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삶

org date: 2012-01-27 12:39

여자목사제도는 과연 성경적인가?

- 김세윤 교수의 주장을 우려하며 -

 

이광호 목사(실로암 교회)

[Ⅰ]

 

지난해 말 합동측 총회장의 총신대학 '기저귀 발언'(2003.11.12) 이후 교계가 시끄러웠다. 그는 경건회 도중 여자목사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펴면서 '여성의 기저귀'를 들먹여 적절치 못한 표현을 했다. 그가 의도한 것은 여자 목사제도에 대한 견해였지만 그 말을 받아들이는 다수의 사람들은 '기저귀' 라는 용어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것이 여성비하 문제로 확산되었다. 당시 당사자는 용어채택으로 인한 자신의 실언을 사과했지만 기독교 여성단체들에서는 그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여성목사 안수를 허락할 것을 요구하기에 까지 이르렀다.

 

이제 반년을 넘겨 총신 신학대학원 여동문회는 지난 7월 5일 풀러신학교의 김세윤 교수를 초빙해 '성경에 나타난 여성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김 교수는 나름대로 이유들을 나열하며 여자 목사제도의 타당성을 제시했다. 그는 특히 고린도전서 14:34,35의 기록에 대한 사본학적 불안정과 두 구절이 고린도전서 14장의 전체적인 문맥을 끊고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어 후대에 삽입된 것이 확실하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했다("'여자여 잠잠하라'는 후대 편집된 것!", 뉴스앤조이, 제90호, 2004.7.8, 참조).

 

그러나 필자는 우선 고린도전서 14:34,35이 후대에 삽입되었다는 말을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그의 무모한 용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렇다면 동일한 성경저자가 기록한 디모데전서 2:9-14의 말씀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 말할지 궁금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유린당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음을 감추고 싶지 않다. 나아가 한 저명한 신학자의 주장이 한국교회에 끼칠 영향을 생각하면 심히 우려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적으로는 한국의 다수 교단들이 이미 여자목사제도를 도입하고 있으며, 한국 보수주의 교단에서도 여자목사제도를 심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교수나 목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여자목사제도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시대에 부응하는 깨어있는 자로 인식되는 반면 부인하는 자는 그와 반대로 인식되고 있다. 더구나 다수의 교회 지도자들이 원리보다는 사회적 분위기 읽기에 주력하고 있는 점과, 시대에 편승하고 있는 일부 인사들의 자세가 원리적 접근을 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주고 있다.

 

필자는 결코 남성우월주의자가 아니며 여성을 비하하고자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 도리어 남성우월주의적 사고를 가진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의 오만함을 지적하고 싶다. 이 글을 쓰면서 신앙을 가진 여성들에게 호소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교회는 결코 남성이나 여성을 위한 단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주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 가운데 존재하는 직분은 어떤 경우에도 특정인 혹은 특정 부류에게 주어지는 기득권적 권리가 될 수 없다. 만일 직분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이미 교회의 직분자로서 적합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성이나 여성 중 어느 편을 지지하여 기득권적 논쟁을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누구 혹은 특정 부류의 편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입장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고 적용해야 하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Ⅱ]

 

(1) 직분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직분과 직책에 대한 차이를 이해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물론 이런 구분은 용어자체에 대한 구분이 아니라 교회의 직분을 이해하기 위한 편의적인 방편이다. 교회의 직분은 항존하는 필수요건이다. 즉 교회의 목사, 장로, 집사 등의 직분은 단순히 일의 능률을 위해 분담하는 직책이 아니라 교회 가운데 마땅히 있어야 하는 본질적 은사이다. 이는 일반적인 직책이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아니라 조직의 편의나 일의 능률을 위해 두고 있는 임의적 제도라는 점과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

 

교회에서 말하는 직분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사로서 원리상 인간들이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창안하거나 만든 제도가 아니다. 즉 직분은 인간의 선택이나 능력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원리상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것이다. 이에 반해 직책이란 인간의 판단과 능력에 따른 것으로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효율적인 기능을 의미한다.

 

교회에는 다양한 직분들과 직책들이 있다. 목사, 장로, 집사 직분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은사적 방편이라면 남전도회장, 여전도회장, 선교부장, 구제부장, 주일학교 교사 등은 직책에 속한다. 이러한 직책은 조직 혹은 기관으로 부터 맡겨진 일의 능률을 위해 남녀의 성에 관계없이 적절한 사람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직분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사이므로 목사도 이와 동일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제도가 있었는데 제사장은 단순한 개인의 능력에 따른 직책이 아니었다. 모든 제사장은 레위인으로서 아론의 자손 가운데서 세워졌다. 이스라엘 백성 중 레위지파 자손이 아니면서 그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여 아무나 제사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기서 필자는 제사장직과 목사직분을 연관지어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며 제사장이 남성이어야 했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제사장은 하나님의 전적인 뜻과 경륜으로 말미암는 직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직분에는 지위의 높고 낮음이 있는 것이 아니며 거기에 권력이나 외적인 권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런 식으로 직분을 이해하게 된다면 권력이나 권위를 가진 '높은 자리'를 남성들만 가지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지적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직분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특별히 허락한 은사이며 인간들의 명예나 권리를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2) 현재 논의되고 있는 직분 문제에 있어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교회의 직분이 마치 시대의 조류에 맞추어져야 하는 듯한 분위기이다. 이는 교회의 직분이 토론이나 여론을 배경으로 하여 변화 가능한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민주적인 절차에 따른 다수의 견해에 따르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인본주의적 대세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약화되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시대나 지역에 따라 상이한 문화를 가지게 된다. 교회는 항상 그 상이한 문화들 가운데 존재해 왔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바는 교회의 직분은 사회적 분위기나 여론에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역사 속에 상속되어져 온 많은 교회들은 다양한 인간 문화들 가운데서 말씀이 교훈하는 바를 그대로 지키고 보존하려고 애써 왔다.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가 필연적으로 투쟁하고 싸우면서 한편으로 고난을 당해야 할 요소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교회의 직분은 인간들의 토론에 의해 결정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토론은 시대와 문화를 배경으로 할 수 밖에 없으므로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나 분위기에 능숙한 사람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설득력 있게 말을 잘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이에 대해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느냐를 주의 깊게 잘 살펴보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여론의 수렴을 거쳐 직분에 대한 해석이나 방향을 결정하려는 노력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지난해 말, 직분과 여성문제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 총신대학에서는 설문조사를 통해 80% 정도의 학생들이 여자목사 제도를 찬성 혹은 입장을 유보하는 것으로 집계했다(총신대보, 제 256호 2003년 10월 14일. 참조). 그 설문조사에 참여한 많은 학생들은 여자목사제도를 지지하거나 그것이 별문제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신학을 지향하고 있다는 총신대학생들이 그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다면 다른 신학대학이나 많은 기독교 여성 단체들의 그에 대한 생각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대체적인 배경이 하나님의 구체적인 말씀이 아니라 사회 정신적 경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바는 인간들의 경험적 자기 생각이나 판단이 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 진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3) 오늘날 여자 목사제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 근거를 성경에 나타나는 여 사사나 여성들의 활약에 두고 있는 것 같다. 나아가 신약성경을 고등비평하는 자들의 입장도 이제 새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구약성경을 보면, 드보라와 같은 여인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사의 직분을 훌륭히 수행했으며 라합, 룻, 에스더 등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들어 쓰신 믿음의 여성들이다. 물론 신약성경에도 훌륭한 믿음의 여인들이 수없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기억해야할 바는 그 모든 여성들이 그러한 믿음의 지위를 남성으로부터 쟁취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구속사 가운데서 자신의 고유한 뜻에 따라 그 여성들을 특별히 선택하심으로써 놀라운 경륜을 이루어 가셨으나, 남성과 여성에게 하나님의 일을 고르게 분배하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을 단순히 규범적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이려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신약성경의 여성들 또한 교회의 직분적 개념과 더불어 이해되어야 한다. 사도바울은 직분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며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할 것을 언급했는데, 그것은 여성을 무시하기 때문에 한 말이 아니라 주님의 교회를 위한 언약적 가르침이었다. 그는 구약시대에 훌륭한 여 사사와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교회의 감독직분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한 것은 구약 역사에 등장하는 여성 관련 내용들이 단순한 규범이 아니라는 기본 개념 위에서 창조와 연관된 교회의 특이성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 여성과 관련된 구약의 역사적 사실을 우리 시대의 교회의 규범으로 이해한다면 율법과 복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 해석상 많은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여자목사제도를 인정하려는 자들 중에는, 교회 가운데 남성과 여성 사이에 어떠한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인격자로서 인간 사이에 남녀간 아무런 차등이 없다는 것은 옳지만 직분에 대한 구별 자체가 없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남성과 여성은 창조질서 가운데서 분명히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인격이나 능력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질서와 그 가운데 존재하는 본질적인 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첫 언약에서 드러나듯이 자녀의 출산은 여성의 몫이며 외부의 위험을 방어하고 가정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은 남성의 몫으로 그것은 창조질서에 속한 것이다.

 

 

 

[Ⅲ]

 

(1) 신약성경을 살펴보면, 가르치는 교사로서 여성을 교회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진리의 계시임을 믿는다. 이미 잘 알고 있는 바대로,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고전 14: 24,25)고 이야기했다. (그 말씀을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 주장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고린도전서 14장은 특별히 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한 은사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여자로 하여금 교회에서 잠잠하도록 요구한 것은, 율법 즉 구약성경을 근거로 하여 은사와 관련된 직분적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바울을 통해 허락하신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시임을 잘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이 본문은 여성과 관련된 일반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당시의 문화나 관습을 배경으로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즉,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바울의 요구가 일반 생활이나 논의에 있어서 침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 뿐더러 소위 교회 안에서 '여성다움'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는 교회의 직분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하는 이유가 율법에 근거해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율법을 근거로 한 것은 성전과 제사장 직분과 연관된 것이다. 여성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제사할 수 없었다.) 물론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않음'의 의미가 '여자답게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으라'는 권면이 아니라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직분이 허락되지 않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칫 고린도전서 14:24의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가르침을 '남성은 교회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는 말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다. 우리가 여기서 얻는 교훈은, 교회의 교사직분이 남성에게 맡겨졌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직분을 남성에게 주어진 어떤 특별한 권리로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바울의 기록은, 교회의 상속이 구약의 율법을 바탕으로 한 교사 직분을 통해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교회에는 그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고유한 질서가 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가르치는 목사직은 개인의 의사에 따라 스스로 성취할 수 있는 직분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 세워지는 직분이다.

 

바울은 또한 디모데전서 2:11-14에서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디모데전서는 이른 바 목회서신으로 교회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특히 디모데전서 2장은 직분에 관련된 기록을 하고 있다.

 

바울은 위 본문에서, 여자가 가르치는 목사의 직분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를 창조질서와 인간이 범죄한 초기 과정에서 찾고 있으며, 그런 연유로 인해 그 직분을 허락하지 않노라고 선언하고 있다. 즉 성경에서 여성들이 교회의 가르치는 직분을 가지는 것을 허락지 않는 이유가 여성 비하나 여성의 지적능력에 대한 불신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역할을 창조질서와 연관하여 더욱 본질적인 것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본문에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이라는 목사의 교사사역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남자를 주관하는 것'이라는 말은 감독의 직분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2) 성경은 이렇듯이 여자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직분, 즉 목사의 직분을 가지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여권주의자들이나 시대적 여성옹호론자들이 여자 목사제도를 인정하려고 애쓰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시대적 페미니즘의 영향 때문이다. 현대에 이르러 많은 여성들과 여성옹호론자들이 남녀 평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역사 가운데 있어왔던 남성들의 잘못된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적 사고로 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사상은 급기야 교회 가운데도 들어와, 직분에 있어서도 성경의 구체적인 가르침을 살피기에 앞서 여권회복의 차원에서 논의의 틀을 제공하고 있다. 여자가 결코 남자보다 못하거나 부족한 것이 없으니 성적 차별이 불필요하며 모든 직분은 남녀가 공평하게 가질 수 있다는 논리이다. 나아가 그들은, 과거 남성들이 여성 위에 군림함으로써 모든 직분과 권위를 독점해 왔으므로 이제 빼앗긴 여성의 직분적 권리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시대에 있어서 많은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이 목사의 직분을 권력 및 권위와 연관된 '높은 자리'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이는 직분을 정치적인 직책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결과이다. 그러므로 왜 그 높고 힘있는 자리에 여자들은 올라갈 수 없고 남자들만 올라가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느냐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은 목사들의 잘못된 권위주의와 교회를 무시했던 악한 행태가 그런 분위기를 만들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남성이 목사의 직분을 맡도록 허락된 것은 결코 남성이 여성보다 성품이 우수하다거나 지적으로 유능해서가 아니다. 만일 누군가 그렇게 생각하다면 그것은 잘못된 남성우월주의적 사고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능력 면에서 볼 때 남성보다는 오히려 여성들이 더 섬세하고 정확한 면이 있을 수 있다. 나아가 남성들은 어떤 경우에도 성적인 차별성으로 인해 여성들을 무시하거나 멸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목사제도가 허용될 수 없음을 지적하는 이유는 성경의 원리적 가르침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교회 가운데 여자 목사를 금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주님 오실 그 날까지 지켜야할 규범이며 그것을 통해 배워야할 분명한 교훈이 있는 것이다. 교회의 직분은 결코 시대적 조류에 맡겨질 수 없으며 인간의 이성적 합의에 의해서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 하나님께서는 하와의 유혹으로 인해 죄가 이 세상에 들어 왔음을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으며, 그것을 직분과 연관 짓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가 여자를 목사로 허락하지 않는 것은, 남성이 여성 위에 군림할 수 있다거나 여성이 남성에게 군림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진정한 의미는 교회가 목사직분을 남성에게 허락함으로써, 여성을 통해 이 세상에 들어 온 죄악을 다스려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교회의 존재를 묵시적으로 선포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목사 혹은 교사직분이 여성에게는 금지되고 남성에게만 허용된 이유이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많은 여성들이 지도자의 위치에 있지 않았느냐는 사실을 내세우며 여성 목사를 인정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여자 목사를 인정하는 모범적인 근거로 사용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각 시대에 여성들을 들어 사용하신 것과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우신, 죄에 승리하는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의 직분은 분명히 서로 다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마다 여러 여성들을 들어 사용하셨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구약시대 뿐 아니라 사도교회 시대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도 마찬가지이다. 드보라, 기생 라합, 룻, 마리아, 엘리사벳, 한나, 막달라 마리아 등 수 없이 많이 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윤리적 결함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윤리성 여부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쓰임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에 따라 그들을 선택하여 쓰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시대에도 많은 여성들을 주님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사용하고 계신다. 목사의 직분을 오용하며 주님을 욕되게 하는 남성들도 많고 그런 직분을 가지지 않았지만 훌륭한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 여성들이 많이 있다. 목사가 되면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는 것이고 목사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지 않는다는 식의 논리는 성립될 수 없으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은 그 자체로서 아무런 차등 없이 매우 소중하다. 하나님께서 남자를 여자보다 더 사랑하고 계심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러나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의 직분을 허락하시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의 뜻이며 몫이다. 여권주의자들이나 여성 옹호론자들은 시류의 영향으로 인해, 여자들도 남자들 처럼 목사가 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우려 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교회 안의 성숙한 여성들은 교회의 목사, 즉 교사로서 직분을 담당하는 형제들을 위해 권면하며 그들의 온당한 순종을 위해 기도하는 자세를 가짐으로써 주님의 교회가 온전히 잘 세워져 갈 수 있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필자의 이런 말에 대해, 현실 교회에서 여성들이 가르치고 있는 문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묻는 사람들이 혹 있을지 모른다. 목사가 있지 않은 작은 교회나 주일학교 같은데서 여성들이 실제로 가르치는 것에 대한 지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자가 독립된 교사로서 성도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목사, 즉 교사의 지도를 받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이는 비단 여전도사 뿐 아니라 남자 전도사나 주일학교 교사들도 마찬가지이다.

