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삶

org date: 2012-01-27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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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안수에 대한 김세윤 교수의 반박에 대한 재반박 ]

 

                                                                                                                                                          서창원 목사

 

성경도 제대로 읽을 줄도 모르고 신학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식한 불초 소인을 대신학자께서 매섭게 질타해주심에 대해 먼저 감사하는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그동안 속에 담아둬 온 자신의 명백한 실체를 여성안수 문제와 관련해 용기 있게 밝혀 주신 대학자의 양심에 박수를 보내드린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쳐 주셨다. 하지만 그것이 가부장적 사회에 있었던 남성 위주의 가르침이고 모두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여’라고 기도하는 여성 신학자들과 여권주의자들의 집요한 여성안수 허용 제기를 환영하면서 그들의 대변인임을 자청한 김 교수의 논리를 이해하려 했으나 무식한 필자로선 납득할 수가 없다.

 

본인은 김 교수의 지적처럼 무식한 목사이요 모순투성이의 글밖에 쓸 줄 모르는 자로서, 세계적인 대학자요 인생의 선배이신 김 교수께 다시 한번 무식한 반론을 제기할 수밖에 없음을 밝힌다.

 

성경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는 학자의 주장이기 때문에 겸손하게 받아들이고자 읽어보았지만 안타까운 생각뿐이다. 성령의 온유한 열매를 위해 기도하면서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워낙 김 교수의 명성과 학문의 업적 때문에 마치 그런 주장이 성경을 제대로 읽는 제정신의 소리인양 우매한 자들의 생각을 굳게 할까 봐 우려하는 아픔을 무식하게(?) 표현하고자 한다.

 

더구나 오늘도 한 영혼, 영혼들을 가슴에 끌어안고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수많은 개혁주의 목사들을 이단시하며 그동안 남성들만 누려온 특권을 여성에게도 그 직책을 수여하는 것만이 교회의 참된 개혁인양 부르짖는 대학자의 논지는 처절하기 짝이 없다.

 

현대 신학의 흐름과 학자들의 학문 그리고 신앙 인격은 분명 별개의 것임을 김 교수의 논지가 증명하고 있다. 현대 학문의 장은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 믿지 않고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유의 주재자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요 죄인의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탁월한 학문적 업적을 이룰 수 있는 풍토이다. 학문이라는 또 다른 권위(우상) 아래 교회를 성경 진리에서 이탈하게 하는 모든 불순 세력들에게 임하실 주님의 징계를 두려워한다.

 

지금까지 학문이 교회를 이끌어온 것은 아니다. 교회로 하여금 수없이 많은 장애를 딛고 역경 속에서 하늘을 향해 여전히 서 있게 한 것은, 성경 진리에 대한 굳건한 신앙이었다. 영원불변의 진리인 성경 말씀이 종교적 전문가의 주장에 의해 퇴색하고 변조되는 우가 발생하고 있음에 대해 경각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만인 제사장론에 대한 반론

 

필자가 이전의 글에서 만인 제사장론에 대해 언급한 것은, 김 교수께서 그렇게 주장하였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김 교수의 글을 반박하면서(참고로, 필자가 글을 썼을 때는 김 교수의 책이 출판되기 전이었다. 필자는 5월호에 실린 김 교수의 글을 보고 글을 써서 원고를 보낸 상태에서 김 교수의 책이 출판되었다는 소식을 「목회와 신학」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일부 여권운동주의자들이 만인 제사장론을 들고 나온 것을 거기에 첨부한 것뿐이다. 문맥상 그렇게 비쳐졌는지는 몰라도 실지로 그것이 김 교수의 주장이라고 말하지 않았음을 먼저 분명히 밝힌다.

 

그러나 만인 제사장론을 토대로 여성안수 문제와 관련해 한마디 언급한다면, 마치 보수주의 목사들만 스스로 제사장으로 간주하여 구약의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오도하는 김 교수의 글은 분명 잘못이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성도들은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을 읽어보지 못했는가? 그리고 마태복음 5장 20절 말씀을 읽었다면, 개혁주의자들을 율법주의자들이라고 함부로 정죄하지 못할 것이다.

 

필자는 보수주의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차라리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의로운 모습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런 소리를 듣는다면 영광이겠다. 그렇지 못한 필자를 그렇게 불러주니 황송할 따름이다. 그러나 율법주의가 무엇인가? 적어도 구원에 있어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과는 달리, 우리의 공적을 드러내고 강조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보수주의자들이 어떻게 율법주의자란 말인가?

 

우리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교훈을 따라 주 예수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임을 어느 신학자들보다 명확하게 천명하는 사람들이다. 율법주의는 배격하지만, 율법은 여전히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다.

 

 

 

다수 보수주의자들과 가정 사역 전문가들이 유교적 가부장적 생활을 한다(?)

 

유교적 가부장적 생활이 비성경적이고 개신교 신학 전통에 어긋난다는 김 교수의 지적은 옳다. 그러나 가부장적 흐름은 한국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이 아니다. 구약에서 이미 발견되는 가장 오래된 사회 제도이기도 하다. 실지로 나쁜 의미로 가부장적 영향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지, 성경은 좋은 측면에서 올바른 제도임을 지지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남자를 먼저 만드시고, 다음에 여자를 만드셨다. 타락이전에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남자인 아담하고만 말씀하셨다(창 2:15절 이하).

