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삶

http://www.reformednews.co.kr/9637

[논문] 성경 속에 나타난 여성안수에 대한 이해 - 이관직 박사

이 글은 이관직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것으로 성경 속에 나타난 여성안수에 대한 이해를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정리한 글이다. 이에 요약 소개한다.

 

I. 창조질서 속에서 본 여성안수

 

먼저 성경 속에 나타난 여성안수를 이해하기 위해 남성과 여성의 관계성을 다루고 있는 창조기사에 나타난 창조의 원리와 질서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여성안수를 긍정적으로 보거나 찬성하는 이들은 창 1:27-28을 중심으로 창조시에 남자와 여자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동등하게 지음받았으며 남자와 여자 모두 다스리는 명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남자와 여자의 권위의 차등은 타락후 생긴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창 2:19-20에서 여자가 창조되기 이전에 이미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에게 이름을 지어준 것에서 창조사역에서의 아담의 리더십을 엿보게 하며 여자와의 역할의 차이가 있음을 시사한다. 23절에서 아담은 여자에게 이름을 칭함으로 그의 머리됨의 권위를 행사했다. 또 여자는 돕는 배필로 지음을 받았다(2:18, 20). 헬퍼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도우실 때 하나님을 지칭할 때도 사용된 단어이며 그 단어 자체가 열등한 것이라는 의미는 포함하지 않는다.

 

창조기사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남성과 여성이 각각 동등하면서도 나름대로의 독특한 특성과 역할을 감당하도록 창조하셨다는 사실이다. 동등하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이 똑같은 역할을 맡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현대의 페미니즘의 영향도 있다고 보여진다.

 

II. 신약에 나타난 여성안수

 

여성안수를 찬성하는 이들은 구약의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서 성취된 것으로 행 2:17-18에 인용되어 있는 것처럼 신약시대의 여성사역의 근거를 삼으려는 경향이 있다.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두 학자 존 파이퍼와 웨인 그루뎀은 초대교회에서 여성의 예언사역에 대해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예언 사역은 오늘날 설교나 특별계시 수준과는 다른 성격의 것이었다고 주장하며 여성 안수를 찬성하는 이들을 비평한다.

 

신약에서 여성안수와 관련되어 자주 언급되는 성경구절들로는 고전 11:2-6, 14:34-36, 딤전 2:11-15, 5:21-33, 3:28을 들 수 있다. 고전 11:3에서는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고 밝힌다. 여기서 머리에 대한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이 머리를 권위와 연결짓고 여성안수를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이 머리를 근원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레이몬드 오르트런드는 첫째 해석을 지지하여 남성의 머리됨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두 사람의 영적으로 동등한 인간의 동반자 관계에서 남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향으로 그 동반자관계를 이끌어가는 우선적인 책임성을 지는 것이다.” 그는 남성의 헤드십의 의미가 남성의 지배성의 개념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라 밝히고 남성의 지배성이라 여성의 영적인 동등성과 권리, 가치를 무시하고 여성의 의지에 반하여 남성의 의지를 주장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김의환 교수는 고전 11:5절을 근거로 교회 안에서 여자가 예언하였다는 점을 이야기하며 여자 안수를 주장하는 견해에 대해 고전 11:2-6의 문맥을 볼 때 여자의 예언을 강조하기보다는 남자가 여자의 머리됨을 강조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 비평하였다.

 

고전 14:34-35의 주석에서 박윤선 박사는 여자가 교회에서 잠잠하는 것을 남자를 지배하는 공적인 교훈을 하지 못하게 한 것으로 해석하면서 이 말은 무슨 말이든지 금지당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딤전 2:11-14에 대한 그의 주석에서 박윤선은 종용히라는 부사가 침묵만 의미하지는 않으며 부녀가 일반적으로 주장할 자가 아니라 순종할 자이며 소동할 자가 아니라 안정할 자며 남자들을 가르칠 자가 아니라 배울 자라고 말함으로 여성안수에 대한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도 여성의 필요한 역할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권성수 교수는 딤전 2:12에 대해 바울이 이 본문에서 여자가 가르치는 것 일체를 금지한 것으 아니며 여자가 공예배에서 남자(성인)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였다고 주석하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가르치는내용에 대해 더글라스 무의 해석에서 본문의 가르침은 성경이나 교리의 전승과 관계된 가르침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무리가 있음을 지적하고 그 가르침은 생활교육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이 본문을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남성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견해에 대해 문맥상 그같은 해석은 적합하지 않다고 비평하면서 주관한다는 동사는 여성의 남성 지배적인 주관을 포함하여 일체의 남성 주관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강조하였다.

 

권성수 교수는 고전 11:5에서 여자가 공예배에서 예언하는 것에 언급하면서 바울은 남성 헤드십에 순복하는 자세를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여자의 공예배시 예언을 인정했다고 하면서 바울에게 상호모순성이 없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그는 여성안수는 남성 헤드십을 무시한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여성사역의 제한은 남성 헤드십의 원리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3:28의 말씀 또한 여성안수를 찬성하는 이들이 자주 사용하고 있는 말씀이다. 하지만 이 말씀은 남자와 여자가 교회의 지도자들로서 맡게 되는 사역의 구분이 없다는 의미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구원에는 제한이 없이 모든 인간들에게 문이 열려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본문으로 보아야 한다고 존 파이퍼와 웨인 그루뎀은 주장한다. 아무튼 이 말씀은 노예들과 여자들에게 갖고 있는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 시각에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말씀이었을 것이다.

 

루이스 존슨은 갈 3:28에 관하여 역사적 인물들, 예를 들어 안디옥의 감독인 익나티우스, 져스틴 마터,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힙폴리투스, 닛사의 그레고리, 존 크리소스톰, 어거스틴, 마틴 루터, 존 칼빈의 주석들에서 살펴본 후에 결론 짓기를 그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갈 3:28이 결혼관계에서와 교회생활에서 남자, 여자의 역할의 구별을 폐지하고 있다고 본 사람은 없다고 결론짓고 있다.

 

권성수 교수도 그의 논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하나라는 갈 3:28의 말씀을 가지고 딤전 2:11-15의 본문에 나타나는 남녀의 역할 차이와 남성 헤드십의 원리를 부정하고 여성 사역의 완전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남녀의 역할 차이와 남성 헤드십의 원리는 타락 이전 창조의 원리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결론적으로 인간의 가치와 권리면에서 차별이 없이 동일하나 그 역할과 기능에 있어서 구별이 있는 것이라고 밝힌다.

 

박형룡 박사는 그의 교의신학전집 중 교회론에서 여성안수에 대한 견해를 언급한다. 그는 여성의 여러 가지 사역의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전체교회에 대해 가르치고 다스리는 것은 남자에게 속한 영역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통해 볼 때 박형룡 박사는 안수를 받는 직책 외에 있어서 여성의 다양한 사역과 교훈하는 사역에 대해서 매우 적극적인 시각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부친의 뒤를 이어 총시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쳐 온 박아론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여성의 목사안수를 반대하는 입장이 정통개혁신학의 입장이라고 분명히 못박고 있다.

 

바울이 비록 여성이 교회에서 다스리는 위치에 서 있는 것을 금하였지만 여성들의 다양한 사역의 가능성에 대해 높게 평가함을 그의 사신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울은 여성들의 이름들을 지적하며 문안하였고 그리고 겐그리아 교회의 사역자로서 뵈뵈를 추천한 후에 브리스길라에게 그의 남편에 앞서 이름을 들고 있다. 또 그가 빌립보 교회에 편지할 때 유오디오와 순두게를 권면하는 부분을 통해 보면 이들이 교회에서 차지한 사역의 영역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로마에 있는 교회에서 여성들의 활동이 가르치는 사역은 아니었다고 해도 이미 활발하게 있었고 바울 또한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많은 여성들이 초대교회에서 여러 가지 면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그들이 안수받은 자들이 아니더라도 그들의 사역은 과소평가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전한 자들도 여자들이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가장 가까이 따라간 자들도 여인들이었고 예수님의 공생에 사역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인물들 가운데는 여인들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보아 예수님의 사역에도 눈에 띄게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여성들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여성들이 교회를 다스리는 입장에서 안수를 받고 활동했다는 증거는 성경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III. 맺음말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신구약 66권의 말씀은 정확무오한 말씀이나 죄로 오염되어 있는 한계성을 가진 우리 인간들의 성경해석은 때로는 100% 완벽하게 오류가 없는 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이 여성안수 문제에 대해서도 여성안수를 찬성하는 이들의 견해를 비판하는 동시에 열려 있는 귀와 눈을 가지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을 해석하며 적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은 남성과 여성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소중한 존재로서 동등하지만 역할 면에 있어 차이가 있고 남성의 머리됨의 전제하에서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과 사역을 지지하고 있다.

 

끝으로 필자는 여성이 전체 교회에서 다스리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여성안수를 찬성하지 않지만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것이 역으로 여성이 보다 다양한 사역의 현장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제한하는 구실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현재의 한국교회와 미래의 한국교회에서 크리스챤 여성들의 사역의 장이 구체적으로 보다 넓혀지도록 교회와 교단이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Posted by 작은샘

http://www.reformednews.co.kr/9631

[논문] 교회 내 여성의 기능과 성직의 자격 -김의원 박사

이 글은 김의원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글로 교회 내에서 여성의 기능과 성직의 자격에 대해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논한 것이다. 이에 요약 소개한다.

 

199479회 통합측 총회에서 여성안수 문제에 대해 허용하는 결의를 하자 그 여파가 합동측에까지 확대되면서 이 문제에 대한 성경적 논의가 어떠한가를 살피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에 논의 일환으로 이번 신학지남 가을호에 여성 안수에 대한 신학적 논의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여성안수를 결정하기 전에 장로회신학대학 다원화목회연구원(1992)에서 교역과 여성안수라는 책을 발간하였고 이 책은 어느 면에서 교단 내의 흐름을 여성 안수 허용으로 흘러가도록 학문적인 배경을 제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의 권두언에서 이 문제를 다루면서 여성이 안수받는 것이 성경적이요 오늘 한국교회의 선교를 위해 필요한 것인가?”라고 두 가지를 함께 묻고 있는데 이 둘은 순차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후자인 여성 안수가 한국교회의 선교 사역에 매우 필요한 것인가?”는 이차적인 문제로 전적으로 전자의 문제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전자의 문제를 해결함이 없이 단지 현장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직분을 세웠다면 이는 교회를 일종의 사회단체쯤 여긴 결과가 될 것이다. 또 전자의 문제 곧 여성이 안수받는 것이 성경적인가?”라는 질문도 자세히 검토하면 여기에도 여성과 안수 사이의 어떤 연관성을 논의하거나 정의함이 없이 이를 혼합시킨 우를 범하였다. 오히려 문제를 정확하게 보려면 이렇게 질문해야 했다. “여성은 성경적 교회구조내에서 성직에 참여할 수 있는 기능이 있는가?”

 

1. 여성안수를 찬성하는 학자들이 여성 안수 문제를 논의하면서 초점을 성직인 안수보다는 여성에 두고 여성이 그 직책을 담당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묻고 있다. 기실 여기에도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여성 안수를 여성이 지닌 능력 혹은 기능의 문제로 보아야 하는가에 있다. 곧 여성이 그 직분을 담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아니면 여성이 교회 내에서 그 직분을 담당하도록 성경적 기능과 자격을 갖추었는가?

 

(1) 여성의 능력적 측면

 

여성 안수를 찬성하는 자들은 여성의 능력이 남성의 능력에 비해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는데서 출발하였다. 이들은 안수문제를 여성과 남성 사이의 성차별과 대결의 관점에서 접근함으로 이 문제의 답을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 내지는 가부장 문화의 남존여비사상의 전제하에서 찾으려 한다. 이들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오랜동안 성직은 남성만이 향유하는 특권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문화가 발전되면서 새 성경해석법이 개발되어 문자적 해석이 얽매던 전통적 개념에 변화를 가져다 주어 한두 어구보다는 전체의 문맥과 맥락에서 메시지를 찾게 되었고 그 결과 여성안수를 금기시 했던 교회들도 성의 장벽을 넘어 성직을 남녀가 공유하게 되었다. 과거 성적 차별이 이제는 없어졌기에 성직을 포함한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출발점은 갈 3:28인 것 같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남녀간의 성차별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본문의 문맥은 교회의 구조적 측면보다는 구원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민족이나 신분, 그리고 성의 차별이 없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기에 그리스도 옷 입혀져 하나님의 구원백성이 되는 것과 같이 여자도 구원백성 가운데 속하였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이 본문으로 여성의 안수문제의 논의를 시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2) 여성의 기능적 측면

 

여성의 기능을 가정 내에서의 기능들을 비교해보면 크게 차이가 주어진다. 남녀의 가능상의 구별은 신체적 생리적 차이가 주어짐과 동시에 이미 창조질서의 가정의 개념에 드러난다. 여자는 창조규례를 통해 가정 내에서 남자에 대한 종속성을 부여받았다. 그렇다면 여자의 종속성은 가정에만 국한되어 있는가? 가정구조에서 확장된 교회구조 내에서도 여자의 종속성을 연속된다고 보아야 하는가? 이 문제는 다음에 다룰 안수의 상관관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었으며 이는 교회의 구조적 측면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2. 여성 안수 문제의 초점은 여성 능력의 문제가 아닌 안수로 나타나는 성직의 개념과 성직을 감당할 수 있는 기능에 있다. 안수는 안수받는 사람의 머리에 손을 얹음으로 교회의 직책을 맡을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남성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여성도 할 수 있는데 왜 하필 성직만 못하는가에서 출발한다면 성직을 일반 직능의 범주 속에 포함시키는 우리를 범하게 된다.

  

안수로 주어지는 성직을 여자가 취할 수 있는 기능과 자격을 지니는가? 이는 성직의 문제이기에 남녀의 성적 구별에 의해 결정될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소명의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여성안수 문제는 남녀 차별의 관점이 아니라 그 기능과 자격에 있어 남녀 구별이 지켜져야 하며 그것이 성경적인가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성직을 부여하는 교회구조와 이에 대한 여성의 기능 사이의 문제이다.

 

교회구조내에서 여성이 성직을 감당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1) 성직을 구원사적 하나님의 은사의 직무로 보는가?

 

(2) 성직을 가정구조가 확장된 교회구조의 직능으로 보는가에 달려 있다. 전자에 따르면 성직도 여러 은사들 중의 하나로 보아 다른 모든 은사를 남녀가 공유하였다는 이유로 여성도 성직을 담당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의 직분을 논의하면서 다른 은사들과 연결시키지 않았다. 예를 들면 장로의 직분을 논하면서 장로들이 행정이나 재정을 담당할 것이기에 그들의 행정과 재정능력을 보라는 구절이 없다. 직분을 언급한 구절은 모두 직분을 담당할만한 자격만을 논의할 따름이다. 성직은 후자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교회구조내의 성직은 가정구조내의 직무와 연결되어 있다. 곧 창조질서에 정해진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적 기능 때문에 여성은 성직을 담당할 수 없는 것이다.

 

이같이 교회 안에서의 여자의 역할을 한정시킨 구절로 고전 11:3-5, 14:34-35, 딤전 2:11-15을 들 수 있다. 이 구절들은 당시의 사회적이고 사상적 배경에서 주어진 한정적 규례가 아니고 성경적이고 영구적인 원리이다. 이 구절들은 교회 내에서의 여자의 종속성을 가르치고 또 창조규례를 통해 정해진 가정구조라는 테두리 내에서 여자들의 기능적 측면을 말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성경이 교회 특히 교회의 지도자를 논의할 때 항상 가정의 영역과 결부시킨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를 다스리고 목양한다. 바울은 교회의 지도자인 장로의 직분을 논의하면서 가정 내에서의 아버지 역할과 연결시킨다. 장로는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여야 한다(딤전 3:4). 이 개념을 활용하여 교회에 적용하였다.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딤전 3:5). 여기서 몇 가지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1) 가정단위와 지역교회는 서로 상관관계를 가진다. 곧 가정은 교회의 가장 작은 단위이다.

 

(2) 바울은 이 유추를 통해 다스린다라는 단어의 기능적 정의를 내린다. 곧 다스림이란 가정과 교회에 대한 온전한 돌봄이다. 하나님은 아버지가 가정에서 모든 지도력을 책임지도록 지키신 것처럼 하나님은 장로가 교회에서 이와 같은 일을 하도록 지키신다.

 

(3) 이 관계 유추에 나타난 주요 원리는 교회에서 통하는 진리가 곧 가정에서 통하는 진리라고 본다. 가정의 원리와 교회의 원리를 구분해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원리는 가정의 원리에서 교회의 원리로 확장된 것인 것만큼 가정에 세워지는 지도자 원리도 그대로 교회에서의 지도자 원리와 연결되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여성안수 문제는 여성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성직에 대한 문제로 교회구조상 여자가 성직의 기능에 참여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남녀는 동등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므로 존재론적 동등성을 인정하지마 가정구조내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고 여기서 확장된 교회구조내에서 여자는 남자를 가르치거나 다스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여자는 성경적으로 볼 때 경륜적 또는 기능적 종속성을 가지며 여자가 교히에서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것 또는 집사나 행정직은 맡을 수 있으나 남자를 가르치거나 다스려서는 안되며 여자는 이런 관점에서 목사나 장로나 전도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Posted by 작은샘

http://www.reformednews.co.kr/9615

[논문] 교회 내 여성 사역의 제한성과 중요성 - 김의환 박사

이 글은 김의환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글로 교회 내 여성 사역의 제한성과 중요성을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다. 이에 요약 소개하여 본다.

 

I. 서론 

 

교회 내에서 여성 사역의 성격과 범위의 문제가 20세기 교회의 커다란 관심사가 되고 있다지난 2000년간의 교회적 전통을 깨고 여성의 목사, 장로 안수 문제가 적극적으로 토론되고 있으며 이미 가톨릭교회와 일부 보수적인 교회를 제외한 많은 교회들이 여성 안수를 단행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오래전에 감리교회와 기독교 장로교회들이 여성 안수를 시행하여 왔으나 통합측 장로교회만은 여성 안수 문제를 놓고 장기간 의견 대립현상을 유지하다 드디어 수년전에 여성 안수를 가결하여 시행 중에 있다.

 

20세기 후반기에 접어들며 일어난 여권운동이 기독교 내에도 혁명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일부 복음적 교회들도 이러한 세속적 여권운동의 압력에 굴복하여 여성의 목사 장로 안수를 개방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랫동안 미국 내에서 개혁주의 정통파 교회로 알려진 크리스챤 개혁파 교회도 20년간의 총회적 논란 끝에 개방 압력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제는 여성의 성직 개방이 하나의 도도한 흐름처럼 인식되어 가고 있다. 이제 여성 안수에 반대하는 신학자나 교회는 시대 착오적이며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으로 지목되어 가고 있다. 일부 복음주의 신학자는 성경에 대한 새 해석을 시도하며 정당화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동등하게 지음받은 남녀가 왜 성직에 있어서만은 구별되어야 하는가 하고 반문한다.

 

그러나 구원에 있어서 구별없이 동등한 취급을 받는다는 영적 특권이 사역에 있어서도 동등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발전할 때 여성 안수 문제로 연결된다.