 

 

 

[Ⅳ]

 

우리시대의 연약한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교훈이 아니라 세속적 시류의 영향을 받고 있는 점은 매우 안타깝다. 목사 직분을 감당하는 남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순종적인 목회가 아니라 권위주의를 앞세운 인본적인 목회를 함으로써 그러한 잘못된 욕구들이 더욱 강하게 분출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말씀에 충실하지 못한 목사들이 성도들 위에 군림하려는 잘못된 모습에서 기인한 부끄러움일 것이다. 그렇잖아도 말씀이 사라져 가는 안타까운 시대에,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해야 할 학자들마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앞의 김세윤 교수는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왜 이제서야 갑작스럽게 그런 주장을 펴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금 묻고 싶다. 이전에는 모르고 있다가 최근에 들어와서 고린도전서14:34,35의 삽입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말인가? 이번 주장도 한국의 여성단체에서 초빙하지 않았으면 말하지 않았을 내용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그는 신학자로서 자질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바라기로는 교회 가운데 교사로 세움을 받은 목사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올바른 목회를 함으로써, 주님의 몸된 교회가 현대 페미니즘의 시류에 휩쓸리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남성이기 때문에 여성보다 우월하다든지 여성이기 때문에 목사보다 신앙이 못한 것이 아니다. 목사 직분을 가진 남성들 보다 특별한 직분을 가지지 않은 일반 여성들이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얼마든지 많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목사라는 직분으로 인해 더 나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교회가 허락한 직분이므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직분을 수행해 갈 따름이다.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잘못 세워진 목회자들이 많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교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자들이 신학교를 졸업했다는 이유와 남성이라는 이유로 쉽게 목사가 되어 있다는 사실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말씀에 나타나는 원리 자체를 무시하거나 바꿀 수는 없다. 남성이 교회의 교사인 목사직분을 맡는 것이 성경적이라 하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 전통을 보존하기 위한 수구적 견해 때문이 아니다. 직분과 관련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단순히 시대에 따른 문화적 특성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주님의 말씀은 그가 다시 오실 그 날까지 교회의 중심에 온전히 받아들여야 할 진리의 교훈이다.

 

하나님 앞에서 남성과 여성의 능력에 따른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목사라고 해서 천국에서 영웅이 된다거나 더 많은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니며 더 많은 상급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직분을 잘 감당하지 못함으로 인해 더욱 엄한 책망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지상에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며 직분을 기득권의 한 형태로 이해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교회에서 기득권을 주장하는 자라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누구라도 주님의 뜻을 오해하고 있는 자들일 것이다. (뉴스앤조이, 2004.7.24)

Posted by 작은샘

org date: 2012. 1. 27. 12:36

 

▲신반포중앙교회에서의 한국성경신학회 제28차 정기논문 발표회 모습 ©뉴스미션

 

상당수의 교단이 여성 교직, 곧 여성 목사와 여성 장로 안수제도를 도입한 가운데 아직도 이를 채택하지 않는 교단들은 디모데전서 2장 13, 14절을 마지막 방파제로 삼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여성 안수 금지는 선명한 명령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예장고신, 대신, 합신 신학자들의 모임인 한국성경신학회(회장 박형용)는 22일 오후 서울 신반포중앙교회에서 ‘목회서신에 대한 주해와 설교’를 주제로 ‘제28차 정기논문 발표회’를 개최했다.

 

이날 발표회에서는 4명의 발제자 중 2명이 디모데전서 2장 13, 14절을 중심으로 ‘여성 안수’ 문제에 대해 논문을 발표해 관심을 모았다.

 

김성봉 박사(신반포중앙교회 담임)와 이승구 박사(합신대 교수)는 디모데전서 2장 13, 14절은 여성 안수에 대해 금하는 구절이라는 공통된 성경 해석을 바탕으로 여성 안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김 박사는 “성경에 대한 입장이 비교적 자유로운 교단에서는 여성 안수 문제가 그다지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라며 “사회적 분위기와 함께 기존의 입장을 수정 보완해 가면 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성경에 대한 입장이 비교적 강경한 교단에서는 여성 안수 문제는 곧바로 ‘성경관’과 직결되는 면이 있다”며 “문제가 되는 본문인 디모데전서 2장 13, 14의 앞 절(11, 12절)을 보면 (여성 안수) 금지는 선명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암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는 본문을 두고 달리 말하는 것은 학자의 궤변이 되고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경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하느냐가 관건

 

이렇듯 여성 안수에 대한 금지가 선명함에도 불구하고 여성 안수를 채택하고 있는 교단들이 생기는 것은 선명한 금지의 근거로 제시된 13, 14절을 설득력 있게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느냐 때문이라는 게 김 박사의 견해다.

 

김 박사에 따르면, 여 성 안수를 받아들이는 이들은 디모데전서 자체를 바울이 쓴 것으로 보지 않는다. 따라서 비록 본문이 여성 안수를 금할지라도 그 금지는 사도의 권위가 아니라고 하며, 심하게는 사도의 이름을 빙자한 자들이 사도의 뜻을 거슬러 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한 한편으로는 창조의 순서를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타락의 순서를 말하는 13, 14절과 관련해서 이 구절들의 근거가 되는 △창세기의 저자가 과연 모세인가 △저자 문제는 차치하고 과연 그런 창조가 실제로 있었는가 △그런 타락이 실제로 있었는가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함으로써 권위를 감소시키고 만다.

 

김 박사는 “이러한 무기력한 기초로서는 아무런 파도도 막아낼 수 없음이 자명하다”면서 “어쩌면 여성 안수 문제를 가결한 교단들은 성경관에 있어서 이러한 입장에 서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어 그는 “똑 같은 본문(13, 14절)이 앞서 지적한 바울 저자설, 창세기 모세 저자설, 창조의 역사성, 타락의 역사성을 믿는 무리에게는 현대에 일어나는 (여성 안수) 파도를 막아내는 방파제 역할을 하기에 충분한 기초로 여겨지기도 한다”고 밝혔다.

 

이 승구 박사도 “디모데전서 2장 12-14절을 앞뒤 문맥으로 고려해 읽을 때, 이 구절은 창조질서와 타락의 빛에서 여성의 목사 및 장로로서의 활동을 금하고 있다”며 “그러므로 우리가 이 구절에 과연 참으로 순종하는가를 심각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Posted by 작은샘

org date: 2012-01-27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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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의 여성 사역의 문제에 대한 한 고찰 - 이승구 교수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디모데전서 2:12-14]

교회에서의 여성 사역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과연 어떻게 생각하여야 하는가? 이런 질문이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서도 계속 제기되고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서 편집진에서 이 문제에 대해 개혁 신학적 입장에서의 의견을 밝히는 글을 쓰도록 요청하였기에 이 문제에 대한 간단한 논의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사역”이라고 할 때 많은 이들은 목사와 장로로서의 사역을 중심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이런 현상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해서 필자 자신은 별로 확신이 서지 않는다. 오히려 필자 자신은 “여성 사역” 이라는 말을 좀 더 폭 넓게 생각해야 하고 그런 폭 넓은 의미의 여성 사역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는 교회 안에서 여성은 처음부터 중요하게 사역해 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이 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이 문제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할 때 생각하는 의도인 여성의 목사와 장로로서의 사역의 의미를 염두에 두고 이 논의를 시작해 보고자 한다. 

1.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출발점 

먼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 각자가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든 지를 차치(且置)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하고 있는 부분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해야 이 문제에 대한 논의에서 본질을 흐리게 하지 않는 건전한 논의가 진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논의해 가는 과정 가운데서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지엽적이고 비본질적인 논의와 심지어 감정적인 의견 표명과 의견의 대립으로 나아갈 위험이 있으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논의에서는 먼저 다음 몇 가지 점들을 분명히 하고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여겨진다. 우리의 논의가 진정 그리스도교적인 논의이려면 우리 모두가 함께 동의하고 출발해야 할 점들은 다음과 같은 점들이라고 여겨진다. 

(1)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빛에서 볼 때 남 ․ 여는 그 신분과 지위에 있어서 동등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점에 있어서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러므로 후의 논의에서 이 점을 가지고 서로를 공격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예를 들어서, 여성 사역을 찬성하는 이들이 이를 비판하는 이들에게 대해서 그렇게 보는 것은 여성을 평등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든지 하는 논의를 해서는 안 된다.) 

창조와 구속의 빛에서는 남녀가 평등하다. 타락의 영향 하에서 서로가 투쟁하며 결과적으로 남자가 여자를 다스리게 되는 현상이 발생했으나(창 3:16), 그것은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기보다는 죄악의 결과요 죄에 대한 형벌의 한 부분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상호 지배적이려고 하는 상황은 하나님께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에서 우리에게 주신 관계의 상황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이 후의 논쟁에서 어떤 입장을 지니든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가 평등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논의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여자가 어떤 점에서 부족한 점이 있어서 여성의 교회에서의 사역이 있을 수 없다는 식의 논의는 있어서도 안 되고, 그런 논의가 전개되어서도 안 된다. 

신분과 지위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고 그 은사와 능력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 남자 됨과 여자 됨에 따라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창조와 구속의 빛에서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논의의 전제의 하나이다. 

또한 창조와 구속의 빛에서는 남자와 여자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의도는 남자와 여자가 각기 그들의 특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에 필요한 것이다. 돕는 배필의 의미가 “그에게 상응하는 돕는 자”임을 생각할 때 이 점은 매우 자명하다. 그래서 바울은 “주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고전 11:11)라고 말하고 있다. 

(2) 교회에서의 사역자의 역할은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로서의 역할이 아닌 것이다. 

신약 교회의 직임은 구약 교회의 직임과 직접적 연속성을 지니고 있는 직임들이 아니다. 구약의 직임들은 오실 메시아의 사역을 바라보게 하는 모형론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으나 신약의 직임들은 구약의 직임과 직접적 연속성을 지니고 있지 않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온전한 선지자, 제사장, 왕직의 대리직임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천주교회에서나 일부 성공회 등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을 대리하는 직임에 근거하여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여야 한다는 것은 이 문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논의를 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것인데, 그리스도가 남성이었으므로 교회의 사역자는 남성이어야만 한다는 식의 논의는 선결 문제 오류를 지닌 잘못된 논의가 되는 것이다. 신약 교회의 직임은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직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 교회의 직임은 그리스도 직임의 대리자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면서 논의해야 한다. 

(3) 신약의 선지자들이 있는 상황은 과도기적인 현상이었지, 선지자가 교회 안에 항상 있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신약의 선지자들 가운데서는 남자 선지자들과 함께 여선지자들이 있었다(행 21:9; 고전 11:5?). 그러나 그런 직분이 신약 교회에 지속적으로 있게 하지 않으신 것이다. 새로운 계시가 교회 안에 지속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4)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논의는 순전히 성경이 항상 있을 교회의 모습을 향해 어떻게 말하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되어져야 한다. 

신약 성경이 교회 안에서의 사역에 대해 서 빛을 비춰 주는 것이 우리의 최종적 판단 근거가 되는 것이다. 

(5)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 우리의 문화 현실이나 우리의 현실에 대한 요구로부터 도출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현실이 이 문제를 판단하는 준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서 교회 안에서 남자들과 똑같이 교육받은 여성들이 차별 받고 있다는 현실로부터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의견을 이끌게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 문화의 요구가 이 문제를 판단하는 준거가 되어서도 안 된다. 

1세기 교회의 문화적 정황이 우리의 교회의 원칙을 규제하도록 해서도 안되고, 그와 반대로 오늘날의 문화적 상황이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좌지우지하도록 해서도 안 된다. 

오늘날에는 여성들의 참여가 사회 전반에 일반화되어졌으므로, 또한 교회 안에서는 여성이 더 많으므로 당연히 여성이 교회 안에서 중요한 직임을 감당하여야 한다는 식의 오늘의 문화와 현실에 근거한 논의가 우리의 사유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 

다시 한번 더 말하지만 신약 성경이 신약 교회의 이 문제에 대해서 말하는 것만이 우리의 최종적 판단 근거가 되어야 한다(sola scriptura!). 

(6) 그렇기에 오늘 우리의 상황에서는 똑같이 교육받은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 전도사나 교 육부서 등에서 사역할 때 경제적 처분 (예) 사례에서나 존경받음에 있어서 남성들과 차별 받지 아니하도록 하는 모든 외적인 준비가 이루어져 나가야 한다는 것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해야 하고 이를 이루어 가기 위해서 함께 노력해 가야 한다. 