 

더구나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었는데,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경에서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권위를 가리킨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동·식물들을 다스리고 번성케 할 책임을 가진 권위자라는 의미이다. 놀라운 것은 아담의 이름은 하나님이 직접 지어주셨지만, 여자인 하와의 이름은 아담이 지었다는 사실이다(창 2:23).

 

히브리인들의 이름은 그 사람의 성품이나 역할을 나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하와의 이름을 지어줄 때 그것 역시 여자에 대한 아담의 머리 즉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부분을 시사한다. 그것이 타락 후에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되어진 것처럼 말하는 김 교수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억지이다(김 교수의 책, p18).

 

때로 구약에서 어머니들이 자녀들의 이름을 지어주기도 하는데, 그것은 자녀들을 통솔하는 권위를 나타내는 일이다. 어머니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부모로서 자녀들에 대한 권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지어 주셨다는 점이다. 창세기 5장 2절은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고 말씀하신다.

 

특별히 남자(아담)와 관련되는 또는 여자와 구별되는 단어로 인간의 이름을 지어주신 것은 남자에게 속한 리더십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것을 가부장적 유교 사상으로 치부하는 것은 비난하기 위한 비난에 불과한 것이다. 또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선악과를 따 먹고 타락한 후에 누가 따 먹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금지의 열매를 먹은 하와를 먼저 불러 말씀한 것이 아니라 아담을 먼저 불러 말씀하셨다.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을 아담에게 물으신 것이다.

 

즉 가정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첫 번째 책임자로 바로 남자인 아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김 교수가 지적하는 여성의 남성에 대한 종속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창세기 3장 16절 이전에 있었던 사실임이 의미심장한 것이다.

 

그리고 하와가 범한 죄와 관련해 성경 어디에서도 하와가 범죄하여 세상에 죄가 들어왔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죄 가운데 출생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하와에게 주어지지 않은 역할인 인간에 관한 ‘머리’를 가리킨다. 이 때문에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쓴 편지에서 여자의 머리가 남자임을 천명하고 있는 이유이다. 여성의 리더십 문제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지 결코 문화적 양보에 의한 것이라거나 덕을 세우기 위한 측면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더구나 저주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 새로운 역할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타락 이전의 아름다운 관계를 더욱 왜곡시켜버린 것이다.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벌을 보라. 거기에 어떤 새로운 역할이나 기능들을 소개해 주지 않았다. 단지 그들이 이전에 가졌던 기능들에 대한 고통과 뒤틀림을 내렸을 뿐이다. 하나님은 하와에게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와가 남편의 권위를 빼앗으려고 하는 그릇된 욕망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관계 속에 어떤 갈등 구조가 생긴 것과 아담의 권위에 대항하여 반역하려는 하와의 욕망을 억제시키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은 무너진 창조 질서를 새롭게 확증하는 것이다. 죄와 저주의 결과로 주어진 고통스러운 관계가 새롭게 회복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베드로는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으로 알고 함께 하늘나라를 유업을 받을 자’임을 상기시키면서 남편의 권위가 무자비한 것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아내의 순종이 남편의 권위를 세워주는 것임을 확증하고 있는 것이다(벧전 3:7).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의 삶에서도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엡 5:22~23). 복종이라는 단어 자체가 의미하는 것과 주께 하듯하라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분명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는 것은 남자의 권위 아래 여자가 속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타락으로 말미암은 남자의 종속적 관계가 아니라 창조 이전부터 구속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창조 질서 틀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다름을 설명하고 있다.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순종하는 것이 주 안에서 마땅한 일이다(골 3:18).

 

그릇된 가부장적인 관습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제거돼야 할 것임이 분명하지만, 가정에서 남편의 리더십 곧 아내의 머리로서 남편의 권위는 존중돼야 한다. 남자가 가족과 종족을 대표하는 우두머리로서의 역할을 맡는 것은 여자가 열등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아론과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이끈 지도력은 그들이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월등한 존재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임명하셨기 때문이다(민 16:11).

 

아론과 모세의 지도력을 거부한 고라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온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온 회중 중에 계시다고 주장하였지만(민 16:3), 그들의 주장은 하나님에 의해 거부됐다.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되는 것은 인격적 우월성이나 신체적 혹은 지적 능력의 탁월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른 것이었다.

 

이처럼 필자가 남녀의 역할과 기능까지 무시하는 ‘동등성’과 그 역할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평등성’을 구분한 것을 가지고 개혁주의자들의 ‘언어유희’로 몰아붙이면서 남녀 동등성을 펼치는 김 교수의 논리야말로 빈약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지음 받았기 때문에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은 아니다. 그렇다고 김 교수의 지적처럼 늦게 지음 받은 여자가 남자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p17)은 그야말로 얼토당토 않는 주장이다.

 

여성을 남편보다 “더 연약한 그릇”(벧전 3:7)이라는 말씀도 거꾸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단연코 우열의 문제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질서와 권위 차원에서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 있음을 왜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가? 그것이 교회 리더십에서도 나타나는 것임을 부인하려고 왜 그렇게 막무가내인가?

