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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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6.04 [펌] 가정교회 학술토론 1
  2. 2021.06.04 사랑의 목회
  3. 2021.06.04 교회개척
  4. 2021.06.04 건강한 교회?

2012-01-27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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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에 목숨 걸 자신이 없다면 가정교회를 하라. - 코람데오닷컴

11월 1일 고려신학대학원(천안) 대강당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600여명의 청중들이 내뿜는 열기보다는 발제자와 패널들이 내뿜는 열기가 뜨거웠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유해무 박사가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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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에 목숨 걸 자신이 없다면 가정교회를 하라.

- 유해무 박사, 신대원 “가정교회” 학술대회에서 어필

 

11월 1일 고려신학대학원(천안) 대강당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600여명의 청중들이 내뿜는 열기보다는 발제자와 패널들이 내뿜는 열기가 뜨거웠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유해무 박사가 가장 강한 톤으로 청중들에게 어필하고 페널들의 집중적인 질문공세를 받기도 하였다.

이 자리에 참석하였던 모 일간지 기자는 참석해 본 중에 가장 재미있는 학술대회였다고 평할 만큼 뜨거운 논쟁에 비하여 시종일관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고 간혹 위트 있는 말솜씨로 청중이 지루할 겨를을 주지 않았던 것도 이번 학술대회의 큰 장점이었다고 할 것이다.

주제 발표

첫 번째로 등단한 변종길 박사는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가정교회는 성경적인가?’ 라는 주제로 발제하였는데 신약 성경 어디에도 최영기 목사가 주장하는 가정교회 형태의 교회를 발견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가정교회를 초대교회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무리라고 진단하고 가정교회의 내용을 장로교화 시킨다고 하더라도 용어는 그대로 받기가 어렵다고 주장하였다.

두 번째로 강단에 선 이상규 박사는 교회사적 관점에서 “교회사에서 본 가정교회”라는 주제로 나서 “공식적인 집회소로서 예배당 건물이 발견된 것은 256년 유프라데스강 상류지역에 위치한 두라-유로포스(Dura-Europos)에서였다”고 서두를 뗀 뒤 150년까지의 신자들의 집회장소는 가정집이었고 150-250년 어간에는 주택을 개조하여 집회소로 사용하는 시기였고 250년에서 313년까지는 큰 건물형태의 집회장소가 대두되었다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가정에서 회집하고 가정에서 목회가 이루어지고 성례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정교회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으로 그는 가정교회 문제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장로교회의 신학과 예배, 의식 등 장로교회의 예배와 교회구조도 16세기를 거쳐 제도화되었다. 새로운 제도는 항상 상당한 저항과 반대에 직면했다"면서 “가정교회 운동은 셀교회와 마찬가지로 과거에 있었던 여러 목회방식 중의 하나로서 일종의 목회 프로그램이라고 생각된다. 변화된 환경은 새로운 목회 방식을 요구하는데, 가정교회는 이런 현실의 반영이고 이런 방식 또한 한 시대의 유행일 수 있다는 점에서 너무 긴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 된다”고 주장했다.

세 번째로 등단한 유해무 박사는 “설교에 목숨 걸 자신이 없다면 가정교회를 하라”고 일갈하여 참석자들이 순간 긴장하였는데 이어 “개혁교회론에는 평신도 사역이라는 개념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개혁교회의 사역자는 가르치는 목사만 있을 뿐이고 평신도는 가르침을 받은 대로 세상에서 살아갈 뿐이라는 평소 교의학적 지론이 뒷받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목회 방법론으로서 가정교회론의 특성은 참고할만하다고 하면서 가정교회를 장로교의 옷을 입혀 도입하려면 하되 굳이 성경에서 억지로 그 근거를 찾으려 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제 가정교회를 시행하고 있는 교회들은 개혁교회의 전통과 교회법을 존중하는 새로운 모델을 계발해야 할 단계에 와 있다. 공교회성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가정교회론을 남에게도 넘겨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고신교회의 신학은 방법론을 개발할 뿐만 아니라, 도입되는 방법론에 대해서 시의적절하게 평가하고, 목회 현장에서 공교회성을 확립해야 할 것이다”고 결론지었다.

마지막으로 발제한 김순성 박사는 실천신학적 관점에서 “가정교회 소그룹 구조와 기능의 실천신학적 의의”라는 주제로 발제하면서 다분히 가정교회의 장점을 부각 시키는 면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가정교회는 한 마디로 교회의 공동체성을 지향하는 다기능적 소그룹 교회운동이다. 종래의 소그룹 운동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면 구조적인 면에서 개인중심이 아니라, 공동체 중심이며, 기능적인 면에서 복합적이고 종합적이라는 점이다”라고 정의하면서 가정교회의 특징을

첫째, 공동체 중심의 사역의 장(場)이다.
둘째, 평신도 중심의 사역의 장(場)이다.
셋째, 목양기능을 지닌 사역의 장(場)이다.
넷째, 삶의 나눔을 통한 친교와 치유사역의 장(場)이다.
다섯째, 영혼구원 중심의 전도와 선교사역의 장(場)이다.
여섯째, 성경적인 제자훈련의 장(場)이다. 라고 진단했다.

