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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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훈 교수 "30년 인연 창조과학회를 떠나며…"

창조과학회 제명 통보 일종의 '학문적 마녀 사냥' 심경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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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훈 교수가 1980년 8월, 창립준비위원회 모임에서 시작해 계속적으로 관여해 온 한국창조과학회에서 제명 통보를 받고 탈퇴했다. 양승훈 교수는 창조과학회를 탈퇴하면서 논쟁의 핵심인 창조연대 및 다중격변 창조론에 관련된 입장을 밝혔다. -편집자 주

 

1981년 1월 24일은 저의 결혼식 날이었습니다. 원래는 결혼 예정일이 1월 31일이었지만 제가 결혼 일자를 잡은 후에 한국창조과학회에서 창립총회 일자를 그 날로 정했기 때문에 도리 없이 일주일 앞당긴 것이지요. 부랴부랴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피곤한 중에 여의도 전경련 회관에서 열린 창립총회를 준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어 창조과학회와 관련된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지금은 전설이 된 <진화는 과학적 사실인가?>을 편집하기 위해 박사과정 학생이 을지로 출판 골목의 허름한 여관방에서 출판업자와 며칠 밤낮을 지새우던 일, 애써 외주를 주어서 제작한 창조과학회 로고가 진화를 연상케 한다는 지적에 따라 지금의 로고로 다시 뜯어고쳤던 일,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주일학교 꼬마들을 대상으로 첫 창조과학 강연을 시작한 이래 국내외에서 1000여 회에 이르는 창조과학 강연을 쫓아다니던 일, 그리고 수많은 원고들. 20대 중반부터 5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저의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창조과학 운동을 이제 '공식적으로' 떠나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몇몇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근래 창조론오픈포럼(이하 본 포럼)을 개최하고, <창조와 격변>(예영, 2006) 출간을 통해 우주·지구가 6000년보다 훨씬 더 오래 되었을 수 있으며, 노아의 홍수 이전, 인류가 창조되기 전에도 여러 차례 전 지구적 격변이 있었다는 다중격변 창조론을 제시한 것으로 인해 지난 8월 말까지 한국창조과학회로부터 탈퇴하지 않으면 제명하겠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저의 주장들이 창조과학회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창조과학회의 명예를 '크게 손상'시켰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정말 창조과학회에 해를 끼쳤는지,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에 해가 되었는지 여부는 제가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제명 통보는 두어 주 전에 이메일로 보낸 것 같은데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창조과학회 회장 명의의 우편물이 학교에 도착해 있더군요. 하지만 방한 중에 이미 간접적으로 들었기 때문에 이와 관련하여 창조과학회 지도자들과 만나서 대화하기를 요청했지만 아쉽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이 문제와 관련해서 좀 더 자세히 나눌 기회가 있겠지만 20대 중반이었던 1980년 8월, 창립준비위원회 모임으로부터 시작하여 30여 년 가까이 관여해 왔던 창조과학회를 탈퇴하면서 이 논쟁의 핵심을 창조연대 및 다중격변 창조론에 관련된 저의 입장과 창조론오픈포럼에 대한 취지로 나누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창조 연대가 오래되었을 수 있다는 주장은 신학적으로 전혀 새로운 주장이 아니며,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 복음주의 진영의 대부분의 구약학자들이 지지하고 있는 성경 해석입니다. 그러므로 6000년 우주·지구 나이는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고, 다른 해석들은 성경의 진리를 타협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오랜 창조 연대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자유주의자라거나 진화론과 타협한 것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일종의 '학문적 마녀 사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창조 연대가 오래되었을 수 있다는 주장은 신·불신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전문 과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이론입니다. 오히려 6000년 우주·지구 연대는 근본주의 진영의 극소수 의견이며,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연대를 연구하는 전문 학자들이 아닙니다. 이러한 아마추어 과학 운동은 비단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고 창조과학의 진원지인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연대 측정 분야에서 정상적인 연구 활동을 하면서(peer-reviewed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는) 우주·지구 연대를 6000년이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 과학자는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오랜 연대의 과학적 증거가 그만큼 압도적이고 분명함을 의미합니다.

셋째, 제가 <창조와 격변>에서 제시한 다중격변 창조론은 수많은 증거들에 기초하여 세운 하나의 가설입니다. 학문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자신의 연구를 기초로 새로운 이론과 모델을 제시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당연히 이 이론에 학문적인 비판이나 반론을 제기하는 것도 환영합니다. 하지만 그 비판이나 반론은 논문이나 그 외 학문적인 글로서, 신뢰할 수 있는 증거에 기초해서 제기되어야지, 일방적인 비난 성명이나 신뢰하기 어려운 비학문적 문헌이나 증거를 기초로 제기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중격변 창조론 역시 다른 학문 이론들처럼 명백히 반증되거나 더 나은 이론이 나오면 폐기처분할 것입니다.