 

 

 

고린도전서 11장 2~16절에 대한 김 교수의 해석은 학문으로 위장한 억지 논리다

 

김 교수는 남녀간의 질서를 가르치는 교훈이 아니라, 여자들이 교회의 공 예배 시간에 기도하거나 예언(설교)할 때 머리에 수건을 쓰고 하라는 가르침이라고 해석하면서 성경을 제대로 읽어달라는 충고를 하셨다. 무식한 목사의 눈에 비친 고린도전서 11장의 내용은 아무리 보아도 김 교수가 결론을 미리 내리고 거기에 짜맞추는 해석을 하는 억지 논리이다. 바울 사도는 2절에서 자신이 “전하여 준 대로 그 유전”을 고린도교회가 지키고 있다는 것을 칭찬하고 있다. “그 유전”은 11장 23절과 15장 1, 3절의 내용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성도들이 알아야 할 것들 중에 여자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기도하고 예언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여성 그리스도인에게도 차별이 없이 동일한 성령의 은사를 부어주심에 대한 요엘 선지서의 성취를 나타내며 그 안에서 여성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자유를 사용하되, 권위 아래서 사용할 것을 가리키고 있다.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것을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7 절의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라는 말씀에서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남자의 영광”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바울은 적어도 고린도교회에 18개월이나 머물렀다. 에베소에서 밤낮으로 쉬지 않고 가르친 3년간의 사역을 생각하면 고린도에 머물 때 18개월 동안 바울이 태만하게 사역한 것이 아니다. 분명히 철저하게 가르치고 훈련시켰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떠나고 난 후에 저마다 은사를 받았다고 난리치고 있는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난 무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가르침이라는 배경에서 11장을 이해해야 한다. 고린도에 머물면서 바울 사도는 분명 교회의 기본적인 규범(Christian ground rules)을 제정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규범을 어기고 무질서하게 행하는 것들에 대해 여성이 그 일을 할 경우, 10절을 염두에 둘 것을 말씀하고 있다.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에 대해 좀 더 살펴보면 두건을 쓰는 것 자체를 권세(exousia)로 표현한 점이다. 이는 기독교인의 자유를 언급하는 차원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권세 있는 자임을 나타내는 것이다(F. W. Grosheide, NICNT, 「고린도전서 주석」, p257). 그래서 RSV에선 권세를 상징하는 표시로 수건으로 번역하고 있고, ASV에선 권세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여성에게 하나님께 접근하도록 허락하시되, 그런 자격이 있는 자의 표시로 머리에 수건을 쓰라고 하신 것이다. 또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그분의 진리를 말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다. 다시 말해, 복음 전하는 사명이 남자 성도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여자 성도들에게도 주어진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나 선지자 혹은 목사와 장로로서 그런 직임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선지자라는 직책과 아울러 여자도 안수하여 장로나 목사를 세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 심지어 초대 교회 역사를 보면, 여성 집사들에 대한 기록이 많이 있음을 본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바실, 데오도레 및 에피파니우스의 문헌 참조). 심지어 니케아 종교회의(325년) 문헌에도 여성 집사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러나 그들을 교회 직임자와 구분되는 평신도로 간주했다.

 

칼세돈 종교회의에서는 그들의 안수 문제를 언급하면서 나이는 40세가 넘어야 하고 미혼이어야 한다고 규정한 것을 본다. 그러나 5세기에 열린 오렌지 종교회의에서 작성된 케논 25조항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여성 집사는 절대적으로 안수 받아선 안 된다. 만일 아직도 안수 받은 여성 집사들이 있다면 그들을 회중에게 주어지는 축도를 받도록 고개를 숙이게 하라.”

 

김교수는 ‘머리’론만 언급하면서 문맥의 어색함을 들어 바울 사도가 논리를 중단하였다고 하면서 ‘권세’(exousia)에 대한 언급은 지나치고 있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나온 것임을 누가 목격하였는가? 천사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 증인들인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에 두라고 11장 10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들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격자가 됨을 표시하는 것이다.

 

김교수는 고린도전서 11장을 자신이 이미 결론 내린 논리대로 해석하기 때문에 14장의 가르침이 모순 되게 보일 것이다. 11장의 가르침이나 14장의 주장은 바울에게 있어서 전혀 논리적 모순이 없다. 남자의 머리론을 말하다가 말발이 안서기 때문에 어정쩡하게 갑자기 중단한 것이 아니다. 머리를 짧게 깎는 것이 남자에게는 자연스러우나 여자에게는 그렇지 않아서가 아니다. 여자가 남자의 권위 아래 있기 때문에 주장하는 ‘머리론’이다. 그것 때문에 남자들이 여성들을 무시할까 봐 11절과 12절을 언급한 것이다. 이 사실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에베소서 5장에서 부부 관계나 골로새서 3장에서 지적한 것과 아주 잘 어울리는 논리이다.

