에서 경건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우리를 확신시키고 설득하며 순종하게 하는 것은 그 중의 하나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그 전체도 아니다. 오히려 성경 권위의 확고한 근거는 칼빈이 지칠 줄 모르게 주장했던 성령의 증거인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믿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아는 것은 성령께서 증거해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때, 즉 성경의 권위와 성령의 증거를 분리시킬 때, 우리는 즉시 영적으로 싸늘해지는 위험에 처하게 되고, 마침내는 비생산적이며 무의미하게 되는 빈약한 논쟁의 희생물이 되고 말 것이다 (Inst. I.7.1, I.7.5, I.8.13 참조). 칼빈은 또한 "하나님이 교리의 저자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확신하기 전에는 교리에 대한 신앙이 수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Inst. I.7.4)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개혁주의는 66권의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임을 믿는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경은 정확무오한 객관적 권위를 지닌 하나님의 말씀일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신앙과 행위의 규범이 된다(딤후3:16, 17). 개혁주의는 로마 가톨릭처럼 성경의 권위를 교회 밑에 두고, 교회가 없이는 성경이 존재할 수 없으나 성경은 없어도 교회는 존재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성경이 처음에는 불성문계시(不 成文啓示)로 있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성경이 교회보다 앞선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 문제이다(엡 2:20).


개혁주의는 성경을 종교적 신물(神物)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에 따라 교회의 씨앗(종자)으로 삼기 위해 주신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 개혁주의는 또한 신정통주의자들처럼, 계시의 객관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에 따르면 계시는 성경과 동일시될 수 없고, 성경은 계시의 증거요 표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자체가 아니며, 성경의 진술들은 계시 자체가 아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계시를 객관화하는 것이요 형체화하는 것이라고 한다. 계시는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는 사건이요, 하나님과 사람이 상봉하지 않는 한 계시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들은 말한다(칼바르트의 성경관 비판에 대하여는 Colin Brown, Karl Barth and the Christian Message, pp. 54~62; Klaas Runia, Karl Barths Doctrine of Holy Scripture를 참조). 개혁주의는 신복음주의자(新福音主義者)들처럼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분리하지 않는다. 그들은 영감은 믿으면서도 무오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절대적으로 무오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같이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신적 권위를 가지며, 그 독자적 신빙성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경을 통하여 구원에 필요한 지식을 교회나 신부(神父)에 의존할 필요없이 충분히 섭취할 수 있다. 로마 가톨릭에 따르면, 성경은 흐려지고 손상되어서 신앙과 행위의 문제까지도 교회가 해석해 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나, 우리는 성경의 명백성(明白性)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들의 견해에 찬성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의 충족성(充足性), 혹은 완전성을 주장한다. 기록된 말씀인 성경은 개인과 교회의 영적·도덕적 욕구를 위해서 충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전을 성경과 동등하게, 혹은 그 이상으로 우월한 권위를 갖게하는 로마 교회의 입장을 우리는 전적으로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

(2) 하나님의 주권사상
개혁주의의 특징은 하나님의 주권사상(主權思想)이다. 개혁주의는 항상 하나님 사상을 그 중심으로 하고 있다. 감리교가 죄인의 구원, 침례교가 중생의 신비, 루터교가 이신득구(以信得救), 모라비안이 그리스도의 상처, 희랍정교가 성령의 신비, 로마 교회가 교회의 보편성을 각각 강조한다고 하면, 개혁주의는 하나님 사상을 강조한다.


개혁주의는 인간의 회심(回心)이나 칭의(稱義)와 같은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하나님이 차지하셔야 할 당연한 권리를 차지하시도록 하는 사상에서 출발한 것이다(Pressly, Mason W. , Calvinism and Science, Articlein Ev. Repertoire, 1891, p. 662. quoted from H. Hemey Mater, The Basic Ideas of Calvinism, 1975, p. 32, 33)개혁주의자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롬 11:36)이라는 말씀을 생활원리로 하고 실현하려 애쓴다.


개혁주의의 중심사상이 바로 하나님 사상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많은 연구가들이 서로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으로하는 사상체계를 이루고자 할 때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지배, 즉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라는 술어를 필연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라는 말이 하나님과 우주와의 관계를 가장 잘 지적해 주는 술어이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은, 자연계와 도덕적 세계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대권(絶對的 大權)이란 뜻으로 해석된다. 하나님은 자연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진리, 도덕, 과학, 사랑 등의 여러 면에서도 법칙과 질서에 따라 다스리신다고 개혁주의자는 믿고 있다.