그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겨야 한다. 중요한 것은 새 부대가 새 포도주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새 포도주가 새 부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가정교회 소그룹은 새 부대이지 그 자체가 새 포도주는 아니다. 그러므로 그 부대에 무엇을 담는가는 여전히 목회자의 몫이다”고 결론지었다.


토론회
 
이날 토론회에 나선 패널들은 가정교회를 성공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김낙춘 목사(한영교회) 조태환 목사(울산큰빛교회) 이문식 목사(산울교회) 강경민 목사(일산은혜교회) 권상준 장로(구미남교회) 정성수 장로(울산큰빛교회)가 참석하였다.

이들은 한 결 같이 가정교회의 장점과 장로교회가 시행함에 있어 하등 문제가 없음을 강조하였으며 장로 패널들은 “단점을 말하라 하는데 단점은 없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다. 장로의 직분을 제대로 하는 것 같다”고 대답해 발제한 교수들을 당혹케 하기도 했다.

가장 이슈가 된 부분은 용어 문제였다. 변종길 박사나 유해무 박사는 가정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변 박사는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다 보면 교회에 어려움을 왔을 때 쉽게 붕괴되고 이탈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었고 유 박사는 목사가 없는 가정에서의 모임을 교회라고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사회를 맡은 김순성 박사는 가정교회에 우호적인 입장에서 중재에 나서 보았지만 팽팽한 입장 차이는 줄어들지 않았다. 가정교회를 주장하는 패널들은 교회라는 용어에 어떤 의미를 두고 있어 ‘교회’를 뺄 수 없다고 주장하고 그렇다면 더욱더 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고 두 박사는 강하게 입을 모았다.

그러자 김순성 박사는 다른 대체 용어는 없겠는가 하고 청중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에 천헌옥 목사(코람데오닷컴 편집장)가 나서 두 쪽 다 둘 다 양보할 수 없다고 하니 ‘가정’ 이라는 용어와 ‘교회’라는 용어를 함께 사용하는 방안으로 ‘교회가정공동체’라는 것은 어떠할지 제의했다. 쉽게 말해 ‘ㅇㅇ교회가정공동체’ 줄여서 ‘교회가정공동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가정교회 목회자들은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제가 가정교회에 대해 끝까지 비판자로 남는 것이 가정교회의 발전에 유익이라는 점을 기억하시라”는 유해무 박사의 평행선 전투발언과 같이 명칭 자체도 앞으로의 숙제로 남겨지면서 학술대회는 뜨거운 열기를 반영하듯 시간을 넘겨 막을 내렸다. 
 
위 발표된 논문은 연구보고및 발표논문방에 준비되는데로 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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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샘

org date: 2012. 1. 11. 22:50

 

마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주는데 익숙하지 않다. 예수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내어주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십자가의 복음의 의미이다.  복음을 전한
다고 하면서 말로만 하고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의 사랑,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을 보여
주지 않으니 복음의 능력이 발휘되지 못한다. 전도를 당하는 사람들은 전도지를 나누어주
면서 전도하는 사람, 들이대는 사람들을 뭔가 자신들로부터 뺏어가는 사람으로 인식하기 
쉽다. 내 시간, 내 돈, 가정의 평화를 뺏어가고 오래동안 지켜온 내 가치관이 판단받고 무시
당하는 것 같을 것이다.

지금의 교회의 전도에 대한 인식이 뭔가 뺏는 것이라는 것은 교회 내에서도 마찬가지로 여겨
진다.  교회간의 수평이동이 그것이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개척교회부터 뭔가 번듯하게
건물을 세우고 안정을 취하고 싶은 100 -200 명 정도의 교인 수의 교회들은 절박하다. 

한 사람, 한 가정이 아쉽다.  그래서 전도가 뺏는 생존경쟁으로 비추어지는 것이 불편한 진실
이다. 각종 편의 제공과 익명성의 잇점이 있는 대형교회들은 더욱 많은 교인을 빨아들인다.
그러고도 중형교회들로 나누어지기를 거부한다. 