 

더욱이 바울의 일관된 이 주장은 디모데 전서의 주장과도 일치한다. 디모데전서의 내용을 김 교수가 “후대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김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하워드 마샬 같은 복음주의 대부(大夫)격인 분이 바울의 저작을 부인한다고 해서 성경의 영감설을 믿지 않는다고 아무도 주장하지 않는다고 하는데(그런 주장을 하는 자들은 근본주의자들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있다) 만약 김 교수도 그렇게 믿고 있다면 하나의 학설에 불과한 것을 마치 그것이 참된 잣대인양 들이대는 오만을 버려야 한다.

 

그런 주장은 분명 성경의 정경론을 부인하는 행위이며 영감론을 경시하는 학자의 오만이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경 목록에서 바울의 목회서신으로 알고 있는 이 성경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삭제되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돕는 배필”과 여성안수에 대한 김 교수의 해석

 

김교수가 돕는 배필을 해석하면서 인용한 전도서 4장 어디에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돕는 배필이라는 말이 없다. 어쩌면 잘못된 인용 구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돕는 자라고 해서 하나님이 나보다 열등한 분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남자의 돕는 배필이라고 해서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성경 전체를 보고 말해야지 한두 구절만 갖고 그것이 전체 해석의 열쇠인양 말하는 것은 성경학자로서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이다. 하나님이 먼저 아담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그를 에덴동산에 두시면서 에덴동산을 다스리고 지키도록 하시고 또 그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에 관한 규범도 주셨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그의 형상대로 창조한 남자를 자신을 대표하는 피조물의 머리로 삼고,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릴 권위와 책임을 부여하셨다.

 

그후에 하나님은 아담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부여하신 피조물에 대한 권위와 책임을 잘 이행할 수 있도록 그를 위해 돕는 배필, 즉 여자를 창조하셨다. 이러한 남녀 창조와 권위와 책임 부여의 순차는 여자에 대한 남자의 권위를 분명하게 해준다. 이것은 여자를 남자의 돕는 배필로 창조했다는 데서 더욱 분명해진다.

 

‘돕는 배필’이란 원문에서 ‘돕는 자’란 말과 ‘그와 상응하는 자’ 그리고 ‘그와 일치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두 단어의 합성어다. 이를 종합하면, 여자는 남자와 일치하면서도 남자를 조력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자가 남자와 일치한다는 것은 여자의 외모가 남자와 일치한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실과 일치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자도 남자와 동등한 하나님의 형상임을 가리키며, 따라서 남자와 여자는 존재론적으로 동등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평등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남자가 갖는 존재론적 존엄과 가치에 있어서 여자는 남자와 동등함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돕는 자’란 양자 사이의 질적 양적 우열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양자 사이 관계에서 한 사람이 주도하는 것에 대해 그와 관계한 사람이 그를 도와 그가 해야 하는 모든 일의 목적을 올바르게 성취하도록 하는 보조적 기능이 있음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하나님과 그의 언약의 백성들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그들의 돕는 자로 호칭되는 것에서 이점이 잘 들어나고 있다. 이러한 호칭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 혹은 언약의 백성이 주도적으로 하는 일에 하나님이 도와서 그 목적을 올바르게 성취하도록 하는 것을 나타낼 뿐, 하나님이 그들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돕는 자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여자를 창조하여 남자의 돕는 자가 되게 하신 것은 남자가 여자에 대하여 우월하거나 여자가 남자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남자가 주도하는 일에 여자가 참여하여 그 일의 목적을 온전하게 성취하도록 해야 한다는 여자가 남자에 대하여 갖는 기능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를 남자의 돕는 배필로 창조하신 것은 남자와 여자가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동등성을 갖지만(존재론적 동등성), 하나님께서 피조물에 대하여 남자에게 주신 권위와 그 책임 이행과 관련해 남자의 주도권에 여자가 참여하여 보조적 역할(기능적 종속성)을 하도록 남녀의 관계를 설정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그들을 한 몸이 되게 하심으로써 양자가 결혼의 관계를 가지면서 인격적으로 일체가 되어 존재론적 동등성과 기능적 종속성이 완전하게 균형을 이루도록 하신 것이다. 이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하나님의 존재론적/기능적 관계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즉 존재론적으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동등하시지만, 기능적으로 성부가 중심이 되어 성자 하나님을 그의 종으로, 사도로 세상에 보내셨기에 성자는 성부에게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그의 사역자로 세상에 보내었기에 성령은 성부와 성령이 이루신 구원을 피조물의 삶에 실제적으로 구현하는 일을 하신다. 그러면서도 성부, 성자, 성령 삼위는 인격적 일체를 이루어 한 하나님이 되신다. 이러한 인격적 일체 속에서 성 삼위 하나님의 존재론적 위엄과 권위, 기능적 역할이 가장 균형 있고 지혜로우며 능력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와 남녀 인간의 창조와 가정이라는 제도를 창설하시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남자가 여자에 대하여 권위를 가지면서 가정의 가장으로서 역할을 하도록 하신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남자가 가정에 대해 갖는 가부장적 위치와 기능은 문화의 유산이나 당시의 문화적 표현을 빌려 묘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과 전통은 비록 타락의 과정을 거치지만 구속 역사의 전 과정에서 여전히 유지되었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성취되었으며 영광스러워졌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피조의 세계를 구원하시고, 그것을 재창조하신 것이다.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였을 뿐 아니라, 그 영광을 이루신 것이다. 바울은 구약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학자로서 에베소서 5장과 골로새서 3장에서 이점을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천지 창조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남녀의 관계를 일관성 있게 그의 모든 서신에서 반영하고 있지, 모순 된 글을 개진시키는 자가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에 대해 그들이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도록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한 몸이 되도록 창조하였다.