워필드(B.B. Warfield)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칼빈주의자는 모든 현상 배후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며, 이 현상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본다. 그리고 기도하는 태도로 전생애를 살아가며, 구원문제 있어서는 자아 의존을 배제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이다"(Calvin as a Theologian and Calvinism Today, pp. 23, 24).


하나님의 주권사상은 개혁주의 첫째가는 대교리로써 다른 모든 교리들의 중심 태양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우주의 최고 절대적인 통치자라고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작정(作定), 창조, 심리, 구속(救贖)에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

(3) 불가항력적 은혜
개혁주의의 셋째 특징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不可抗力的 恩惠)이다. 개혁주의의 구원이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임을 믿는다. 즉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요,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임을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죄인 안에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실 때 아무도 그 역사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이 개혁주의자들의 신념이다. 하나님이 주권사상을 가지다보면, 구원의 문제도 자연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만 해결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구원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교리는 칼빈주의 5대 강령이다. 즉 인간의 전적부패, 무조건적 선택, 제한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그리고 성도의 견인등이다. 이 교리들은 구원은 사람의 공로나 사람의 노력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임을 강조한다.


개혁주의는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며(창6:5, 렘17,9, 시51:5; 롬3:10),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말한 영적 선(靈的 善)을 행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른 말로하면,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존재이므로, 자신의 힘으로는 예수를 믿을 능력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이어서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창세 전에 선택하셨다(엡1:4). 이 선택은 선행을 조건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한 은혜의 선택이다.


그리고 성자(聖者)는 성부의 택함을 받은 죄인들을 위하여 인간이 되시고,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속을 완성하신다. 이것은 피택자(被擇者)에 국한된 구속이다(마1:21, 요10:14, 행 20:28). 제한속죄(制限贖罪)가 아니면 하나님의 선택은 무의미하다.


칼빈은 이 선택교리에 대하여 다른 칼빈주의자들보다 더 신중하였다. 그는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높였고, 구원과 관련하여서도 높였지만, 그가 기독교 강요에서 구원의 문제를 다루기까지는 선택교리를 충분히 논하지 않았다(Inst. III. 21~24).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이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죄인들을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는 피택자에게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음을 적용시키는 성령의 중생시키시는 역사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구원의 국면을 우리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라는 말로 표현한다. 어거스틴은 이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고 또한 즐겨 사용하셨다. 이 말이 내포하고 있는 뜻은, 성령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데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 성사, 성령은 죄인을 구원하시는데 다같이 참여하신다. 성부 하나님은 만세 전에 구원할 자를 미리 선택하셔서, 그의 백성을 성자 하나님에게 주시고, 성자 하나님은 때가 되어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의 구속을 완성하신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위에서 말한대로, 선택된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적용하여 저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이다. 한 죄인을 구원하시는데 얼마나 놀랍고 감격스러운 은혜인가!

(4) 하나님나라와 세상에 대한 견해
개혁주의의 넷째 특징은 하나님나라와 세상과의 관계에 대하여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하나님나라와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견해는 늘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개혁파 신학자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똑같은 '문화적 명령'에 대한 인식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개혁파의 신학적 전통은 최선을 다하여 세계의 형태와 문화에 대하여 큰 관심을 표시해 왔다. 물론 세상과 일치한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세상을 변혁시킨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하였다.


우리는 이 사실이 칼빈에게서 아주 강하게 나타났음을 보게 된다. 제네바에 있어서의 칼빈의 관심은 복음선포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으로 훨씬 더 넓은 것이었다(칼빈의 이관심에 대하여는 W. Fred Graham, The Constructive Revolutionary: John Calvin and His SocioEconomic Impact, Richmond: John Knox Press, 1971를 읽을 것). 확실히 복음의 선포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와 국가의 생활 전반에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개혁주의는 사회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며, '문화적 명령'에 대한 높은 인식을 갖고 있다. 문화적 명령에 대하여 논할 때, 기본적으로 지적되는 성경귀절은 창세기 1장 28절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귀절은 생활의 모든 방면과 경험의 모든 국면을 하나님의 주권에 종속시키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그것을 요구할 책임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살고있는 상황에 대하여도 우리는 관심을 가진다. 배고픈 자가 배부름을 얻고, 목마른 자가 시원함을 얻으며, 핍박받는 자가 보호를 받고, 궁핍한 자가 만족함을 얻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개혁주의자는 다음 말씀과 같이 매우 강한 신앙을 고백한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24:1). 그리고 하나님은 한 순간이라도 세계를 자신 밖의 어떤 세력에도 내어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개혁주의자는 믿는다. 이것이 바로 일반사회에서 사회악과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위범(違犯)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 없다는 이유가 된다.