'뺏는' 목회는 약육강식의 세상과 닮아 있다. 세상은 점점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더욱 
뺏는 것이 정당화되고 있다.  시장경제가 더욱 그렇다.  능력있는 자가 더 많이 차지하는 것
이 당연시 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뺏는'목회는 아무런 설득력도 없고 기독교 정신도 아니다. 복음은 사랑이다.
나 자신까지 내어주는 사랑이 예수님의 복음을 잘 표현한다.  뺏으려는 탐욕을 감추고 사랑을
가장하면 상대방은 그것을 알아챈다.  그냥 조건없이 주어야 한다. 

주는 것은 내가 가장 못하는 것이다.  그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 여기고
주는 것도 사양하고 내가 잘 주지도 못한다. 이런 내가 사랑의 목회로 교회를 시작한다면 
얼마나 어려울까?  나도 이렇게 어려운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는 사랑으로 전도하고 
그 사람이 또 그 같은 사랑을 보여주기를 기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그래도 그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이고 전도의 바른 길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생존에
얽매이지 않고 사랑에 집중하고 사랑의 복음 사역에 집중하는 교회를 세워갈 수 있을 것 같다. 
수에 얽매이지 말고 동역하는 사람이 있는 한 계속해서 사랑의 사역에 힘쓰는 교회라면 끝까지
해볼만 하지 않은가? 주위의 교회를 긴장시키지 않아도 된다. 경쟁이 아니라 사랑으로 대하면
된다.  내 교회 주위에 많은 교회가 있으면 어떤가? 사랑의 사역을 하는 교회는 많아서 나쁠
것도 없다. 크기가 작아도 할 일은 있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서로 도우면 된다. 
번듯하게 이름을 내고 폼을 잡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작은 교회들이 
나아가야할 방향이 아닐까? 

개척교회 목회자들은 많이 지쳐있다. 매일 생계를 걱정해야 한다. '뺏는'목회의 현실에서 사
랑을 베풀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 모른다.  좀 경제적 여유가 있는 교회에서 
이런 개척교회들을 도우면 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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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샘

교회개척

2021. 6. 4. 15:40 : 신학/목회신학

2012. 1. 11. 21:17

 

교회개척

사역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교회를 개척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하다가
어떤 교회를 세워야 하는가를 두고 많이 고민하였다.  그러나 뾰족한 답은 없었다.

주위에 세워지고 사라져가는, 또 겨우 간판을 떼지 못하고 버티고 있는 수많은 작은
교회들을 보면서 고민했다. 그 같은 교회를 또 하나 세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돌아다녀 본 중형교회들의 설교가 말씀 중심적이지 못한 것을 보면서 말씀을 잘 가르
치는 교회가 필요할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내가 자신있어 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를 세우려면 당장 건물을 구해야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다. 빚으로 세워진
개척교회가 건물과 인테리어를 안고 버티다가 사라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무슨 일이 있어도 성도가 어느 정도 모이고 나서 건물을 구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되
었다.  그러나 아무런 개척 멤버가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사람을 만나고 전도해서 동
역자로 세운단 말인가?  요즘은 교회개척은 물 건너 갔다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시대이다.
사람들은 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가면 만날 방법이 많지 않다. 

언젠가 동료 목사가 전해들었다는 어느 목사님의 말이 딱 맞다. 요즘 교회개척은 마치
교회 개업과 같다. 투자하여 가게를 먼저 마련한 후에 사람들이 모여들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주위에 간판을 달고 있는 작은 교회들에 과연 성도들이 얼마나 모이고 있을까?
교회란 성도들의 공동체인데 건물이 먼저 우선이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무리를 해서 집회 장소를 구하고 간판을 달았다고 해서 바로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으면
곧 바로 생존의 문제로 넘어간다.  영혼을 구원하고 복음 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교회를
유지하게 위해 사람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재정도 큰 문제이다.  빚 더미 위에 앉기
쉽다. 주위 사람들에게 큰 부담을 지게 된다. 왜 이 교회가 세워져야 했는가에 대한 대답
은 없이 그저 생존을 위한 몸부림만 남게 된다.  이미 크고 작은 교회들로 가득 차 있는
동네에서 또 교회를 세우면 주위 교회의 담임목사들의 눈총을 피할 길이 없다. 경계의 눈길로
본다.  이런 현실은 뭔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교회를 개척하면 처음에는 전도지를 뿌리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주위에 아는 사람이 별
로 없으니 알리려는 것이다.  그런데 전도지 뿌려서 전도가 되는 경우가 별로 없다. 사람
이 별로 없으니 관계 전도도 잘 안 된다. 

교회를 세우는 것이 어렵다면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까지 어떤 것이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을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인터넷 공간에서라도
말씀을 전하고 접촉하고 소통하는 것을 준비하고 있다.  그것은 계속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 또 한 가지를 깨닫게 하신다. 

사랑의 목회이다. 주는 목회이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시면서 우둔한 내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가기를
원하고 계심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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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샘

org date: 2011. 12. 26. 16:30 

건강한 교회?