 

과연 오늘의 교회는 지난 2000년간의 관행이나 침묵을 깨고 여성에게 성직 부여를 위해 안수를 해야 하는가의 문제에 직면하여 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여성의 교회 내의 사역을 확대시키기 위해 여성안수를 허락하는가 아니하는가의 문제에 있지 않고 성경의 권위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의 문제로 집약된다. 여성 안수 자체는 하나의 의식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성의 성직 개방은 성경의 가르침과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가르침이 잘못된 것을 시인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성경에 비추어 교회가 2000년간 잘못 가르쳐 왔다면 반드시 고쳐야 한다. 그러나 정말 여성안수는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인가? 아니면 시대적 압력에 굴복하고 마는 것인가의 문제로서 오늘의 교회가 당면한 최대의 이슈 중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여성 안수 문제를 다루려 할 때 이 문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일은 오늘의 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

 

II. 구약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실 때 남자와 여자를 함께 지으신 사실(1:27)은 남자와 여자가 인격적으로 동등하다는 진리를 가르쳐 준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형상 차원에서 동등할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함께 다스리는 문화적 사명도 함께 받았다(1:26, 28).

 

이 문화적 사명을 이행함에 있어 창세기 2장은 보다 자세한 설명을 제공한다. 창세기 2:18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위해 돕는 배필을 지으실 때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무엇을 위한 돕는 배필인가?

 

그것은 땅을 정복하기 위함이요 문화적 사명의 보다 완벽한 수행을 위함이었다. 1:28절에서 땅을 정복하라고 명하실 때 그 방편으로 생육하고 번성하여야 함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여성은 남성의 갈빗대로 지음받은 이차적 피조물이므로 창조 순서 자체에서부터 남자의 종속성을 면치 못한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사실은 여자가 남자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2:23)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함이요 곧 연합하여 둘이 한 몸(2:24)을 이룬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아담과 하와는 인격적으로 동등하며 한 몸이며 한 사명을 받은 동역자이다.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은 남편에게 땀 흘려 일하게 하였고 아내에게 아이를 낳는 수고를 하게 하시므로 사역 분담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 사역 분담에 있어 여자에게는 돕는 자의 역할이 주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의 돕는 자의 위치가 오늘날 교회에서 여성들의 적극적 사역을 금하는 성경적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구속사적 경륜 속에서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이미 여성들의 사역을 활용하셨다. 여성들이 사사로, 선지자로 쓰임 받기도 하였다.

 

요엘 선지자는 장차 여자들도 예언할 것을 일찍이 예언하였다(2:28). 미리암은 모세와 아론과 함께 이스라엘 출애굽 운동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12:4). 그의 여선지자로서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모세의 사역의 보조적 역할임을 망각한 미리암이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였느냐(12:2)”고 비방하며 모세의 리더십에 도전하는 실수를 범하였고 여호와의 징벌이 따랐다(12:9-10).

 

드보라는 사사시대에 여선지자로 활약했다(4:4-6). 드보라는 선지자로만 아니라 사사의 사역도 감당했다(4:5). 이스라엘은 드보라의 리더십 아래 40년 동안 태평성대를 구가하였다(5:31). 훌다도 여선지자로 활약했다. 에스더 역시 이방 포로 가운데서 극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출하였다. 이렇듯 구약의 여자들도 선지자로, 사사로 구속역사의 과정 속에 중요한 한 몫을 감당했다.

 

III. 신약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

 

신약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은 마태복음 첫 장에서부터 나타난다. 예수의 족보에서도 돋보이고 예수의 탄생 기사에서는 더욱 그렇다. 예수의 생애와 십자가 수난 그리고 부활사건 주변에 여자들의 활동상은 눈부실 정도이다. 사도 요한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십자가 현장에서 도망칠 때 예수의 어머니를 비롯해 많은 여인들이 끝까지 지켜 보았다. 죽음을 예비하여 나드 가름을 예수의 몸에 바른 자도 마리아였다. 주님의 복음이 전파될 때마다 마리아의 도움을 함께 전하여 그의 기념비적 신앙을 본받으라고 극찬하셨다(26:13). 무덤에 맨 먼저 찾아간 사람들도 갈릴리에서 온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이었다.

 

누가는 사도행전 18장에서 바울의 복음 사역을 도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의 헌신적 봉사를 언급하며 유명한 아볼로를 전도하여 개종시킨 사실을 밝히고 있다. 바울은 16장에서 그들을 소개할 때 그의 목숨을 대신해 목숨을 바치기를 각오한 특별한 동역자로 부르고 있다. 주목할 일은 유대적 관례를 깨고 바울은 브리스길라를 아굴라보다 먼저 기명한 사실이다. 여성의 위치가 남성의 위치보다 단순히 여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확인되는 경우이기도 하다.

 

로마서 16장에 나타난 바울의 많은 여자 동역자들의 이름은 주목할만 하다. 특히 루포의 어머니는 바울의 어머니라고까지 언급하였다(16:13).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바울은 여성의 사역이 그의 선교운동에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담당했는가라는 사실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4:3)

 

빌립보교회에 있어 두 여성 지도자들인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중요한 위치에서 사역한 사실이 명시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마음을 품고(4:2) 사역을 할 것을 권면하였다. 이처럼 바울의 선교 사역에 있어 여성의 파트너로서의 비중을 기대했으며 그가 세운 교회들이 여성 지도자들의 적극적 참여와 봉사에 의존한 바가 컸음을 알 수 있다.

 

주의 일을 함께 있어서 남녀가 상호의존 관계에 있음을 바울은 이렇게 지적한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12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전 11:11-12)

 

신약이 가르치는 교회 안에서의 여성 위치는 구약시대에 레위인 중심의 성전 사역에 비하면 훨씬 개방적이고 진취적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여자들의 공중기도 하는 것이나 예언하는 것을 인정하였다(고전 11:5). 빌립의 네 딸도 예언하는 자로 활동하였다(21:9).

 

IV. 여성 사역의 제한에 관한 고찰

 

여성 사역은 신구약에 공히 인정한 바이나 그것은 모든 영역에 있어서 남성과 동등한 입장에서 인정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여성들이 남성들과 함께 교회에서 참여는 하였으나 그것은 남성들의 사역에 대한 보조적인 참여임을 가르친다. 성경은 교회 내의 여성 사역의 중요성과 함께 제한성을 강조하고 있다.

 

1. 딤전 2:12-14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여기에 여자의 가르침에 대한 금지의 범위가 문제시 된다. 여자는 일체 교회에서 가르칠 수 없다는 말인가? 아니면 남자를 가르칠 수 없다는 말인가? 후자의 뜻으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남자를 주관할 수 없다는 다음 명령에서 주관의 대상이 남자인 것처럼 가르침의 대상도 남자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디도서 2:3-4에서 여자가 다른 여자를 가르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바울이 금하는 것은 여자가 교회에서 남자를 가르치는 일이다.

 

다음으로 주관할 수 없다는 뜻은 남자 위에 권위로 다스릴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두 가지 제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딤전 5:17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이 교회 내 여성사역을 제한하는 것은 다스리는 장로직과 가르치는 목사직임이 분명하다. 바울은 이어서 여성 사역의 제한에 관한 이유를 2:13-14에서 밝힌다.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14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바울은 여자의 가르침을 금한 이유를 단순히 그 당시 가부장적인 남성 위주 사회였기 때문이 아니라 창조에 있어 우선순위가 남자가 먼저이고 여자는 남자를 돕는 자로 창조하였음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바울이 여성의 가르치는 사역에 대한 금기 이유를 창조에 있어 남녀간의 역할의 차이에 두었기 때문에 금기의 성격은 일시적이 아니라 영구적임을 알 수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창조 후 타락의 원인 제공자가 아담이 아니라 여자였다는 사실을 밝힘으로 바울은 창조 질서면에서만 아니라 타락과 구속역사 차원에서 여자와 남자의 역할 차이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어서 15절에 여성의 역할이 독특한 영역 해산이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 여성의 가정 사역에 있어 주역성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2. 고전 11:2-10

 

고전 11:5에 바울이 교회 안에서 여자가 예언하는 것을 허락하였다는 사실이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의 가르치는 것을 허락한 것으로 해석하여 여자 목사를 세워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본문 전체 문맥을 살피면 여자의 예언에 강조가 있지 않고 여자의 예언은 은사활용까지도 남자와 여자의 머리됨에 강조가 있음을 알 수 있다(고전 11:3).

 

여자가 머리에 반드시 모자를 써야 할 이유는 여자의 머리는 남자(11:3)일 뿐만 아니라 여자는 남자의 영광(11:7)이 되기 때문이다. 여자가 머리에 모자를 씀으로 남자의 머리됨을 예언하는 중에도 나타내야 한다는 논리이다. 여자도 예언할 수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자의 머리됨을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예언의 은사를 활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흔히들 구약의 여선지자 드보라의 사역을 들어 여성 목사 안수의 타당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사사기 4:2-16까지 전말을 자세히 살피면 드보라의 선지활동도 고전 11:3-7까지의 교훈에서 보는 남자의 머리됨을 전제하고 있다. 드보라는 다만 예언의 은사를 받아 그것을 공적으로 활용하기보다 종려나무 아래 거하여 조용히 사역하였고 그에게 찾아오는 자를 상대하였다(4:4-5).

 

이 점에서 구약시대의 다른 남자 선지자와 차이가 있다. 드보라가 바락에게 여호와의 계시를 알릴 때에도 개인적으로 상대했다. 그리고 사사로서의 드보라는 전쟁 수행에 있어 남자 사사들처럼 전쟁의 지휘관으로서의 지도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락을 따라 갔을 뿐이고 전쟁의 공은 바락이 세웠다(4:15-16). 드보라는 다볼산 전투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개인적으로 바락에게 전하는 일만 했다(4:6-7).

 

예언은 이처럼 하나님께 받은 바를 그대로 전하는 일만 하는데 그친다. 그러나 가르치는 일은 받은 계시를 설명하는 일이다. 이 두 가지 은사는 서로 상이하다. 오늘날 여선지자요 사사였던 드보라의 경우를 들어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직을 여성에게도 적용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그릇된 것이다. 오히려 드보라의 선지 활동 자세는 신약의 남자의 머리됨의 가르침을 잘 설명하여 주는 본보기가 되기도 한다.

 

VI. 여성 사역의 중요성

 

성경은 교회 내에서의 여성 사역의 제한을 분명히 밝힘과 동시에 여성 사역의 중요성도 동시에 강조한다. 비록 여성 사역의 제한이 있기는 하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요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장차 유업을 함께 이어 받는데는 동일함에 틀림없다(3:28-29).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다 함께 구원받을 후속자로 천국운동의 경쟁자가 아닌 동역자로 세우셨다. 선교와 교육, 봉사면에서 여성에게 남성을 돕는 동역자로서 무한한 활동의 은사와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오늘 한국교회의 현실 속에서 중요한 여성 사역의 영역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1. 전도와 선교운동

 

아볼로를 전도한 브리스길라와 같이 전도에 앞장 서서 개교회 부흥에 기여할 수 있다. 남성이 파고들이 어려운 아파트 전도는 여성의 전도가 효과적이라 하겠다. 전도주일에 1등인 대상이 대부분 여성들의 몫이 되어 있는 사례들은 여성들에게 전도의 활로가 열려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여 준다. 교회 여전도회에 가입하여 전도와 선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하나님 나라 확장에 직접 공헌하게 된다.

 

2. 기도 운동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전 1903년 원산에서 여자 선교사들의 기도회 모임에서 일어난 기도의 열기가 평양으로 점화된 사실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오늘 새벽기도회, 철야기도회, 산기도회의 모임에서 절대적 다수를 이루는 여자 성도들의 기도의 힘을 한국교회 부흥의 밑거름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일찍이 화란 자유주의 신학자요 목회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가 복음적인 목회자요 신학자로 변하게 되는데는 처음 담임하였던 교회 여성도들의 끈질긴 기도의 힘이 작용한 사실은 교훈하는 바가 크다. 어거스틴을 개종시킨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는 초대교회 역사를 움직인 동인이 되었다.

 

3. 성경공부 운동 및 주일학교 운동

 

2:3-5가 가르치는대로 성숙한 여인은 어리고 성숙하지 못한 여인들을 가르칠 책임과 사명이 있다. 한국교회 안에 여성도가 많은 사실은 성숙한 여성도들의 교육적 사명을 더욱 일깨워준다. 특히 한국 사회처럼 낮에는 집안에 여성만 남아 있는 상황에서 여자들 중심의 성경공부와 구역 예배에서 여성 리더의 필요성과 책임은 지대하다 할 것이다.

 

오늘 크게 부흥한 교회일수록 여전도사, 여성구역장, 여성권찰들이 활발한 봉사를 안하는 교회가 없다. 또 각종 주일학교 교사로서의 봉사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 여전도사에게는 전교회 성도들을 위한 심방의 문이 항상 열려 있다. 여전도회 주관으로 여자 강사를 초청하여 교회적 부흥회를 개최하여 함께 은혜의 잔치에 동참할 수도 있다. 일찍이 명향식 전도사는 안수를 받지 않았어도 여자 부흥사로 크게 활동한 사실이 있다. 그 때에 많은 남편들도 참석하여 함께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선교지에 가서 선교하는 여자 선교사는 많은 남녀를 개종시킨 전례들을 남겼다. 순교한 남편 선교사의 뒤를 따라 남미 에콰도르의 아우카 토인들에게 가서 선교한 엘리사벳 엘리옷이라는 여선교사는 전체부족을 전도하여 개종시킨 후 교육한 교육사적인 사표를 남기기도 했다.

 

4. 문서 선교운동

 

성경 번역, 기독교 철학이 담긴 문학작품 창작, 경건과 전도를 위한 저술, 테이프 제작, 복음서점 사업 등을 통해 효과있는 문서 선교를 할 수 있다. 이밖에도 여성이 교회 안에서의 창의적 사역의 길은 널리 열려 있다. 다만 목회자를 돕는 동역자의 자세에서 교회 봉사를 위해 헌신할 때 루디아, 뵈뵈 그리고 브리스길라가 걸어갔던 같은 길을 따라가게 될 것이다.

 

VII. 결론

 

오늘 여성 안수 문제는 교회가 당면한 중대한 이슈이다. 그러나 안수문제는 단순한 교회의 한 이슈문제에 그치지 않고 성경 권위 문제와 직결된다. 과거 한국교회가 여성 안수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부정적 반응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교회가 그만큼 성경의 권위를 높이고 성경대로 믿는 정통신학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자유주의 신학의 득세로 인해 새로운 성경해석이라는 미명 아래 오늘의 상황에 비추어 성경 해석을 시도하여 여성 안수를 점차 허용하여 가고 있다. 성경이 분명히 명시하는 금기도 시대에 비추어 허용할 수 있다는 주장은 분명 성경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다. 성경의 가르침보다 현실 상황을 더 중시하는 경향 때문이다. 여성 안수가 새 해석으로 허용되면 그 다음은 동성연애에 대한 새 해석이 뒤따른다. 이어서 하나님의 호칭을 바꾸어 남성, 여성이 공히 만족할 수 있는 중성 명사 채용을 주장하는 운동이 뒤따른다. 이 추세는 미국교회에서 그대로 나타나는 실정이다. 어디서나 이 연결고리는 뗄 수 없는 새 해석의 공식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제 우리는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보루에서 안주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이 가르치는 남성의 머리됨의 일관된 대 주제와 범위 안에서 여성 사역의 교회 내에서의 성경적 제한을 인정하면서 여성 사역의 극대화를 추진해야 한다. 과거에 가부장적 남성 위주의 유교문화에 영향을 입은 한국교회가 여성 사역의 활성화를 충분히 추진하지 못한 점을 개선하여 여성사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전반적인 여성사역의 적극적 추진에 힘써야 한다.

Posted by 작은샘

[논문] 여성안수 시비  - 서철원 박사

http://www.reformednews.co.kr/9608

 

≪리폼드뉴스≫ [논문] 여성안수 시비

  이 글은 서철원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것으로 여성안수 문제에 대한 성경적이고 개혁주의적 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요약 소개해 본다.  

www.reformednews.co.kr

이 글은 서철원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것으로 여성안수 문제에 대한 성경적이고 개혁주의적 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요약 소개해 본다.

 

 

여성 해방운동이 전세계적인 조류가 되어 사회전반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사회는 여성운동의 주장과 언어들을 대부분 미국언어에 수용하였다. 가령 남자를 표기하는 manperson으로 바꾸고 남자 3인칭 대명사 he로 표기했던 것을 he/she로 바꾸었다. 그리고 성차별을 나타내는 모든 표현들을 다 공동표현으로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여성을 표기하는 말을 더욱 선호하게 되었다. 가령 he 대신에 she로 바꾸어 쓰는 경향이 강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사회의 갈등 요인을 제거하고 시빗거리를 없애 버렸다.

 

여성해방운동이 한국에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전통적이 가족 구성법인 호주제를 폐지하였고 자녀들의 성도 여자의 성을 따라서 할 수 있게 법을 바꾸었다. 그전부터서도 한국의 부인들이 가정의 경제권을 다 장악하고 있었다. 서양의 관습을 따라 한국의 호주제를 폐지했겠지만 서양에서는 여자가 결혼 전까지는 아버지의 성을 따랐다가 결혼하면 남자의 성을 따르고 비록 이혼하더라도 그 성만은 버리지 못하게 되었다. 호주제를 폐지한 국회의원들이 왜 그 성에 관한 법은 바꾸지 않았는지 의아심이 많다.

 

여성해방운동은 교회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개신교회의 대부분의 대교단들이 여성을 목사로 안수하였다. 대교파인 로마 가톨릭교회는 아직은 여성 사제를 세우지 않고 있다. 작은 교단으로서 보수신학을 지키는 교회는 여성안수를 반대하고 심지어 여집사도 세우지 않고 있다.

  

한국에도 많은 교단들이 여성을 목사로 안수하였다. 한국교회에서 여자 목사안수를 비교적으로 늦게 시작한 통합측 교회는 한국교회에서 가장 많은 여자 목사들을 안수한 교회가 되었다. 소수의 보수교회들만이 여성안수의 강한 조류에 맞서있다.

 

세계 교회상황이 이러하더라도 우리 합동측 교회는 여성목사안수와는 무관할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목회자들 중에서 유력한 분들이 비록 소수이기는 하나 여성안수의 당연성을 제기하였고 신학교에서도 여성안수 지지가 나왔다. 그리고 최근에는 우리 총신을 졸업한 여전도사들의 상당수와 재학생들의 상당수가 여성안수를 강력하게 희망하였다.

 

이런 와중에 K교수가 기독신문에 성경에 나타난 여성의 역할이라는 제하에 글을 실어 여성안수가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 것같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가 여성안수를 하지 않는 것은 복음에 반하여 결국은 그 길로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란 암시를 강하게 하고 있다. 아마도 우리 교회도 신학적으로 넓은 길로 가기로 하면 세계의 대교단들이 하는 여성안수를 하게 될지 모른다. 또 교회에서 남성지도권을 유지하기 위해 여자를 굴종시키고 비하시키고 있다고 책망하였다. 이런 주장과 책망이 성경적 근거를 갖는가?

  

K교수는 갈라디아서 3:28절의 남녀동등성을 가르치는 바울의 본문에 근거해서 여성안수의 성경적 근거를 설명하고 제시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14:34-35절이 1세기 말엽에 첨가된 것으로 단정하다. 거의 같은 명령을 담고 있는 디모데전서 2:11-15절도 바울이 쓴 것이 아니라 1세기 말엽에 편집한 것으로 주장한다. 이렇게 주장하여 평소 그가 취하고 있는 편집비평의 입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더 나아가서 이 두 본문은 바울의 율법주의적 본문인데 이것을 복음의 핵심을 담는 본문보다 더 금과옥조로 여겨 남성들의 지도권 독점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여성의 굴종을 정당화하고 영속화한다고 강조한다. 바울의 복음의 국면과 율법주의의 단계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일이다.