우리는 임신중절의 그 무서운 악, 도처에서 볼 수 있는 도덕적 부패, 권력에 짓밟힌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 약하고 무력한 사람들에 대한 핍박에 대하여 반대하는 것이다. 분명히 사회변혁은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도 복음의 선포와 개인의 중생에서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해서는 안된다든가, 복음을 증거하지 않거나,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거나, 비전을 가지지 않거나, 또는 부흥과 개혁이 늦어지는데도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교훈적 의지를 수행하도록 부름받지 않은 자처럼 생각한다든가 하는 것은 매우 큰 잘못이다.


만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속해있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마치 하나님에 대해 자신의 의무를 혼자 수행할 수 있는 것처럼 크리스챤이 자기 혼자만 살아가는 개인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인 신앙의 삶에서 타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은 그 특성이 악하고, 또한 온 세상이 악한 자 안에 처해 있으나(요일5:19), 우리는 세상을 대항하여 싸우는데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개혁주의 신자들은 폭군에게 도전했고 또한 그들을 넘어뜨렸다.


낫소의 윌리엄, 오랜지공, 존 낙스, 존 파임, 올리버 크롬월, 리쳐드 카메론, 스코틀랜드의 언약론자들, 그리고 존 위더스푼(William of Nassau, the Prince of Orange, John Knox, John Pym, Oliver Cromwell, RichardCameron, the Scottish Covenanters and John Witherspoon), 등 이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유산이며, 이 세상에서 어떻게 크리스챤으로 살아가며, 어떻게 신앙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를 우리는 그들에게서 배우게 된 것이다. 우리는 어두움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폭군의 광포도 우리에게 공포를 주지 못한다. 우리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니 어째서 무서워하겠는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16:33).


이와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계11:15)하게 될 그 날을 향하여 열심히 일해야 할 것이다.

2. 한국교회와 개혁주의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은 정확히 말해서 유럽의 칼빈주의(개혁주의)와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 사상이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신학이다. 이 신학은 칼빈주의적 영미 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에 전래되어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 되었다. 그리하여 한국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표준을 교의와 규례의 표준으로 채용함으로써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의 교회가 된 것이다(박형룡,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 신학지남, 제43권 3집, 1976. p. 11 참조).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를 출발점으로 하고, 칼빈주의 5대 교리, 문화적 명령, 그리스도인의 삶 등으로 전개된 개혁주의, 여기에 독특한 신학적 특징들이 가미되어 이루어진 청교도주의 등이 한국장로교 신학의 전통이 된 것이다.


1885년 4월 5일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 목사가 한국에 온 이래 1938년까지의 한국교회는 매우 강한 개혁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자유의 바람이 일기 시작하였고, 1938년 9월에는 신사 참배 결의라는 일대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1945년 해방을 맞으면서 한국장로교회는 대열을 재정비하고 개혁주의 수호와 발전을 위해 박차를 가하였으나, 6.25 동란, WCC 운동, 교단의 분열 등 원하지 않는 일들이 계속 발생하여 개혁주의 신학성장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한국에서의 칼빈연구 100년"(이상규, 개혁주의 신행협회, 1985)에서 볼 수 있는 대로, 1924년 칼빈이 처음 소개된 이래 1984년까지 60년동안 칼빈의 저서 번역, 칼빈에 관한 저술, 논문 등을 모두 합쳐 240편밖에 나오지 않은 사실을 미루어 보더라도, 스스로의 노력도 부족했거니와 외적 여 건에도 상당한 지배를 받은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후 칼빈 주석 전질과 기독교강요가 번역되고, 칼빈에 관한 저서, 논문들이 상당한 양으로 출판, 또는 각 신학지에 게재된 것을 보면 아직도 한국교회의 개혁주의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IV. 맺는말


복음주의, 근본주의, 개혁주의 비교
우리는 위에서 복음주의, 근본주의, 개혁주의 등 3대 신학운동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복음주의가 17세기 이후 독일에서 루터교회의 죽은 전통에 불만하여 생긴 경건주의 운동에서 파생된 운동이며, 근본주의가 20세기초 미국에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동으로 생긴 신학운동이라고 한다면, 개혁주의는 바울, 어거스틴을 거쳐 16세기 칼빈에 의하여 체계화된 사상운동이다.