 

창세기 1장 26-28절과 쌍벽을 이루는 구절로 갈라디아서 3장~28절을 들고 있는데, 이것 역시 김 교수께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두 구절 모두 남녀 동등성을 강조하기 위해 주신 말씀이 아니다. 더욱이 후자의 선언은 구원의 대상에 있어서 차별이 없음을 말씀하는 것이지, 그것이 어떻게 여성안수 허용에 대한 주된 판단 구절로 사용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선언문의 적용에 있어서 교회 직분을 수여함과 관련하여 누구도 차별하지 말고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김 교수는 스스로 성경 문맥을 파악하지 못하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그리스도의 몸(교회) 안의 관계들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구성원이 되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자격을 그리스도안에서 모두가 하나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것이 몸 안의 지체들 간에 아무 구별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남녀는 평등하다. 하나님은 구원의 은총을 남녀노소 차별 없이 수여하신다. 그러나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가 있듯이, 이스라엘과 비이스라엘의 구분이 있다. 신약의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구별이 있다. 지체들 간의 구별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그 구별 때문에 하나님은 결코 공의하지 않고 자비하지도 않는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부르고 싶은가? 하나님의 공의가 김 서방이나 김 서방의 공의보다 못한 것인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하심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 테두리 안에서만 적용될 뿐이다.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는 저자거리의 김 서방이나 이 서방이 이해하는 공의와 자비하고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거리가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라는 소명은 목사들만의 것도 아니요, 여성들만의 것도 아니다.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받은 은사를 갖고 하나님을 섬기는 특권을 지니고 있다.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부르심을 받은 소명이 있다.

 

더욱이 복음을 전파하라는 소명은 어린아이 신앙인들에게도 주어진 명령이다. 그것이 목사직의 근거가 아니다. 남성들에게서도 자신이 받은 소명이 확실히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장로회에서 점검하고 신학교에 보내 신학 훈련을 받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의 직임에 해당하는 소명감은 성경 어디에서도 여성에게 허락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천명한다.

 

빌립의 네 딸들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그들은 예언하는 자들로서 선지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좀더 정확하게 지적한다면, 여선지자란 호칭은 예언하는 여자들에게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칭호라는 점이다. 단 누가복음 2장 36절에 안나 여선지자만이 그리스도를 선포한 사실에 근거하여 칭호가 주어졌을 뿐이다. 이것도 안나 여선지자를 구약의 연장선상에 있는 특수한 상황으로 간주한다면, 실제로 신약 교회가 세워진 이후 그 어느 여자에게도 여선지자라는 칭호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훗날 2, 3세기에 있었던 몽타니즘(Montanism)을 신봉하던 브리스길라와 막스길라 두 여인이 선지자로 나서면서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이 있은 후 점차적으로 예언 및 선지자라는 명칭들이 교회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신약의 정경이 형성된 것과 묘한 연관이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Dictionary of N. T. Theology, Vol 3. pp74~89 참조). 초대 교회 문헌들에 나타난 여성들의 활동은 남자들 못지않은 귀중한 것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교회 직임을 받아 남자를 주관하여 가르치고 다스리는 일들은 이단들 집단에서 허용한 것 외에 필자가 살펴본 문헌들에선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있었던 랍비 학자들에 대한 언급(p26)이나 사본학과 역사 비평에 대한 김 교수의 지적은 자신의 박학다식함을 과시하려는 듯하나, 구약의 어디에서도 두 학파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유전을 가르치는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율법의 바른 정신을 심어주신 주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율법을 온전케 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다.

 

중세 1,000년의 암흑기에 교회의 전통과 유전으로 사람들을 억압한 교권주의자들과 오늘날 개혁 교회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김 교수는 간과하고 있다. 개혁주의자들은 칼빈을 완벽한 신학자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믿어야 할 도리와 바른 교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칼빈의 가르침은 그 어떤 것보다 월등하다는 것으로 간주할 뿐이다.

 

중세 시대에는 성경을 일반 신자들에게 주지도 않았고 심지어 상당수의 신부들조차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루터가 복음서를 설교할 때 그들은 복음서를 루터의 저작이라고 말할 정도로 무식했다. 그러나 오늘날 개혁 교회 목사들은 그렇게 무식한 사람들이 아니다. 성도들도 모두 자기 집에 성경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토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종교 개혁자들이 물려준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다.

 

사본에 의해서 아니라, 정경인 성경에 의해서 ‘개혁된 교회는 날마다 개혁돼야 한다’는 구호를 사용하고 있다. 랍비들의 전통으로 돌아가 보자. 그들은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는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말했다. 여성 비하 발언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여성들에게 율법도 가르치지 않았다. 사실이다. 그런 전통 아래서 예수님께서 혁명적인 일을 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이미 율법에서 가르치고 있는 일을 예수님께서 제대로 실천하신 것이다. 율법을 온전케 하시는 분으로서 말이다.