  

우리가 여기서 K교수의 제시에 어리둥절하고 이해하기 힘든 것은 두 본문 고전 14:34-35와 딤전 2:11-15절은 1세기 말에 추가되거나 기록되었다고 하여 바울의 글이 아니라고 단정하고서는 바울의 율법주의적인 언명이라고 주장하는 점이다. 이로써 자기 스스로 자기 해석과 설명이 모순임을 드러낸다.

 

또 갈 3:28은 남녀동등성을 가르치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을 드러내고 있다고 제시한다. 그런데 이 본문에 대한 K의 관점과 주장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갈 3:28은 남녀동등성을 가르치면서 그 동등성에 근거해서 여성안수의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도 않고 암시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이해나 주입과는 본문은 천리도 멀다. 3:28은 남녀동등성과 상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구원 얻음에는 유대인이나 자유인이나 심지어 노예나 자유인에게 아무런 차이나 차별이 없음을 말한다. 남자나 여자도 아무 차이가 없어서 다 주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고 의에 이름을 강조하고 있다. 갈라디아서는 구원얻고 완전해지기 위해 꼭 해야 한다고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율법준수를 예수 믿음에 더해야 한다는 것을 바울이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다.

 

남녀간의 인격적 동등성에서 남녀의 목회직임의 동등성에 대해 결코 암시도 없고 그런 것에는 아무런 의도도 없었다. 갈라디아서의 어느 한 본문이나 전체 본문에서 바울이 남녀의 동등성에서 남녀직분의 동등성에로 나아가야 함을 마음에라도 담고 있음을 암시라도 하는가?

  

또 고전 7:2-16도 남녀의 동등성을 말하므로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다고 K는 주장한다. 이 본문의 내용이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는가? 고전 7:2-16은 결혼한 부부가 서로의 몸을 나누는 것에 한쪽에 독점되어 있지 않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인가?

  

또 고전 11:2-11도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남녀동등이 복음의 핵심인가? 이 본문은 교회가 기도할 때 여자가 머리를 어찌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오히려 이 본문은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고 말하고 있는데 오히려 바울이 남녀동등성을 스스로 깨뜨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11절에 가정에서 남녀가 함께 있고 함께 생활하며 남녀가 동등하게 결혼생활을 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5:21-31에는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이 있으므로 남녀동등성과 상호주의 원칙을 담고 있다고 K는 보는데 이것이 바른 독법인가? 이 본문은 교회의 성도들이 상호복종하는 것을 말하지 남녀간 피차 복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자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오히려 22-28절에 나와 있다. 여자가 남편에게 복종하되 교회가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여자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할 것을 권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남녀동등성과 상호주의 원칙을 끌어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여성안수의 정당을 도출할 수 있는가? 그런 해석은 너무 견강부회이고 자기 의도로 성경을 먹칠하는 행위이다. 성경을 본문대로 이해하고 지키는 것이 복음을 훼손하고 서로 모순되게 하는 것이라고 힐난하는데 이 힐난이 누구에게 적용되어야 하는가?

 

보수주의자들은 혹은 보수주의 칼빈주의자들은 성경을 임의로 선정하여 편향되게 읽고 남자들의 권위독점을 위해 복음에 배치되는 구약적 율법주의의 여성비하에 호소한다고 K는 힐난한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고 가르치면 안된다고 한 말을 살리기 위해 바울이 정죄한 율법주의적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고 정죄한다.

 

이런 율법주의적 태도를 고수함으로 보수주의자들은 부활을 처음 전한 막달라 마리아와 여성들을 범법자로 만들고 그들이 설교한 복음을 무효화하며 심지어 주 예수까지 교회에서 여자의 잠잠함을 어기도록 교사한 분으로 만들고 있다고 정죄한다. 도대체 이런 해석과 주장은 바른 정신을 가지고 하는 말인가?

  

K의 주장과 진술을 종합하면 신약성경은 여성 안수에 대한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한다. 그래서 나온 변명이 성경을 글자적으로 이해하지 말고 정신을 따라 이해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또 남성지도권 주창자들의 주장을 타도해야 복음을 더욱 잘 전하고 여성들이 안수를 받아 복음을 전하므로 여성을 노예화하는 이슬람과 힌두교의 도전을 이겨낼 수 있다고 권고한다. 오히려 여성안수를 한 대교단들의 신학이 너무 넓고 현대신학이 되어서 기독교서의 존립이 어렵게 되어 있는 상황을 K의 눈은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K 교수는 복음의 내용을 제시하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함으로 인종적 차별, 신분적 차별, 성적 차별을 철폐하여 만인에게 자유와 정의와 평화를 확대해야 하는 것으로 제시하였다.

  

복음이 선포되므로 인종적 차별과 신분적 차별과 성적 차별을 다 제거하였고 또 제거하고 있다. 복음선포로 이루어진 결과를 복음으로 결코 혼동하면 안된다. 복음은 주 예수께서 피 흘려 죽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와 사망에서 구출하신 것을 말한다. 이 복음선포가 인류의 역사에 기적들을 산출하였다. 기적들을 복음의 핵심으로 혼동하면 안된다. 우리는 복음선포자의 자격에다 성별간의 차이를 결코 부과하지 않는다. 남녀가 다 복음의 전사들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단지 여자들이 목사가 되어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 성경에서 아무런 근거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3:28을 아무리 강조해도 거기에는 남녀동등성에서 여성안수에로 나아가도록 하는 제시나 당위가 전혀 제시되어 있지 않다는 것만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 본문에는 모든 사람들이 어떤 신분에 있든지 간에 다 동일하게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입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여성안수를 지상의 목표로 삼으면 이 본문을 여성안수의 근거로 볼 수 있게 되는가? 그런 해석법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보수주의자들에게 향했던 권고와 힐난은 오히려 K에게로 향해야 한다. 성경본문을 읽을 때 안경을 벗고 성경본문대로 읽기를 권고한다.

  

교회에서 여성을 굴종시키고 비하한다고 하는데 여성안수를 안 하는 것을 그렇게 보는 모양이다. 우리는 유교의 전통에서 살아왔으므로 여성하대의 관습이 남아 혹은 여성들을 남자이상으로 존중하지 못하는 면이 있을 수 있다. 그런 면을 여성안수문제와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여자의 인격을 존귀한 인격으로 존중한다. 여기에 무슨 남녀차별이 있을 수 있는가? 여성안수시비를 여성인격의 비하로 연결하는 우리를 범하지 말기를 권한다.

Posted by 작은샘

양승훈 교수의 '창조와 격변' - 교보문고 책소개.

 

목차

서 문

 

감사의 글

 

추천사 (유정철 교수, 윤성희 박사, 박세범 장로)

제1장 창조론과 진화론
제2장 자연발생설과 특수창조론
제3장 열역학과 생명의 기원
제4장 외계 생명체는 존재하는가?
제5장 진화는 과학적 사실인가?
제6장 생물학적 증거들
제7장 헥켈의 사기극
제8장 화석의 증거들
제9장 인류의 기원 논쟁
제10장 라마피테쿠스에서 도구인간까지
제11장 직립원인에서 현생인류까지
제12장 과학적 연대논쟁
제13장 창세기 대홍수
제14장 대홍수와 다중격변
제15장 창조와 설계
제16장 기원 논쟁과 세계관

내용 색인
창조회 후원교회 및 기관(목회자)
저자 소개

 

책 속으로

# 서문
그러나 적어도 저는 자연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증거들로 미루어 볼 때 창조론적 견해가 진화론적 견해보다 더 타당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본서를 썼습니다. 저는 제가 정립해 온 세계관과 그동안 받아온 교육과 연구한 것들을 종합해 볼 때 창조론적 견해가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생명 세계의 존재를 설명하는 바른 견해라고 믿습니다... 필자는 본서가 종교적 교리에 대한 맹목적 변증보다도 진리에 대한 합리적 변증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교리가 아니라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하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작은샘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14569 

 

내가 창조과학을 떠난 네 가지 이유

- 다중격변론 등 창조과학자들과의 논쟁

 

본지는 밴쿠버에 위치한 기독교세계관대학원 원장이자 창조과학 운동의 중심에 있던 양승훈 교수가 2006년 부터 시작된 창조론 논쟁 이후 창조과학을 떠나게 된 배경과 학술적 논지를 연재 합니다. - 편집자 주


저는 2006년 7월, <창조와 격변>(예영)이라는 책을 출판한 이후 창조론 논쟁 속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진화론자들과의 논쟁보다도 다른 창조론자들과의 논쟁에 휘말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저런 헤프닝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에 있는 어떤 한국인 창조과학자는 제가 제시한 다중격변론을 다른 이단적 주장들과 함께 부수는 만화를 그려 발표하기도 하고, 서울 인근에 있는 어느 교회는 제가 창조과학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집회 강사로 초청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했다고 합니다.
1981년에 시작된 한국에서의 창조과학 운동은 일정 부분 한국교회에 도움을 준 측면이 있습니다. 특히 지적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한국 교회에서 성경의 과학적 변증을 주도한 창조과학 운동은 가뭄의 단비와 같았습니다. 그리고 교단과 관계없이 한국교회의 근본주의적 분위기는 창조과학의 전성기를 여는 기초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은 급속한 과학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이 시대의 새로운 제사장으로 부상한 과학자들이 무너지고 있는 성직자들의 통합적 권위를 재건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창조과학의 2대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대홍수설과 젊은 지구론은 틀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단 한 차례의 홍수로 인해 지구상의 대부분의 지층과 화석이 형성되었으며, 또한 대부분의 지표면의 모습이 결정되었다는 주장은 과학적 증거들과 일치하지 않는 점이 너무 많습니다. 지구와 우주가 6천년 전에 창조되었다는 주장 역시 틀렸음이 분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성도들이나 목회자들이 6천년/대홍수론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틀린 이론을 많은 사람들이 지지할까요?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볼 필요 없이 저 자신에게 물어보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1980년, ‘80 세계복음화 대성회’의 일환으로 개최되었던 창조과학 세미나에서 미국 창조과학자들로부터 처음 단일격변설을 소개 받은 이후, 제가 이 이론이 완전히 틀렸음을 확신할 때까지 2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으니까요. 어떻게 과학을 공부한다는 사람이, 그것도 기초과학인 물리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그렇게 오랫동안 틀린 이론을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믿고 있었을까요? 명백한 오류지만 모른 척하고 지내는 것이 틀렸음을 계속 주장함으로서 교회 내에 분란을 일으키는 것보다 나아서 그랬을까요? 여기에는 크게 네 가지 정도의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전문성 부족

 

첫째 이유는 창조과학을 전업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창조과학자들은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는 전문가이지만 창조과학과 관련하여 직접적인 연구를 하는 분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더라도 학자적인 치밀함을 가지고 연구하거나 평가하지 못합니다. 기원 논쟁의 대부분의 이슈들이 기초과학 분야에 속한 것들이며, 기초과학 분야에서는 제대로 연구를 하기 위해 오랜 훈련이 필수적입니다. 꼭 학교에서 해당 분야의 석, 박사를 하지 않았더라도 혼자서라도 부지런히 공부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근래 북미주에 있는 두어 분이 인터넷을 통해 저의 글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창조과학 분야에도 전문가들이 많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전문가라는 분들의 글을 퍼서 올려놨습니다. 하지만 반론을 올렸던 한 분은 경영학을 전공한 분이며, 다른 한 분은 자동차 정비업을 하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들이 퍼온 글의 저자들도 역시 그 분야의 전문가들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창조과학에 참여하는 분들이 전문가가 아니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창조과학자들 중에는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탁월한 전문성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만 그것은 창조과학과 관련된 전문성이 아닙니다. 그러면 해당 분야에서 전문성이 부족한 것이 왜 문제가 될까요?

 

전문성이 부족하면 자신이 전문적인 연구를 하지 않음은 물론 학문적이지 않은 문헌을 인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2008년 8월, 저의 제명 문제를 논의하면서 한국창조과학회 이사회가 열렸는데 그 때 회의록과 더불어 우주와 지구가 젊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헌들을 20여개 첨부하여 임원들에게 배포했습니다. 우연히 저도 그 문건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 문헌들 중에 학술적인 가치가 있는 것들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글을 쓴 분들 중에 지구나 우주 연대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분들이 한 사람도 없었으며, 그 글들을 모은 분도 서울 인근 어느 대학 웹디자인학과 교수였습니다.

 

이것은 비단 우주나 지구 연대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창조과학자들은 대폭발이론을 그렇게 심하게 비판하지만 대폭발이론, 흔히 표준모델(Standard Model)로 알려져 있는 이 이론을 전공하는 분들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초기 우주론을 전공하는 분들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해당 과학 분야에서 전문성이 없는 분들이 또 다른 비전문가들이 쓴 대중서적들을 근거로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논쟁에 참여하니 온갖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제가 2006년 <창조와 격변>에서 제시했던 다중격변론에 대해서도 몇몇 창조과학자들이 비판했지만 아쉽게도 정작 이 이론을 제대로 공부하고 비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중격변모델을 비판하면서 대규모 운석이 떨어지면서 남긴 증거들이 화산폭발 때 만들어지는 증거들과 비슷하다는 주장을 하며 운석 충돌 자체를 부정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모리스(Henry M. Morris)는 달 표면의 수많은 운석 충돌 자국들을 사탄과의 영적 전쟁의 흔적이라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중생대와 신생대의 경계에 있는 K-T 경계면 멸종도 부정합니다. K-T 경계면이 운석 충돌에 의한 것인지, 화산폭발에 의한 것인지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K-T 경계면 멸종이나 수많은 운석이 지구와 충돌한 흔적은 해석이 아니라 과학적 사실입니다.

 

비록 제가 제시한 이론이기는 하지만 저 역시 다중격변설이 100% 맞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이론은 적어도 지금까지 동일과정설이나 단일격변설(대홍수설)에 비해서는 맞을 가능성이 높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반증주의자들의 표현을 빈다면 다중격변설은 더 나은 이론이 나와서 오류가 입증될 때까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잠정적인 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1997년, 한국 대학을 사임하고 밴쿠버로 올 때까지만 해도 창조과학 연구에 저의 남은 생애를 걸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까지 창조과학의 2대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젊은 지구/우주와 대홍수 개념을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기보다는 그것들이 맞음을 좀 더 확실하게 증명하기 위해 다른 문헌들을 조사하면서 동시에 야외 탐사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업으로 창조과학을 연구하면서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창조과학 모델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증거가 너무 많고 분명했습니다.

 

창조과학에서 특히 많은 오해가 난무하는 분야는 창조과학자들 중에서 전공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천문학과 우주론 분야입니다. 창조과학에서는 현대 우주론의 표준모델이라고 하는 대폭발이론이나 별이나 은하의 나이를 전공하고 있는 학자들이 (제가 아는 한) 없습니다. 대폭발이론 등 우주의 기원을 연구하는 초기 우주론 연구는 천문학에 대한 지식은 물론이려니와 상당한 이론물리학적 배경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전공자가 아니면 현재의 이론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저는 대폭발이론을 맞고 틀리고를 떠나 그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비판하는 것은 학자적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대폭발이론의 연구는 고사하고 이를 제대로 이해조차 못하고 있는 아마추어들이 학문적이지 않은 문헌들을 근거로 대폭발이론을 마치 사탄의 이론인 듯이 매도하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한 예로 대폭발이론을 비판하면서 이는 제재소가 폭발해서 저택이 만들어질 가능성, 수 백 만 개의 비행기 부품 더미가 폭발해서 747 점보기가 조립될 가능성 등을 운운하는 사람은 이 이론의 기초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분이라고 보면 됩니다. 초기 우주론을 전공하는 학자들은 대폭발이론은 너무 많은 증거들이 축적되어서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대폭발이론의 세부적인 분야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여러 문제들이 있지만 적어도 현재까지는 대폭발이론보다 천문학 분야의 이론적 증거나 관측상의 증거들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없음은 분명합니다.

 

2. 편향된 인용

 

둘째 이유는 편향된 문헌 인용 때문입니다. 즉 다른 사람들의 연구 결과나 말을 문맥에 맞지 않게 인용하거나 필요한 문헌만 선별적으로 인용하는 “생략에 의한 속임”(deception by ommission)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데이터들만 선별적으로 인용하고 싶은 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화론자들도 그런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많지만 안타깝게도 창조과학자들 중에서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지구나 우주 연대 문제를 다룬 창조과학자들의 문헌에는 의도적으로 데이터를 왜곡한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20세기 창조과학 운동의 선구자인 모리스(Henry M. Morris)가 윗콤(John C. Whitcomb, Jr.)과 공저한 <창세기 대홍수>(The Genesis Flood)는 “수 백만 년 전에 사라진 바다”(the sea which vanished so many million years ago)라는 구절을 “여러 해 전에 사라진 바다”(the sea which vanished so many years ago)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방사능 연대측정법은 어떻습니까? 방사능 연대측정은 드물게 틀린 결과가 나오기는 하지만 98% 이상 정확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창조과학 대중강사 중의 한 사람이자 전직 과학교사였던 호빈드(Kent Hovind)는 방사성동위원소 연대측정이 받아들여지는 유일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기 때문이라는 터무니없는 얘기를 하고 다니고 있습니다. 물론 호빈드 자신은 한 번도 방사능 연대를 연구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신, 불신을 막론하고 자신이 한 번도 진지하게 연구하지 않은 분야에서 전문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모두 엉터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과학자들에 대한 인격 모독이기 이전에 피조세계의 법칙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아마추어로서 미국 창조과학자들의 문헌만을 접할 때는 방사성동위원소 연대측정은 마귀가 만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미국에서 유학하는 동안 위스콘신 대학(University of Wisconsisn-Madison) 과학사학과에서 방사성 연대측정법의 하나인 탄소연대측정의 역사를 석사 논문 주제로 선택한 가장 큰 이유도 탄소연대측정이 엉터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논문을 작성하면서 방사성 연대측정 분야의 문헌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제가 그 분야에 대해 너무 아는 게 없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질학 분야에 가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한 차례의 노아의 대홍수만으로 지구의 모든 지층과 화석, 그리고 각종 지형들이 형성되었다는 주장은 매우 단순하고 성경적인 듯이 보입니다. 하지만 이 단일격변설이 터무니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오랜 연구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최소한의 지질학 상식을 가지고 제가 살고 있는 동네 인근에 나가서 하루만 돌아다니면 충분합니다. 어떤 반대되는 증거가 있더라도 나는 단일격변설만을 믿겠노라고 신앙고백을 한 사람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남겨놓으신 지구 역사에 대한 증거가 너무나 뚜렷합니다. 노아의 홍수는 분명하게 일어났지만 창조과학에서 말하는 노아의 홍수는 아니라는 것이 증거에 충실한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빛의 속도가 변한다는 주장도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과학에서는 백억 광년 이상 떨어진 별빛을 지구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젊은 우주의 틀에서 설명하기 위해 과거에는 광속이 무지하게 빨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느려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먼 거리에 있는 퀘이사(quasar) 스펙트럼의 다중선 분석에 기초한 다른 사람들의 연구 결과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빛의 속도가 늦어지고 있음이 증명되었을까요?