(7)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성경의 규범적 의미에 대해서 우리가 다 순종하려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복종해야한다.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 하지 않는 것은 비성경적인 태도이다. 그러나 혹시 성경을 존중하면서 서로 달리 해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서로가 성경을 존중하는 태도를 확인 할 수 있으면 그것을 인정하면서 서로 존중히 여기면서, 성경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에 대해서는 재미있게 토론하며 함께 하나님의 바른 뜻이 어떤 것인지를 추구하여 가야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서로 인신 비방하거나 서로를 이단시하는 태도로 발전되어 가서는 안된다. 물론 성경의 가르침에 복종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강한 비판을 해야 한다.다시 말해서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에 복종하려고 하면서 그 성경의 가장 바른 뜻이 어떤 것인지를 함께 찾아가는 동료 해석자들로서 서로를 존중하고 귀히 여기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다시한번 더 강조하자면, 우리의 모든 판단의 최종적 근거는 성경의 가르침이어야만 한다. 

2. 이 문제에 대한 신약의 해당 구절과 그 의미 

그렇다면 우리는 일차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결정적인 논의를 하는 신약 성경의 구절이 있는 지를 확인해야 한다. 먼저 이 논의와 관련해서 많이 언급되는데 실상 여성의 교회 사역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구절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첫째로, 고린도전서 11:2-16의 맥락을 잘 살펴보면 그 본문은 직접적으로 여성의 교회 안 에서의 사역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 구절 안에 있는 예언에 대한 언급은 당시에는 여선지자들이 아직까지 있었다는 것에 근거하여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언급에 근거해서 당시에 예배 가운데서 예언하는 여선지자가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오늘날도 교회 안에 그런 일을 하는 이들이 허용될 수 있으리라 고 하는 것은 계시사의 발전에 유의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로, 고린도전서 14:34-36도 여성의 교회 안에서의 사역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은 아니라 고 판단된다. 이는 예배 중에 소란스럽게 하거나, 특히 옆 사람에게 묻기 위해 말 하는 것을 지적하면서, 바울이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 지니라”(고전 14:35)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그렇게 보아야만 이 구절들에게 바울이 말하는 요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여성들이 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던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서 예배가 소란스러워지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적당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는 권면의 한 부분으로 주어진 말씀으로 생각해야지, 이를 여성 사역에 대해 직접적 함의를 지닌 말씀으로 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 가운데서 이 문제와 관련하여 직접적인 연관성을 지닌 구절은 디모데전서 2:9-14의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서는 그 맥락이 교회의 예배적 상황이라는 것은 바로 위에 있는 구절인 디모데전서 2:8의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고 말하는데서 찾아 질 수 있다. 이는 각 가정에서 기도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기보다는 예배처에서의 의식적 기도 행위를 언급하는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런 예배적 맥락에서 여인들이 과연 어떻게 자신들을 치장할 것인지를 말하고(2:9-10), 이런 예배적 상황에서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고 한 뒤(11절, 여기까지는 말씀은 고전 14:34-36의 의미와 상통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하고 있다(12절). 

그러므로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여성의 교회 안에서의 목사와 장로로서의 사역에 대한 찬반 양론이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 본격적 쟁점

“디모데 전서 2:12-14을 과연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 구절과 관련된 중요한 논점은 다음 세 가지 일 것이다. 첫째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12절)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둘째로, 이 금령은 당시의 문화적 상황에 따른 1세기적 정황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니면 주께서 오실 때까지의 상황 전체를 지배하는 것인가? 셋째로, 이 말씀을 바울의 글로 믿는 지, 아닌 지의 여부이다. 

이 세 가지를 하나하나 논의해 보기로 하자. 

첫째,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12절)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이 말의 표현 형태는 다른 곳에 사용된 용어들과 비교할 때 가르치는 것은 교회에서의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것과 연관된 것이고(딤전 1:3; 3:4; 4:11, 13, 16; 5:17; 6:3; 딤후 2:2, 24; 4:2), 따라서 다른 곳에서 “목사 즉 교사”(엡 4:11)라고 언급된 이들의 사역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주관하는 것”도 교회 안에서 공식적으로 다스리는 것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이는 다른 곳에서 “장로들”이라고 언급된 이들이 하는 사역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게 보면 이 말씀은 여자가 교회 안에서 공식적인 가르치는 직무인 목사의 역할을 하는 것과 다스리는 직무인 장로의 역할을 하는 것을 금하는 구절이라고 해석되는 것이다. 

둘째, 이 금령은 당시의 문화적 상황에 따른 1세기적 정황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니면 주께 서 오실 때까지의 상황을 지배하는 것인가? 

만일에 1세기 정황에서의 이야기라면 이 말씀은 1세기 성도들에게는 구속력을 지니는 것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구속력이 없는 말씀인 것이 된다. 만일 그런 것이라면, 교회 모임과 관련하여 여자는 머리에 수건을 쓰라는 금령이(고전 11:2-16) 1세기 고린도 교인들에게만 적용되고 오늘 우리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과 같이, 디모데 전서의 이 금령도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금령으로 여겨져야 할 것이다. 

만일 이 디모데 전서 2장의 본문이 12절로 마쳐지고 있다면 이와 같은 해석의 가능성도 상당히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본문에는 디모데 전서 2:13-14이 따라 붙어 있으므로 결코 그렇게 해석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말씀에 의하면 이 말씀의 인간 저자는 창조의 순서에 근거해서(12절), 그리고 타락의 순서의 근거해서(14절) 여자가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가르치며 주관하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논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의 질서와 타락의 문제가 있는 상황 가운데서는 이는 계속 적용되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이 논의의 방식을 깨지 않는 한 우리는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창조의 질서가 계속되는 한, 교회에서는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12절)이 허락되지 않는다. 

셋째, 이 말씀을 바울의 글로 믿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논의해 보기로 하자. 

필자는 이 말씀을 바울 자신이 쓴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바른 해석이라고 여긴다. 본문 자체가 사도 바울이(딤전 1:1; 1:13; 2:7) 디모데에게(1:2, 18; 6:20) 구체적인 정황 가운데(딤전 1:3) 있는 그에게 목회의 지침을 주기 위해 기록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1세기 정황에서 사도의 이름을 빌어 바울의 제자 격되는 존재가 이런 편지를 쓰는 것이 오늘날과 같이 위조나 이름 도용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당대의 관습적인 관례였다는 설명을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렵다고 본다. 

그러나 백 번 양보해서 혹시 그렇다고 해도 적어도 그 인간 저자가 이 글을 쓰는데 성령께서 영감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져야 한다. 

그렇다면 위의 논의에 의해서 이는 오늘 우리를 규제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이 부분의 인간 저자가 누구이든지 이 말씀에 따라서 우리는 교회에서는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12절)을 허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을 바울이 쓴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그렇게 논의하시는 분들은 과연 만일 이것이 바울이 친히 쓴 것이라면 이 말씀을 따라서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그런 논의를 하는 것인가? 혹시 이 말씀에 따르고 싶지 않은 마음이 그들을 이 말씀은 바울이 쓴 글이 아니라는 해석에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닌지를 묻고 싶다). 

4. 결론 

이상에서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여성의 교회 안에서의 사역 문제를 다루는 유일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는 디모데 전서 2:12-14에 근거해서 판단할 때 여자가 교회 안에서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일을 하는 것(목사직)과 다스리고 주관하는 일을 하는 장로직은 허락되지 않았고, 이 구절의 내포에 따라 그것은 창조의 질서가 존재하는 한 지속되는 교훈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런 성경의 가르침이 있는 한 우리는 이 말씀에 근거해서 교회 안에서 목사직과 장로직을 여성에게 허락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외에 폭 넓은 의미의 여성 사역은 교회 안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고 격려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신약의 가르침에 우리가 복종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이 능력이 부족하다거나 열등하다는 생각에서 그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님에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순전히 성경이 지시하는 가르침에 충실하려고 하는 마음에서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사역에 대해서, 그것도 목사직과 장로직에 대해서만 이런 금령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 여성이 가르치는 것을 이 성경은 금하지 않는다. 또 다른 사회적 맥락에서 여성이 주관하는 자와 치리하는 자와 재판하는 자가 되는 것을 이 성경은 금하지 않는 것이다. 

여성이 잘 다스릴 수 있는 은사가 있다면 다른 사회의 영역에서 그와 부합한 하는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일의 한 부분이 될 것이다. 또한 여성이 잘 가르치는 은사가 있다면 이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잘 가르치는 일을 효과적으로 해야 할 것이고, 그리스도인 여성이 그리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2:12-14의 의미에 대한 우리의 주해가 유지될 수 있다면 교회의 맥락에서는 여성이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목사직을 수행하는 것과 다스리는 장로직을 수행하는 것이 허용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서 언급하고 있지 않은 집사직에 대해서는 여성이 그 집사직을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로마서 16:1과 디모데전서 3:11에 대한 주해를 참조할 때도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물로 이것은 그 자체로 또 깊은 주해적 논의를 필요로 하는 문제이다.) 

또한 고래로부터 칼빈을 비롯한 많은 개혁신학자들도 여성의 집사직은 허용적인 태도를 가져 왔다. 이는 집사직이 목사직이나 장로 직에 비해 낮은 직임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교회의 모든 직임의 평등성은 장로교회의 큰 가르침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장로교 헌법에 허용하지 않고 있을 때는 총회에서의 연구와 논의를 거쳐서 헌법이 수정된 후에야 시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여성의 교회 안에서의 목사와 장로로서의 사역 가능성의 문제는 디모데 전서 2:12-14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부디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에 충실해서 이 말씀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한다.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이 어떻게 되든지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근자의 논의 중에서 가장 성경적이며 개혁파적 전통에 충실하며 이 글의 입장과 가장 유사한 논의로 Edmund Clowney, The Church(Leicester: IVP, 1995), 제 15장의 논의를 참조하라. 
또한 이와 가까우면서도 집사직도 여성이 감당하지 않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논의로는 Robert L. Reymond, A New Systematic Theology of the Christian Faith (Tennessee: Thomas Nelson, 1998), 제 23장 각주 9, 10을 보라. 


출처 :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

Posted by 작은샘

2012-01-27 11:50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961 

 

설교에 목숨 걸 자신이 없다면 가정교회를 하라. - 코람데오닷컴

11월 1일 고려신학대학원(천안) 대강당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600여명의 청중들이 내뿜는 열기보다는 발제자와 패널들이 내뿜는 열기가 뜨거웠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유해무 박사가 가장

www.kscoramdeo.com

 

설교에 목숨 걸 자신이 없다면 가정교회를 하라.

- 유해무 박사, 신대원 “가정교회” 학술대회에서 어필

 

11월 1일 고려신학대학원(천안) 대강당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600여명의 청중들이 내뿜는 열기보다는 발제자와 패널들이 내뿜는 열기가 뜨거웠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유해무 박사가 가장 강한 톤으로 청중들에게 어필하고 페널들의 집중적인 질문공세를 받기도 하였다.

이 자리에 참석하였던 모 일간지 기자는 참석해 본 중에 가장 재미있는 학술대회였다고 평할 만큼 뜨거운 논쟁에 비하여 시종일관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고 간혹 위트 있는 말솜씨로 청중이 지루할 겨를을 주지 않았던 것도 이번 학술대회의 큰 장점이었다고 할 것이다.

주제 발표

첫 번째로 등단한 변종길 박사는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가정교회는 성경적인가?’ 라는 주제로 발제하였는데 신약 성경 어디에도 최영기 목사가 주장하는 가정교회 형태의 교회를 발견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가정교회를 초대교회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무리라고 진단하고 가정교회의 내용을 장로교화 시킨다고 하더라도 용어는 그대로 받기가 어렵다고 주장하였다.

두 번째로 강단에 선 이상규 박사는 교회사적 관점에서 “교회사에서 본 가정교회”라는 주제로 나서 “공식적인 집회소로서 예배당 건물이 발견된 것은 256년 유프라데스강 상류지역에 위치한 두라-유로포스(Dura-Europos)에서였다”고 서두를 뗀 뒤 150년까지의 신자들의 집회장소는 가정집이었고 150-250년 어간에는 주택을 개조하여 집회소로 사용하는 시기였고 250년에서 313년까지는 큰 건물형태의 집회장소가 대두되었다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가정에서 회집하고 가정에서 목회가 이루어지고 성례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정교회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으로 그는 가정교회 문제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장로교회의 신학과 예배, 의식 등 장로교회의 예배와 교회구조도 16세기를 거쳐 제도화되었다. 새로운 제도는 항상 상당한 저항과 반대에 직면했다"면서 “가정교회 운동은 셀교회와 마찬가지로 과거에 있었던 여러 목회방식 중의 하나로서 일종의 목회 프로그램이라고 생각된다. 변화된 환경은 새로운 목회 방식을 요구하는데, 가정교회는 이런 현실의 반영이고 이런 방식 또한 한 시대의 유행일 수 있다는 점에서 너무 긴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 된다”고 주장했다.

세 번째로 등단한 유해무 박사는 “설교에 목숨 걸 자신이 없다면 가정교회를 하라”고 일갈하여 참석자들이 순간 긴장하였는데 이어 “개혁교회론에는 평신도 사역이라는 개념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개혁교회의 사역자는 가르치는 목사만 있을 뿐이고 평신도는 가르침을 받은 대로 세상에서 살아갈 뿐이라는 평소 교의학적 지론이 뒷받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목회 방법론으로서 가정교회론의 특성은 참고할만하다고 하면서 가정교회를 장로교의 옷을 입혀 도입하려면 하되 굳이 성경에서 억지로 그 근거를 찾으려 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제 가정교회를 시행하고 있는 교회들은 개혁교회의 전통과 교회법을 존중하는 새로운 모델을 계발해야 할 단계에 와 있다. 공교회성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가정교회론을 남에게도 넘겨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고신교회의 신학은 방법론을 개발할 뿐만 아니라, 도입되는 방법론에 대해서 시의적절하게 평가하고, 목회 현장에서 공교회성을 확립해야 할 것이다”고 결론지었다.

마지막으로 발제한 김순성 박사는 실천신학적 관점에서 “가정교회 소그룹 구조와 기능의 실천신학적 의의”라는 주제로 발제하면서 다분히 가정교회의 장점을 부각 시키는 면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가정교회는 한 마디로 교회의 공동체성을 지향하는 다기능적 소그룹 교회운동이다. 종래의 소그룹 운동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면 구조적인 면에서 개인중심이 아니라, 공동체 중심이며, 기능적인 면에서 복합적이고 종합적이라는 점이다”라고 정의하면서 가정교회의 특징을

첫째, 공동체 중심의 사역의 장(場)이다.
둘째, 평신도 중심의 사역의 장(場)이다.
셋째, 목양기능을 지닌 사역의 장(場)이다.
넷째, 삶의 나눔을 통한 친교와 치유사역의 장(場)이다.
다섯째, 영혼구원 중심의 전도와 선교사역의 장(場)이다.
여섯째, 성경적인 제자훈련의 장(場)이다. 라고 진단했다.