넷째, 이러한 저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창조론오픈포럼은 오랜 창조 연대를 주장하려는 모임이 아닙니다. 저의 개인적인 견해와는 무관하게 본 포럼은 각 분야의 복음주의 전문 과학자, 신학자들의 다양한 견해들을 나누자는 것이 근본 취지입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전 세계적으로 복음주의 진영의 전문 신학자와 과학자들의 창조론 연구 결과들이 산더미처럼 발표되었지만 아쉽게도 한국 교회에는 극소수 근본주의 진영의 견해만이 소개되었습니다. 그래서 건전한 여러 창조론 논의들을 균형 있게 한국 교회에 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에 본 포럼을 시작한 것입니다. 당연히 본 포럼은 여러 창조론 운동들 중의 하나인 창조과학에 대해서도 열려 있으며, 실제로 지난 세 차례의 포럼에서 발표된 논문들 중에는 창조과학 입장을 지지하는 논문들도 있습니다.

다섯째, 본 포럼은 한국 교회가 지적인 황무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안타까운 마음 때문에 시작된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신․불신을 막론하고 전문 과학자들은 창조과학의 핵심이랄 수 있는 6000년 우주·지구 연대와 모든 지층과 화석이 1년 미만의 대홍수로 인해 형성되었다는 단일격변설을 천동설 내지 평면 지구설과 비슷한 수준의 이론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만일 앞으로도 지금처럼 전문 학회나 학회지가 아니라 일반 성도들을 대상으로 대중적 캠페인에만 의존하는 과학 운동이 한국 교회를 휩쓴다면 한국 교회는 지적인 게토(ghetto)가 될 것이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지적 자살'이라는 오래된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전도나 복음의 변증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소중한 복음이 폄훼(貶毁)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조롱받는 일이 계속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끝으로 저는 창조과학회를 떠나지만 창조론 운동을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이제 좀 더 자유롭게 창조론 운동에 매진할 수 있을 것이며, 함께 창조론 운동으로 젊음을 불태웠던 여러 친구들과 더 가깝게 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6000년 우주·지구 연대와 단일격변설이 왜 그렇게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되는지 아직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들도 많이 있겠지요. 하지만 창조과학회 안에 있든지 밖에 있든지 관계없이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의 눈의 비늘을 벗기시고 성경 말씀과 창조 세계의 비밀을 밝히 깨닫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 16:13). 우리 모두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엡 4:15) 자라가기를 소원합니다.

[출처: 뉴스앤조이] 양승훈 교수 '30년 인연 창조과학회를 떠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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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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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신 진화론자’ 아닌 확고한 창조론자”

 

[인터뷰] ‘과신대’ 이끄는 서울대 우종학 교수   - 크리스찬 투데이

 
▲우종학 교수는 “생물이 역사적으로 진화해 왔고, 과학이 그 원인을 어느 정도 규명했으니 ‘신은 없다’는 주장은 말 그대로 주장일 뿐”이라며 “왜 진화와 진화 이론이 무신론만을 지지하는가? 이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라고 했다. ⓒ김진영 기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경은 마치 선언과도 같은 이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창세기 1장에서 끝난다. 성경 66권 1,189장 31,102절 중 단 한 장, 31절 만에. 그래서 우리는 그 과정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 이 우주와 지구, 특히 인간이 어떻게 창조됐는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단지 하나님께서 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신앙으로 고백한다.  

 

그런데 간혹 이것을 따져 물어오는 이들이 있다. 주로 비기독교인들이다. 눈부신 과학의 발전으로, 생명의 기원마저 설명할 수 있다는 그들은 과연 신(神)이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여기에 대한 기독교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회피하거나 맞서거나. 문제는 후자다. 어떻게 맞설 것인가? 맞서야만 하는가?

지금까지 기독교는 대개 회피하는 쪽에 가까웠다. 기독론이나 구원론만큼 정립된 '창조론'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냥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인본주의가 팽배하고, 진화론이 맹위를 떨치는 시대, 기독교는 그 신앙을 변증해야 하는 시대적 사명 앞에 있다.

이에 본지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과학자를 만났다. 우종학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교수다. 그는 과학과 무신론의 도전에 응전하고 균형 있는 창조신앙을 세우기 위한 단체인 '과학과 신학의 대화'(과신대)를 이끌고 있다. 아래는 그와의 일문일답.