 

실제로 창조과학에서 인용하고 있는 해당 논문의 저자들은 과거에 빛의 속도가 더 빨랐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 우주에서 빛의 속도가 변했다고 해도 그것은 현재 속도의 백만분의 일 정도의 무시할 정도이며, 이 또한 관측오차 이내이기 때문에 큰 의미가 있는 결과는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이 결과는 오히려 젊은 우주론에 심각하게 반대되는 증거인데도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데이터를 잘못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3. 편향된 신학

 

셋째 이유는 편향된 신학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창조과학이 근본주의 운동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근본주의 신학의 특징은 반지성주의적이며 전투적이라는 점입니다. 창조과학이 그렇게 많은 과학적 자료들을 제시하면서 성경을 과학적으로 변증하는데 반지성적이라는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오래 전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어떤 창조과학자와 창조연대와 관련하여 장시간 전화로 논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미국창조과학연구소(ICR)의 연구만으로 충분하고 우리는 그 주장을 어떻게 전하는가의 문제만 남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분은 더 이상의 연구는 필요하지 않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분은 제게 더 이상 많은 공부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근본주의의 근본적인 문제는 반성의 부재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돌진합니다. 창조론 논의에 있어서 현재의 혼란은 자신의 주장이 신학적으로 어떤 함의가 있는지 충분히 반성하지 않은 채 신학적 기초가 없는 과학자와 공학자들이 너무 멀리 갔기 때문입니다. 과학자들과 공학자들의 단순함이 문제를 키웠다고나 할까요? 아직까지 그런 정관을 유지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초기 한국창조과학회 정관에는 정회원이 되려면 이공계 분야에서 적어도 석사학위 이상을 가져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창세기를 전공하는 구약학자들은 정회원이 될 수 없었고, 창조과학에 대한 신학적 반성은 애초부터 힘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미국 창조과학회도 비슷합니다.

 

근본주의 신학이 단순한 과학자와 공학자들의 손에서 더욱 더 전투적이고 선명성 있게 다듬어진 것이 현재의 창조과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신학적 반성을 필요로 하는 문제를 신학적 훈련을 받지 않은 분들이 다룸으로 인해 좌충우돌하는 현재의 상황이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현 창조과학의 문제는 신학이나 과학사, 과학철학자 등 인문학 분야의 학자들이 참여하지 않고 과학자와 공학자들 중심의 운동이어서 문제가 더 커졌습니다.

 

일반적으로 과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반성의 여지가 없는 자연을 대상으로 연구하기 때문에 신학자들처럼 생각이 그렇게 깊지 못합니다. 때로는 신앙생활에서 그런 단순 사고가 유익할 때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런 단순 사고를 가진 분들이 창조/진화와 같이 신앙적, 이념적 함의가 강하게 내재된 분야의 지도자로 참여하게 되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신학적 반성 능력, 다시 말해 신학적 소양이 부족한 분들이 강한 신학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는 논쟁에 뛰어들게 되면 옹기전에 황소가 뛰어든 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학적 소양이 부족하다는 것은 어떻게 드러날까요? 신학적 훈련을 받지 못한 분들은 자신의 과학적 주장이 어떤 신학적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한 예로 창조과학자들은 성경 문자주의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자신들은 성경 문자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근본주의적 주장을 하면서도 자신은 근본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성경을 과학 교과서처럼 사용하면서도 자신은 성경을 과학 교과서로 보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이념적 자기 정체성(self-identification)이 확립되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어떤 사람을 근본주의자라고 부를 때는 그 사람이 자기 입으로 자신을 근본주의자라고 말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주장과 태도가 근본주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조과학자들은 아무리 자신을 근본주의자, 혹은 성경 문자주의자가 아니라고 해도 신학자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근본주의, 혹은 성경 문자주의로 부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은 먼저 자기가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만일 자신이 스스로의 신학적 정체성을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다면 전문 신학자나 과학철학자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많은 분들이, 그것도 훌륭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다른 분야에서 탁월한 연구 업적을 내는 분들이 창조론 분야에서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큰 고통입니다. 어폐가 많지만 갈릴레오의 심경을 헤아려 보기도 합니다. 지구가 움직이는 것이 분명한데도 어디에 그런 성경 구절이 있느냐고 갈릴레오를 비판, 정죄했던 당시 로마 대학 교수들과 교황청 이단심문소(The Holy Office) 도미니칸 배심원들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당시 천동설주의자들은 성경을 내세워 갈릴레오를 정죄했지만 실제로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근거해서 갈릴레오를 정죄하고 비판했습니다. 오늘날도 창조과학이 천동설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외형적으로는 성경 구절을 많이 인용하지만 실제로는 잘못된 이데올로기나 잘못된 신학에 근거한 것은 아닌지...

 

흥미로운 것은 지금도 일부 근본주의자들 중에는 천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운영하는 웹사이트도 있고, 천동설을 주장하는 책도 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의 글을 보면 하나 같이 성경 구절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는 사실입니다. 천동설을 주장하는 어떤 근본주의 기독교 단체가 운영하는 홈페이지에는 지구가 움직이지 않고 태양이 움직이는 것을 보여준다는 성경 구절이 67개나 제시되어 있습니다!!

 

4. 소통의 문제

 

넷째 이유는 소통의 문제 때문입니다. 저는 저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저와 다를 수 있고 또한 저의 제가 제시한 모델이나 이론의 오류를 지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나서 겸손하게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누구라도 완전히 주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지만 그래도 편견과 아집, 독선과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면서 진지하게 하나님 말씀과 그 분이 만드신 피조세계의 증거들을 함께 연구한다면 진리의 성령께서 바르게 인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서로 생각이 다르더라도 기쁘게 대화할 수 있으며, 서로로부터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창조론 오픈 포럼”은 바로 그런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모임입니다. 오픈 포럼이기 때문에 당연히 창조과학자들에게도 오픈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초기 단계라 모든 사람들에게 오픈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복음주의적 신앙을 견지하고 있는 분이라면 누구나 초청합니다. 그래서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듯 서로의 의견을 겸손하게 개진하고, 논의함으로 하나님의 피조세계에 대한 선한 청지기로 구비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양승훈 원장 / 벤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
양승훈  edit@n314.ndsoftnews.com


[펌]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4569

'핫이슈 > 창조론과 진화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조와 격변  (0) 2021.06.04
[펌] 창조과학회제명 양승훈교수의 변  (0) 2021.06.04
[펌] 창조론적 진화론  (0) 2021.06.04
Posted by 작은샘

 

 

 

[펌]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5825

 

양승훈 교수 "30년 인연 창조과학회를 떠나며…"

창조과학회 제명 통보 일종의 '학문적 마녀 사냥' 심경 고백

www.newsnjoy.or.kr

양승훈 교수가 1980년 8월, 창립준비위원회 모임에서 시작해 계속적으로 관여해 온 한국창조과학회에서 제명 통보를 받고 탈퇴했다. 양승훈 교수는 창조과학회를 탈퇴하면서 논쟁의 핵심인 창조연대 및 다중격변 창조론에 관련된 입장을 밝혔다. -편집자 주

 

1981년 1월 24일은 저의 결혼식 날이었습니다. 원래는 결혼 예정일이 1월 31일이었지만 제가 결혼 일자를 잡은 후에 한국창조과학회에서 창립총회 일자를 그 날로 정했기 때문에 도리 없이 일주일 앞당긴 것이지요. 부랴부랴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피곤한 중에 여의도 전경련 회관에서 열린 창립총회를 준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어 창조과학회와 관련된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지금은 전설이 된 <진화는 과학적 사실인가?>을 편집하기 위해 박사과정 학생이 을지로 출판 골목의 허름한 여관방에서 출판업자와 며칠 밤낮을 지새우던 일, 애써 외주를 주어서 제작한 창조과학회 로고가 진화를 연상케 한다는 지적에 따라 지금의 로고로 다시 뜯어고쳤던 일,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주일학교 꼬마들을 대상으로 첫 창조과학 강연을 시작한 이래 국내외에서 1000여 회에 이르는 창조과학 강연을 쫓아다니던 일, 그리고 수많은 원고들. 20대 중반부터 5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저의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창조과학 운동을 이제 '공식적으로' 떠나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몇몇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근래 창조론오픈포럼(이하 본 포럼)을 개최하고, <창조와 격변>(예영, 2006) 출간을 통해 우주·지구가 6000년보다 훨씬 더 오래 되었을 수 있으며, 노아의 홍수 이전, 인류가 창조되기 전에도 여러 차례 전 지구적 격변이 있었다는 다중격변 창조론을 제시한 것으로 인해 지난 8월 말까지 한국창조과학회로부터 탈퇴하지 않으면 제명하겠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저의 주장들이 창조과학회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창조과학회의 명예를 '크게 손상'시켰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정말 창조과학회에 해를 끼쳤는지,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에 해가 되었는지 여부는 제가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제명 통보는 두어 주 전에 이메일로 보낸 것 같은데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창조과학회 회장 명의의 우편물이 학교에 도착해 있더군요. 하지만 방한 중에 이미 간접적으로 들었기 때문에 이와 관련하여 창조과학회 지도자들과 만나서 대화하기를 요청했지만 아쉽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이 문제와 관련해서 좀 더 자세히 나눌 기회가 있겠지만 20대 중반이었던 1980년 8월, 창립준비위원회 모임으로부터 시작하여 30여 년 가까이 관여해 왔던 창조과학회를 탈퇴하면서 이 논쟁의 핵심을 창조연대 및 다중격변 창조론에 관련된 저의 입장과 창조론오픈포럼에 대한 취지로 나누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창조 연대가 오래되었을 수 있다는 주장은 신학적으로 전혀 새로운 주장이 아니며,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 복음주의 진영의 대부분의 구약학자들이 지지하고 있는 성경 해석입니다. 그러므로 6000년 우주·지구 나이는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고, 다른 해석들은 성경의 진리를 타협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오랜 창조 연대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자유주의자라거나 진화론과 타협한 것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일종의 '학문적 마녀 사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창조 연대가 오래되었을 수 있다는 주장은 신·불신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전문 과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이론입니다. 오히려 6000년 우주·지구 연대는 근본주의 진영의 극소수 의견이며,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연대를 연구하는 전문 학자들이 아닙니다. 이러한 아마추어 과학 운동은 비단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고 창조과학의 진원지인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연대 측정 분야에서 정상적인 연구 활동을 하면서(peer-reviewed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는) 우주·지구 연대를 6000년이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 과학자는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오랜 연대의 과학적 증거가 그만큼 압도적이고 분명함을 의미합니다.

셋째, 제가 <창조와 격변>에서 제시한 다중격변 창조론은 수많은 증거들에 기초하여 세운 하나의 가설입니다. 학문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자신의 연구를 기초로 새로운 이론과 모델을 제시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당연히 이 이론에 학문적인 비판이나 반론을 제기하는 것도 환영합니다. 하지만 그 비판이나 반론은 논문이나 그 외 학문적인 글로서, 신뢰할 수 있는 증거에 기초해서 제기되어야지, 일방적인 비난 성명이나 신뢰하기 어려운 비학문적 문헌이나 증거를 기초로 제기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중격변 창조론 역시 다른 학문 이론들처럼 명백히 반증되거나 더 나은 이론이 나오면 폐기처분할 것입니다.

넷째, 이러한 저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창조론오픈포럼은 오랜 창조 연대를 주장하려는 모임이 아닙니다. 저의 개인적인 견해와는 무관하게 본 포럼은 각 분야의 복음주의 전문 과학자, 신학자들의 다양한 견해들을 나누자는 것이 근본 취지입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전 세계적으로 복음주의 진영의 전문 신학자와 과학자들의 창조론 연구 결과들이 산더미처럼 발표되었지만 아쉽게도 한국 교회에는 극소수 근본주의 진영의 견해만이 소개되었습니다. 그래서 건전한 여러 창조론 논의들을 균형 있게 한국 교회에 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에 본 포럼을 시작한 것입니다. 당연히 본 포럼은 여러 창조론 운동들 중의 하나인 창조과학에 대해서도 열려 있으며, 실제로 지난 세 차례의 포럼에서 발표된 논문들 중에는 창조과학 입장을 지지하는 논문들도 있습니다.

다섯째, 본 포럼은 한국 교회가 지적인 황무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안타까운 마음 때문에 시작된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신․불신을 막론하고 전문 과학자들은 창조과학의 핵심이랄 수 있는 6000년 우주·지구 연대와 모든 지층과 화석이 1년 미만의 대홍수로 인해 형성되었다는 단일격변설을 천동설 내지 평면 지구설과 비슷한 수준의 이론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만일 앞으로도 지금처럼 전문 학회나 학회지가 아니라 일반 성도들을 대상으로 대중적 캠페인에만 의존하는 과학 운동이 한국 교회를 휩쓴다면 한국 교회는 지적인 게토(ghetto)가 될 것이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지적 자살'이라는 오래된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전도나 복음의 변증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소중한 복음이 폄훼(貶毁)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조롱받는 일이 계속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끝으로 저는 창조과학회를 떠나지만 창조론 운동을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이제 좀 더 자유롭게 창조론 운동에 매진할 수 있을 것이며, 함께 창조론 운동으로 젊음을 불태웠던 여러 친구들과 더 가깝게 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6000년 우주·지구 연대와 단일격변설이 왜 그렇게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되는지 아직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들도 많이 있겠지요. 하지만 창조과학회 안에 있든지 밖에 있든지 관계없이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의 눈의 비늘을 벗기시고 성경 말씀과 창조 세계의 비밀을 밝히 깨닫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 16:13). 우리 모두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엡 4:15) 자라가기를 소원합니다.

[출처: 뉴스앤조이] 양승훈 교수 '30년 인연 창조과학회를 떠나며…'

'핫이슈 > 창조론과 진화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조와 격변  (0) 2021.06.04
내가 창조과학을 떠난 네 가지 이유 - 양승훈  (0) 2021.06.04
[펌] 창조론적 진화론  (0) 2021.06.04
Posted by 작은샘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06269

 

“나는 ‘유신 진화론자’ 아닌 확고한 창조론자”

 

[인터뷰] ‘과신대’ 이끄는 서울대 우종학 교수   - 크리스찬 투데이

 
▲우종학 교수는 “생물이 역사적으로 진화해 왔고, 과학이 그 원인을 어느 정도 규명했으니 ‘신은 없다’는 주장은 말 그대로 주장일 뿐”이라며 “왜 진화와 진화 이론이 무신론만을 지지하는가? 이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라고 했다. ⓒ김진영 기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경은 마치 선언과도 같은 이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창세기 1장에서 끝난다. 성경 66권 1,189장 31,102절 중 단 한 장, 31절 만에. 그래서 우리는 그 과정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 이 우주와 지구, 특히 인간이 어떻게 창조됐는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단지 하나님께서 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신앙으로 고백한다.  

 

그런데 간혹 이것을 따져 물어오는 이들이 있다. 주로 비기독교인들이다. 눈부신 과학의 발전으로, 생명의 기원마저 설명할 수 있다는 그들은 과연 신(神)이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여기에 대한 기독교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회피하거나 맞서거나. 문제는 후자다. 어떻게 맞설 것인가? 맞서야만 하는가?

지금까지 기독교는 대개 회피하는 쪽에 가까웠다. 기독론이나 구원론만큼 정립된 '창조론'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냥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인본주의가 팽배하고, 진화론이 맹위를 떨치는 시대, 기독교는 그 신앙을 변증해야 하는 시대적 사명 앞에 있다.

이에 본지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과학자를 만났다. 우종학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교수다. 그는 과학과 무신론의 도전에 응전하고 균형 있는 창조신앙을 세우기 위한 단체인 '과학과 신학의 대화'(과신대)를 이끌고 있다. 아래는 그와의 일문일답.

 

진화, 진화 이론, 진화주의

-진화론을 과학으로 여겨, 이를 근거로 창조론, 나아가 신까지 부정하는 이들이 있다. 진화론은 정말 과학인가?

"그 전에 한 가지 분명히 하고 싶은 게 있다. 흔히 진화론이라는 말로 단순히 표현하지만, 이 말 안에는 진화와 진화 이론, 그리고 진화주의라는 서로 다른 세 가지 개념이 뒤섞여 있다. 이것을 구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함에도,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는 데 1차적인 문제가 있다.

진화라는 건 일종의 경험적 데이터다. 화석 등을 통해 관찰해 보니 각 종(種)이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진화해 왔다는, 일종의 발견이다. 진화 이론은 그런 진화가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다. '자연선택'이라든지 '유전자 변이' 같은 용어들이 바로 진화 이론을 정립하는 데 쓰였다.

문제는 진화주의다. 이것은 과학이라기보다 차라리 하나의 철학이나 사조에 가깝다. 무신론이 바로 진화주의에 해당한다. 즉, 생물이 역사적으로 진화해 왔고, 과학이 그 원인을 어느 정도 규명했으니 '신은 없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주장일 뿐이다. 왜 진화와 진화 이론이 무신론만을 지지하는가? 이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다. 다시 말해, 그와 같은 과학적 발견과 이론이 반대로 유신론을 지지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럼 진화와 진화 이론은 과학으로 받아들인다는 얘긴가?

"말했다시피 진화는 그저 하나의 발견으로, 과학이냐 아니냐를 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가령 약 46억 년의 지구 역사에서 영장류의 화석은 다른 것들보다 후대에 나온다. 그러므로 그 현상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본다. 문제는 진화 이론인데, 나는 생물학자가 아니다. 천문학자로서 구체적인 진화 기제는 잘 알지 못하고 크게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걸 밝혀내는 건 생물학자들이 몫이다. 다만, 같은 과학자로서 지금까지 그들이 연구해 광범하게 합의한 것들에 대해서는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진화 이론을 과학으로 인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과 그 분의 창조를 부정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그러니까 진화주의가 아닌 진화나 진화 이론이라면 그것이 반드시 창조론과 대립하지 않는다는 건가?

"그렇다. 하나님께서 진화를 창조의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많은 이들이 창조하면 마치 마술처럼 무언가를 '뿅' 하고 갑자기 나타나게 하는 이미지만 떠올린다. 이건 기독교인이나 아니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높은 산에 올라 자신을 압도하는 절경 앞에서 창조주의 위대함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눈앞에 펼쳐진 기암괴석과 구비치는 계곡은 풍화와 침식의 결과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걸 보고 누구하나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일 가능성이 더 높다. 인류의 기원 문제에 있어 진화와 진화 이론도 본질적으로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특별계시라면 자연은 일반계시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런 일반계시를 이해할 수 있는 틀이 바로 과학”이라고 했다. ⓒ김진영 기자

"종교와 과학, 양립할 수 있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창조론과 진화론, 나아가 신앙과 과학은 대척점에 있지 않았나? 지금도 그렇고.

"그랬던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둘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유럽을 중심으로 일어난 근대의 과학혁명은 종교개혁을 그 사상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 과학적으로 더 앞서 있었던 건 중국이나 인도를 비롯한 동양과 이슬람권 국가들이었지만 근대과학의 성립에 있어서는 유럽에 뒤지고 말았다. 아마 유럽인들은 그들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기독교, 즉 그 신을 합리적이라고 믿었고, 이것을 자연 탐구의 철학적 근거로 삼았던 것 같다. 실제 근대과학을 일으킨 수많은 과학자들 중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그 동기 역시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그런데 종교와 과학을 대척점에 두고 그 둘 사이의 갈등을 부각시킨, 이른바 '종교 VS 과학'이라는 구도가 상업적 의도 등과 맞물리며 대중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매스 미디어의 영향도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다. 또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무신론 과학자들이 그렇게 몰고 간 측면도 있다.