그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겨야 한다. 중요한 것은 새 부대가 새 포도주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새 포도주가 새 부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가정교회 소그룹은 새 부대이지 그 자체가 새 포도주는 아니다. 그러므로 그 부대에 무엇을 담는가는 여전히 목회자의 몫이다”고 결론지었다.


토론회
 
이날 토론회에 나선 패널들은 가정교회를 성공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김낙춘 목사(한영교회) 조태환 목사(울산큰빛교회) 이문식 목사(산울교회) 강경민 목사(일산은혜교회) 권상준 장로(구미남교회) 정성수 장로(울산큰빛교회)가 참석하였다.

이들은 한 결 같이 가정교회의 장점과 장로교회가 시행함에 있어 하등 문제가 없음을 강조하였으며 장로 패널들은 “단점을 말하라 하는데 단점은 없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다. 장로의 직분을 제대로 하는 것 같다”고 대답해 발제한 교수들을 당혹케 하기도 했다.

가장 이슈가 된 부분은 용어 문제였다. 변종길 박사나 유해무 박사는 가정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변 박사는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다 보면 교회에 어려움을 왔을 때 쉽게 붕괴되고 이탈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었고 유 박사는 목사가 없는 가정에서의 모임을 교회라고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사회를 맡은 김순성 박사는 가정교회에 우호적인 입장에서 중재에 나서 보았지만 팽팽한 입장 차이는 줄어들지 않았다. 가정교회를 주장하는 패널들은 교회라는 용어에 어떤 의미를 두고 있어 ‘교회’를 뺄 수 없다고 주장하고 그렇다면 더욱더 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고 두 박사는 강하게 입을 모았다.

그러자 김순성 박사는 다른 대체 용어는 없겠는가 하고 청중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에 천헌옥 목사(코람데오닷컴 편집장)가 나서 두 쪽 다 둘 다 양보할 수 없다고 하니 ‘가정’ 이라는 용어와 ‘교회’라는 용어를 함께 사용하는 방안으로 ‘교회가정공동체’라는 것은 어떠할지 제의했다. 쉽게 말해 ‘ㅇㅇ교회가정공동체’ 줄여서 ‘교회가정공동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가정교회 목회자들은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제가 가정교회에 대해 끝까지 비판자로 남는 것이 가정교회의 발전에 유익이라는 점을 기억하시라”는 유해무 박사의 평행선 전투발언과 같이 명칭 자체도 앞으로의 숙제로 남겨지면서 학술대회는 뜨거운 열기를 반영하듯 시간을 넘겨 막을 내렸다. 
 
위 발표된 논문은 연구보고및 발표논문방에 준비되는데로 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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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샘

org date: 2012-01-27 11:24

 

http://www.reformednews.co.kr/986

평등과 복종의 원리에서 본 여성안수 문제

소재열

<크리스찬연합신문사>(9월 2일자 신문)에서 연속기획특집 이슈논단으로 여성안수 문제를 취급했다. 여성안수를 찬성한 조동호 목사와 이종윤 목사, 여성안수를 반대한 손석태 목사와 소재열 목사의 글이 연재됐다. 본 글은 여성안수 반대의 글을 제기한 소재열 목사의 글을 <크리스찬연합신문>의 양해를 받아 싣게 되었다(리폼드뉴스 편집부). 여성안수를 둘러싼 논쟁은 복음주의자 안에서도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사안으로 화해가 불가능할 정도가 되어 버렸다. 이제 여성안수의 문제는 신학자의 개개인의 차이와 논쟁을 뛰어넘어 교단별로 뚜렷한 양자택일의 입장을 취함으로써 지금까지 교단을 구분했던 교리적인 차이보다 여성안수의 문제가 다른 어떤 교리보다 더욱 상징성을 가진 교단의 구분을 위한 범주가 되어 가고 있다.

이제 여성안수를 지지해 준다면 어느 누구와도 연대할 수 있다는 태도가 교회 내의 여권주의주의들과 이 운동을 지지하는 그룹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제 성경의 권위와 보수적인 성경해석을 추구하는 개혁파 교단들끼리도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진영과 찬성하는 진영으로 나누어지는 이런 경향은 어느 정도 전 세계적인 흐름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1. 장로회 각 교단의 여성안수에 대한 역사적 고찰

현재 한국장로교 안에서 고신측과 합동측은 여성안수를 허용하지 않지만 기장측과 통합측은 여성안수를 허용하고 있다. 기장측에서는 1956년 제41회 총회에서 여장로제를 통과시키고 그 다음해인 1957년에 3명의 여 장로가 탄생하였다. 여 목사제는 1974년 제59회 기장총회에서 받아들여졌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측에서는 여성안수 청원은 제46회, 제47회, 제49회, 제50회, 제52회 총회 등 거의 매년 총회에 여성안수를 청원하였으니 총회는 번번이 이를 반려하였다.

1968년 제53회 총회 때는 여 장로 제도만을 청원하였으니 다음해 총회에서 반려되었고, 1971년 제56회 총회에서는 투표에 부쳐져 94:194로 부결되었다(대한예수교 장로회(통합), 제56회 총회, 총회록, 98-99). 제56회 총회 이후로 여성안수 문제는 여성들의 청원으로 거의 매해 투표에 붙여지기는 하나 부결을 거듭할 뿐이었다. 1991년 제76회 총회는 여성안수 부결에 대하여 “향후 3년간은 이 문제에 대하여 헌의도 할 수 없도록 하는 안”까지 통과시켰다. 그러나 그 3년의 기간이 지난 후인 1994년 제79회 총회여성안수의 건이 통과되고 노회 수의를 거쳐 1995년 5월 27일 여성안수에 대한 헌법 개정안이 공고된 이후 1996년 4월 28일 첫 여장로로 안수를 받았고 그해 첫 여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1994년 제79회 통합측 총회에서 “여성 안수 문제”에 대하여 허용하는 결의를 하자, 그 여파가 합동측에까지 확대되면서 이 문제에 대한 성경적 논의의 필요성 때문에 <신학지남>, 1996년 가을호(통권 248호)에서 특집으로 “교회와 여성”이라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들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김의환 박사,“교회내 여성의 기능과 성직의 자격”, 박아론 박사,“여성의 목사안수에 관한 여권주의자들의 주장과 우리의 견해”, 권성수 박사,“딤전 2:11-15에 관한 주석적 고찰”, 김길성 박사,“여성임직에 대한 성경의 교훈”, 다음해인 1997년 가을호(제252호)에서도 심창섭 박사의 “여성안수에 대한 소고”와 정훈택 박사의 “존재론적 평등성, 기능적 종속성”, 이관직 박사의 “성경 속에 나타난 여성안수에 대한 이해”라는 논문이 발표됨으로 합동교단의 신학적 입장은 여성안수가 신학적으로 불가함을 발표하게 되었다. 또한 제83회(1998) 예장합동 총회는 신학적으로 여성안수를 허락할 수 없다고 이를 확증했다.

2. 여성안수 문제에 대한 신학적 논쟁

한국장로교회는 역사적으로 여권문제는 함경북도 성진 중앙교회 김춘배 목사는 1934년 8월 22일자 「기독신보」에 “장로회 총회에 올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의 공개서한을 발표한 일이 있었다. 그는 이 글에서 지난 해 총회시 함남노회에서 여자에게 장로 자격을 주자고 헌의한 건을 부결한 데 대해 유감을 표시하고, 남녀 차별적 헌법에 근거하여 여자에게 치리권을 부여하지 않은 것은 성경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김춘배 목사는 “여자는 조용하라.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고 바울이 기록한 것은, 2천 년 전의 한 지방교회의 교훈과 풍습을 말함이요,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다”라고 선언한 것이 총회에서 문제로 제기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총회는 단호하게 “성경의 파괴적인 비평을 가르치는 교역자들과 성경을 시대사조에 맞도록 자유롭게 해석하는 교역자들을 우리 교회 교역계에 제외하기 위하여 총회는 각 노회에 명하여 교역자의 시취문답을 행할 때에 성경비평과 성경 해석 방법에 관한 문답을 엄밀히 하여 조금이라도 파괴적 비평이나 자유주의 해석 방법의 감화를 받은 자는 임직을 거절케 할 일이오며 이미 임직 받았던 교역자가 그런 교훈을 하거든 노회는 그 교역자를 권징조례 제6장 제42조, 제43조(면직조항)에 의하여 처리케 할 일이다.” 라는 입장을 정리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교단에 속했던 김세윤 교수는 여성안수를 고린도전서 14장이 사본학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점을 들어 후대에 남성우월주의자인 누군가에 의해서 바울의 이름으로 삽입ㆍ편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성경해석은 여성 안수를 지지하기 위한 해석학적인 주요한 유형들 가운데 속하는 것으로서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믿음과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그의 세미나에 참석한 합동교단의 여성도들 다수가 지지하였다. 이에 대해서 서철원 교수는 김세윤 교수의 신학적인 탈선을 중심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박혜근 교수(칼빈대학교 조직신학교수)는 그의 논문 “‘평등 그러나 복종’의 성경적 이해”라는 논문에서 “1970년대를 기점으로 교회 안에서도 페미니스트 운동의 여파로 여성의 독립적인 가치와 남성과 동등한 성직 안수의 권리를 구현하고자 하는 시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라고 말하면서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들이 가진 해석의 지배적인 원리란 남성과 여성의 ‘동등’(equality) 혹은 남성으로부터 여성의 ‘해방’ (liberation)이라는 정치적 사회적 이념”이었으며, “이들 이념적 가치야말로 교회 안과 밖이라는 구분을 떠나 역사적인 모든 유형의 페미니스트들이 실현하고자 했던 공통된 목표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교회와 관련하여 페미니스트들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관심사는 남성이 독점해 온 성직을 여성과 공평하게 나누어 갖자는 것이며, 그 첫 번째 실천적인 과제가 바로 성경을 그들이 가진 이념으로 재편하고 재해석 하는 일”이 문제점이었음을 지적하면서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을 따라 성경을 재구성하지 않는다면 성경은 결코 페미니즘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현재 여성 안수를 둘러싼 논쟁의 본질은 사실은 특정한 성경 본문을 둘러싼 단순한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여성 안수의 이슈를 근본적으로 성경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교회의 고백적 전통에 대한 현대의 이데올로기의 도전이란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성경의 권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전통적인 해석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를 인정하는 건전한 해석의 원칙을 고수하는 일일 것이다.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교회가 일어서고 무너지는 일이 달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1980년대 더글라스 무(Douglas Moo)와 필립 페인(Philip B. Payne)은 여성 안수를 두고 트리니티 저널(the Trinity Journal)을 통해 논쟁의 글을 실었다. 무는 이 논쟁의 글의 결론으로 “여성이 남성을 가르치거나 남성을 다스리는 권위를 행사해서는 안 되며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남성과 여성이 가지는 관계의 구조를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페인은 “디모데전서 2:11-15은 교회에서 여성들을 가르치거나 다스리는 지도자로서의 활동을 금하는 충분한 근거를 주고 있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사도 바울의 특수한 국지적, 문화적 조건 하에 있는 에베소교회에게 그 같이 말하였으나 우주 보편적인 모든 교회에 적용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따라서 오늘날의 교회에까지 영속적인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함으로서 이러한 논리와 논쟁은 이미 한국교회 안에서 역사적으로 첨예하게 대립되는 내용으로 이 문제는 단순히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는 차원이 아니라 성경 해석과 성경의 무오성이라는 측면에서 거론되기도 했다.

이러한 논쟁의 대립들은 역사적 정통신학을 결정짓는 신앙과 신학의 유일한 원천인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있으며, 특히 성경의 무오성과 영감, 권위에 대한 해석의 문제로 대립되었다. 그 대립의 한 중앙에 성경의 무오성과 영감을 부인하고 성경의 신적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탈선적 해석방법들로 대한 전통적인 해석방법과 현대신학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어쩌면 이러한 대립과 충돌, 논쟁과 대결은 성경과 신학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나타내기 위한 필요한 조치들이라 할 수 있다.

3. 신학적 근거에 의해 여성안수를 반대한 이유

신학이란 곧 성경해석의 원리이자 성경해석에 근거한 사상적 체계이다. 따라서 신학이란 신앙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회가 지금까지 교회를 양육해 온 바른 신학을 성경의 이정표로 삼는 일은 자유주의 현대주의적 폐해가 만연한 지금에 더욱 중요한 일이다. 즉 신학적 탈선은 언제나 병든 신앙의 문제로 이어진다. 신학의 내적 원리는 믿음이라면, 외적 원리는 성경이다. 따라서 성경 본문의 의미가 우리의 삶에 어떤 함축성을 갖는가 라는 질문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성경이 교회의 신앙과 모든 실천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여성안수의 문제 역시 성경을 정경으로 전제하는 건전한 성경해석의 원리를 채택하는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문제는 이 문제가 양성평등주의, 비성경적인 성차별주의에 편승한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출발해서는 안된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입장에서 여성안수를 반대한다.

첫째, 김세윤 교수는 여성안수를 고린도전서 14장이 사본학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점을 들어 후대에 남성우월주의자인 누군가에 의해서 바울의 이름으로 삽입ㆍ편집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를 거부한다.

어느 누구든지 성경 권위를 훼손하는 비평적인 접근은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바울서신 중에서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성경의 본문에 대해서 바울의 저작을 부정하는 식의 주장이나 성경의 저자들이 틀렸다고 주장하거나, 성경도 문화나 환경의 영향을 받는 상대적인 문서일 뿐이라는 유형의 해석에 동의할 수 없으며 이를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니콜(Roger Nicole)은 다양한 성경해석의 입장을 소개하면서 여성안수를 긍정적으로 보면서 “성경의 본문이 항구적이고 우주적인 구속력을 갖는다는데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내용은 인정할 수 없다.