 

신명기 6장에 있는 이스라엘의 대헌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말씀을 아는가? 거기 어디에도 여성에게 율법을 가르치지 말라고 명령한 것이 없다. 도리어 남녀를 떠나 모든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 진리를 왜곡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가르침을 바르게 해석하고 실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렇다면 여성 안수 문제도 지금까지 남성 위주의 목사들이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억압하고 있는 것을 이제 김 교수와 같은 대학자가 나서서 해방시켜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이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한 개혁 교회 목사의 한심한 작태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기초는 명백하다. 그 원리는 만고불변의 원리이다. 종교개혁 시대에 개혁자들이 교회론을 성경에서 회복시킨 것은 원리 자체였다. 그러므로 그 원리에 입각한 개혁 교회 전통은 지금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교회로서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지켜야 아름다운 것이다. 주님께서 하셔야 할 일을 교회가 하고 나선다는 것은 월권이다. 힘을 잃게 된다. 지지를 받을 수도 없게 된다. 교회 역사가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19 세기 말을 전후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역사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들이 역사 비평과 아울러 사본 비평을 수용하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교회가 한 일은 여성안수 허용 문제였다. 자유주의 신학의 틀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거기서 출발한 장로교회는 결국 가톨릭과 손을 잡게 되고 세계교회협의회(WCC)운동의 태동을 열게 되었다.

 

필자는 김 교수에게 한국 교회도 그런 전철을 밟도록 권장하고 싶은지 묻고 싶다. 교회 성장에 대한 이해는 김 교수의 이해와 별 다를 바 없다. 이전의 글에서 던진 필자의 질문은 ‘과연 여성을 안수하여 목사로, 장로로 세운 교단과 교회들이 김 교수가 지적한 것과 같은 영적 성숙함을 이루고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역사가 그렇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고 우리의 현실이 교회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더구나 교회 직임은 교회가 설정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성령께서 각각의 성도들에게 주신 은사에 따라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을 한다. 그러나 안수하여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으신 일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규례에 따라 안수하여 세우는 목사(혹은 장로)와 집사로 한정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들에 의해 규정된 가르침을 준수하는 것이 교회가 할 일이다. 오늘날 누구도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제자들인 사도들이 하지 않은 것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

 

 

 

막달라 마리아가 설교자였다고?

 

마리아가 유대 사회에서 주님의 부활하심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었다는 기록이 어디에 있는가? 여자들의 증거는 도리어 제자들에게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사도들은 저희의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눅 24:11). 명백한 사실은 여자들이 사도들로서 어떤 공적 역할을 소유했다거나 열두 제자와 견줄 수 있는 역할을 했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앞의 글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그 사실을 마치 기자가 독자들의 알 권리를 위해 기사를 쓰듯 제자들에게 알려주라는 것이었다. 만일 막달라 마리아가 설교자로 나서도록 주님께서 허락하셨다면, 예수님의 부활의 첫 증인인 막달라 마리아가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가장 먼저 일어서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사실을 증언하도록 청함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막달라 마리아가 그 사이에 숨을 거뒀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그녀와 함께 간 다른 여성들은 왜 나서지 않았는가?(눅 24:10).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의 부탁을 못 들었기 때문이었는가?

 

예를 들어, 누군가가 미국 땅에 있는 김 교수의 소식을 필자에게 와서 말한다고 하자. 그것을 설교라고 하는가? 비록 초대 교회 복음의 핵심이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한 것이었을지라도, 그 내용들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말해야 하는 복음인 것이다. 그리고 스승의 죽음으로 인해 자기들도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면서 일종의 대책이나 세우고자 있던 제자들의 모임을 ‘공교회’ 모임으로 본다는 김 교수의 주장은 참으로 억지가 아니고 무엇인가? 자신의 성경읽기만이 완벽한 것이라는 생각은 학자의 오만이다.

 

그리고 고린도교회에서 여자들이 예언한 부분에 대한 것을 보면, 김 교수는 “성령의 영감에 호소하면서 성경을 해석하고 성도들을 권면하는 것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로 요즘 말로 하면 설교”라고 했다(p60). 그러나 고린도교회에서 실시된 추상 명사로서 예언(propheteia)은 신약 성경에서 총 19번 사용된 것 중에 5번 언급된 단어이다.

 

베드로나 마태에 의한 기록은 구약의 예언적 말씀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된 데 비해, 바울 사도만 성령의 은사로서 사용하는 예언임을 말하고 있다. 동사 사용은 고린도전서에서만 총 11번 사용되었는데, 기본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즉 성경 해석(구약에 대한)보다 하나님이 방언이나 예언을 통해 성도들에게 주시는 새로운 계시의 말씀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예언을 한 여성들도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여선지자라는 호칭으로 부른 적이 없다는 점이다. 즉 여자들이 예언의 은사를 사용했다고 해서 그것이 장로나 감독의 직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선지자들은 사도들과 더불어 교회의 기초이다(엡 2:20). 오늘날 사도직과 선지자직이 교회 안에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더 이상 그런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계시를 주셔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즉 계시 중단 사상, 다시 말해 신·구약 성경이 정경으로 정해진 이상 더 이상 계시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자기 백성에게 계시해 주시던 구약의 방법은 이미 끝났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 1항). 그 계시는 오직 신·구약 성경 66권에만 포함돼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은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으로 받으며 교회와 신학적 논쟁에서 “최고의 권위”를 지닌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예언’ 혹은 ‘예언하다’는 말을 통틀어 종합할 때, 고린도교회에서 여성들의 예언 활동은 공식적인 선지자 직함을 받아 한 일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부어주시는 성령의 은혜에 힘입어서 성도들이 하나님께 받은 진리를 함께 나눈다는 차원에서 이해돼야 한다.