나는 종교와 과학이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다고 본다. 앞서 기독교 창조론이 진화와 진화 이론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 것도 이런 판단 때문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특별계시라면 자연은 일반계시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런 일반계시를 이해할 수 있는 틀이 바로 과학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주로 고백하듯이, 과학을 통해 대자연을 만드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과학자들 중에는 무신론자가 더 많은 것처럼 보인다.

"정확한 통계야 알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아마 무신론자보다, 신과 같은 초과학 초경험의 세계는 확신할 수 없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자가 더 많을 것이라는 게 내 추측이다. 사실 우리의 삶은 과학으로 입증할 수 없는 게 너무나도 많다. 왜 거짓말을 하거나 남의 것을 빼앗으면 안 되는 것인가와 같은 윤리적 질문은 과학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따지고 보면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으니 결국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리는 것이야 말로 과학적인 태도가 아니다. 물론 나처럼 기독교 신앙을 가진 과학자들도 많다."

"광대한 우주보다 더 크신 이가..."

-창조론에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나?

"나는 모태신앙인으로 자랐고,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초등학교 땐 밤하늘을 보며 별 자리를 익히고, 신문이나 잡지에 우주탐사선에 대한 기사가 실리면 그걸 오려 스크랩하는 걸 좋아할 정도로, 우주에 대한 호기심도 많았다. 그러면서 어린 마음에 '이토록 광대한 우주가 존재하려면 그보다 크신 이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나에겐 신앙과 과학이 결코 모순이 아니었다.

그런 내가 기독교 창조론에 관심을 갖게 됐던 건, 대학에서 천문학을 공부한 뒤 석사과정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주변에서 '천문학은 우주의 나이가 대략 140억년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것 아니냐? 기독교인인 네가 그런 학문을 해도 되느냐?'고 물어왔기 때문이다.

'아니, 140억년이라는 우주의 나이와 내 신앙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단 밀인가?' 나로서는 이런 생소한 질문 앞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마침내 한국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어떤 창조론을 갖고 있는지 알게 됐다. '아, 그들은 지구와 우주의 나이를 대략 6천년에서 1만년 사이로 보는구나!"

이때부터 창조론을 보다 심도 있게 공부하게 됐던 것 같다. 과연 내가 공부하는 천문학이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것인지, 내게 물어오는 이들에게 대답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으로 신의 존재와 창조를 증명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필연적으로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과학의 범주로 끌어내리는 오류에 봉착하게 된다”고 했다. ⓒ김진영 기자

-소위 '창조과학'을 말하는 것인가?

 

"맞다. 지구의 나이가 대략 6천년에서 1만년 사이라는 건 그들의 핵심적 주장 가운데 하나다. 이른바 '젊은 지구론'이다. 하지만 오늘날 과학계에서 이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물론 그들은 과학을 무기로 삼은 무신론자들의 공격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를 지키기 위한 선의에서 그런 주장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방법이 틀렸다고 본다.

창조과학이 처음 태동했을 때는 그 이름이 '과학적 창조론'이었다. 즉, 과학으로 신의 존재와 창조를 증명할 수 있다는 생각인데, 이것은 필연적으로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과학의 범주로 끌어내리는 오류에 봉착하게 된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 당위성이 과학의 힘을 빌려야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불가능하게 될 경우 이는 어김없이 무신론자들의 먹잇감이 된다.

예를 들어 어떤 과학적 발견이나 이론이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근거라고 주장했을 때, 만약 시간이 흘러 그런 발견과 이론이 틀렸다는 게 밝혀지면, 하나님의 자리는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어떤 현상에 대해 섣불리 과학을 배재하고 기적과 같은 하나님 능력을 앞세우면, 훗날 과학이 그와 같은 현상을 증명해 버릴 때도 같은 결과가 초래된다.  

때문에 알리스터 맥그라스 같은 신학자들은 이처럼 자연, 즉 일반계시에서 출발하는 신 존재 입증은 위험하다고 일찍이 경고했었다. 오히려 그 반대, 그러니까 특별계시에 근거해 자연을 보면 그 안에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신 진화론자? 유신이든 무신이든..."

-많은 이들이 교수님을 '유신 진화론자'라고 부른다. 동의하나?

"사실 인류의 기원에 대한 내 주장이 이거다 라고 잘라 말하거나 그렇게 책에 쓴 적이 없다. 다만 창조과학이 주장하는 젊은 지구론만이 기독교의 유일한 견해가 이니라는 메시지를 전달해 왔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과학계가 말하는 진화 이론도 하나의 창조 방법으로 얼마든지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한 정도였다. 아마 이 때문에 나를 '유신 진화론자'라고 부르는 듯하다.

하지만 이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유신이든 무신이든, 그 뒤에 '진화론자'라는 표현이 붙는 이상 그 사람은 '진화주의자'가 되어버리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 '유신 진화론자'라고 할 때, 그 표현의 이면에는 '저 사람은 사실 진화주의자인데, 그저 유신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썼을 뿐'이라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단언컨대 나는 진화주의자가 아니다. 그것을 반대하는 확고한 창조론자다."

-진화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지금도 진화의 과정에 있다는 논리적 귀결에 이르는데, 이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한 목회자에게서 비슷한 질문을 받았던 적이 있다. 그 때 내가 '진화 할 것'이라고 했더니,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라. 하지만 한 번 잘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인간이 갖는 특별함이 과연 생물학적인 것에만 국한된 것인지를.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건, 하나님께서도 우리처럼 눈 코 입이 있고 손가락이 다섯 개라는 따위의 의미는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의 몸이 진화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창조물로서의 인간의 존언함이 훼손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프랑스 같은 유럽의 나라들에 있는 왕궁에 가보면, 과거 왕이 누웠던 침대가 지금과 달리 작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의자도 그렇고 갑옷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몸이 진화한다는 걸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아닐까 한다. 사실 생물학적 구조로만 보면 인간은 그리 완벽하지 않다. 예컨대 하나의 숨구멍으로 기관지와 식도가 같이 있다는 건, 특히 어린이의 경우 매우 위험할 수 있는 구조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창세기의 기록이, 우리가 단지 생물학적 존재만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특별할 수 있는 건 흙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생기 때문이다. 존 스토트도 그의 로마서 강해에서 이 부분을 강조했다. 존 스토트 역시 진화의 방법으로 인간이 창조됐을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는 신학자다."

 

 
▲“오해를 좀 많이 받는다”는 우종학 교수. 그는 “그러나 내 의도는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과 같이 교회를 떠난 기독교인들을 조금이라도 돕고자 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 ⓒ김진영 기자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위해"

 

-'과학과 신학의 대화'(과신대)를 이끌고 있다. 왜 시작하게 됐나?

"과학주의 시대, 무신론은 기독교에게 굉장히 큰 도전이다. 그로 인해 신앙을 잃어버리는 이들도 있다. 특히 젊은이들이 그렇다. 이들에게 지구의 나이가 6천년에서 1만년 정도라는 주장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그들이 단지 기독교의 창조론만을 불신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복음 전체에 회의를 느낄 수도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과신대를 시작하게 됐다. 과학과 무신론의 도전 앞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그 신앙을 '창조신학'이라는 틀 안에서 변증하고, 과학과 신앙의 건전한 대화를 모색해 교회를 돕자는 취지다."

-끝으로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오해를 좀 많이 받는다. 심지어 나를 가리켜 기독교인이 아니라거나 성경을 믿지 않는다고 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내 의도는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과 같이 교회를 떠난 기독교인들을 조금이라도 돕고자 한 것일 뿐이다. 앞으로는 이런 시각으로 나를 봐주었으면 좋겠다(웃음)."

 

<저작권자 ⓒ '종교 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Posted by 작은샘

org date: 2012-01-27 21:49

 

최갑종 교수 - 고신대(1974, Th.B.)와 고려신학대학원(1977, M.Div.)을 졸업한 뒤 미국에서 리폼드 신학대학원(1982, MA in Biblical Studies), 칼빈 신학대학원(1984, Th.M.), 프린스턴 신학대학원(1986, Th.M.), 덴버대학교·아이립 신학대학원 공동 박사학위(1998, Ph.D.) 등을 나왔다. 현재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 한국기독교학회 회원, 한국개혁주의신학회 회원, 한국복음주의신학회 부회장으로 있다.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RkzJ/14484

 

[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는가?]

                                                                                                             최갑종   /   2008.05.31 22:54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의 진정성을 부인하는 것은 사본학적으로 볼 때 설득력이 약하며 본문 구절을 고대 헬라의 문화-사회학적으로 살펴볼 때 이 구절은 여성의 성직 안수를 반대하는 근거로 보기에는 부당하다.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에서 사도 바울의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교훈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교회 안에서 여성의 성직 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한다. 반면에 여성의 성직 안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만날 때마다 설명하는 일에 적지 않은 부담을 느낀다. 지난해 「목회와신학」에서 여성 안수 문제와 관련한 글이 여러 차례 실렸는데,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에 대한 해석은 항상 논쟁의 한 축이 되어 왔다.


예를 들면, 교회 안에서 여성의 인권 신장과 여성 안수를 지지하는 김세윤 교수(미국 풀러신학교 신약학)는 2004년 5월호에서 “성경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나”(5월호, pp.56~71)와 “서창원 목사의 ‘여성 안수 허용 문제에 대한 이의 제기’에 답함”(11월호, pp.186~199)에서 사본학적 이유를 들어 고린도전서 14절 34~35절을 후대에 삽입된 비 바울적인 본문으로 단정함으로써 논점의 아킬레스건을 피해 갔다.

반면에 서창원 목사(서울 삼양교회 담임)는 김세윤 교수의 주장을 반박하는 “여성 안수 허용 문제에 대한 이의 제기”(10월호, pp.200~207)에서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의 진정성(眞正性)을 거듭 주장함으로써 바울이 여성의 성직(목사, 장로, 감독, 안수 집사)을 명백하게 금하고 있다는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본문 말씀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그것을 후대에 첨부된 비 바울적인 것으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여성의 성직 안수를 명백하게 금하고 있는 바울의 가르침으로 봐야 하는가? 본고에서 두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의 진정성을 부인하는 것은 사본학적으로도 설득력이 약하다는 점이다. 둘째, 본문 구절을 고대 헬라의 문화-사회학적으로 살펴볼 때 여성의 성직 안수를 반대하는 규범적인 성경 말씀으로 보기는 부당하다는 점이다.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의 진정성


과연 본문 말씀은 진정성을 갖고 있지 못하는가? 김세윤 교수를 비롯해 여러 학자들(J. Weiss, C. K. Barrett, H. Conzelmann, G. D. Fee, J. M. Ross, R. W. Allison, P. B. Payne, R. B. Hays)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후대에 첨가된 비 바울적인 본문이라고 단정한다.


첫째, 서방 계열의 사본들인 D, E, F, G, 88, 소수의 라틴 사본들 d, e, f, g, 그리고 4세기 교부 암부로시에스터(Ambrosiaster)가 이 구절을 생략하거나 40절 이후에 배치하고 있다. 둘째, 34-35절에 대해 진정성을 가진 바울의 기록으로 볼 경우, 이것은 바울이 교회 안에서 여성의 기도와 예언 활동을 분명히 허용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1장 5절과 모순을 일으킨다. 셋째, 34~35절은 예언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전후 문맥의 흐름과 일치하지 않는다. 넷째, 34절에서 ‘성도의 교회’라는 말과 바울이 자신의 주장을 ‘율법’에 호소하려는 내용이 바울의 통상적 언어 용법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상당수의 다른 학자들(Antoinette Clark Wire, Curt Niccum, Anthony C. Thisleton, David E. Garland)은 위의 이유들이 설득력을 갖지 못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여성 안수 문제와 관계없이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의 진정성을 계속 유지하려 한다.

첫째, 몇몇 서방 계열의 사본들이 이 본문을 생략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현존하는 대다수의 고대 사본들과 번역본들 이를테면 p46, a, B, A, 33, 88mg, Origen, Chrysostom, Theodoret 등 교부들의 증언과 Vulgate, Old Syriac, Coptic, Armenian, Ethiopic, Georgian, Slavonic 등 역본들과 Lectionaries 그리고 대부분의 다른 사본들이 34~35절의 본문을 유지하고 있다. 사본학적으로 보면 34~35절을 생략하는 증거들은 연대적으로 후대에 속하며, 지역적 분포로 보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서방에 편중돼 있다. 반면에 34~35절을 유지하는 증거들은 연대적으로 훨씬 앞서 있고, 지역적으로도 동방과 서방 교회를 포함해 전 중동 지역에 분포돼 있다. 따라서 사본학적 면에서 34~35절을 생략하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더 설득력을 지닌다. 그래서 현재 학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희랍어 성경, NA 26판 및 27판, UBS 3판 및 4판은 모두 34~35절을 유지하고 있다. UBS 4판은 각주에서 34~35절을 ‘B’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런 평가는 본문의 진정성이 거의 확실하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과 11장 5절의 모순 문제는 양 본문을 어떻게 접근해 해석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답변이 달라질 수 있다. 성경에 보면, 같은 저자의 글이지만 서로 모순인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경우마다 한 본문의 진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나 서로의 모순을 피하기 위해서 다른 본문의 진정성을 배제시킬 수는 없지 않는가? 만일 고린도전서 11장 5절이 여성 전체에 관한 일반적인 원리를 말하고 있고, 반면에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이 어떤 결혼한 여성들의 지나칠 정도의 무례한 행위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한다면, 양 본문이 서로 모순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셋째, 34~35절이 예언의 문제를 취급하고 있는 전후 문맥의 흐름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본문의 몇몇 단어들이 바울의 일반적 언어 용법으로 볼 때 낯설다는 주장도 어떤 관점에서 본문의 주제나 흐름을 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의견이 달라질 수 있다. 몇몇 주석가들(E. Ellis, B. Witherington, A. C. Thiselton)에 의해 세심하게 연구된 것처럼, 34~35절에 나오는 중요 어휘들이 이미 그 앞 절에서 사용되고 있다. 곧 34~35절의 핵심 단어들인 ‘말하다’(14, 32절), ‘잠잠하다’(28, 30, 34절), ‘교회 안에서’(28, 35절), ‘복종하다’(32, 34절)가 그 앞 절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이 후대에 삽입된 비 바울적인 것이라는 주장은 사본학적으로 내외적 증거들로 보아 그 설득력이 매우 약하다. 오히려 사본학적 증거들은 34~35절이 본문의 진정성을 옹호하고 있다. 만일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이 진정성을 가진 바울의 본문에 속한다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바울의 가르침을 여성의 성직 안수를 반대하는 성경적 근거로 삼을 수 있는가? 문제는 바울이 누구에게, 무슨 이유로, 어떤 배경에서, 무엇을 주장하기 위하여 이 말을 했는가 하는 점이다.
 

고대 헬라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

고대 헬라 사회에서 남성은 그 신분과 존재에서 원천적으로 여성보다 우월하며, 따라서 여성은 남성의 지배를 받은 것이 일반적이다. 남성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여러 영역에 관여해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반면에, 여성의 위치와 역할은 남성의 영역에 관여할 수 없었고 주로 가정에 제한돼 있었다. 주전 4세기 아덴에서 여자들은 가까운 친척을 제외하곤 자신의 얼굴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아야 했다. 심지어 결혼하는 처녀는 신랑이 자신의 얼굴을 보는 첫 번째 사람이 되도록 했으며, 결혼한 후에 남편이 자기 아내의 얼굴을 대중 앞에 노출시키게 될 경우에 그는 자신의 얼굴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간주했을 정도다. 고전적인 아덴의 법에 따르면, 아내 된 여자가 가정을 떠나 대중들 앞에 나서게 되면 그 여인은 남편으로부터 부정하게 간주돼 이혼을 당할 수도 있었다(Plutarch, Bride 31, Mor. 142CD).

일반적으로 고대 헬라 세계에서 정숙한 여자들은 결혼하기 전에는 자기 아버지의 허락 없이, 결혼한 후에는 남편의 허락 없이 일절 집을 나서지 않았다. 결혼한 여자들은 남편이 정치적이든, 사회적이든 혹은 개인적이든 집을 나설 때 따라나서는 것은 금기 사항이었다. 부인이 남편과 동행해 참석한 파티 장소에서 술을 마시게 될 경우, 그것은 남편과 자신에게 모두 수치스러운 일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창녀들만이 남자들과 함께 술을 마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결혼하기 전에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 아래 복종하고 결혼한 후에 남편에게 복종하면서 가사 일에 매달리고 아이를 낳아 양육해야 했다. 그리고 집안에도 외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거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여인의 방’이라는 별채에 머물러야만 했다. 여자들이 부득이 집을 나서게 될 경우, 남자들에게 일절 말을 할 수 없었다. 유리피데스(Euripides)는 “결혼한 여자가 젊은 남자와 함께 서있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자 특히 결혼한 여자가 거리에서 젊은 남자와 함께 있으면, 수치스러운 일을 한 여자나 창녀로 취급받았다.

1세기의 헬라 작가 플루타르크(Plutarch)는 「신부와 신랑에게 주는 충고」라는 책에서 “결혼한 여자는 집안에 머물러야 하며, 손과 발과 얼굴을 제외하고 어떤 신체도 일반 사람들에게 노출시키지 않아야 하며, 밖에서 말을 하지 않아야 하고 매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라고 적고 있다. 여자가 말을 하고 싶으면 자기 남편에게만 하거나 남편을 통해 말해야 하며, 바깥에서 직접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드러내는 수치스러운 일이나 남편을 욕되게 하는 일로 간주되었다.