 

진화, 진화 이론, 진화주의

-진화론을 과학으로 여겨, 이를 근거로 창조론, 나아가 신까지 부정하는 이들이 있다. 진화론은 정말 과학인가?

"그 전에 한 가지 분명히 하고 싶은 게 있다. 흔히 진화론이라는 말로 단순히 표현하지만, 이 말 안에는 진화와 진화 이론, 그리고 진화주의라는 서로 다른 세 가지 개념이 뒤섞여 있다. 이것을 구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함에도,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는 데 1차적인 문제가 있다.

진화라는 건 일종의 경험적 데이터다. 화석 등을 통해 관찰해 보니 각 종(種)이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진화해 왔다는, 일종의 발견이다. 진화 이론은 그런 진화가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다. '자연선택'이라든지 '유전자 변이' 같은 용어들이 바로 진화 이론을 정립하는 데 쓰였다.

문제는 진화주의다. 이것은 과학이라기보다 차라리 하나의 철학이나 사조에 가깝다. 무신론이 바로 진화주의에 해당한다. 즉, 생물이 역사적으로 진화해 왔고, 과학이 그 원인을 어느 정도 규명했으니 '신은 없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주장일 뿐이다. 왜 진화와 진화 이론이 무신론만을 지지하는가? 이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다. 다시 말해, 그와 같은 과학적 발견과 이론이 반대로 유신론을 지지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럼 진화와 진화 이론은 과학으로 받아들인다는 얘긴가?

"말했다시피 진화는 그저 하나의 발견으로, 과학이냐 아니냐를 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가령 약 46억 년의 지구 역사에서 영장류의 화석은 다른 것들보다 후대에 나온다. 그러므로 그 현상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본다. 문제는 진화 이론인데, 나는 생물학자가 아니다. 천문학자로서 구체적인 진화 기제는 잘 알지 못하고 크게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걸 밝혀내는 건 생물학자들이 몫이다. 다만, 같은 과학자로서 지금까지 그들이 연구해 광범하게 합의한 것들에 대해서는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진화 이론을 과학으로 인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과 그 분의 창조를 부정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그러니까 진화주의가 아닌 진화나 진화 이론이라면 그것이 반드시 창조론과 대립하지 않는다는 건가?

"그렇다. 하나님께서 진화를 창조의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많은 이들이 창조하면 마치 마술처럼 무언가를 '뿅' 하고 갑자기 나타나게 하는 이미지만 떠올린다. 이건 기독교인이나 아니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높은 산에 올라 자신을 압도하는 절경 앞에서 창조주의 위대함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눈앞에 펼쳐진 기암괴석과 구비치는 계곡은 풍화와 침식의 결과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걸 보고 누구하나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일 가능성이 더 높다. 인류의 기원 문제에 있어 진화와 진화 이론도 본질적으로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특별계시라면 자연은 일반계시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런 일반계시를 이해할 수 있는 틀이 바로 과학”이라고 했다. ⓒ김진영 기자

"종교와 과학, 양립할 수 있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창조론과 진화론, 나아가 신앙과 과학은 대척점에 있지 않았나? 지금도 그렇고.

"그랬던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둘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유럽을 중심으로 일어난 근대의 과학혁명은 종교개혁을 그 사상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 과학적으로 더 앞서 있었던 건 중국이나 인도를 비롯한 동양과 이슬람권 국가들이었지만 근대과학의 성립에 있어서는 유럽에 뒤지고 말았다. 아마 유럽인들은 그들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기독교, 즉 그 신을 합리적이라고 믿었고, 이것을 자연 탐구의 철학적 근거로 삼았던 것 같다. 실제 근대과학을 일으킨 수많은 과학자들 중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그 동기 역시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그런데 종교와 과학을 대척점에 두고 그 둘 사이의 갈등을 부각시킨, 이른바 '종교 VS 과학'이라는 구도가 상업적 의도 등과 맞물리며 대중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매스 미디어의 영향도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다. 또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무신론 과학자들이 그렇게 몰고 간 측면도 있다.

나는 종교와 과학이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다고 본다. 앞서 기독교 창조론이 진화와 진화 이론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 것도 이런 판단 때문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특별계시라면 자연은 일반계시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런 일반계시를 이해할 수 있는 틀이 바로 과학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주로 고백하듯이, 과학을 통해 대자연을 만드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과학자들 중에는 무신론자가 더 많은 것처럼 보인다.