복음주의가 경건을 강조하고, 근본주의가 근본교리들(성경의 무오성, 그리스도의 신성, 동정녀의 탄생, 대속교리,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을 주장하고, 하나님의 영광보다 인간의 구원을 더 강조한다면,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主權)을 강조하고, 이 근본원리에 따라 모든 문제들(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신학)을 풀어 나가려고 노력한다.


복음주의와 근본주의 운동이 다 귀중한 운동이나, 성경이 말하는대로의 교리적 균형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커다란 결함을 가지고 있다. 성경은 교훈의 건전성과 관련있는 균형을 중대시하고 있는 것이다(딤전1:9; 6:3; 딤후1:13).


우리 한국교회는 앞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며, 하나님의 문화적 명령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지고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 건설에 힘쓰는 운동에 동참하여야 할 것이다.

 Richard Gamble (RTS), 개혁주의와 복음주의 상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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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샘

org date: 2011. 12. 26. 16:55 

 

한국에서는 보수적인 장로교의 교세가 강하다. 특히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단과 교세가 많다. 
그런데 내가 모태신앙이면서도 교회에서 칼빈주의라는 말을 들어보았어도 칼빈주의가 무엇인
지 신학교에 가기 전까지는 제대로 들은바가 없다. 그저 자유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지켜야할
신학의 보루라고만 여겨져 왔다.  한국교회의 전통이 신학보다는 목회, 교회 성장에 관심이 많
아서 그럴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신학교에 와서 비로소 칼빈주의에 대해 배우게 되었고 개혁
주의를 배우게 되었다. 

개혁주의를 배우면서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모른다. 신학교, 신학생들의 부정적 모습 때문에
신학교 가는 것을 만류하던 주위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런데 막상 신학을 공부하면서 왜 진작
5년 전쯤 일찍 시작하지 않았는지 후회가 되었다.  신학공부는 그저 신학교에서 지식적으로 신학
을 배우는 것에 그치려던 내게 많은 도전을 주었다.  청년기 신앙생활에서 고민했던 것들을 신학
적 사고를 통해 재조명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가 표방하던 개혁주의가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깊고 혁신적이고 우리 삶을 흔들어 놓는지 깨닫게 되었다. 흩어진 파편같은 일상의 신앙 
고민들이 연결되고 더 깊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동시에 많은 목회자들이 신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배운 신학을 목회에 적용하는 경우는 드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신학교에서 개혁주의
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탓도 크다고 본다.  일례로 총신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온 목사도
개혁주의의 핵심 개념을 명확하게 요약해내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그저 신학 교과서를 지식적
으로 배우고 외워서 공부하여 졸업했으니 신학적 사고가 부족한 것이라 여겨진다.  그에 비해 
나는 신학적 사고를 강조하던 교수로부터 신학을 배우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한국교회가 크게 성장하고 세계선교에 더 많은 참여를 하고 있다는 통계를 보면서도 목회 현장
의 현실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 없다.  개혁주의 신학을 목회에 적용하지 못해서 교회가 세속화 
되어가고 자유주의, 성장주의에 밀리는 것 같다.

개혁주의를 더 깊이 있게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가서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조직신학을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은 현대신학에서 개혁주의는 소수라는 것이다. 현대신학에서
는 복음주의가 더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단순히 교회사 속에서 운동(movement)으로 시작
되고 발전해 왔던 복음주의가 아니라 신학적 체계를 세워가는 신학적 복음주의를 보게 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현대신학에서 복음주의에 비해 개혁주의의 학문적 기여가 매우 적고 제한적이라
는 것이다.  복음주의의 한계를 보면서 개혁주의가 더욱 현대신학의 논쟁에 참여하길 바라마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몇 개 남아 있는 개혁주의 신학교마저 흔들리는 모습뿐이었다.  미국에 
개혁주의를 배우러 왔지만 오히려 구석에 몰려 있는 개혁주의의 현실을 보고 실망이 많았다. 

그러나 공부를 하면 할수록 논문을 쓰면서 드는 생각은 개혁주의가 현대신학에서 가장 성경적인 
신학이라는 것이다. 학문적 토론의 장에 적극 참여하고 다원화된 복음주의 미래를 바르게 이끌어
가는 것도 개혁주의라고 확신한다. 포스트 모던시대에 개혁주의가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화려
한 논리보다 더욱 두텁고 포괄적이며 깊이 있는 방향으로 개혁주의 신학이 연구되고 발전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Posted by 작은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