물론 바울 당대에 마케도니아 여성들은 사도행전 16장 14~15절과 빌립보서 4장 2~3절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고대 헬라 지역의 여성들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렸다. 집안 일은 물론이고 장사를 포함해 시의 관리나 민중의 주요 제사와 국가 제사의 여사제로 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자 종들이나 노예들은 일반 여자들에게 적용되는 사회적 규범이나 제약에 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집안에 있는 여주인을 대신해 외부 세계에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대중들이 사용하는 샘에서 물을 길어오거나 기타 다양한 심부름들을 하기 때문이었다. 시골에서 남편과 함께 농사를 짓는 가난한 농부의 아내들에게도 이 같은 규범들이 엄격히 적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대다수 헬라 여성들은 철저하게 남자들에게 예속돼 있었고, 남자들이 하는 일에 함부로 관여할 수 없었다. 헬라 세계에서 여성들을 남성들에게 종속시키게 된 배경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처럼(Aristotle, Generation of Animals, Ⅱ. 3-4, Pol. 1.2.12, 1254b), 여성들은 존재론적으로 남성들에 비해 불완전하고 하급 존재에 속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이한 것은 세속적 영역에서 종교적 영역으로 방향을 돌릴 경우에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는 점이다. 종교적 영역에서 헬라 여성들의 역할은 보다 개방적이고 적극적이었다. 정치적, 사회적 영역에서 성적 불평등이 종교적 영역에서 거의 사라졌다. 여자 사제들은 남자 사제들과 똑같은 의무와 책임을 갖는다. 모든 여성들은 사회적 신분에 관계없이 성전의 모든 장소에 자유롭게 접근하고 기도와 제사 행위에 참여할 수 있었다. 심지어 어떤 여자 사제들은 국가적 제사를 집전했으며, 신탁의 전달자가 되곤 했다. 따라서 헬라 사회의 여성들 중에 종교 행위 참여를 자신의 신분 상승의 기회로 삼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여자가 종교적 영역을 통해 더 높은 영역 곧 남자의 영역에 속하기 위해 엄청난 장애물을 극복해야만 한다. 여자가 남자의 영역에 도달하기 위해선 성전에 가서 모든 사람들이 성전을 떠난 다음에도 남아서 기도에 전념해야 하며, 감각적이고 육적인 여자의 영역을 벗어나 영적인 남성의 영역에 도달하기 위해 성생활을 멀리하는 금욕적인 생활에 힘써야 했다.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의 의미

앞서 살펴본 것처럼,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의 진정성을 거부하기 어렵다고 한다면, 이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바울은 본문에서 너무나 단호하고 분명하게 “여자는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어떤 면에서 여자가 말할 수 있고, 어떤 면에서 여자가 말할 수 없는지에 대해 선을 긋거나 구분해 말하고 있지 않다. 바울은 교회에서 여자들이 설교나 가르치는 것은 할 수 없고 그 대신에 예언, 방언, 기도 및 찬송 등은 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바울은 아무런 조건을 제시하지 않고 여자들은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구절에서 바울이 모든 여자들은 교회에서 일절 말하지 말고 잠잠해야 함을 가르친다고 봐야 하는가? 만일 우리가 본문을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면, 바울이 이미 고린도전서 11장 5절과 39절에서 여자들이 예배 때에 남자와 마찬가지로 기도와 예언을 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과 정면으로 대립할 뿐 아니라, 바울과 함께 사역한 여러 여성 지도자에 대해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바울 서신에 종종 등장하는 브리스가, 뵈뵈, 순두게, 유니아, 눔바 등 많은 여성 사역자들이 교회 안에서 일절 말하지 않아야 했다면 그들이 어떻게 교회의 지도자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바울이 여자들에게 교회에서 일절 말하지 말고 잠잠해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는 식으로 쉽게 결론을 내려선 안 된다.

또한 본문에서 바울이 어떤 것은 말할 수 있고 어떤 것은 말할 수 없다는 식의 인위적으로 선을 긋고 있는 것처럼 봐서도 안 된다. 여기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바울이 왜 고린도교회 여자들을 향해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가르치는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바울이 여자들에게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는 이유를, 당시 고린도교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여자 성도들 특히 가정을 갖고 있던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 일으킨 분쟁과 예배시의 무질서를 경계하고 예방하기 위함으로 본다. 여기서 바울이 일반 여성 전체를 두고 말하기보다 남편이 있는 기혼 여성들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이 고린도 지역에 복음을 전할 당시 헬라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예속돼 있었고, 남자들이 있는 공중 장소에서 여자들이 함부로 나서거나 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여자들의 활동 영역은 가정에 제한돼 있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 차별이 철폐되고 동등하다는 바울의 복음이 고린도 지역에 선포되었을 때 특히 여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하다. 아마 교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여자들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자신들의 가정과 사회에서 누릴 수 없는 자유 곧 남녀가 동등하게 예배에 참여할 수 있고 방언, 예언 등 성령의 은사에 참여할 수 있으며, 부부 생활에서도 남편과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주어졌다는 가르침을 받았다(고전 7:2~6). 그때 여자 성도들 중에 일부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와 남녀의 동등권을 남용해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세우신 남녀의 신분과 역할의 차이는 물론이고 결혼과 부부 생활까지 거부하며 심지어 가정과 교회를 혼동해 교회 안에서까지 남자와 같이 행동하려는 극단적인 상황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그들은 가정과 교회, 특별히 공중 예배 때에 일부 여성도들이 당시 사회에서 금기로 여겼던 통념을 깨고 자신들의 남편을 제쳐두고 다른 남자들에게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큰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여성도들에게 여자들은 자기 남편들이 함께 있는 교회의 모임 중에는 다른 남자들에게 말하지 말고 잠잠하며 오히려 궁금한 점이 있으면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물어보라는 특수한 교훈을 줘야만 했다.

따라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11장 34~35절의 본문을 바울이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 모든 여자들은 교회에 와서 집으로 갈 때까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일절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는 일반적인 명령을 하는 것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예배 때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고린도교회의 몇몇 기혼 여성도들에게 주는 특수한 명령으로 봐야 한다. 바울이 전후 문맥에서 계속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은 교회 예배의 질서이다. 그는 14장 34~35절의 본문 앞에 예배 질서에 대한 교훈을 주는 문단을 두고 있다. 즉 문단이 시작되는 14장 26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 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면서, 문단이 끝나는 33절에서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라고 가르치고 있다. 교회의 예배에 반드시 질서가 있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아무리 예배 때에 어떤 개인에게 찬송과 말씀과 계시와 방언의 은사가 주어졌더라도 회중에게 덕이 않되면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도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한다(14:27~28). 비록 자신에게 계시가 주어졌더라도 옆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계시가 주어졌으면 잠잠하라고 한다(14:30). 그런 후에 구체적인 실례로서 교회에서 여자들이 잠잠해야 한다고 교훈하고 있다. 그리고 40절에서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면서 14장을 종결한다. 바울은 방언과 계시가 남자들에게만 주어진 특수한 은사라고 말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14장 5절에서 고린도 성도들이 모두 방언과 예언하기를 원한다고 할 때, 또 14장 39절에서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라”고 명령할 때, 바울은 남자만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14장 31절에서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라고 말할 때도 여성도들을 제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방언과 예언과 말씀을 배우는 일에 여성도들이 참여할 수 없다는 점이 아니라 이 모든 일에 질서가 있다는 점이다.

바울이 14장 34~35절에서 교회의 여성도들 특히 결혼한 여성도들이 공예배시에 잠잠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여자로서 할 수 없는 방언과 예언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행위를 통해 공예배의 질서는 물론이고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구분돼 있는 가정의 질서를 어지럽혔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여성도들은 성령 체험을 통해 자신들은 이미 모든 영역에서 남녀의 역할과 신분의 차이를 극복한 자들로 자처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만일 고린도 성도들이 공예배시에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았다고 한다면, 바울은 그런 교훈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바울이 로마교회나 갈라디아교회나 그밖에 다른 지역의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 동일한 교훈을 주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고린도 교회 여성도들이 공예배 때 질서를 어지럽혔다고 한다면, 교회와 가정의 질서 유지를 위해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여성도들이 교회 질서를 혼란하게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그들을 향해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하는 것은 극히 부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에서, 마치 바울이 시대와 장소와 여건을 초월해 여자들에게 무조건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교훈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고린도 교회 여성도들은 어떻게 교회의 예배와 가정의 질서를 어지럽혔는가?

우리는 바울이 14장 35절에서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라고 말하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예배의 질서를 어지럽힌 자가 결혼한 여성도들이라는 것과 그들이 자신들의 남편을 제쳐 두고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남자 교우들)에게 질문을 제기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바울은 집에서 자기 남편과 더불어 사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을, 교회에 와서 다른 남자들과 해결하려는 것은 교회와 자신의 남편을 동시에 부끄럽게 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본문에서 질문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선행 문단이 방언과 예언과 계시에 관해 말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아마 교회 예배 중에 방언과 예언과 계시 혹은 가르침이 주어지고 있을 때 그들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기 위해 소란을 피우면서 질문들을 던진 것 같다. 바울이 제기한 질문을 자신들의 남편들에게 집에서 물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방언, 예언, 계시보다 오히려 말씀에 대한 가르침일 가능성이 더 크다.

만일 그렇다면 여인들의 질문은 마치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님이 예배 중에 말씀을 설교하거나 가르칠 때, 어떤 무식한 여자 교우가 주제 넘는 질문을 던져 예배를 방해하는 일과 유사한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예배 중에 남자들이 아니라 왜 여자들이 질문을 제기했는가 하는 점이다. 바울이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 수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우리는 적어도 여성도들의 남편들은 자신들의 아내들이 궁금해 하는 문제를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여자들은 쉽게 이해할 수 없어서 그와 같은 질문을 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당시에 헬라, 로마, 유대의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거나 제한돼 있었다. 유대 사회에서 여인들은 회당이나 학교에서 율법을 배우는 기회를 갖지 못했으며, 헬라 로마 사회에서 여인들은 가장 기본적인 공교육의 내용인 수사학도 가르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여자들은 대체로 남자들에 비해 이해의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 여성도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남자들보다 이해의 수준이나 능력이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여성도들이 예배 중에 터무니없는 질문도 제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여자들은 본성적으로 남자들보다 이해의 수준과 능력이 뒤떨어진다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바울은 어디까지나 당대의 사회와 문화적 관습 아래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당시 여인들이 대부분의 정보와 지식을 가정에서 남편에게 의존하고 있던 것처럼, 교회의 여성도들도 교회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들에 부딪혔을 때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남편에게 물어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왜냐면 여자들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는 당대의 사회적 문화적 규범으로 볼 때, 여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자신의 남편을 제쳐 두고 다른 남자들에게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일종의 성적 유혹으로 간주될 정도로 자기 남편에게도 대단히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율법에 호소해 남편과 아내 사이에, 남자와 여자 사이에 유지돼야 할 올바른 질서를 회복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왜냐면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에 교회가 부도덕한 집단으로 비쳐져 선교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바울은 복음 안에서 주어지는 남녀 동등함의 자유를 인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자유가 성도들이 살고 있는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환경에서 부도덕한 일로 간주될 때, 그 자유의 사용을 부분적으로 제한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 안수와는 전혀 다른 문제다.

 
나가는 말: 바울과 여성의 안수

여성의 성직 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을 고린도전서 11장 2~15절, 디모데전서 2장 8~15절과 함께 사도 바울의 여성 안수 금지를 위한 규범적인 본문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고린도전서 11장 2~15절과 디모데전서 2장 8~15절도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처럼, 고린도교회와 에베소교회의 여성도들 중에 복음의 자유를 남용하거나 곡해해 남자와 여자의 구분과 남편과 아내의 질서까지 부정해 가정과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선교의 문까지 닫게 하는 위험을 주는 자들에게 주는 바울의 특별 교훈으로 봐야 한다.

우리가 이 구절들을 예배 때 머리에 수건을 쓰라는 권면이나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문안하라는 권면(롬 16:16, 고전 16:20)처럼,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사회적 특수한 정황에 비춰 해석해 그 의미와 메시지를 오늘에 적용시키지 않고 보편적이고 규범적인 구절들로 받아들인다면, 오늘날 교회 안에서 여성이 가르치고 말하는 모든 행위들을 전면 중단해야 한다. 교회는 여성가대원, 주일학교 여교사, 여전도사 등을 세우지 말아야 하고 신학교는 여자 신학도에게 입학을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 또 목사 후보생을 가르치는 여성 신학 교수도 둘 수 없게 된다. 여성들은 교회에 올 때 반드시 머리에 수건을 써서 자신의 얼굴을 노출시키지 않도록 당부해야 하고, 교회 안에서 여성도들은 어떤 경우이든지 말하지 말고 잠잠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물론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 ‘여자들은 예배 때 머리에 수건을 쓰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인사하라’는 권면을 현재 우리 교회 안에서 그대로 적용시키지 않는다고 해서, 이런 구절들을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신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오해해선 안 된다. 바울은 이 구절들을 통해 모든 시대에 적용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 ‘머리에 수건을 쓰라’는 권면에서 예배 때 여자가 갖춰야 할 마땅한 태도에 대한 메시지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인사하라’는 권면에서 성도간의 우의와 사랑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이처럼 ‘교회 안에서 모든 여성도들이 말하지 말고 가르치지 말며 남자를 주관하지 말라’는 교훈에서도 모든 시대를 초월해 선포되는 남녀의 구분과 가정과 교회 안에서 지켜야 할 남녀의 질서에 대한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어떤 성경 구절이 시대와 문화에 매여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가질 수 없다는 것으로 곡해해선 안 됨을 강조하고 있다. 어떤 성경 구절을 문화-사회학적으로 혹은 역사-문학적으로 접근해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와 영감에 도전하는 일로 오해하는 것은, 마치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강조를 신성에 대한 도전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점이다. 예수님의 인성에 관한 올바른 이해 없이 예수님의 메시아적 인격과 사역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성경에 대한 역사-문화적, 문화-사회학적 접근 없이 성경의 메시지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이런 해석학적 관점과 동시에 우리가 염두에 둬야 할 것은, 바울 서신의 특수한 구절들을 해석할 때 그것을 바울의 일반적이고 통일성 있는 교훈과 연관시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바울의 서신에서 이해하기 힘든 다양한 교훈들을 만나더라도, 바울이 스스로 모순을 범하고 비논리적이며 비체계적인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일관성과 통일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우리가 느끼는 모순과 비일관성은 어떤 면에서 바울의 문제이기보다 접근하는 우리 자신의 문제로 일어나는 것이다.

필자는 바울 신학을 제시하면서 바울 신학 전체를 묶는 어떤 일관성과 통일성을 가진 중심 사상이 있음을 확인한 바 있다. 그것은 바로 ‘창조’, ‘타락’, ‘구속’, ‘재창조’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속사에 입각한 종말론과 그 종말론의 내용을 형성하고 있는 기독론과 성령론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이런 관점에서 인간과 세계 역사의 모든 문제들을 보고 있다. 교회 안에서 여성의 역할 문제도 예외가 아니다. 바울은 남녀 관계를 포함해 모든 인간 사회의 문제들이 아담의 범죄로 타락하고 죄로 오염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속되었고, 이제 그리스도와 그의 보내신 성령 안에서 새롭게 회복되는 새 창조 사역이 이뤄지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바울에게 새 창조는 단순히 아담의 타락 이전으로 복귀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있다. 그것은 타락 이전보다 더 고차원적인 새로운 창조이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원문의 뜻은 ‘새로운 창조’)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선언할 때, 이것은 그야말로 옛 창조와 대비되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창조를 의미한다. 또 갈라디아서 6장 15절에서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원문의 뜻은 ‘새 창조’)만이 중요하니라”라고 선언할 때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새 창조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리고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서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바울의 가르침은 신약 교회 안에서 여성의 역할 문제를 첫 창조나 구약 시대의 관점에서만 보아선 안 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여성의 역할 문제를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이뤄지고 있는 새 창조의 관점에서 볼 것을 시사한다.

사실상 바울은 자신의 목회와 선교 사역에서 그가 살고 있던 헬라와 로마와 유대의 가부장적이고 남성 위주의 문화를 뛰어넘어 적지 않은 여성 사역자들을 동참시킴으로써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이뤄지고 있는 새 창조를 이미 부분적으로 적용하고 실천했다. 다시 말해 새 창조는 ‘아직’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미래적인 것만이 아니라, 비록 그 완성은 주님의 재림으로 ‘이미’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오심으로 지금 여기서 이뤄지고 있는 현재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14장과 디모데전서 2장에 나타나 있는 바울의 강하고 부정적인 교훈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도 바울의 구속사적이고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이해해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새 창조를 말하고 있더라도 새 창조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옛 세계와 함께 공존한다. 다시 말해 ‘이미’(새 창조 세계)와 ‘아직’(옛 창조 세계)이 함께 공존한다. 이런 사실 때문에 비록 어떤 것이 ‘이미’의 관점에서 보면 가능하더라도, ‘아직’이라는 세계와 문화와 역사의 구조를 함부로 뛰어넘을 수는 없을 뿐더러 때로 제약을 받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고린도 교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 교우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과 성령 체험을 통해 자신들이 마치 이 세상을 초월할 수 있는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착각하면서 부부 생활과 결혼까지 거부하고, 당시 고린도 교회가 처해 있던 문화와 사회적 정황을 혁명적으로 뛰어넘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구조를 교회 안에서 만들려고 했다. 이것은 결국 가정의 파괴와 교회의 무질서는 물론이고 교회의 선교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여성 교우들에게 특별 교훈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원리적으로 여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와 차별 없이 동등하게 되었더라도 여자들이 누릴 수 있는 원리적 자유 됨이 특수한 교회의 상황에서 오히려 부작용을 초래할 경우에 그것은 유보되거나 제한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면 여성에 관한 바울의 ‘이미’와 ‘아직’에 관련된 교훈이 서로 상치될 때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떤 교훈을 우선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교회와 교단 그리고 교단이 서 있는 시대적 정황에 따라 다소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아직’에 대한 교훈을 ‘이미’에 대한 교훈의 빛 아래서 이해하고 적용하고 그 반대라면 안 된다는 점이다. 즉 고린도전서 12, 14장, 디모데전서 2장에 나타나 있는 여성의 역할과 위치에 관한 부정적 교훈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 고린도후서 5장 17절, 고린도전서 12장 13절의 긍정적 본문에 비춰 해석해야지 그 반대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옛 창조가 새 창조의 빛 아래서, 특별한 교훈이 보편적인 교훈 아래서, 과거가 미래의 빛 아래서 해석돼야지 그 반대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른편으로 돌아가는 시계의 시침이 왼편으로 되돌아 갈 수 없는 것처럼, 옛 창조는 새 창조를 향해 ‘아직’은 ‘이미’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지 그 반대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주후 1세기 헬라-로마-유대의 남존 여비와 가부장적 사회 구조 안에서도 초기 기독교가 여성의 문제에 관해 혁명적이라고 할 만큼 ‘이미’ 앞섰다면, 지금 남녀평등과 여성의 인권이 보장된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가 일반 사회보다 ‘아직’ 뒤떨어져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이제 한국 교회는 여성의 성직 안수를 포함해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을 제한하는 모든 제도와 법을 과감하게 개선하고 오히려 사회를 선도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이 땅에서 인종과 신분과 성차별이 없는 새 창조와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진정한 주역이 될 수 있다.


주(註)1. 이 글은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 아래 수행 중인 “고대 헬라-로마-유대 사회와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관한 연구”에 부분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밝혀 둔다.
                                                                                        

                                                                                                               최갑종 | 2005. 7.

Posted by 작은샘

org date: 2012-01-27 21:30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RkzJ/14484

 

[ 여성안수에 대한 김세윤 교수의 반박에 대한 재반박 ]

 

                                                                                                                                                          서창원 목사

 

성경도 제대로 읽을 줄도 모르고 신학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식한 불초 소인을 대신학자께서 매섭게 질타해주심에 대해 먼저 감사하는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그동안 속에 담아둬 온 자신의 명백한 실체를 여성안수 문제와 관련해 용기 있게 밝혀 주신 대학자의 양심에 박수를 보내드린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쳐 주셨다. 하지만 그것이 가부장적 사회에 있었던 남성 위주의 가르침이고 모두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여’라고 기도하는 여성 신학자들과 여권주의자들의 집요한 여성안수 허용 제기를 환영하면서 그들의 대변인임을 자청한 김 교수의 논리를 이해하려 했으나 무식한 필자로선 납득할 수가 없다.

 

본인은 김 교수의 지적처럼 무식한 목사이요 모순투성이의 글밖에 쓸 줄 모르는 자로서, 세계적인 대학자요 인생의 선배이신 김 교수께 다시 한번 무식한 반론을 제기할 수밖에 없음을 밝힌다.

 

성경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는 학자의 주장이기 때문에 겸손하게 받아들이고자 읽어보았지만 안타까운 생각뿐이다. 성령의 온유한 열매를 위해 기도하면서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워낙 김 교수의 명성과 학문의 업적 때문에 마치 그런 주장이 성경을 제대로 읽는 제정신의 소리인양 우매한 자들의 생각을 굳게 할까 봐 우려하는 아픔을 무식하게(?) 표현하고자 한다.