"정확한 통계야 알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아마 무신론자보다, 신과 같은 초과학 초경험의 세계는 확신할 수 없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자가 더 많을 것이라는 게 내 추측이다. 사실 우리의 삶은 과학으로 입증할 수 없는 게 너무나도 많다. 왜 거짓말을 하거나 남의 것을 빼앗으면 안 되는 것인가와 같은 윤리적 질문은 과학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따지고 보면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으니 결국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리는 것이야 말로 과학적인 태도가 아니다. 물론 나처럼 기독교 신앙을 가진 과학자들도 많다."

"광대한 우주보다 더 크신 이가..."

-창조론에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나?

"나는 모태신앙인으로 자랐고,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초등학교 땐 밤하늘을 보며 별 자리를 익히고, 신문이나 잡지에 우주탐사선에 대한 기사가 실리면 그걸 오려 스크랩하는 걸 좋아할 정도로, 우주에 대한 호기심도 많았다. 그러면서 어린 마음에 '이토록 광대한 우주가 존재하려면 그보다 크신 이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나에겐 신앙과 과학이 결코 모순이 아니었다.

그런 내가 기독교 창조론에 관심을 갖게 됐던 건, 대학에서 천문학을 공부한 뒤 석사과정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주변에서 '천문학은 우주의 나이가 대략 140억년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것 아니냐? 기독교인인 네가 그런 학문을 해도 되느냐?'고 물어왔기 때문이다.

'아니, 140억년이라는 우주의 나이와 내 신앙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단 밀인가?' 나로서는 이런 생소한 질문 앞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마침내 한국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어떤 창조론을 갖고 있는지 알게 됐다. '아, 그들은 지구와 우주의 나이를 대략 6천년에서 1만년 사이로 보는구나!"

이때부터 창조론을 보다 심도 있게 공부하게 됐던 것 같다. 과연 내가 공부하는 천문학이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것인지, 내게 물어오는 이들에게 대답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으로 신의 존재와 창조를 증명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필연적으로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과학의 범주로 끌어내리는 오류에 봉착하게 된다”고 했다. ⓒ김진영 기자

-소위 '창조과학'을 말하는 것인가?

 

"맞다. 지구의 나이가 대략 6천년에서 1만년 사이라는 건 그들의 핵심적 주장 가운데 하나다. 이른바 '젊은 지구론'이다. 하지만 오늘날 과학계에서 이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물론 그들은 과학을 무기로 삼은 무신론자들의 공격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를 지키기 위한 선의에서 그런 주장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방법이 틀렸다고 본다.

창조과학이 처음 태동했을 때는 그 이름이 '과학적 창조론'이었다. 즉, 과학으로 신의 존재와 창조를 증명할 수 있다는 생각인데, 이것은 필연적으로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과학의 범주로 끌어내리는 오류에 봉착하게 된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 당위성이 과학의 힘을 빌려야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불가능하게 될 경우 이는 어김없이 무신론자들의 먹잇감이 된다.

예를 들어 어떤 과학적 발견이나 이론이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근거라고 주장했을 때, 만약 시간이 흘러 그런 발견과 이론이 틀렸다는 게 밝혀지면, 하나님의 자리는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어떤 현상에 대해 섣불리 과학을 배재하고 기적과 같은 하나님 능력을 앞세우면, 훗날 과학이 그와 같은 현상을 증명해 버릴 때도 같은 결과가 초래된다.  

때문에 알리스터 맥그라스 같은 신학자들은 이처럼 자연, 즉 일반계시에서 출발하는 신 존재 입증은 위험하다고 일찍이 경고했었다. 오히려 그 반대, 그러니까 특별계시에 근거해 자연을 보면 그 안에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신 진화론자? 유신이든 무신이든..."

-많은 이들이 교수님을 '유신 진화론자'라고 부른다. 동의하나?

"사실 인류의 기원에 대한 내 주장이 이거다 라고 잘라 말하거나 그렇게 책에 쓴 적이 없다. 다만 창조과학이 주장하는 젊은 지구론만이 기독교의 유일한 견해가 이니라는 메시지를 전달해 왔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과학계가 말하는 진화 이론도 하나의 창조 방법으로 얼마든지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한 정도였다. 아마 이 때문에 나를 '유신 진화론자'라고 부르는 듯하다.

하지만 이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유신이든 무신이든, 그 뒤에 '진화론자'라는 표현이 붙는 이상 그 사람은 '진화주의자'가 되어버리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 '유신 진화론자'라고 할 때, 그 표현의 이면에는 '저 사람은 사실 진화주의자인데, 그저 유신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썼을 뿐'이라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단언컨대 나는 진화주의자가 아니다. 그것을 반대하는 확고한 창조론자다."