둘째, 성경과 전통의 관계에서의 문제 때문이다. 개혁주의 교회는 특별히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있어서는 “규범적 원리”라고 불리는 독특한 해석적 원리를 발전시켜 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Ⅰ:Ⅵ에 나타난 대로 성경의 절대성과 충분성, 충족성에 대한 신앙에 근거해서 성경에서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하게 가르치지 않는 것은 교회론의 영역에 일체 도입하지 않았다. 반드시 성경으로부터 확정적인 지지를 받는 것만을 교회의 조직과 예배모범의 요소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규범적 원리는 종교개혁자 칼빈에 의해서 처음 제안되었다. 이러한 규범의 원리들은 성경의 권위를 보존하고자 하는 열정과 의도가 근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원리에 따르면 여성안수에 관한 한 여성의 안수를 위한 성경의 승인을 확보해야 한다. 왜냐하면 여성안수를 허용해야 할 것인지, 금해야 할 것인지는 전적인 성경적인 근거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즉 여성안수 허용의 정당성은 성경의 근거와 함께 분명하게 증명되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이같은 증명의 의무는 여성안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이유를 반대하는 식으로 여성안수를 증명하여 성경적 권위의 근거로 삼는 것은 옳지 않다.

셋째, 창조와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여성의 문제 때문이다. 남녀 창조의 기사에서 남자와 여자가 책임과 권한에서 동등하지 않다. 남녀가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사람이라는 존재론적으로는 동등하다. 그러나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고 이브가 있기도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았고 행위언약의 당사자가 되었다. 아담의 위치는 ‘먼저’로써 특징 지워진다. 먼저 됨은 존재의 순서를 말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양식을 말하는 것이다. 즉 아담이 언약의 대표자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아담은 이브를 포함한 모든 인류를 위한 언약의 머리가 됨으로써 단순히 시간적으로 먼저 지어진 존재 이상의 이부에 앞서는 권위를 가진 존재가 된 것이다. 남녀간의 권위와 복종의 이슈는 일반적으로, 근본적으로 창조시 언약적 질서에 속한 문제이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과 관련하여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아무런 역할의 차별이나 구분이 없어야 한다고 해석하면서 이 구절이 남자와 여자 사이의 일정한 역할의 구분을 규정하는 다른 성경과 충돌하는 것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여성안수자들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 28절이 보편적 교회에 영속적인 원리라고 믿었다고 보고, 표면적으로 이 성경과 충돌하는 모든 성경은 거부되어야 한다고 믿는 입장이다. 브루스나 그 브루스의 입장을 취한 김세윤 교수는 갈라디아서 3장 28절과 반대되는 주장을 담고 있는 다른 성경을 다룰 때 전자를 취하고 후자를 부정한다.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이러한 입장은 결코 지지를 받지 못한다.

우리는 “성경은 아무런 내적인 모순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수용한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서의 자유와 여자에 관한 제한규정이라는 상호 모순되는 것 같은 두 가지 언급을 설명하고자 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평등과 일체성의 선언은 교회 안에서의 역할의 구분과 차이에 대한 명령과 아무런 모순 없이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며 오늘날의 교회에도 여전히 권위적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할 수 있다.

4. 결론

결론적으로 여성안수를 금해야 한다는 주장은 성경이 명확하게 가르치는 바라고 믿으며, 여성의 성직안수 금지는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라는 규범을 존중하는 해석적 노력의 결과로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이다. 성경은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의 소유자로서는 동등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과의 언약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권위와 복종의 질서가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러한 남녀의 언약적 권위와 복종의 질서를 무효화 하거나 소멸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며, 이는 이미 밝힌바 예장 합동교단의 신학적 입장이기도 하다(*) 

 

* 일부 오자를 수정하였습니다.  

영성안수 -> 여성안수

Posted by 작은샘

org date: 2012. 1. 11. 22:50

 

마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주는데 익숙하지 않다. 예수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내어주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십자가의 복음의 의미이다.  복음을 전한
다고 하면서 말로만 하고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의 사랑,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을 보여
주지 않으니 복음의 능력이 발휘되지 못한다. 전도를 당하는 사람들은 전도지를 나누어주
면서 전도하는 사람, 들이대는 사람들을 뭔가 자신들로부터 뺏어가는 사람으로 인식하기 
쉽다. 내 시간, 내 돈, 가정의 평화를 뺏어가고 오래동안 지켜온 내 가치관이 판단받고 무시
당하는 것 같을 것이다.

지금의 교회의 전도에 대한 인식이 뭔가 뺏는 것이라는 것은 교회 내에서도 마찬가지로 여겨
진다.  교회간의 수평이동이 그것이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개척교회부터 뭔가 번듯하게
건물을 세우고 안정을 취하고 싶은 100 -200 명 정도의 교인 수의 교회들은 절박하다. 

한 사람, 한 가정이 아쉽다.  그래서 전도가 뺏는 생존경쟁으로 비추어지는 것이 불편한 진실
이다. 각종 편의 제공과 익명성의 잇점이 있는 대형교회들은 더욱 많은 교인을 빨아들인다.
그러고도 중형교회들로 나누어지기를 거부한다. 

'뺏는' 목회는 약육강식의 세상과 닮아 있다. 세상은 점점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더욱 
뺏는 것이 정당화되고 있다.  시장경제가 더욱 그렇다.  능력있는 자가 더 많이 차지하는 것
이 당연시 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뺏는'목회는 아무런 설득력도 없고 기독교 정신도 아니다. 복음은 사랑이다.
나 자신까지 내어주는 사랑이 예수님의 복음을 잘 표현한다.  뺏으려는 탐욕을 감추고 사랑을
가장하면 상대방은 그것을 알아챈다.  그냥 조건없이 주어야 한다. 

주는 것은 내가 가장 못하는 것이다.  그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 여기고
주는 것도 사양하고 내가 잘 주지도 못한다. 이런 내가 사랑의 목회로 교회를 시작한다면 
얼마나 어려울까?  나도 이렇게 어려운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는 사랑으로 전도하고 
그 사람이 또 그 같은 사랑을 보여주기를 기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그래도 그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이고 전도의 바른 길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생존에
얽매이지 않고 사랑에 집중하고 사랑의 복음 사역에 집중하는 교회를 세워갈 수 있을 것 같다. 
수에 얽매이지 말고 동역하는 사람이 있는 한 계속해서 사랑의 사역에 힘쓰는 교회라면 끝까지
해볼만 하지 않은가? 주위의 교회를 긴장시키지 않아도 된다. 경쟁이 아니라 사랑으로 대하면
된다.  내 교회 주위에 많은 교회가 있으면 어떤가? 사랑의 사역을 하는 교회는 많아서 나쁠
것도 없다. 크기가 작아도 할 일은 있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서로 도우면 된다. 
번듯하게 이름을 내고 폼을 잡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작은 교회들이 
나아가야할 방향이 아닐까? 

개척교회 목회자들은 많이 지쳐있다. 매일 생계를 걱정해야 한다. '뺏는'목회의 현실에서 사
랑을 베풀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 모른다.  좀 경제적 여유가 있는 교회에서 
이런 개척교회들을 도우면 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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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샘

교회개척

2021. 6. 4. 15:40 : 신학/목회신학

2012. 1. 11. 21:17

 

교회개척

사역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교회를 개척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하다가
어떤 교회를 세워야 하는가를 두고 많이 고민하였다.  그러나 뾰족한 답은 없었다.

주위에 세워지고 사라져가는, 또 겨우 간판을 떼지 못하고 버티고 있는 수많은 작은
교회들을 보면서 고민했다. 그 같은 교회를 또 하나 세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돌아다녀 본 중형교회들의 설교가 말씀 중심적이지 못한 것을 보면서 말씀을 잘 가르
치는 교회가 필요할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내가 자신있어 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를 세우려면 당장 건물을 구해야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다. 빚으로 세워진
개척교회가 건물과 인테리어를 안고 버티다가 사라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무슨 일이 있어도 성도가 어느 정도 모이고 나서 건물을 구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되
었다.  그러나 아무런 개척 멤버가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사람을 만나고 전도해서 동
역자로 세운단 말인가?  요즘은 교회개척은 물 건너 갔다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시대이다.
사람들은 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가면 만날 방법이 많지 않다. 

언젠가 동료 목사가 전해들었다는 어느 목사님의 말이 딱 맞다. 요즘 교회개척은 마치
교회 개업과 같다. 투자하여 가게를 먼저 마련한 후에 사람들이 모여들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주위에 간판을 달고 있는 작은 교회들에 과연 성도들이 얼마나 모이고 있을까?
교회란 성도들의 공동체인데 건물이 먼저 우선이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무리를 해서 집회 장소를 구하고 간판을 달았다고 해서 바로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으면
곧 바로 생존의 문제로 넘어간다.  영혼을 구원하고 복음 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교회를
유지하게 위해 사람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재정도 큰 문제이다.  빚 더미 위에 앉기
쉽다. 주위 사람들에게 큰 부담을 지게 된다. 왜 이 교회가 세워져야 했는가에 대한 대답
은 없이 그저 생존을 위한 몸부림만 남게 된다.  이미 크고 작은 교회들로 가득 차 있는
동네에서 또 교회를 세우면 주위 교회의 담임목사들의 눈총을 피할 길이 없다. 경계의 눈길로
본다.  이런 현실은 뭔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교회를 개척하면 처음에는 전도지를 뿌리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주위에 아는 사람이 별
로 없으니 알리려는 것이다.  그런데 전도지 뿌려서 전도가 되는 경우가 별로 없다. 사람
이 별로 없으니 관계 전도도 잘 안 된다. 

교회를 세우는 것이 어렵다면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까지 어떤 것이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을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인터넷 공간에서라도
말씀을 전하고 접촉하고 소통하는 것을 준비하고 있다.  그것은 계속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 또 한 가지를 깨닫게 하신다. 

사랑의 목회이다. 주는 목회이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시면서 우둔한 내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가기를
원하고 계심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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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샘

org date: 2012. 1. 4. 21:19

 

정확히는 지난 주 성탄절 이후부터 감기가 시작되었는데 낫는가 싶더니 지난 주말부터 다시 콧물이
흐르고 머리도 지끈거렸다. 결국 새해는 감기와 함께 시작한 것이 되었다. 지금은 아내만 제외하고
아이들까지 포함해서 감기로 고생중이다.

최근 2,3년 전부터 느끼는 것이지만 이번에 이비인후과를 다니면서도 또 다시 실감한 것이 있다.
의사들을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괜찮다는 말이 있어서 찾아갔고 가보니 사람도 많고 일류대 출신
이라 좀 믿음직했다. 처방을 받은 약을 먹은 첫날은 왠 약이 이렇게 잘 듣는지 모르겠다며 아내와 몇
번이나 말을 했다. 그것은 저녁까지만이었다.  악몽은 그 다음날 시작되었다.  2일분 약이었는데 왜
그 결과가 하루 하루가 다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둘째날 누런 코는 줄었고 가래도 없어진 것은 좋았
지만 점심을 지나며 맑은 콧물이 계속 흘렀다.  계속 화장지로 코를 풀기 바빴다. 아침, 저녁에 먹을 
약만 처방해 주었기에 점심때 약을 먹을 수도 없었다.  급기야 오후에는 오한이 나면서 떨어야 했다.
창문을 열어 환기시키면서 찬바람을 좀 쐰 것 때문인가 그래도 그것은 잠깐인데. 어쨌든 찬바람을 
쐬기 전부터 줄줄 흐르던 콧물은 저녁에 약을 먹은 후에도 계속되었다.  아이들을 살펴보니 아이들은 
아예 약을 먹은 첫날부터 별로 효과가 없는 듯했다.  나는 오한때문에 해열제를 먹었고 그래서 좀 회복
되는가 싶었다.  그것도 잠시... 새벽에도 고생을 했다. 아침에는 다시 해열제 복용.  결국 다른 이비인
후과로 발을 돌렸다.   별로 믿음이 안가지만 또 혹시나 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역시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 뿐이다.  새해를 온 가족이 감기와 함께 시작해서 올해 얼마나 힘들지 모르겠다고 걱정하는 아내의 말을 듣고 부정적으로 보지 말라고 하긴 했지만 아무것도 못하니 내심 좀 답답하긴 하다.  그러나 오히려 오직 하나님만 믿고 바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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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2. 26. 19:04

 

합동신학교 신복윤 교수의 '복음주의, 근본주의, 개혁주의 비교' 

 

복음주의, 근본주의, 개혁주의 비교

 

graced.egloos.com

복음주의, 근본주의, 개혁주의 비교
  
신복윤 교수 

 
이 글에서는 복음주의, 근본주의, 개혁주의 등 몇몇 운동들의 용어, 역사적 배경, 사상적 특징들을 돌아보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활동한 상황, 평가, 그리고 한국 교회와의 관계 등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Ⅰ. 복음주의


1. 복음주의의 발단
근본주의가 20세기초 미국에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동으로 생긴 신학이라고 한다면, 복음주의(福音主義, Evangelicalism)는 17세기 이후 독일 루터교회의 '죽은 전통'에 불만을 품은 경건주의(敬虔主義)운동에서 파생된 운동이다.


종교개혁 이후 독일교회에는 점점 신앙의 고정화 현상이 나타나 교리적 정통주의가 만연케 되자, 슈페너(P.Spener 1635~1705)와 후랑케(Francke, 1663~1727)를 중심으로 종교적 정열과 내적 생명을 되살리려는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 독일교회에 커다란 각성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 "기독교는 생활이요 체험이다"라는 표어를 가지고 성경의 생활화를 강조하였다. 이들의 경건주의 운동이 바로 독일과 영국, 그리고 기타 유럽의 복음주의의 모체가 된 것이다(복음주의,신학사전, 개혁주의 신행협회 pp. 204~205).


복음적이란 용어는 복음에 기초하려는 모든 개신교 교회에 붙여졌다. '복음주의'란말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에도 적용되고, 영국에서는 웨슬리파 감리교회에도 사용되었다. 이렇게 사용된 복음주의는 기독교회 기본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한편, 성경의 권위와 완전영감설을 강조하고, 의식적 예배보다는 설교의 우위성을 주장하며, 로마가톨릭에 대해서는 짙은 회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

2. 복음주의의 역사
위에서 말한대로 복음주의는 17세기 이후에 생긴 운동이지만, 그러나 초대교회의 신경(信經)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초대교회는 그것을 성경의 교훈과 관련하여 그 의미를 파악하고 변증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복음주의 신학은 이 시대의 사상과 손을 잡고 다음 내용들을 확인하였다.