 

더구나 오늘도 한 영혼, 영혼들을 가슴에 끌어안고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수많은 개혁주의 목사들을 이단시하며 그동안 남성들만 누려온 특권을 여성에게도 그 직책을 수여하는 것만이 교회의 참된 개혁인양 부르짖는 대학자의 논지는 처절하기 짝이 없다.

 

현대 신학의 흐름과 학자들의 학문 그리고 신앙 인격은 분명 별개의 것임을 김 교수의 논지가 증명하고 있다. 현대 학문의 장은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 믿지 않고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유의 주재자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요 죄인의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탁월한 학문적 업적을 이룰 수 있는 풍토이다. 학문이라는 또 다른 권위(우상) 아래 교회를 성경 진리에서 이탈하게 하는 모든 불순 세력들에게 임하실 주님의 징계를 두려워한다.

 

지금까지 학문이 교회를 이끌어온 것은 아니다. 교회로 하여금 수없이 많은 장애를 딛고 역경 속에서 하늘을 향해 여전히 서 있게 한 것은, 성경 진리에 대한 굳건한 신앙이었다. 영원불변의 진리인 성경 말씀이 종교적 전문가의 주장에 의해 퇴색하고 변조되는 우가 발생하고 있음에 대해 경각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만인 제사장론에 대한 반론

 

필자가 이전의 글에서 만인 제사장론에 대해 언급한 것은, 김 교수께서 그렇게 주장하였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김 교수의 글을 반박하면서(참고로, 필자가 글을 썼을 때는 김 교수의 책이 출판되기 전이었다. 필자는 5월호에 실린 김 교수의 글을 보고 글을 써서 원고를 보낸 상태에서 김 교수의 책이 출판되었다는 소식을 「목회와 신학」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일부 여권운동주의자들이 만인 제사장론을 들고 나온 것을 거기에 첨부한 것뿐이다. 문맥상 그렇게 비쳐졌는지는 몰라도 실지로 그것이 김 교수의 주장이라고 말하지 않았음을 먼저 분명히 밝힌다.

 

그러나 만인 제사장론을 토대로 여성안수 문제와 관련해 한마디 언급한다면, 마치 보수주의 목사들만 스스로 제사장으로 간주하여 구약의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오도하는 김 교수의 글은 분명 잘못이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성도들은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을 읽어보지 못했는가? 그리고 마태복음 5장 20절 말씀을 읽었다면, 개혁주의자들을 율법주의자들이라고 함부로 정죄하지 못할 것이다.

 

필자는 보수주의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차라리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의로운 모습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런 소리를 듣는다면 영광이겠다. 그렇지 못한 필자를 그렇게 불러주니 황송할 따름이다. 그러나 율법주의가 무엇인가? 적어도 구원에 있어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과는 달리, 우리의 공적을 드러내고 강조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보수주의자들이 어떻게 율법주의자란 말인가?

 

우리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교훈을 따라 주 예수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임을 어느 신학자들보다 명확하게 천명하는 사람들이다. 율법주의는 배격하지만, 율법은 여전히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다.

 

 

 

다수 보수주의자들과 가정 사역 전문가들이 유교적 가부장적 생활을 한다(?)

 

유교적 가부장적 생활이 비성경적이고 개신교 신학 전통에 어긋난다는 김 교수의 지적은 옳다. 그러나 가부장적 흐름은 한국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이 아니다. 구약에서 이미 발견되는 가장 오래된 사회 제도이기도 하다. 실지로 나쁜 의미로 가부장적 영향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지, 성경은 좋은 측면에서 올바른 제도임을 지지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남자를 먼저 만드시고, 다음에 여자를 만드셨다. 타락이전에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남자인 아담하고만 말씀하셨다(창 2:15절 이하).

 

더구나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었는데,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경에서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권위를 가리킨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동·식물들을 다스리고 번성케 할 책임을 가진 권위자라는 의미이다. 놀라운 것은 아담의 이름은 하나님이 직접 지어주셨지만, 여자인 하와의 이름은 아담이 지었다는 사실이다(창 2:23).

 

히브리인들의 이름은 그 사람의 성품이나 역할을 나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하와의 이름을 지어줄 때 그것 역시 여자에 대한 아담의 머리 즉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부분을 시사한다. 그것이 타락 후에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되어진 것처럼 말하는 김 교수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억지이다(김 교수의 책, p18).

 

때로 구약에서 어머니들이 자녀들의 이름을 지어주기도 하는데, 그것은 자녀들을 통솔하는 권위를 나타내는 일이다. 어머니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부모로서 자녀들에 대한 권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지어 주셨다는 점이다. 창세기 5장 2절은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고 말씀하신다.

 

특별히 남자(아담)와 관련되는 또는 여자와 구별되는 단어로 인간의 이름을 지어주신 것은 남자에게 속한 리더십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것을 가부장적 유교 사상으로 치부하는 것은 비난하기 위한 비난에 불과한 것이다. 또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선악과를 따 먹고 타락한 후에 누가 따 먹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금지의 열매를 먹은 하와를 먼저 불러 말씀한 것이 아니라 아담을 먼저 불러 말씀하셨다.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을 아담에게 물으신 것이다.

 

즉 가정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첫 번째 책임자로 바로 남자인 아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김 교수가 지적하는 여성의 남성에 대한 종속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창세기 3장 16절 이전에 있었던 사실임이 의미심장한 것이다.

 

그리고 하와가 범한 죄와 관련해 성경 어디에서도 하와가 범죄하여 세상에 죄가 들어왔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죄 가운데 출생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하와에게 주어지지 않은 역할인 인간에 관한 ‘머리’를 가리킨다. 이 때문에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쓴 편지에서 여자의 머리가 남자임을 천명하고 있는 이유이다. 여성의 리더십 문제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지 결코 문화적 양보에 의한 것이라거나 덕을 세우기 위한 측면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더구나 저주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 새로운 역할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타락 이전의 아름다운 관계를 더욱 왜곡시켜버린 것이다.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벌을 보라. 거기에 어떤 새로운 역할이나 기능들을 소개해 주지 않았다. 단지 그들이 이전에 가졌던 기능들에 대한 고통과 뒤틀림을 내렸을 뿐이다. 하나님은 하와에게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와가 남편의 권위를 빼앗으려고 하는 그릇된 욕망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관계 속에 어떤 갈등 구조가 생긴 것과 아담의 권위에 대항하여 반역하려는 하와의 욕망을 억제시키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은 무너진 창조 질서를 새롭게 확증하는 것이다. 죄와 저주의 결과로 주어진 고통스러운 관계가 새롭게 회복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베드로는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으로 알고 함께 하늘나라를 유업을 받을 자’임을 상기시키면서 남편의 권위가 무자비한 것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아내의 순종이 남편의 권위를 세워주는 것임을 확증하고 있는 것이다(벧전 3:7).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의 삶에서도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엡 5:22~23). 복종이라는 단어 자체가 의미하는 것과 주께 하듯하라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분명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는 것은 남자의 권위 아래 여자가 속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타락으로 말미암은 남자의 종속적 관계가 아니라 창조 이전부터 구속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창조 질서 틀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다름을 설명하고 있다.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순종하는 것이 주 안에서 마땅한 일이다(골 3:18).

 

그릇된 가부장적인 관습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제거돼야 할 것임이 분명하지만, 가정에서 남편의 리더십 곧 아내의 머리로서 남편의 권위는 존중돼야 한다. 남자가 가족과 종족을 대표하는 우두머리로서의 역할을 맡는 것은 여자가 열등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아론과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이끈 지도력은 그들이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월등한 존재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임명하셨기 때문이다(민 16:11).

 

아론과 모세의 지도력을 거부한 고라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온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온 회중 중에 계시다고 주장하였지만(민 16:3), 그들의 주장은 하나님에 의해 거부됐다.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되는 것은 인격적 우월성이나 신체적 혹은 지적 능력의 탁월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른 것이었다.

 

이처럼 필자가 남녀의 역할과 기능까지 무시하는 ‘동등성’과 그 역할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평등성’을 구분한 것을 가지고 개혁주의자들의 ‘언어유희’로 몰아붙이면서 남녀 동등성을 펼치는 김 교수의 논리야말로 빈약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지음 받았기 때문에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은 아니다. 그렇다고 김 교수의 지적처럼 늦게 지음 받은 여자가 남자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p17)은 그야말로 얼토당토 않는 주장이다.

 

여성을 남편보다 “더 연약한 그릇”(벧전 3:7)이라는 말씀도 거꾸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단연코 우열의 문제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질서와 권위 차원에서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 있음을 왜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가? 그것이 교회 리더십에서도 나타나는 것임을 부인하려고 왜 그렇게 막무가내인가?

 

 

 

고린도전서 11장 2~16절에 대한 김 교수의 해석은 학문으로 위장한 억지 논리다

 

김 교수는 남녀간의 질서를 가르치는 교훈이 아니라, 여자들이 교회의 공 예배 시간에 기도하거나 예언(설교)할 때 머리에 수건을 쓰고 하라는 가르침이라고 해석하면서 성경을 제대로 읽어달라는 충고를 하셨다. 무식한 목사의 눈에 비친 고린도전서 11장의 내용은 아무리 보아도 김 교수가 결론을 미리 내리고 거기에 짜맞추는 해석을 하는 억지 논리이다. 바울 사도는 2절에서 자신이 “전하여 준 대로 그 유전”을 고린도교회가 지키고 있다는 것을 칭찬하고 있다. “그 유전”은 11장 23절과 15장 1, 3절의 내용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성도들이 알아야 할 것들 중에 여자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기도하고 예언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여성 그리스도인에게도 차별이 없이 동일한 성령의 은사를 부어주심에 대한 요엘 선지서의 성취를 나타내며 그 안에서 여성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자유를 사용하되, 권위 아래서 사용할 것을 가리키고 있다.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것을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7 절의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라는 말씀에서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남자의 영광”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바울은 적어도 고린도교회에 18개월이나 머물렀다. 에베소에서 밤낮으로 쉬지 않고 가르친 3년간의 사역을 생각하면 고린도에 머물 때 18개월 동안 바울이 태만하게 사역한 것이 아니다. 분명히 철저하게 가르치고 훈련시켰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떠나고 난 후에 저마다 은사를 받았다고 난리치고 있는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난 무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가르침이라는 배경에서 11장을 이해해야 한다. 고린도에 머물면서 바울 사도는 분명 교회의 기본적인 규범(Christian ground rules)을 제정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규범을 어기고 무질서하게 행하는 것들에 대해 여성이 그 일을 할 경우, 10절을 염두에 둘 것을 말씀하고 있다.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에 대해 좀 더 살펴보면 두건을 쓰는 것 자체를 권세(exousia)로 표현한 점이다. 이는 기독교인의 자유를 언급하는 차원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권세 있는 자임을 나타내는 것이다(F. W. Grosheide, NICNT, 「고린도전서 주석」, p257). 그래서 RSV에선 권세를 상징하는 표시로 수건으로 번역하고 있고, ASV에선 권세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여성에게 하나님께 접근하도록 허락하시되, 그런 자격이 있는 자의 표시로 머리에 수건을 쓰라고 하신 것이다. 또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그분의 진리를 말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다. 다시 말해, 복음 전하는 사명이 남자 성도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여자 성도들에게도 주어진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나 선지자 혹은 목사와 장로로서 그런 직임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선지자라는 직책과 아울러 여자도 안수하여 장로나 목사를 세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 심지어 초대 교회 역사를 보면, 여성 집사들에 대한 기록이 많이 있음을 본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바실, 데오도레 및 에피파니우스의 문헌 참조). 심지어 니케아 종교회의(325년) 문헌에도 여성 집사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러나 그들을 교회 직임자와 구분되는 평신도로 간주했다.

 

칼세돈 종교회의에서는 그들의 안수 문제를 언급하면서 나이는 40세가 넘어야 하고 미혼이어야 한다고 규정한 것을 본다. 그러나 5세기에 열린 오렌지 종교회의에서 작성된 케논 25조항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여성 집사는 절대적으로 안수 받아선 안 된다. 만일 아직도 안수 받은 여성 집사들이 있다면 그들을 회중에게 주어지는 축도를 받도록 고개를 숙이게 하라.”

 

김교수는 ‘머리’론만 언급하면서 문맥의 어색함을 들어 바울 사도가 논리를 중단하였다고 하면서 ‘권세’(exousia)에 대한 언급은 지나치고 있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나온 것임을 누가 목격하였는가? 천사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 증인들인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에 두라고 11장 10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들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격자가 됨을 표시하는 것이다.

 

김교수는 고린도전서 11장을 자신이 이미 결론 내린 논리대로 해석하기 때문에 14장의 가르침이 모순 되게 보일 것이다. 11장의 가르침이나 14장의 주장은 바울에게 있어서 전혀 논리적 모순이 없다. 남자의 머리론을 말하다가 말발이 안서기 때문에 어정쩡하게 갑자기 중단한 것이 아니다. 머리를 짧게 깎는 것이 남자에게는 자연스러우나 여자에게는 그렇지 않아서가 아니다. 여자가 남자의 권위 아래 있기 때문에 주장하는 ‘머리론’이다. 그것 때문에 남자들이 여성들을 무시할까 봐 11절과 12절을 언급한 것이다. 이 사실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에베소서 5장에서 부부 관계나 골로새서 3장에서 지적한 것과 아주 잘 어울리는 논리이다.

 

더욱이 바울의 일관된 이 주장은 디모데 전서의 주장과도 일치한다. 디모데전서의 내용을 김 교수가 “후대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김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하워드 마샬 같은 복음주의 대부(大夫)격인 분이 바울의 저작을 부인한다고 해서 성경의 영감설을 믿지 않는다고 아무도 주장하지 않는다고 하는데(그런 주장을 하는 자들은 근본주의자들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있다) 만약 김 교수도 그렇게 믿고 있다면 하나의 학설에 불과한 것을 마치 그것이 참된 잣대인양 들이대는 오만을 버려야 한다.

 

그런 주장은 분명 성경의 정경론을 부인하는 행위이며 영감론을 경시하는 학자의 오만이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경 목록에서 바울의 목회서신으로 알고 있는 이 성경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삭제되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돕는 배필”과 여성안수에 대한 김 교수의 해석

 

김교수가 돕는 배필을 해석하면서 인용한 전도서 4장 어디에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돕는 배필이라는 말이 없다. 어쩌면 잘못된 인용 구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돕는 자라고 해서 하나님이 나보다 열등한 분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남자의 돕는 배필이라고 해서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성경 전체를 보고 말해야지 한두 구절만 갖고 그것이 전체 해석의 열쇠인양 말하는 것은 성경학자로서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이다. 하나님이 먼저 아담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그를 에덴동산에 두시면서 에덴동산을 다스리고 지키도록 하시고 또 그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에 관한 규범도 주셨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그의 형상대로 창조한 남자를 자신을 대표하는 피조물의 머리로 삼고,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릴 권위와 책임을 부여하셨다.

 

그후에 하나님은 아담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부여하신 피조물에 대한 권위와 책임을 잘 이행할 수 있도록 그를 위해 돕는 배필, 즉 여자를 창조하셨다. 이러한 남녀 창조와 권위와 책임 부여의 순차는 여자에 대한 남자의 권위를 분명하게 해준다. 이것은 여자를 남자의 돕는 배필로 창조했다는 데서 더욱 분명해진다.

 

‘돕는 배필’이란 원문에서 ‘돕는 자’란 말과 ‘그와 상응하는 자’ 그리고 ‘그와 일치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두 단어의 합성어다. 이를 종합하면, 여자는 남자와 일치하면서도 남자를 조력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자가 남자와 일치한다는 것은 여자의 외모가 남자와 일치한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실과 일치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자도 남자와 동등한 하나님의 형상임을 가리키며, 따라서 남자와 여자는 존재론적으로 동등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평등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남자가 갖는 존재론적 존엄과 가치에 있어서 여자는 남자와 동등함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돕는 자’란 양자 사이의 질적 양적 우열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양자 사이 관계에서 한 사람이 주도하는 것에 대해 그와 관계한 사람이 그를 도와 그가 해야 하는 모든 일의 목적을 올바르게 성취하도록 하는 보조적 기능이 있음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하나님과 그의 언약의 백성들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그들의 돕는 자로 호칭되는 것에서 이점이 잘 들어나고 있다. 이러한 호칭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 혹은 언약의 백성이 주도적으로 하는 일에 하나님이 도와서 그 목적을 올바르게 성취하도록 하는 것을 나타낼 뿐, 하나님이 그들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돕는 자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여자를 창조하여 남자의 돕는 자가 되게 하신 것은 남자가 여자에 대하여 우월하거나 여자가 남자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남자가 주도하는 일에 여자가 참여하여 그 일의 목적을 온전하게 성취하도록 해야 한다는 여자가 남자에 대하여 갖는 기능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를 남자의 돕는 배필로 창조하신 것은 남자와 여자가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동등성을 갖지만(존재론적 동등성), 하나님께서 피조물에 대하여 남자에게 주신 권위와 그 책임 이행과 관련해 남자의 주도권에 여자가 참여하여 보조적 역할(기능적 종속성)을 하도록 남녀의 관계를 설정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그들을 한 몸이 되게 하심으로써 양자가 결혼의 관계를 가지면서 인격적으로 일체가 되어 존재론적 동등성과 기능적 종속성이 완전하게 균형을 이루도록 하신 것이다. 이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하나님의 존재론적/기능적 관계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즉 존재론적으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동등하시지만, 기능적으로 성부가 중심이 되어 성자 하나님을 그의 종으로, 사도로 세상에 보내셨기에 성자는 성부에게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그의 사역자로 세상에 보내었기에 성령은 성부와 성령이 이루신 구원을 피조물의 삶에 실제적으로 구현하는 일을 하신다. 그러면서도 성부, 성자, 성령 삼위는 인격적 일체를 이루어 한 하나님이 되신다. 이러한 인격적 일체 속에서 성 삼위 하나님의 존재론적 위엄과 권위, 기능적 역할이 가장 균형 있고 지혜로우며 능력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와 남녀 인간의 창조와 가정이라는 제도를 창설하시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남자가 여자에 대하여 권위를 가지면서 가정의 가장으로서 역할을 하도록 하신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남자가 가정에 대해 갖는 가부장적 위치와 기능은 문화의 유산이나 당시의 문화적 표현을 빌려 묘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과 전통은 비록 타락의 과정을 거치지만 구속 역사의 전 과정에서 여전히 유지되었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성취되었으며 영광스러워졌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피조의 세계를 구원하시고, 그것을 재창조하신 것이다.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였을 뿐 아니라, 그 영광을 이루신 것이다. 바울은 구약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학자로서 에베소서 5장과 골로새서 3장에서 이점을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천지 창조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남녀의 관계를 일관성 있게 그의 모든 서신에서 반영하고 있지, 모순 된 글을 개진시키는 자가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에 대해 그들이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도록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한 몸이 되도록 창조하였다.