요즘은 교회 주보를 보면 나름대로 교회를 소개하는 타이틀이 붙어있는 것을 자주본다.
최근 몇년 전부터 기업 경영적 관점에서 비전을 분명히 하기 위해 핵심 가치를 선명하게
제시했던 것이 이제 교회에 들어와서 유행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문제가 있다.

기업과 교회는 그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기업은 나름대로 핵심가치를 정하고 제시할 수 있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다. 또한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는 이미 성경에 제시되어 있다. 각 지역
교회가 임의대로 핵심가치를 부여할 권위도 없다. 지역교회가 강조점을 어디에 두겠다고
정할수는 있지만 하나님 말씀에 따를 때만 정당성을 인정받을 것이다. 우리 교회는 어떤
핵심 가치를 가진, 어떤 비전을 가진 교회 라고 광고하고 자랑하는 것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다.  머리되신 예수님이 강조되어야 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면 충분하다.

어찌되었든 이미 정하기로 한 것이라면 소위 '핵심가치'는 교회마다 크게 다르지 않아야
한다. 좀 더 나아가 교파, 교단에 따라 좀 다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신학을
따르는 교회가 정하는 핵심 가치와 주장이 서로 상이하다면 문제가 있다.

교회의 핵심가치와 주장은 신학을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구체적
으로 목회자가 지향하는 목회의 신학이 분명히 드러나는 곳은 어디란 말인가?

요즘 '건강한 교회'를 지향하는 교회들이 상당히 많다.  교파싸움, 신학싸움에 진저리
가 났는지 신학적 표현을 쓰지 않으려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누가 보기에도
중립적인 '건강한 교회'라는 표현을 쓴다.  일단 듣기에 초교파적이고 건전해보인다.
'웰빙'이니 하면서 건강을 중요시하는 시대의 흐름과 맞아 떨어지는 것일까?

그런데 무엇이 '교회의 건강'인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저 서로 싸우지 않고 적당한
양육 프로그램이 있고 사회적 기여도 하면서 '신학 냄새'를 드러내지 않으면 건강한
교회일까? '건강한 교회'는 신학과 상관없이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기 때문에 자유주의
교회나 보수주의 교회 모두 신학과 상관없이 사용할 수 있다.  '건강성'에 대한 정의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교회 역사적으로 보면 보수주의 혹은 전통적인 개혁주의 교회가 자유주의와 싸워온
것은 그저 당파싸움이 아니라 중요한 신앙고백과 관련된 싸움이었다.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교회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 교회의 '건강'이라는 말은 교회의 정체성과 상관없이 모나지 않고 무난하게
성장하는 교회를 지칭하는 말이 되어버린 것 같다.

요즘은 교회 성장이 가장 큰 관심사이다 보니 교회가 성장하는 것과 '건강한 교회'를
관련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양적성장만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질적성장이 '건강한 교회'로 표현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교회의 건강이 무엇이냐에 대한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건강한 교회'
를 핵심가치와 비전으로 제시하는 것은 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 가능성이
많다.

개혁주의 교회는 개혁주의를 추구하는 것, 성경과 하나님중심의 교회를 추구하는 것이
가장 건강한 교회가 될 것이다.

'건강한 교회'라는 말은 또 다른 문제점이 있다.  교회의 상태를 단순히 건강한 것과
병든 것으로 보는 관점이 문제이다.  교회는 완전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다.  항
상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성화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성도들의 모임이다.  '건강한 교회'
라는 말이 교회의 영적 상태에 대한 잘못된 환상을 심어줄 수 있다.  '우리교회는 건
강한 교회'라는 말을 할 때 문제가 없는 교회인 것처럼 착각할 수 있다. 특히 대형교회,
유명한 교회에서 그럴 가능성이 많다.

교회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한다.  그러나 어떤 시점에서 교회 전체
혹은 그 안의 성도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다고 해서 교회가 건강하지 못
하다고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한 번 하나님께 순종했다고 '이 교회는 건강하다'고
단정지을수도  없다.  순종과 불순종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교회가 건강한가는 교회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는 말로 사용되는데 적절하지 않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영적 상태
를 판단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이다. 교회는 그것을 향하여
나가야 한다.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가고 있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건강/불건강이란 말이 어떤 임상적 치료만 받으면 곧 불건강이 건강하게 될 것 같은 생각
에 빠지기 쉽게 한다.  신앙생활은 그처럼 단순하지 않다.  끊임없는 영적싸움의 연속이다.
전쟁이 계속되고 있을 때는 한 번의 승리가 아니라 전쟁이 끝나기 까지 어떻게 계속 싸워
나가느냐가 중요하다. '건강한교회'라는 말로 영적인 긴장감을 늦추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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