즉 성경은 하나님의 참된 계시이며, 그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음성으로 말씀하신다는 것,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요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라는 것,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구속적으로 역사속에 들어오셨다는 것,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 시라는 것, 죄의 권세와 심판은 모든 인류에게 다같이 실재(實在)한다는 것, 하나님은 자비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먼저 찾아오셨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세우고 계신다는 것, 역사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일반적 부활, 최후의 심판, 천국과 지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등이다.


복음주의 신학은 또한 초기 중세교회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캔터베리의 안셀름(Anselm)이 주장한 속죄론에서 만족설(滿足說)을 비중있게 취하였으며, 끌레르보의 버나드(Bernard)가 주장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하여도 강조하였다.


특히 복음주의 신학은 종교개혁의 특징들과 특별한 관계를 갖고있다. 복음주의는 철저하게 성경 중심성을 강조하고, 특별히 설교와 관련하여 성경의 능력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온다는 것, 교리와 생활의 모든 문제에 대하여 성경은 최종적인 권위를 갖는다는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성령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고 그것을 자국어로 번역하여 널리 보급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 등에 깊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복음주의는 또한 이신칭의(以信稱義)교리를 강조하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자기계시(自己啓示)를 신뢰함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복음주의는 역시 교회는 성령으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아버지를 직접적으로, 개인적으로, 또는 항상 가까이 나아가는 모든 신자들로 구성된다는 것을 기쁘게 고백하였다.


종교개혁은 제도화된 여러 구조들과 민족주의적 충동의 결과로 나타났으며, 이 속에서 복음주의 신학의 다양성이 발생하였다. 그들 가운데는 성례의 본질, 개인의 구원과 관련된 하나님의 작정(作定)의 위치, 천년 왕국의 시기, 교회의 정치형태, 성경영감의 정확한 성격, 구원의 확신에 도달하는 방법, 문화와 국가에 대한 관계 등에 대하여 이해의 차이가 있었다. 오늘의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이런 문제들 가운데 대부분은 약간 이차적인 중요성을 가진 문제로 생각될지도 모르는 것들이다.


복음주의 신학은 또한 대략 18세기 중엽에 일어난 복음주의적 각성운동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이때 복음주의는 위대하고 표준적인 전통신학을 재차 확인하고, 크리스챤 삶의 신학에 특별한 역점을 두었다. 구원에 이르는 신앙이나 회심의 성질에 대한 논의는, 비록 회심의 시간에 대한 차이는 있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식과 이에 따르는 성질의 변화 문제와 함께 계속 전면에 나타났다.
성화의 수단과 그 가능성도 역시 강조되었는데, 성화의 시간과 성취에 대하여 약간의 차이가 다시 한번 있었다. 공동의 영적 삶의 신학이 또한 강조되었는데, 교회의 갱신과 세계의 복음화, 그리고 사회의 개선을 특별히 강조했다.


1980년대에 와서 복음주의 신학은 크리스챤 삶의 신학에서 벗어나 진지한 성경해석 작업과 이를 반영하는 사상을 통하여 다시 한번 중세 초기와 종교개혁 시대처럼 정통신학의 유산을 활기차게 선택하려는 증거를 보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바로 그 당시에 복음주의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과 충돌하고 있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옛 계몽주의 운동의 합리주의와 신지식(神知識)에 이르는 다리로서 인간의 자각을 강조하는 후기 칸트 철학의 결합이었으며, 이 신학은 낭만주의 시대에 호소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한 배경 가운데서 복음주의 신학은 그 새로운 견해들과 타협함으로 약화되거나 후퇴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그 침체를 변호하려는 노력도 일어나고 있었다.


이들은 정통신학의 정수를 옹호하는데 눈부신 활약을 하면서도, 자주 그 당시 사상의 많은 부분을 버리고, 크리스챤 삶의 신학에 대한 독특한 복음주의적인 강조점을 약화시켰다. 따라서 모든 신학의 최종적인 형성을 종교개혁시대의 신앙고백에 끼워넣은 인상을 주었다.


이때 복음주의 신학의 빛을 희미하게나마 비추어 주던 학파가 있는데 바로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ayper) 이후에 나타난 화란학파(the Dutch School)이다. 이들은 정통신학의 전통을 확인하고, 모든 부분에서 크리스챤 삶의 신학에 대한 중요성을 깊이 깨닫고 있었으며, 동시에 많은 문제점들을 느끼고 그 당시 발생되는 문제들에 접근하고 있었다.


19세기 후반에 자유주의 신학의 압력은 계속 증대되고, 복음주의는 약화되었기 때문에, 더욱 더 방어적인 복음주의 신학이 근본주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 가장 중요한 보루는, 교회와 사회가 파멸을 향하여 돌진한다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천년왕국설이었다. 그리스도교는 '현재'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모든 것을 '미래'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20세기 중반에는 복음주의 신학 안에 어떤 활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영국 학자들이 진지하고 학문적인 성경해석 방법의 접근에 공헌하였고, 미국 학자들은 조직신학, 변증학, 윤리학같은 조직신학의 보조학문 영역에서 열심히 연구하였다. 화란학파와 메노나이트파(Mennonites)는 중요한 여러 종류의 출발점부터 사회적 행동의 신학들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오순절파의 카리스마 운동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교회를 통해 강하게 그리고 초자연적으로 나타나신다는 성령의 신학을 선언하였다.

3. 영적신학
마지막으로, 복음주의 신학은 영적신학(Spiritual Theology)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위대한 신학 전통의 일부분인 삶의 신학의 방법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정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신학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명상하고 기도하며 연구해야 할 대상이다. 신학연구의 목표는 신학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학문적인 만족에 대한 유혹은 극복되어야 한다. 즉 신학은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결산의 날이 가깝다는 자각에서 행해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복음주의 신학의 작업 전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다.

4. 한국교회와 복음주의
한국교회는 일반적으로 '복음주의적'이다. 복음주의는 요약해서 말한다면, 경건주의에 개혁주의가 가미된 운동이라고 하겠다. 복음주의자는 그러기 때문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대원칙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한국의 복음주의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의 복음주의는 현재 여러 교파에 속해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회장:전호진, 총무:박형용)가 있고,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김준곤, 총무:김영혁)가 있고, 복음주의사상·신앙·사업 확장에 힘쓰고 있다. 비록 사상과 교파의 배경은 다르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복음의 정열을 가지고, 경건하게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복음주의자라고 한다면, 한국복음주의 운동은 소망스러운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 경계할 것은 복음주의가 경건주의에 흐르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최근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에 비해 유럽의 복음주의 신학이 약세에 있는 것은 경건주의 운동의 영향 때문이다. 경건주의가 내세운 생활위주의 기독교는 얼마 안가서 교리적으로 이질화의 염려가 있다.

II. 근본주의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독일과 영국에서 일어난 자유주의는 19세기말 미국에서 강한 세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성경의 객관적 계시와 정확무오한 권위에 정면 도전하고, 그리스도의 처녀탄생,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대속교리, 육체부활 등에 대하여 회의를 느꼈다. 모세오경의 저작권, 구약의 연대적 순서, 복음서 기록의 정확성, 바울신서의 저작권 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신학적인 공격만이 아니라, 과학적인 공격도 아울러 퍼부었다. 다윈의 진화론이 인류와 세계에 대한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견해를 불신하는데 사용되기 시작했다. 인간은 부패하고 타락한 존재가 아니라, 완성을 향하여 진보하여 가는 것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이와같은 비평에 대하여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 즉 초자연적인 복음의 변호와 전파를 위하여 일어난 것이 곧 근본주의(根本主義, Fundamentalism)운동이었다. 그러나 신학적인 배경은 다양하여, 이 운동에는 칼빈주의자, 알미니안파, 침례교도, 장로교도, 그리고 세대주의자(世代主義者)들이 한데 뭉쳐 있었는데, 그들은 20세기초까지 공동의 적인 자유주의를 대항해서 싸웠다.

1. '근본주의'라는 말
'근본주의'라는 말은 1920년 침례교기관지 「The Watchman Examiner」의 편집인 커티스 리 로우즈(Curtis Lee Laws 1868~1946)가 북침례교 총회안의 반현대주의자들을 가리켜 사용한데서 비롯된다. 이 용어는 현대주의 신학과 현대문화의 세속화 양상에 대항하여 싸우는 복음주의 개신교도들을 총체적으로 넓은 의미에서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예를 들자면, 이 용어는 첫째로 복음주의적 개신교도들에게요, 둘째는 반현대주의자들에게다. 그들은 전통적, 초자연적, 성경적인 기독교의 원리에 동의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앞에서도 말한 바 있는 반현대주의자나 혹은 세속화에 대항하여 싸우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 이 용어는 넓은 의미에서도 사용되고, 좁은 의미에서도 사용되기 때문에 그 묘사는 다소 복잡하다.


때때로 이 말은 일반적으로 어떤 종교상의 반현대주의자를 가리키는데 사용된다. 혹은 근본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남미에서 흔히 볼 수 있는대로, 복음적 부흥운동에서 도를 지나치거나 반(反)지성주의적인 사람들을 가리켜 막연하게 사용하기도 한다. 이 말을 그렇게 사용하게 될 때, 근본주의와 부흥운동을 혼동하게 되고, 따라서 부흥운동가들의 뿌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몇몇 운동들과 혼동을 초래하게 된다.


예를 들면, 19세기 후반기에 일어난 '성결운동(聖潔運動)'은 완전무죄생활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체험을 강조하였다. 20세기 초에 일어난 '오순절운동'은 영적능력을 극적으로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들은 반현대주의자인 근본주의자들의 호전성을 채택하였기 때문에 근본주의적이 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들은 교회와 관계에서는 독립성을 유지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이 모든 운동들의 공동 기원을 19세기 미국 부흥운동의 다양한 유산에 두고 있는 것이 확실하며, 그래서 그들은 보통 근본주의자로 불려졌지만,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부흥운동가들이었다.


영국에서 근본주의라는 말은 더 넓은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서 근본주의는 성경의 고등한 견해와 근본적인 주장들을 가지는 복음주의적 보수주의를 가리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제임스 팩커(J. I. Packer)는 이런 의미에서 그의 저서 「Fundamentalism and the Word of God」(London, 1958)에서 근본주의를 변호했으며, 제임스 바르(James Barr)는 「Fundamentalism」(London, 1977)라는 저서에서 근본주의운동을 비판하면서 보수주의적 복음주의의대부분의 분파들을 하나로 묶어 말하였다.


한편 미국에서는 근본주의가 호전적인 반현대주의적 백인 복음주의자들을 가리켜 좁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미국의 흑은 복음주의자들은 흔히 스타일에서는 부흥사이고, 교리면에서는 근본주의이며, 윤리면에 있어서는 반현대주의에 속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근본주의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2. 근본주의의 역사(曆史)와 특징
근본주의 운동의 특징들은 그 역사에서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다. 에네스트 샌딘(Ernest. R. Sandeen)은 그의 중요한 연구서 「The Roots of Fundamentalism:British and American Millenarianism 1800~1930」(Chicago, 1970)에서, 근본주의의 주요한 근원은 다비(J. N. Darby)와 그밖의 사람들의 저작에서 볼 수 있는 천년기전 재림예언운동(千年期前再臨豫言運動)이라고 지적하였다. 비록 영국에서 이 운동이 전통적인 교회를 떠난 플리머스 형제단(The Plymouth Brethren)을 만들어내기는 하였으나, 19세기 후반 미국의 장로교와 침례교같은 중요한 교파 안에서도 근본주의의 표현들이 나타났다.


세대주의(世代主義, Dispensationalism)가 이 운동의 특징이었으며, 스코필드(C. I. Scofield)의 관주성경(Reference Bible)은 거의 정경(正經)처럼 인정되었다. 또한 미국의 많은 세대주의자들은 영국의 케직사경회의 온건한 성결운동의 교리를 채택하였다. 세대주의는 이 시대에 교회의 파멸을 예고하면서, 20세기 초의 공격적인 현대주의 신학의 발생에 대하여 투쟁할 것을 고무하였다.


특히 현대주의가 강했던 미국에는 현대주의에 대항하여 신앙의 근본원리들을 옹호하고자 하는 세대주의자들이 많이 있었다. 북장로교에서는, 보수주의자 프린스톤 신학교의 지성적인 지도자들 찰스 핫지(Charles Hodge), A. A. 핫지(A. A. Hodge), 워필드(B. B. Warfield), 메이첸(J. G. Machen)에 의해 강하게 유지되었다.


보수주의적 장로교인들은 우선 근본교리를 옹호하는 전략을 전개하였다. 특히 1909년부터 1915 년까지 12권으로 된 근본주의 총서 「근본원리들(The Fundamentals)」이 출판되어 전통적인 교리들이 옹호되었다. 이 총서는 라이만 스튜어드(Lyman Steward)와 밀턴 스튜어드(Milton Steward) 형제가 희사한 25만불과 무디기념교회 딕슨(A. C. Dixon) 목사의 편집으로 이루어졌고, 집필자들은 당시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미국과 영국의 보수주의 신학자들이었으며, 전국적으로 300만권 이상이 무료로 배부되었다(George M. Marseden,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 Oxford University Press, 1980, p. 118).


이 총서는 성경의 축자영감과 무오성을 강조하는 29편의 논문들을 중심으로,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을 변호하는 총 90편의 논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많은 근본주의 단체들이, 비록 한가지도 표준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근본주의적' 교리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가장 공통된 요점은 성경의 무오성(無誤性).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동정녀 탄생, 대리속죄,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이었다.


1920년대에, 현대주의자들을 대항하여 열심히 싸운 근본주의자들은 주요한 북장로교와 침례교 교단들 안에서 세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작은 규모의 근본주의 논쟁들이 다른 교파들 안에서도 발생하였으며,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사이에 이와 비슷한 분열들이 미국과 캐나다에 있는 교회 안에서 발생하기도 하였다. 한편 근본주의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도덕적 부패를 공격함과 동시에, 교회와 문화의 부패도 공격하였다. 윌리엄 브라이언(William J. Bryan, 1860~1925)이 주도한 바 있는, 미국공립학교에서의 진화론 교육 금지운동은 그러한 관심사의 주요한 표현이었다.