 

창세기 1장 26-28절과 쌍벽을 이루는 구절로 갈라디아서 3장~28절을 들고 있는데, 이것 역시 김 교수께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두 구절 모두 남녀 동등성을 강조하기 위해 주신 말씀이 아니다. 더욱이 후자의 선언은 구원의 대상에 있어서 차별이 없음을 말씀하는 것이지, 그것이 어떻게 여성안수 허용에 대한 주된 판단 구절로 사용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선언문의 적용에 있어서 교회 직분을 수여함과 관련하여 누구도 차별하지 말고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김 교수는 스스로 성경 문맥을 파악하지 못하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그리스도의 몸(교회) 안의 관계들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구성원이 되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자격을 그리스도안에서 모두가 하나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것이 몸 안의 지체들 간에 아무 구별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남녀는 평등하다. 하나님은 구원의 은총을 남녀노소 차별 없이 수여하신다. 그러나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가 있듯이, 이스라엘과 비이스라엘의 구분이 있다. 신약의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구별이 있다. 지체들 간의 구별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그 구별 때문에 하나님은 결코 공의하지 않고 자비하지도 않는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부르고 싶은가? 하나님의 공의가 김 서방이나 김 서방의 공의보다 못한 것인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하심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 테두리 안에서만 적용될 뿐이다.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는 저자거리의 김 서방이나 이 서방이 이해하는 공의와 자비하고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거리가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라는 소명은 목사들만의 것도 아니요, 여성들만의 것도 아니다.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받은 은사를 갖고 하나님을 섬기는 특권을 지니고 있다.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부르심을 받은 소명이 있다.

 

더욱이 복음을 전파하라는 소명은 어린아이 신앙인들에게도 주어진 명령이다. 그것이 목사직의 근거가 아니다. 남성들에게서도 자신이 받은 소명이 확실히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장로회에서 점검하고 신학교에 보내 신학 훈련을 받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의 직임에 해당하는 소명감은 성경 어디에서도 여성에게 허락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천명한다.

 

빌립의 네 딸들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그들은 예언하는 자들로서 선지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좀더 정확하게 지적한다면, 여선지자란 호칭은 예언하는 여자들에게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칭호라는 점이다. 단 누가복음 2장 36절에 안나 여선지자만이 그리스도를 선포한 사실에 근거하여 칭호가 주어졌을 뿐이다. 이것도 안나 여선지자를 구약의 연장선상에 있는 특수한 상황으로 간주한다면, 실제로 신약 교회가 세워진 이후 그 어느 여자에게도 여선지자라는 칭호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훗날 2, 3세기에 있었던 몽타니즘(Montanism)을 신봉하던 브리스길라와 막스길라 두 여인이 선지자로 나서면서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이 있은 후 점차적으로 예언 및 선지자라는 명칭들이 교회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신약의 정경이 형성된 것과 묘한 연관이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Dictionary of N. T. Theology, Vol 3. pp74~89 참조). 초대 교회 문헌들에 나타난 여성들의 활동은 남자들 못지않은 귀중한 것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교회 직임을 받아 남자를 주관하여 가르치고 다스리는 일들은 이단들 집단에서 허용한 것 외에 필자가 살펴본 문헌들에선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있었던 랍비 학자들에 대한 언급(p26)이나 사본학과 역사 비평에 대한 김 교수의 지적은 자신의 박학다식함을 과시하려는 듯하나, 구약의 어디에서도 두 학파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유전을 가르치는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율법의 바른 정신을 심어주신 주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율법을 온전케 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다.

 

중세 1,000년의 암흑기에 교회의 전통과 유전으로 사람들을 억압한 교권주의자들과 오늘날 개혁 교회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김 교수는 간과하고 있다. 개혁주의자들은 칼빈을 완벽한 신학자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믿어야 할 도리와 바른 교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칼빈의 가르침은 그 어떤 것보다 월등하다는 것으로 간주할 뿐이다.

 

중세 시대에는 성경을 일반 신자들에게 주지도 않았고 심지어 상당수의 신부들조차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루터가 복음서를 설교할 때 그들은 복음서를 루터의 저작이라고 말할 정도로 무식했다. 그러나 오늘날 개혁 교회 목사들은 그렇게 무식한 사람들이 아니다. 성도들도 모두 자기 집에 성경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토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종교 개혁자들이 물려준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다.

 

사본에 의해서 아니라, 정경인 성경에 의해서 ‘개혁된 교회는 날마다 개혁돼야 한다’는 구호를 사용하고 있다. 랍비들의 전통으로 돌아가 보자. 그들은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는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말했다. 여성 비하 발언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여성들에게 율법도 가르치지 않았다. 사실이다. 그런 전통 아래서 예수님께서 혁명적인 일을 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이미 율법에서 가르치고 있는 일을 예수님께서 제대로 실천하신 것이다. 율법을 온전케 하시는 분으로서 말이다.

 

신명기 6장에 있는 이스라엘의 대헌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말씀을 아는가? 거기 어디에도 여성에게 율법을 가르치지 말라고 명령한 것이 없다. 도리어 남녀를 떠나 모든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 진리를 왜곡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가르침을 바르게 해석하고 실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렇다면 여성 안수 문제도 지금까지 남성 위주의 목사들이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억압하고 있는 것을 이제 김 교수와 같은 대학자가 나서서 해방시켜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이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한 개혁 교회 목사의 한심한 작태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기초는 명백하다. 그 원리는 만고불변의 원리이다. 종교개혁 시대에 개혁자들이 교회론을 성경에서 회복시킨 것은 원리 자체였다. 그러므로 그 원리에 입각한 개혁 교회 전통은 지금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교회로서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지켜야 아름다운 것이다. 주님께서 하셔야 할 일을 교회가 하고 나선다는 것은 월권이다. 힘을 잃게 된다. 지지를 받을 수도 없게 된다. 교회 역사가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19 세기 말을 전후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역사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들이 역사 비평과 아울러 사본 비평을 수용하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교회가 한 일은 여성안수 허용 문제였다. 자유주의 신학의 틀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거기서 출발한 장로교회는 결국 가톨릭과 손을 잡게 되고 세계교회협의회(WCC)운동의 태동을 열게 되었다.

 

필자는 김 교수에게 한국 교회도 그런 전철을 밟도록 권장하고 싶은지 묻고 싶다. 교회 성장에 대한 이해는 김 교수의 이해와 별 다를 바 없다. 이전의 글에서 던진 필자의 질문은 ‘과연 여성을 안수하여 목사로, 장로로 세운 교단과 교회들이 김 교수가 지적한 것과 같은 영적 성숙함을 이루고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역사가 그렇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고 우리의 현실이 교회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더구나 교회 직임은 교회가 설정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성령께서 각각의 성도들에게 주신 은사에 따라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을 한다. 그러나 안수하여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으신 일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규례에 따라 안수하여 세우는 목사(혹은 장로)와 집사로 한정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들에 의해 규정된 가르침을 준수하는 것이 교회가 할 일이다. 오늘날 누구도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제자들인 사도들이 하지 않은 것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

 

 

 

막달라 마리아가 설교자였다고?

 

마리아가 유대 사회에서 주님의 부활하심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었다는 기록이 어디에 있는가? 여자들의 증거는 도리어 제자들에게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사도들은 저희의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눅 24:11). 명백한 사실은 여자들이 사도들로서 어떤 공적 역할을 소유했다거나 열두 제자와 견줄 수 있는 역할을 했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앞의 글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그 사실을 마치 기자가 독자들의 알 권리를 위해 기사를 쓰듯 제자들에게 알려주라는 것이었다. 만일 막달라 마리아가 설교자로 나서도록 주님께서 허락하셨다면, 예수님의 부활의 첫 증인인 막달라 마리아가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가장 먼저 일어서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사실을 증언하도록 청함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막달라 마리아가 그 사이에 숨을 거뒀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그녀와 함께 간 다른 여성들은 왜 나서지 않았는가?(눅 24:10).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의 부탁을 못 들었기 때문이었는가?

 

예를 들어, 누군가가 미국 땅에 있는 김 교수의 소식을 필자에게 와서 말한다고 하자. 그것을 설교라고 하는가? 비록 초대 교회 복음의 핵심이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한 것이었을지라도, 그 내용들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말해야 하는 복음인 것이다. 그리고 스승의 죽음으로 인해 자기들도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면서 일종의 대책이나 세우고자 있던 제자들의 모임을 ‘공교회’ 모임으로 본다는 김 교수의 주장은 참으로 억지가 아니고 무엇인가? 자신의 성경읽기만이 완벽한 것이라는 생각은 학자의 오만이다.

 

그리고 고린도교회에서 여자들이 예언한 부분에 대한 것을 보면, 김 교수는 “성령의 영감에 호소하면서 성경을 해석하고 성도들을 권면하는 것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로 요즘 말로 하면 설교”라고 했다(p60). 그러나 고린도교회에서 실시된 추상 명사로서 예언(propheteia)은 신약 성경에서 총 19번 사용된 것 중에 5번 언급된 단어이다.

 

베드로나 마태에 의한 기록은 구약의 예언적 말씀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된 데 비해, 바울 사도만 성령의 은사로서 사용하는 예언임을 말하고 있다. 동사 사용은 고린도전서에서만 총 11번 사용되었는데, 기본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즉 성경 해석(구약에 대한)보다 하나님이 방언이나 예언을 통해 성도들에게 주시는 새로운 계시의 말씀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예언을 한 여성들도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여선지자라는 호칭으로 부른 적이 없다는 점이다. 즉 여자들이 예언의 은사를 사용했다고 해서 그것이 장로나 감독의 직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선지자들은 사도들과 더불어 교회의 기초이다(엡 2:20). 오늘날 사도직과 선지자직이 교회 안에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더 이상 그런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계시를 주셔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즉 계시 중단 사상, 다시 말해 신·구약 성경이 정경으로 정해진 이상 더 이상 계시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자기 백성에게 계시해 주시던 구약의 방법은 이미 끝났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 1항). 그 계시는 오직 신·구약 성경 66권에만 포함돼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은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으로 받으며 교회와 신학적 논쟁에서 “최고의 권위”를 지닌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예언’ 혹은 ‘예언하다’는 말을 통틀어 종합할 때, 고린도교회에서 여성들의 예언 활동은 공식적인 선지자 직함을 받아 한 일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부어주시는 성령의 은혜에 힘입어서 성도들이 하나님께 받은 진리를 함께 나눈다는 차원에서 이해돼야 한다.

 

고린도 교회에 허락한 은사 사용함에서 김 교수의 주장을 따르면 오늘날 모든 성도들을 다 안수하여 목사와 장로로 세울 수 있다고 비약시킬 수 있다.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더구나 고린도전서 12장 28~30절과 로마서 12장에 언급된 은사 부분을 말씀한 가르침들과 어긋나는 죄를 범하게 된다.

 

 

 

사본학적 비평이 성경 해석의 원리인가?

 

교회가 언제부터 성경 해석을 위해 사본학을 해석의 열쇠로 받았는가? 사본학이 올바른 성경 이해에 도움을 주는 것에 대해 필자 역시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본 비평이란 학자들의 학설에 불과한 것이지, 사본에 근거한 성경 해석을 가지고 오늘날 교회의 모든 교리와 가르침을 뒤집으려고 해선 안 된다. 그것이 학문하기를 좋아하는 분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도구는 될지 몰라도 정경 해석의 열쇠는 아니다. 김 교수는 한국 교계에 반포돼 있는 주석들을 모두 싸잡아 공해라고 비난하고 있다.

 

김교수가 말하는 ‘월드 바이블 주석, NICNT, NICOT, BST 및 Black NTC’ 등의 주석류들을 필자도 종종 사용하고 있음을 밝힌다. 그렇다고 사본의 내용들 때문에 정경에 수록된 사실들을 감히 변경하여 설교하는 오만함은 나타내지 않는다. 김 교수의 주장이 마치 모든 판단의 정설인양 억지를 부리는 태도는 바르지 못하다. 사본이란 어디까지나 하나의 학설에 불과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에 대한 후대 삽입설을 주장하는 사본이 있다고 하는 김 교수의 주장은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그런 견해를 뒷받침하는 성경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몇몇 사본들이 그 본문을 그 장의 뒷부분(40절 이후)에 놓으려는 경향을 보이기는 하지만, 어떤 사본도 그 본문을 삭제하고 있지는 않다. 그 본문이 난해한 것이긴 하지만, 그 본문을 제거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김 교수가 그 본문을 만족스럽게 다룰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본문을 난도질하는 태도는 학문하는 자의 자세가 아니다.

 

모든 성경학자들은 성경의 정경을 존중하고 신앙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정경이 잘못된 것이라면 공교회가 연합하여 김 교수의 지적 야욕을 만족시켜 주는 새로운 정경 작업을 하루 속히 서둘러야 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먹고 사는 자들의 의무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께서 교회를 온전케 하는데 있어서 신·구약 성경 66권을 정경으로 주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은사를 받아 일하는 목사는 그 진리를 전파하고 가르치며 지키는데 힘을 다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성경을 자기 입맛에 맞게 그리고 시대적인 흐름에 짜맞추기 위한 김 교수의 수고는 학자로서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여권 운동을 줄기차게 주장하는 이들을 제외하곤 결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일이다. 정경을 정할 당시 편집자들이 다른 사본에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있는 것을 없다고 할 만큼 오류를 범했다고 보진 않는다. 교회의 제도와 원리에 관한한 이미 주어진 계시와 그 계시에 대한 성경 해석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훗날 김 교수와 같은 분을 세우셔서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한 그 엄청난 일을 발견케 하여 정경을 수정해야 할 만큼 당시 공회가 죄악을 범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사본 비평에서 얻어지는 생략된 문자, 말, 구절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근본 진리가 바뀌어야 할만한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고린도전서 14장은 사본 비평에 의해서 여성 안수 문제를 허용하여 교회 직분자로 세워야 할 만큼 삭제돼야 할 삽입 구절이 아니다. 필자의 주장이 김 교수의 눈에 무식한 자들의 반열에 서서 무식한 발언을 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정신 차린 말을 하는 것이다. ‘다양한 사본들로 뜻이 달라지고 기독교 교리 체계까지 심각한 영향을 주는 사본들’이 이제까지 발견되지 않아서 편집자들이 성경을 정경으로 잘못 채택했다는 주장을 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스스로 성경 기자와 성경보다 우위에 놓는 오만함이다.

 

김교수의 주장대로 한다면 지금까지 잘못된 성경을 믿고 가르쳐서 이 땅에 교회를 남기고 간 선진들은 모두 ‘성경 해석을 한 번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사람들’의 대표들이 아닌가? 그 들이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친 모든 내용들이 모두 쓰레기란 주장을 어찌 감히 할 수 있단 말인가?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피 흘리신 선배들을 모욕하는 발언은 삼가야 한다. 김 교수의 주장대로 한다면, 그들은 거짓된 해석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잃은 불쌍한 영혼들이란 말인가? 그들의 유산을 따먹고 있는 김 교수는 그들의 무덤 앞에 가서 사죄할 생각이 없는가?

 

사본 비평이나 역사 비평을 공부하여 성경의 바른 해석을 하고 싶으나 “근본주의적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목이 졸리는 상황에서 실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목신, 11월호 p191)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자신의 글을 반박하는 사람에게 독설에 가까운 필력을 휘두르는 것이 전부란 말인가? 김 교수는 히브리서 11장 24~26절을 읽어 보기는 했는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를 위해 능욕 받는 일을 미국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길 용기가 없다면 진리를 위해 목숨을 버린 앞서간 선진들을 욕하고 한국 교회를 어지럽히며 보수주의 교회들을 뒤흔들려는 악의에 찬 발언을 삼가 주기를 부탁드리고 싶다.

 

성경의 정경성은 무엇보다 사도성이다. 만약 신약의 목회 서신이 사본 비평에 의해 바울 사도의 저작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세우신 교회를 위해 남기신 성경이 잘못된 것이고 결국 하나님의 오류라는 오명까지 덮어쓸 수 있게 하는 무서운 죄악이다. 외경으로 간주하는 다다케나 클레멘트전서 그리고 헤르마스의 목자서 등이 정경의 목록에서 제외된 배경은 그것이 사도들이 쓴 것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다.

 

필자가 알기로 정경성의 표지들은 다음과 같다. 사도들이 원저자여야 한다. 혹은 사도들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 초대 교회에 의해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확실하게 정경으로 받아들여지는 다른 책들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교회는 정경을 창출해 내지 않았고 단지 책들이 정경성을 지니고 있다고 인식하고 받아드리며 그것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 인정으로 말미암아 그 책들은 교회 안에서 권위 있는 것이 된다. 이때 종교회의에서 교회가 사용한 말은 ‘레시피무수’(recipimus)였다.

 

즉 ‘우리는 받아드린다’는 뜻이다. 그래서 교회의 제도와 직제 및 예배와 모든 가르침은 모두 정경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저작이 아니라고 한다면, 정경으로서 가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가 지금까지 허망한 것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였으니 그 죄를 어찌 다 씻으란 말인가?

 

 

 

여성 처우에 대한 개혁 교회가 고쳐야 할 일들

 

여성안수를 금하고 있으면서 실지로 개혁 교회는 여성들을 신학교에서 받아들여 훈련시키고 있고, 일부 교회에선 여전도사들에게 때로 설교도 시키고 성경 공부도 시키고 있다. 주일학교 교사들도 여성들이 훨씬 더 많다. 그러면서 안수 문제만큼은 안 된다고 하는 완고함이 있다는 비평은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안수하여 세운 근거가 없기 때문에 할 수는 없을지라도 브리스길라나 뵈뵈가 한 일들, 사도들에게 탁월한 여자로 알려진 유니아가 한 일들은 교회 안에서 얼마든지 하고 있는 것이다. 동일한 학교에서 동일한 교수들 밑에서 동일한 수업료를 내고 신학을 공부한 여성들에 대한 교회에서의 대우가 반드시 달라져야 한다. 그들의 수고와 땀을 교회가 인정하고 남자 목사들이 받는 사례와 차이가 나지 않도록 고쳐한다.

 

필자가 시무하는 삼양교회에도 여전도사들이 있다. 시무 여전도사를 둔 적도 있었다. 그리고 여성들에게 머리에 두건을 쓰라고 강조한다. 개혁 교회나 김 교수의 주장을 수용하는 교회나 이 세상에서 완벽한 교회는 한 곳도 없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에 근접한 바른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노력은 개혁 교회들이 더 앞서고 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개혁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순교자들을 배출해 왔다. 자유주의 교회들에서 대각성 운동이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김 교수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안수 문제를 떠나서 성도는 주님께서 주신 은사를 갖고 주님의 교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여 섬겨야 한다. 상은 우리의 수고한 대로 대목자장께서 주실 것이다(고전 3:8). 이 땅에 최저 생활비도 안 되는 사례비를 받고 교회를 섬기는 목사들도 많이 있다. 그런 자들이나 그렇지 않은 자들이나 모두 주님께서 보시고 있다. 여성안수 문제로 왜 남자 목사들이 다투고 있느냐는 소리도 듣는다. 하나님이 여성들을 목양의 대상으로 주지 않았다면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동일한 상속자들이기에 그들을 위한 수고는 곧 주님을 위한 수고인 것이다. 필자는 여성들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존중한다. 그들의 헌신과 눈물과 봉사로 인해 눈물을 지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목사보다 상을 더 많이 받을 여인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필자는 여성들을 안수하여 세울 수 있는 권한을 주님께로부터 받지 못했다. 이 세상의 누구도 그런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무식한 목사의 글을 읽어주신 독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한다. 허다한 무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탁하게 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한다(고후 2:17).

 

                                                                                       

                                                                                                                 서창원 | 2004. 12.

Posted by 작은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