 

고린도 교회에 허락한 은사 사용함에서 김 교수의 주장을 따르면 오늘날 모든 성도들을 다 안수하여 목사와 장로로 세울 수 있다고 비약시킬 수 있다.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더구나 고린도전서 12장 28~30절과 로마서 12장에 언급된 은사 부분을 말씀한 가르침들과 어긋나는 죄를 범하게 된다.

 

 

 

사본학적 비평이 성경 해석의 원리인가?

 

교회가 언제부터 성경 해석을 위해 사본학을 해석의 열쇠로 받았는가? 사본학이 올바른 성경 이해에 도움을 주는 것에 대해 필자 역시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본 비평이란 학자들의 학설에 불과한 것이지, 사본에 근거한 성경 해석을 가지고 오늘날 교회의 모든 교리와 가르침을 뒤집으려고 해선 안 된다. 그것이 학문하기를 좋아하는 분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도구는 될지 몰라도 정경 해석의 열쇠는 아니다. 김 교수는 한국 교계에 반포돼 있는 주석들을 모두 싸잡아 공해라고 비난하고 있다.

 

김교수가 말하는 ‘월드 바이블 주석, NICNT, NICOT, BST 및 Black NTC’ 등의 주석류들을 필자도 종종 사용하고 있음을 밝힌다. 그렇다고 사본의 내용들 때문에 정경에 수록된 사실들을 감히 변경하여 설교하는 오만함은 나타내지 않는다. 김 교수의 주장이 마치 모든 판단의 정설인양 억지를 부리는 태도는 바르지 못하다. 사본이란 어디까지나 하나의 학설에 불과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에 대한 후대 삽입설을 주장하는 사본이 있다고 하는 김 교수의 주장은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그런 견해를 뒷받침하는 성경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몇몇 사본들이 그 본문을 그 장의 뒷부분(40절 이후)에 놓으려는 경향을 보이기는 하지만, 어떤 사본도 그 본문을 삭제하고 있지는 않다. 그 본문이 난해한 것이긴 하지만, 그 본문을 제거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김 교수가 그 본문을 만족스럽게 다룰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본문을 난도질하는 태도는 학문하는 자의 자세가 아니다.

 

모든 성경학자들은 성경의 정경을 존중하고 신앙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정경이 잘못된 것이라면 공교회가 연합하여 김 교수의 지적 야욕을 만족시켜 주는 새로운 정경 작업을 하루 속히 서둘러야 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먹고 사는 자들의 의무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께서 교회를 온전케 하는데 있어서 신·구약 성경 66권을 정경으로 주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은사를 받아 일하는 목사는 그 진리를 전파하고 가르치며 지키는데 힘을 다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성경을 자기 입맛에 맞게 그리고 시대적인 흐름에 짜맞추기 위한 김 교수의 수고는 학자로서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여권 운동을 줄기차게 주장하는 이들을 제외하곤 결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일이다. 정경을 정할 당시 편집자들이 다른 사본에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있는 것을 없다고 할 만큼 오류를 범했다고 보진 않는다. 교회의 제도와 원리에 관한한 이미 주어진 계시와 그 계시에 대한 성경 해석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훗날 김 교수와 같은 분을 세우셔서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한 그 엄청난 일을 발견케 하여 정경을 수정해야 할 만큼 당시 공회가 죄악을 범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사본 비평에서 얻어지는 생략된 문자, 말, 구절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근본 진리가 바뀌어야 할만한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고린도전서 14장은 사본 비평에 의해서 여성 안수 문제를 허용하여 교회 직분자로 세워야 할 만큼 삭제돼야 할 삽입 구절이 아니다. 필자의 주장이 김 교수의 눈에 무식한 자들의 반열에 서서 무식한 발언을 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정신 차린 말을 하는 것이다. ‘다양한 사본들로 뜻이 달라지고 기독교 교리 체계까지 심각한 영향을 주는 사본들’이 이제까지 발견되지 않아서 편집자들이 성경을 정경으로 잘못 채택했다는 주장을 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스스로 성경 기자와 성경보다 우위에 놓는 오만함이다.

 

김교수의 주장대로 한다면 지금까지 잘못된 성경을 믿고 가르쳐서 이 땅에 교회를 남기고 간 선진들은 모두 ‘성경 해석을 한 번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사람들’의 대표들이 아닌가? 그 들이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친 모든 내용들이 모두 쓰레기란 주장을 어찌 감히 할 수 있단 말인가?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피 흘리신 선배들을 모욕하는 발언은 삼가야 한다. 김 교수의 주장대로 한다면, 그들은 거짓된 해석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잃은 불쌍한 영혼들이란 말인가? 그들의 유산을 따먹고 있는 김 교수는 그들의 무덤 앞에 가서 사죄할 생각이 없는가?