그런데 1925년 테네시주 데이튼(Dayton)시의 고등학교 생물교사인 존 스코우프스(John Scopes)는 이 법을 어기고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100불 벌금형의 유죄판결을 받은 바 있다. 근본주의자들은, 진화론 교육의 보급은 미국인의 생활에서 성경의 권위를 손상시키며, 도덕적 상대주의로 조장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공산주의, 로마교회, 술, 담배, 춤, 도박과 극장구경도 근본주의자들이 공격하는 또 다른 중요한 표적들이었다. 이러한 투쟁속에서 근본주의는 미국의 남북부전역과 그밖의 영어권 나라들, 그리고 그들의 선교지역에서, 여러가지 전통을 가진 반현대주의 크리스챤들의 연합으로 성장하였다. 그 연합의 중심에 미국의 세대주의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근본주의는 다른 전통들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았다.


1930년대에 와서 근본주의는 어떤 특수한 교회적인 표현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가장 효과적인 근본주의자들은 점차로 현대주의자들이 들어있는 단체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교회나 교파로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들 대부분이 침례교 도와 세대주의자들이었다. 분리주의가 참된 신앙의 시금석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20년대의 호전적 반현대주의자들의 광범한 연합은 1940년대에 와서는 분열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에서 한 주요한 집단은 호전성을 완화하고, 중요한 교파들과의 접촉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집단은 해롤드 J. 오켄가(Harold John Ockenga), 칼 F. H. 헨리(Carl F. H. Henry), 에드워드 J. 카넬 (Edward J. Carnell)과 같은 대변자들이 주로 이끌어왔으며, 그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을 '신복음주의자 (Neo-Evangelicals)'라고 불렀다. 그들이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의 협력을 얻은 것은 복음주의적 전(前) 근본주의자들의 발전을 알려주는 신호가 되었다.


한편 존 R. 라이스(John. R. Riee, 1895~1980), 밥 존스(Bob Jones, 1883~1968), 그리고 칼 맥킨타이어(Carl Mcintire1906~)와 같은 호전적인 분리주의자들은 자신들만이 참된 '근본주의자'라고 주장하였다. 초기의 근본주의 운동과 달라진 이 분리주의적 근본주의 운동을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간하배(Harvie Conn)교수는 '신근본주의'라고 불렀다(ContemporaryWorld Theolog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77. p. 120).


1960년대 이후의 미국의 '근본주의'는 이 소수의 분리주의적 근본주의자들이 아니라, 넓은 복음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넓은 복음주의에는 전 근본주의자들과 여러가지 전통의 성경을 믿는 크리스챤들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1980년대에 침례교의 근본주의자인 제리 포웰(Jerry Fawell)의 Moral Majority의 시작과 함께, 미국인의 공적생활에서 전통주의적 크리스챤의 관습을 그대로 보존하려는 근본주의자들의 정치적 관심은 1920년대에서처럼 다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근본주의자들의 정치운동은 역시 현재 세대주의적 예언 해석에 중요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강력하게 지원하고 있다.

3. 근본주의와 한국교회
한국장로교회는 처음부터 청교도적 개혁주의를 선교사들에게서 전수받았다. 그러나 역사가 흐르는 동안에 이 청교도적 개혁주의 전통 속에는, 경건주의, 신비주의, 세대주의와 함께 근본주의 등, 성경사상에 미흡한 요소들이 들어와 사상적 혼란을 가져왔다. 특히 근본주의적 요소를 한국장로교회 안에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일반 은총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개혁주의적 한국장로교회는 세상학문에 대한 노력을 강조하지 않았고, 그러다보니 반(反)지식주의에 흐르는 경향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계시종교와 과학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칼빈은 계시종교를 알게될 때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바로 알게 된다고 하였다. 우리는 영원적인 것만이 아니라, 시간적인 것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으로 믿고 아울러 존중하며 강조하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또한 잘못된 경건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자라왔다는 것도 근본주의의 영향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크리스챤이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마땅하나, 그것이 경건생활이 못되고, 경건주의에 빠지게 될 때, 형식주의가 되고 율법주의가 된다. 경건주의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성경에 없는 생활표준을 세우고, 그 표준이 마치 성경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고, 마침내는 논쟁을 일으켜 덕을 세우지 못하게 된다.

4. 근본주의에 대한 평가
근본주의가 초자연주의를 강조하고, 성경의 권위, 처녀탄생, 그리스도의 신성, 대속교리, 부활, 재림 등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을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나, 거기서 몇가지 약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첫째로, 근본주의는 하나님의 주권교리를 강조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주권은 다른 모든 교리를 싸고 도는 중심 태양이다. 하나님은 우주의 절대적인 최고의 통치자이시며, 작정과 창조와 섭리와 구속에서 주권적으로 일하시는 것이다.


둘째로 근본주의의 약점은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깊이 보지 못하는 점이다. 구약시대의 신자들 가운데는 율법으로 구원을 얻고, 신약시대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은 다같이 은혜언약에 속하는 구원방법의 계시이다. 구약이 은혜의 약속에 대해 계약이라고 한다면, 신약은 그 성취에 대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양자는 연속성과 통일성은 갖는 것이다.


셋째로, 근본주의의 약점은 위에서도 말했지만, 일반은총(자연은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세속 학문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하여 마침내는 반(反)지식주의로 흘러가고 말았다.


넷째로, 근본주의는 개인의 종교경험을 강조하는 경건주의적 경향을 보이면서 기독교의 사회적, 문화적 명령을 무시한다. 종교는 개인의 기도생활과 성경공부, 그리고 교회출석에 국한되고, 경제학이나 사회학, 그리고 자연과학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하여는 무관한 생활을 한다. 그러므로 문화·과학은 성경신학에 의하여 지도받지 못하고 오히려 한정되고 제약을 받는다.


다섯째로, 초기 근본주의와 후기(신) 근본주의가 다같이 복음을 전파하고 옹호하려는 열심은 대단하나, 옹호하려는 면이 전파하려는 면보다 더 우세하다. 적극적 자세에서 부정적 자세로, 당당한 싸움에서 사사로운 다툼으로, 은혜로움과 예절에서 비난의 언어로, 그리고 운동에서 인물로 그 호전성을 나타낸다(간하배, 현대신학 해설, p. 165).

III. 개혁주의(改革主義)
'개혁'이라는 말은 본래 16세기 로마 카톨릭교회의 오류와 폐단에 대항하여 일어난 교회들의 성격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이다. 그러므로 개혁이라는 말은 더 넓은 의미에서 종교개혁의 모든 교회에 적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가 교회생활과 개인생활에서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 것을 고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매우 제한된 의미를 갖는다. 이 말 루터의 사상에서 그 자체를 구별짓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개혁주의라는 용어는 또한 칼빈주의라는 말로 불리워지기도 한다.

1. 개혁주의의 사상적 특징
개혁주의는 칼빈으로부터 전해진 사상체계이다. 창시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 사상 체계의 중요한 해설가이다. 칼빈의 신학사상은 개혁운동에 이바지한 다른 위대한 지도자들의 사상과 함께 어거스틴 사상의 부흥이요, 어거스틴의 사상은 그보다 몇세기 전의 바울사상의 부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사상들을 조직적으로 설명하고, 특수하게 적용하여 현대를 위하여 제시한 사람이 바로 칼빈이다. 이때부터 이 사상체계를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라 부른다(H. Henry Meeter, The basic Ideas of Calvinism, Grand Rapids:Baker Book House, 1975, p. 29).


개혁주의는 신학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사상체계이다. 여기에는 신학과 함께 정치, 사회, 과학, 예술 등에 대한 사상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 사상체계는 인생관, 우주관, 세계관을 제공한다(상게서 p. 30). 개혁주의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사상적 특징을 가진다.

(1) 성경관
개혁주의에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성경관이다. 미국 칼빈신학교의 클로스터 교수(Fred H. Klooster)는 그의 논문에서 개혁주의의 독특성을 성경관(sola and tota scriptura)에서 찾았다(The Uniqueness of Reformed Theology:A Preliminary Attempt at Description, Grand Rapids:The Reformed Ecumenical Synod, 1979).


종교개혁은 성경의 권위를 재발견하고, 그것을 새롭게 강조하였다. 종교개혁은 부패한 교권제도의 횡포를 버리고, 그 자체의 기초를 하나님의 말씀 위에 두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하게 취급되었던 교회 전통의 권위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새로 발견한 진리에서 활기를 찾아,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인이라는 것, 그는 말씀을 통하여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신다는 것, 그 말씀이 죄인을 부르시는 수단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권위로 그들을 다스리시며 순종케 하신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오늘날 성경의 영감(靈感)과 무오(無誤)에 관한 문제로 광범위한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말씀을 주셨는지는 정확하고 상세하게 알지 못한다. 사실 하나님은 성경의 어떤 부분을 우리에게 주시되, 다른 부분과는 다르게 주셨다. 예를 들면, 십계명은 하나님 자신의 손으로 쓰시는 방법으로 주셨는가하면, 복음서들은 목격자들을 사용하여 영감으로 회상케하여 쓰도록 하였다. 누가는 역사를 조사하는 특별한 방법으로 누가복음을 기록하였다. 성경 저자의 인간성과 개성이 영감의 과정에서 성령(聖靈)에 의하여 충분히 인정되고 고려되었다는 것도 완전히 명백하다.


그러나 이사야와 아모스는 전혀 다른 문체(文體)와 다른 배경에서 각각 다른 책들을 썼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울과 요한은 비슷하게 그들 자신의 마음의 특성들을 보여 주었으며, 진리를 각각 다른 견지에서 표현하였다. 그들은 놀랍도록 서로 다른 문체로 쓰고, 예리하고 고상하게 나타내면서도 다같이 그들 자신의 독특한 지성과 경험을 가지고 기록하였던 것이다.


개혁파 전통에서는 영감의 방법이나, 성경의 여러가지 특성의 의미에 관한 기술적인 정의(定義)보다는 오히려 성경의 권위(權威)에 대하여 더 많이 강조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성경에 접근하면, 성경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다양한 형용사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성경은 권위가 있으되, 궁극적이며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책이다. 성경은 잘못이 있을 수도 없고, 잘못을 범할 수도 없으며, 우리를 나쁜 길로 인도하지는 더욱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교훈을 의지하고, 전적으로 신뢰하며, 우리가 행복하게 살고 죽기 위하여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을 바로 이 성경에서 찾는다(Inst. I. 7, 8, 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 인간의 구원, 신앙,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필요한 중요성에 따라 그것들을 성경에서 추론할 수 있다. 성령의 새로운 계시나 인간의 전통이나를 불문하고, 성경에는 어떤 것이라도 다른 무엇을 첨가해서는 안된다"(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I/6). 그러므로 성경이 말할 때 우리는 이에 순종하고 성경이 진리를 증언할 때,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그 진리에 굴복한다.


그러나 어떤 근거에서 우리는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성령(聖靈)의 신학자라 불리우는 칼빈은 이에 대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도움을 우리에게 주었다. 칼빈의 열차(列車)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담겨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특수한 책이라고 믿으며, 여기서 감동을 받는다. 여러 세기를 걸쳐서 기록되었으나, 그 비상한 통일성, 위엄있는 문체, 영광스러운 내용, 놀랄만한 일관성, 예언의 놀라운 기록과 그 성취,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속에서 경건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우리를 확신시키고 설득하며 순종하게 하는 것은 그 중의 하나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그 전체도 아니다. 오히려 성경 권위의 확고한 근거는 칼빈이 지칠 줄 모르게 주장했던 성령의 증거인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믿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아는 것은 성령께서 증거해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때, 즉 성경의 권위와 성령의 증거를 분리시킬 때, 우리는 즉시 영적으로 싸늘해지는 위험에 처하게 되고, 마침내는 비생산적이며 무의미하게 되는 빈약한 논쟁의 희생물이 되고 말 것이다 (Inst. I.7.1, I.7.5, I.8.13 참조). 칼빈은 또한 "하나님이 교리의 저자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확신하기 전에는 교리에 대한 신앙이 수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Inst. I.7.4)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개혁주의는 66권의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임을 믿는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경은 정확무오한 객관적 권위를 지닌 하나님의 말씀일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신앙과 행위의 규범이 된다(딤후3:16, 17). 개혁주의는 로마 가톨릭처럼 성경의 권위를 교회 밑에 두고, 교회가 없이는 성경이 존재할 수 없으나 성경은 없어도 교회는 존재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성경이 처음에는 불성문계시(不 成文啓示)로 있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성경이 교회보다 앞선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 문제이다(엡 2:20).


개혁주의는 성경을 종교적 신물(神物)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에 따라 교회의 씨앗(종자)으로 삼기 위해 주신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 개혁주의는 또한 신정통주의자들처럼, 계시의 객관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에 따르면 계시는 성경과 동일시될 수 없고, 성경은 계시의 증거요 표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자체가 아니며, 성경의 진술들은 계시 자체가 아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계시를 객관화하는 것이요 형체화하는 것이라고 한다. 계시는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는 사건이요, 하나님과 사람이 상봉하지 않는 한 계시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들은 말한다(칼바르트의 성경관 비판에 대하여는 Colin Brown, Karl Barth and the Christian Message, pp. 54~62; Klaas Runia, Karl Barths Doctrine of Holy Scripture를 참조). 개혁주의는 신복음주의자(新福音主義者)들처럼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분리하지 않는다. 그들은 영감은 믿으면서도 무오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절대적으로 무오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같이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신적 권위를 가지며, 그 독자적 신빙성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경을 통하여 구원에 필요한 지식을 교회나 신부(神父)에 의존할 필요없이 충분히 섭취할 수 있다. 로마 가톨릭에 따르면, 성경은 흐려지고 손상되어서 신앙과 행위의 문제까지도 교회가 해석해 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나, 우리는 성경의 명백성(明白性)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들의 견해에 찬성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의 충족성(充足性), 혹은 완전성을 주장한다. 기록된 말씀인 성경은 개인과 교회의 영적·도덕적 욕구를 위해서 충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전을 성경과 동등하게, 혹은 그 이상으로 우월한 권위를 갖게하는 로마 교회의 입장을 우리는 전적으로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

(2) 하나님의 주권사상
개혁주의의 특징은 하나님의 주권사상(主權思想)이다. 개혁주의는 항상 하나님 사상을 그 중심으로 하고 있다. 감리교가 죄인의 구원, 침례교가 중생의 신비, 루터교가 이신득구(以信得救), 모라비안이 그리스도의 상처, 희랍정교가 성령의 신비, 로마 교회가 교회의 보편성을 각각 강조한다고 하면, 개혁주의는 하나님 사상을 강조한다.


