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삶

'아바(abba)'는 '아빠(daddy)'가 아니다!

막연한 추론이 낳은 지식, 하나님 '아빠'로 부르고 싶은 감상주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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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먼 옛날에 생산된 성서를 오늘날의 교훈으로 풀어내는 작업이 '주석'의 최종 목표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훈에 급급한 나머지 본문이 자리한 당대적 맥락의 의미를 놓치는 경우가 있다. 해석적 기술의 결핍과 이로 인한 무지가 주된 원인이 되지만 독자들의 신앙 스타일에 얽매인 편향성과 특정 의미에의 집착도 무관치 않다. 때로 전문 학자들의 태만과 이에 따른 인습적인 통념의 반복 역시 그런 엉뚱한 의미 편취와 곡해의 사태에 적극적인 요인이 되기도 한다. 물론 성서 해석의 무지와 기만의 결과로 선포되는 메시지에 감동받을 수 있는 현실을 나는 이해한다. 이런 현실의 장벽을 뚫고 보다 순전한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대안적 성서 주석은 그래서 종종 피로하고 괴로운 노동이 된다. 그런 버거운 부담을 무릅쓰고 기존의 주석적 성벽을 허무는 뜨거운 감자 하나를 끄집어내 보기로 한다. 그것은 신약성서에 사용된 '아바(abba)'라는 아람어가 우리말의 '아빠'를 뜻한다는 오래 묵은 오해에 관한 것이다.

2.


내가 추적하기로 이러한 '아바=아빠'의 의미론적 등치의 계기를 제공한 사람은 요아킴 예레미아스라는 20세기 독일의 성서학자이다. 그는 불트만 우파 계열의 학자로 그의 몇몇 예수 연구의 저작들이 국내에 번역, 소개되면서 이 땅의 신약성서 이해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그중에서 예수의 비유와 기도에 대한 그의 해석은 그 영향의 비중이 꽤 컸다. 1965년에서 1971년에 생산된 그의 여러 저작들은 예수의 '아바' 기도를 큰 비중으로 다루면서 그것이 가족 관계의 친밀함을 드러내는 어린아이의 말로 하나님과 예수의 독특한 부자 관계를 특징짓는 호칭임을 주장하였다. 아버지를 호칭하는 친밀한 어린아이의 말이라는 암시는 곧 그것이 '아빠'로 이해되어야 할 근거를 제시하였고, 이러한 유추 및 확대해석은 감정적인 유착 관계를 중시하는 한국적 정서에 크게 호응하면서 이 땅에 무비판적으로 수입되었다.

하지만 예레미아스의 저작들에서 이 구절의 해석, 곧 '아바=아빠'의 등식은 하나님을 아버지라는 가족 관계의 친밀한 용어로 드러낸 예수의 표현을 과장되게 밀어붙인 추론이었을 뿐, 당시 이 아람어 용례를 언어학적으로 정밀하게 분석하여 연구해 낸 결과는 아니었다. 물론 그는 일관되게 '아바'에 집중하면서 꽤 쓸 만한 자료들을 수집하여 비교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아바가 어린아이의 말이라는 대전제가 워낙 완고하여 그는 그 검증 과정에서 드러난 여러 무리수를 논리적으로 치밀하게 해명하기에 앞서 그 대전제로 수렴시키는 안이한 선택을 했다. 그런데 그것이 이 땅에서는 이렇다 할 검증 절차도 없이 불변의 사실이 되었고 진리로 승화되었다. 서구의 추론적 지식에 대한 이 땅의 식자층이 바친 거의 맹목적이고 온전한 순종의 결과였다.

3.

저명한 학자의 영향력은 매우 강고했다. 더구나 그는 유구한 신학 전통을 지닌 서구 선진국의 학자였다. '아바=아빠'의 간단한 등식은 이후 17년간 확고부동한 해석학적 권위를 차지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던 중 이러한 지당한 공식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abba'를 관련 자료에 비추어 재차 치밀하게 비교 분석하여 논증한 학자는 밴더빌트대학의 교수이자 근동의 셈족 언어 전문가였던 제임스 바(James Barr)였다. 그는 1988년 영문학술지 (1988, April) 28~47쪽에 "Abba Isn't Daddy"라는 제목의 획기적인 논문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그는 다양한 'abba' 관련 자료들을 언어학적으로 정밀하게 분석하면서 예레미아스가 범한 논증의 오류와 허방을 예리하게 지적하였다. 그의 이런 연구 결과 밝혀진 핵심적인 사실은 예수와 당대 유대인들에게 아람어 'abba'라는 어휘 속에 우리말의 '아빠(영어의 애칭 daddy)'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레미아스의 추론에 대한 제임스 바의 비판은 그의 장기인 언어학적 분석을 동원하여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게 제출되었다.

첫째, '아바(abba)' 어형의 언어학적 기원은 기존 연구에 의하면 1) 강조적 상태 2) 호격 3)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 등의 세 종류로 설명되는데 예레미아스는 오로지 3)의 사례에만 집착했다는 것이다.