 

사본 비평이나 역사 비평을 공부하여 성경의 바른 해석을 하고 싶으나 “근본주의적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목이 졸리는 상황에서 실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목신, 11월호 p191)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자신의 글을 반박하는 사람에게 독설에 가까운 필력을 휘두르는 것이 전부란 말인가? 김 교수는 히브리서 11장 24~26절을 읽어 보기는 했는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를 위해 능욕 받는 일을 미국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길 용기가 없다면 진리를 위해 목숨을 버린 앞서간 선진들을 욕하고 한국 교회를 어지럽히며 보수주의 교회들을 뒤흔들려는 악의에 찬 발언을 삼가 주기를 부탁드리고 싶다.

 

성경의 정경성은 무엇보다 사도성이다. 만약 신약의 목회 서신이 사본 비평에 의해 바울 사도의 저작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세우신 교회를 위해 남기신 성경이 잘못된 것이고 결국 하나님의 오류라는 오명까지 덮어쓸 수 있게 하는 무서운 죄악이다. 외경으로 간주하는 다다케나 클레멘트전서 그리고 헤르마스의 목자서 등이 정경의 목록에서 제외된 배경은 그것이 사도들이 쓴 것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다.

 

필자가 알기로 정경성의 표지들은 다음과 같다. 사도들이 원저자여야 한다. 혹은 사도들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 초대 교회에 의해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확실하게 정경으로 받아들여지는 다른 책들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교회는 정경을 창출해 내지 않았고 단지 책들이 정경성을 지니고 있다고 인식하고 받아드리며 그것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 인정으로 말미암아 그 책들은 교회 안에서 권위 있는 것이 된다. 이때 종교회의에서 교회가 사용한 말은 ‘레시피무수’(recipimus)였다.

 

즉 ‘우리는 받아드린다’는 뜻이다. 그래서 교회의 제도와 직제 및 예배와 모든 가르침은 모두 정경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저작이 아니라고 한다면, 정경으로서 가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가 지금까지 허망한 것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였으니 그 죄를 어찌 다 씻으란 말인가?

 

 

 

여성 처우에 대한 개혁 교회가 고쳐야 할 일들

 

여성안수를 금하고 있으면서 실지로 개혁 교회는 여성들을 신학교에서 받아들여 훈련시키고 있고, 일부 교회에선 여전도사들에게 때로 설교도 시키고 성경 공부도 시키고 있다. 주일학교 교사들도 여성들이 훨씬 더 많다. 그러면서 안수 문제만큼은 안 된다고 하는 완고함이 있다는 비평은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안수하여 세운 근거가 없기 때문에 할 수는 없을지라도 브리스길라나 뵈뵈가 한 일들, 사도들에게 탁월한 여자로 알려진 유니아가 한 일들은 교회 안에서 얼마든지 하고 있는 것이다. 동일한 학교에서 동일한 교수들 밑에서 동일한 수업료를 내고 신학을 공부한 여성들에 대한 교회에서의 대우가 반드시 달라져야 한다. 그들의 수고와 땀을 교회가 인정하고 남자 목사들이 받는 사례와 차이가 나지 않도록 고쳐한다.

 

필자가 시무하는 삼양교회에도 여전도사들이 있다. 시무 여전도사를 둔 적도 있었다. 그리고 여성들에게 머리에 두건을 쓰라고 강조한다. 개혁 교회나 김 교수의 주장을 수용하는 교회나 이 세상에서 완벽한 교회는 한 곳도 없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에 근접한 바른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노력은 개혁 교회들이 더 앞서고 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개혁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순교자들을 배출해 왔다. 자유주의 교회들에서 대각성 운동이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김 교수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안수 문제를 떠나서 성도는 주님께서 주신 은사를 갖고 주님의 교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여 섬겨야 한다. 상은 우리의 수고한 대로 대목자장께서 주실 것이다(고전 3:8). 이 땅에 최저 생활비도 안 되는 사례비를 받고 교회를 섬기는 목사들도 많이 있다. 그런 자들이나 그렇지 않은 자들이나 모두 주님께서 보시고 있다. 여성안수 문제로 왜 남자 목사들이 다투고 있느냐는 소리도 듣는다. 하나님이 여성들을 목양의 대상으로 주지 않았다면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동일한 상속자들이기에 그들을 위한 수고는 곧 주님을 위한 수고인 것이다. 필자는 여성들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존중한다. 그들의 헌신과 눈물과 봉사로 인해 눈물을 지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목사보다 상을 더 많이 받을 여인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필자는 여성들을 안수하여 세울 수 있는 권한을 주님께로부터 받지 못했다. 이 세상의 누구도 그런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무식한 목사의 글을 읽어주신 독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한다. 허다한 무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탁하게 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한다(고후 2:17).

 

                                                                                       

                                                                                                                 서창원 | 2004. 12.

Posted by 작은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