개혁주의는 인간의 회심(回心)이나 칭의(稱義)와 같은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하나님이 차지하셔야 할 당연한 권리를 차지하시도록 하는 사상에서 출발한 것이다(Pressly, Mason W. , Calvinism and Science, Articlein Ev. Repertoire, 1891, p. 662. quoted from H. Hemey Mater, The Basic Ideas of Calvinism, 1975, p. 32, 33)개혁주의자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롬 11:36)이라는 말씀을 생활원리로 하고 실현하려 애쓴다.


개혁주의의 중심사상이 바로 하나님 사상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많은 연구가들이 서로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으로하는 사상체계를 이루고자 할 때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지배, 즉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라는 술어를 필연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라는 말이 하나님과 우주와의 관계를 가장 잘 지적해 주는 술어이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은, 자연계와 도덕적 세계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대권(絶對的 大權)이란 뜻으로 해석된다. 하나님은 자연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진리, 도덕, 과학, 사랑 등의 여러 면에서도 법칙과 질서에 따라 다스리신다고 개혁주의자는 믿고 있다.


워필드(B.B. Warfield)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칼빈주의자는 모든 현상 배후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며, 이 현상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본다. 그리고 기도하는 태도로 전생애를 살아가며, 구원문제 있어서는 자아 의존을 배제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이다"(Calvin as a Theologian and Calvinism Today, pp. 23, 24).


하나님의 주권사상은 개혁주의 첫째가는 대교리로써 다른 모든 교리들의 중심 태양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우주의 최고 절대적인 통치자라고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작정(作定), 창조, 심리, 구속(救贖)에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

(3) 불가항력적 은혜
개혁주의의 셋째 특징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不可抗力的 恩惠)이다. 개혁주의의 구원이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임을 믿는다. 즉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요,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임을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죄인 안에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실 때 아무도 그 역사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이 개혁주의자들의 신념이다. 하나님이 주권사상을 가지다보면, 구원의 문제도 자연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만 해결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구원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교리는 칼빈주의 5대 강령이다. 즉 인간의 전적부패, 무조건적 선택, 제한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그리고 성도의 견인등이다. 이 교리들은 구원은 사람의 공로나 사람의 노력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임을 강조한다.


개혁주의는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며(창6:5, 렘17,9, 시51:5; 롬3:10),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말한 영적 선(靈的 善)을 행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른 말로하면,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존재이므로, 자신의 힘으로는 예수를 믿을 능력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이어서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창세 전에 선택하셨다(엡1:4). 이 선택은 선행을 조건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한 은혜의 선택이다.


그리고 성자(聖者)는 성부의 택함을 받은 죄인들을 위하여 인간이 되시고,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속을 완성하신다. 이것은 피택자(被擇者)에 국한된 구속이다(마1:21, 요10:14, 행 20:28). 제한속죄(制限贖罪)가 아니면 하나님의 선택은 무의미하다.


칼빈은 이 선택교리에 대하여 다른 칼빈주의자들보다 더 신중하였다. 그는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높였고, 구원과 관련하여서도 높였지만, 그가 기독교 강요에서 구원의 문제를 다루기까지는 선택교리를 충분히 논하지 않았다(Inst. III. 21~24).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이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죄인들을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는 피택자에게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음을 적용시키는 성령의 중생시키시는 역사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구원의 국면을 우리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라는 말로 표현한다. 어거스틴은 이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고 또한 즐겨 사용하셨다. 이 말이 내포하고 있는 뜻은, 성령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데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 성사, 성령은 죄인을 구원하시는데 다같이 참여하신다. 성부 하나님은 만세 전에 구원할 자를 미리 선택하셔서, 그의 백성을 성자 하나님에게 주시고, 성자 하나님은 때가 되어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의 구속을 완성하신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위에서 말한대로, 선택된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적용하여 저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이다. 한 죄인을 구원하시는데 얼마나 놀랍고 감격스러운 은혜인가!

(4) 하나님나라와 세상에 대한 견해
개혁주의의 넷째 특징은 하나님나라와 세상과의 관계에 대하여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하나님나라와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견해는 늘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개혁파 신학자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똑같은 '문화적 명령'에 대한 인식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개혁파의 신학적 전통은 최선을 다하여 세계의 형태와 문화에 대하여 큰 관심을 표시해 왔다. 물론 세상과 일치한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세상을 변혁시킨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하였다.


우리는 이 사실이 칼빈에게서 아주 강하게 나타났음을 보게 된다. 제네바에 있어서의 칼빈의 관심은 복음선포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으로 훨씬 더 넓은 것이었다(칼빈의 이관심에 대하여는 W. Fred Graham, The Constructive Revolutionary: John Calvin and His SocioEconomic Impact, Richmond: John Knox Press, 1971를 읽을 것). 확실히 복음의 선포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와 국가의 생활 전반에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개혁주의는 사회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며, '문화적 명령'에 대한 높은 인식을 갖고 있다. 문화적 명령에 대하여 논할 때, 기본적으로 지적되는 성경귀절은 창세기 1장 28절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귀절은 생활의 모든 방면과 경험의 모든 국면을 하나님의 주권에 종속시키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그것을 요구할 책임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살고있는 상황에 대하여도 우리는 관심을 가진다. 배고픈 자가 배부름을 얻고, 목마른 자가 시원함을 얻으며, 핍박받는 자가 보호를 받고, 궁핍한 자가 만족함을 얻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개혁주의자는 다음 말씀과 같이 매우 강한 신앙을 고백한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24:1). 그리고 하나님은 한 순간이라도 세계를 자신 밖의 어떤 세력에도 내어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개혁주의자는 믿는다. 이것이 바로 일반사회에서 사회악과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위범(違犯)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 없다는 이유가 된다.


우리는 임신중절의 그 무서운 악, 도처에서 볼 수 있는 도덕적 부패, 권력에 짓밟힌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 약하고 무력한 사람들에 대한 핍박에 대하여 반대하는 것이다. 분명히 사회변혁은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도 복음의 선포와 개인의 중생에서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해서는 안된다든가, 복음을 증거하지 않거나,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거나, 비전을 가지지 않거나, 또는 부흥과 개혁이 늦어지는데도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교훈적 의지를 수행하도록 부름받지 않은 자처럼 생각한다든가 하는 것은 매우 큰 잘못이다.


만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속해있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마치 하나님에 대해 자신의 의무를 혼자 수행할 수 있는 것처럼 크리스챤이 자기 혼자만 살아가는 개인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인 신앙의 삶에서 타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은 그 특성이 악하고, 또한 온 세상이 악한 자 안에 처해 있으나(요일5:19), 우리는 세상을 대항하여 싸우는데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개혁주의 신자들은 폭군에게 도전했고 또한 그들을 넘어뜨렸다.


낫소의 윌리엄, 오랜지공, 존 낙스, 존 파임, 올리버 크롬월, 리쳐드 카메론, 스코틀랜드의 언약론자들, 그리고 존 위더스푼(William of Nassau, the Prince of Orange, John Knox, John Pym, Oliver Cromwell, RichardCameron, the Scottish Covenanters and John Witherspoon), 등 이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유산이며, 이 세상에서 어떻게 크리스챤으로 살아가며, 어떻게 신앙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를 우리는 그들에게서 배우게 된 것이다. 우리는 어두움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폭군의 광포도 우리에게 공포를 주지 못한다. 우리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니 어째서 무서워하겠는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16:33).


이와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계11:15)하게 될 그 날을 향하여 열심히 일해야 할 것이다.

2. 한국교회와 개혁주의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은 정확히 말해서 유럽의 칼빈주의(개혁주의)와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 사상이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신학이다. 이 신학은 칼빈주의적 영미 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에 전래되어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 되었다. 그리하여 한국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표준을 교의와 규례의 표준으로 채용함으로써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의 교회가 된 것이다(박형룡,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 신학지남, 제43권 3집, 1976. p. 11 참조).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를 출발점으로 하고, 칼빈주의 5대 교리, 문화적 명령, 그리스도인의 삶 등으로 전개된 개혁주의, 여기에 독특한 신학적 특징들이 가미되어 이루어진 청교도주의 등이 한국장로교 신학의 전통이 된 것이다.


1885년 4월 5일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 목사가 한국에 온 이래 1938년까지의 한국교회는 매우 강한 개혁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자유의 바람이 일기 시작하였고, 1938년 9월에는 신사 참배 결의라는 일대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1945년 해방을 맞으면서 한국장로교회는 대열을 재정비하고 개혁주의 수호와 발전을 위해 박차를 가하였으나, 6.25 동란, WCC 운동, 교단의 분열 등 원하지 않는 일들이 계속 발생하여 개혁주의 신학성장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한국에서의 칼빈연구 100년"(이상규, 개혁주의 신행협회, 1985)에서 볼 수 있는 대로, 1924년 칼빈이 처음 소개된 이래 1984년까지 60년동안 칼빈의 저서 번역, 칼빈에 관한 저술, 논문 등을 모두 합쳐 240편밖에 나오지 않은 사실을 미루어 보더라도, 스스로의 노력도 부족했거니와 외적 여 건에도 상당한 지배를 받은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후 칼빈 주석 전질과 기독교강요가 번역되고, 칼빈에 관한 저서, 논문들이 상당한 양으로 출판, 또는 각 신학지에 게재된 것을 보면 아직도 한국교회의 개혁주의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IV. 맺는말


복음주의, 근본주의, 개혁주의 비교
우리는 위에서 복음주의, 근본주의, 개혁주의 등 3대 신학운동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복음주의가 17세기 이후 독일에서 루터교회의 죽은 전통에 불만하여 생긴 경건주의 운동에서 파생된 운동이며, 근본주의가 20세기초 미국에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동으로 생긴 신학운동이라고 한다면, 개혁주의는 바울, 어거스틴을 거쳐 16세기 칼빈에 의하여 체계화된 사상운동이다.


복음주의가 경건을 강조하고, 근본주의가 근본교리들(성경의 무오성, 그리스도의 신성, 동정녀의 탄생, 대속교리,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을 주장하고, 하나님의 영광보다 인간의 구원을 더 강조한다면,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主權)을 강조하고, 이 근본원리에 따라 모든 문제들(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신학)을 풀어 나가려고 노력한다.


복음주의와 근본주의 운동이 다 귀중한 운동이나, 성경이 말하는대로의 교리적 균형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커다란 결함을 가지고 있다. 성경은 교훈의 건전성과 관련있는 균형을 중대시하고 있는 것이다(딤전1:9; 6:3; 딤후1:13).


우리 한국교회는 앞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며, 하나님의 문화적 명령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지고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 건설에 힘쓰는 운동에 동참하여야 할 것이다.

 Richard Gamble (RTS), 개혁주의와 복음주의 상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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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샘

org date: 2011. 12. 26. 16:55 

 

한국에서는 보수적인 장로교의 교세가 강하다. 특히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단과 교세가 많다. 
그런데 내가 모태신앙이면서도 교회에서 칼빈주의라는 말을 들어보았어도 칼빈주의가 무엇인
지 신학교에 가기 전까지는 제대로 들은바가 없다. 그저 자유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지켜야할
신학의 보루라고만 여겨져 왔다.  한국교회의 전통이 신학보다는 목회, 교회 성장에 관심이 많
아서 그럴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신학교에 와서 비로소 칼빈주의에 대해 배우게 되었고 개혁
주의를 배우게 되었다. 

개혁주의를 배우면서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모른다. 신학교, 신학생들의 부정적 모습 때문에
신학교 가는 것을 만류하던 주위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런데 막상 신학을 공부하면서 왜 진작
5년 전쯤 일찍 시작하지 않았는지 후회가 되었다.  신학공부는 그저 신학교에서 지식적으로 신학
을 배우는 것에 그치려던 내게 많은 도전을 주었다.  청년기 신앙생활에서 고민했던 것들을 신학
적 사고를 통해 재조명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가 표방하던 개혁주의가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깊고 혁신적이고 우리 삶을 흔들어 놓는지 깨닫게 되었다. 흩어진 파편같은 일상의 신앙 
고민들이 연결되고 더 깊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동시에 많은 목회자들이 신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배운 신학을 목회에 적용하는 경우는 드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신학교에서 개혁주의
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탓도 크다고 본다.  일례로 총신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온 목사도
개혁주의의 핵심 개념을 명확하게 요약해내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그저 신학 교과서를 지식적
으로 배우고 외워서 공부하여 졸업했으니 신학적 사고가 부족한 것이라 여겨진다.  그에 비해 
나는 신학적 사고를 강조하던 교수로부터 신학을 배우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한국교회가 크게 성장하고 세계선교에 더 많은 참여를 하고 있다는 통계를 보면서도 목회 현장
의 현실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 없다.  개혁주의 신학을 목회에 적용하지 못해서 교회가 세속화 
되어가고 자유주의, 성장주의에 밀리는 것 같다.

개혁주의를 더 깊이 있게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가서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조직신학을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은 현대신학에서 개혁주의는 소수라는 것이다. 현대신학에서
는 복음주의가 더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단순히 교회사 속에서 운동(movement)으로 시작
되고 발전해 왔던 복음주의가 아니라 신학적 체계를 세워가는 신학적 복음주의를 보게 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현대신학에서 복음주의에 비해 개혁주의의 학문적 기여가 매우 적고 제한적이라
는 것이다.  복음주의의 한계를 보면서 개혁주의가 더욱 현대신학의 논쟁에 참여하길 바라마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몇 개 남아 있는 개혁주의 신학교마저 흔들리는 모습뿐이었다.  미국에 
개혁주의를 배우러 왔지만 오히려 구석에 몰려 있는 개혁주의의 현실을 보고 실망이 많았다. 

그러나 공부를 하면 할수록 논문을 쓰면서 드는 생각은 개혁주의가 현대신학에서 가장 성경적인 
신학이라는 것이다. 학문적 토론의 장에 적극 참여하고 다원화된 복음주의 미래를 바르게 이끌어
가는 것도 개혁주의라고 확신한다. 포스트 모던시대에 개혁주의가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화려
한 논리보다 더욱 두텁고 포괄적이며 깊이 있는 방향으로 개혁주의 신학이 연구되고 발전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Posted by 작은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