둘째, 설사 그 어원이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에 있었다손 치더라도(그럴 가능성에 회의적이지만) 예수 당시 이 단어는 이미 '아버지'를 호칭하는 모든 연령대의 공통된 용어로 정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약성서 시대에 '아바' 호칭을 어린아이의 재잘거리는 '아빠'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은 난센스라는 것이다.

셋째, 예레미아스 자신이 이 '아바' 호칭이 어린아이만의 용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예수를 비롯한 당대의 경건한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유아처럼 '아빠'로 호칭한다는 것이 '용납할 수 없는 나이브함'의 증표라는 점을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바의 어린아이 용례에 집착했던 자가당착이 지적된다.

넷째, 만일 '아바'가 '아빠'의 함의를 지닌 아람어였다면 이 단어가 사용된 마가복음 14:36, 로마서 8:15, 갈라디아서 4:6에서 그것의 병행구인 희랍어에 그 세밀한 뜻이 반영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이 문구(abba ho patēr)에서 '아바'를 번역한 희랍어는 '아빠'가 아닌 그냥 '아버지'이다. 희랍어에도 아버지를 가리키는 유아스런 애칭이 있었다. 호머 시대 사용된 atta라든가,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사용한 patridion도 있지만, 가장 유력한 후보는 papas이다. 실제로 이 희랍어 papas는 제우스신이나 아티스신을 호칭하는 어휘로 사용된 용례가 있다. 그런데 이 아람어의 뜻을 가장 잘 알았을 마가복음의 저자와 사도 바울조차 papas가 아닌 patēr를 abba의 병립 어휘로 삼았다. 그들에게 '아바'는 그냥 '아버지'였기 때문에 그렇게 자연스럽게 표기한 것이리라.

다섯째, 그레코-로마 전통에서 제우스신 등을 아버지/아빠라고 부른 용례들이 탐지된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경우를 예수와 당시 경건한 일부 유대인들에 국한된 유별나고 독특한 예외적인 사례로 못 박아 버리는 것도 공정한 판단이 못된다. 우리 전통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어 예외적인 가치를 독점했으면 하는 환상적 욕구의 간절함이야 왜 모르겠는가.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러한 배타적인 시야의 협량함이 앎과 깨달음의 반경에 심근경색을 가져올 수 있다는 교훈을 얻는다.

4.

어쨌든 국내의 성서학자들은 제임스 바의 저 유명한 논문을 읽어보지 못했거나 읽어 보았더라도 굳이 '아바=아빠'의 도식이 정착되어 개역개정번역에도 반영된 상태에서 소란을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았는지 이후 잠잠했다. 그래서 그의 연구로 창출된 새로운 지식은 별반 호응을 얻지 못한 채 이 땅의 아카데미아에서 실종되어 버렸다. 혹여 이 사실을 아는 일부 소수의 침묵 속에 갇혀버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 하나님을 친밀하게 '아빠'로 어린애처럼 부르고 싶은 신앙의 감상주의는 더 부추겨졌고, 이와 함께 미성숙한 자아를 감성일변도의 신앙 취향으로 땜질하려는 나이브한 '하나님/아빠/낭만주의'도 더욱 견고하게 이 땅의 신앙 풍토 속에 뿌리내려 갔다.

1960년대의 막연한 추론이 낳은 허술한 앎의 소문이 이 땅에 아무런 학문적 검증 없이 허술하게 유통된 나머지 그것은 이 땅의 예배당에서 수많은 목사들과 교인 대중에 의해 복창되어 왔다. 너무 순진하게 서구의 지식을 받아먹고 너무 빨리 소화시켜 버리는 이 땅의 신학적 풍토 역시 그러한 복창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그리하여 신학적 아카데미아와 교회의 방기 가운데 유통된 그와 같은 태만한 인습적 통념은 하나님과의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유착관계를 강화하였고 가족주의적으로 연성화된 신앙의 사유화를 촉진하는 데 적잖이 이바지했다. 1960년대의 고리타분한 인식의 틀에 우리의 신학적 지성이 꽁꽁 묶여 1980년대의 정밀한 분석과 연구를 통한 견고한 앎의 열매를 방기한 대가는 이토록 혹독했다.

5.

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의 백성들은 애·어른 구별 없이 다들 미욱한 자녀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아바'가 '아빠'가 아니라고 해서 이런 해석적 권위로써 모종의 어른스러움을 과시하며 어린애 같은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성도를 타박하려 한다면 이는 과잉 적용이다. 그러나 아버지-자녀로 맺어진 '하나님의 가족' 관계가 미숙함과 유치함이 아닌 성숙함을 전제로 하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하나님=아빠'로 표상되는 신앙적 나이브함의 승승장구는 종종 성도를 우민화 이데올로기에 볼모로 붙잡아두려는 유혹을 조장하기 쉽다. 애·어른 구별 없이 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며 자신을 낮추고 구원을 갈망하는 것이 신앙의 본령일 터이다. 그렇다면 애와 어른 사이의 세밀한 차이를 구별하여 어린아이의 말과 생각과 버릇을 버리게 하고 장성한 사람의 성숙한 사고력과 판단력을 독려하는 것은 신학의 의무이다. 제대로 된 성서 주석이 그 신학의 밑자리에 깔려 있어야 한다.

[출처: 뉴스앤조이] '아바(abba)'는 '아빠(daddy)'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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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