-진화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지금도 진화의 과정에 있다는 논리적 귀결에 이르는데, 이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한 목회자에게서 비슷한 질문을 받았던 적이 있다. 그 때 내가 '진화 할 것'이라고 했더니,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라. 하지만 한 번 잘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인간이 갖는 특별함이 과연 생물학적인 것에만 국한된 것인지를.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건, 하나님께서도 우리처럼 눈 코 입이 있고 손가락이 다섯 개라는 따위의 의미는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의 몸이 진화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창조물로서의 인간의 존언함이 훼손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프랑스 같은 유럽의 나라들에 있는 왕궁에 가보면, 과거 왕이 누웠던 침대가 지금과 달리 작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의자도 그렇고 갑옷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몸이 진화한다는 걸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아닐까 한다. 사실 생물학적 구조로만 보면 인간은 그리 완벽하지 않다. 예컨대 하나의 숨구멍으로 기관지와 식도가 같이 있다는 건, 특히 어린이의 경우 매우 위험할 수 있는 구조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창세기의 기록이, 우리가 단지 생물학적 존재만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특별할 수 있는 건 흙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생기 때문이다. 존 스토트도 그의 로마서 강해에서 이 부분을 강조했다. 존 스토트 역시 진화의 방법으로 인간이 창조됐을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는 신학자다."

 

 
▲“오해를 좀 많이 받는다”는 우종학 교수. 그는 “그러나 내 의도는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과 같이 교회를 떠난 기독교인들을 조금이라도 돕고자 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 ⓒ김진영 기자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위해"

 

-'과학과 신학의 대화'(과신대)를 이끌고 있다. 왜 시작하게 됐나?

"과학주의 시대, 무신론은 기독교에게 굉장히 큰 도전이다. 그로 인해 신앙을 잃어버리는 이들도 있다. 특히 젊은이들이 그렇다. 이들에게 지구의 나이가 6천년에서 1만년 정도라는 주장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그들이 단지 기독교의 창조론만을 불신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복음 전체에 회의를 느낄 수도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과신대를 시작하게 됐다. 과학과 무신론의 도전 앞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그 신앙을 '창조신학'이라는 틀 안에서 변증하고, 과학과 신앙의 건전한 대화를 모색해 교회를 돕자는 취지다."

-끝으로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오해를 좀 많이 받는다. 심지어 나를 가리켜 기독교인이 아니라거나 성경을 믿지 않는다고 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내 의도는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과 같이 교회를 떠난 기독교인들을 조금이라도 돕고자 한 것일 뿐이다. 앞으로는 이런 시각으로 나를 봐주었으면 좋겠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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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샘

[취재파일] 영화 '히말라야'의 우문현답…

"내려와야지. 거기서 삽니까?"

- 김영아 기자 : 2016.01.02 09:57

 

지난 2012년 10월 14일, 오스트리아의 모험가 펠릭스 바움가르트너가 지상 39km 성층권에서 자유낙하에 성공했다. 맨몸으로 성층권 높이에서 지상으로 뛰어내리는 데 성공한 건 인류 역사상 바움가르트너가 처음이었다. 2014년 앨런 유스터스 전 구글 부사장이 41km 자유낙하에 성공하기 전까지 이 분야 최고 기록이었다.

바움가르트너의 역사적인 도전에는 준비 단계에서부터 전 세계의 눈과 귀가 집중돼 있었다. 바움가르트너가 무사히 지상에 발을 딛는 순간, 숨죽이며 지켜보던 세계가 함께 열광했다. 인류 역사에 새 이정표가 세워진 직후 기자회견장에서 한 기자가 물었다. "39km 높이에 섰을 때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어떤 영웅적인 답변이 나올까? 모두의 눈과 귀가 바움가르트너를 향했다. 그때 바움가르트너는 이렇게 답했다. "세상 꼭대기에 서면 겸손해집니다. 기록을 깨겠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그저 살아 돌아오고 싶었을 뿐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히말라야에서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엄홍길 대장에게 진행자가 묻는다. "흔히 등산을 인생에 비유하기도 하는데요, 지금까지 수많은 산행을 겪으면서 얻게 된 교훈, 이런 게 있다면 뭐가 있을까요?"

엄 대장은 세계 최초로 8천 미터 16좌를 완등한 세계적인 산악인이다. 영화 속 진행자는 물론, 스크린을 마주하고 있는 관객들도 모두 어떤 대답이 나올까 잔뜩 기대에 찬 눈빛으로 엄 대장을 주목한다. 그런데 그때, 엄 대장이 진행자에게 반문한다.

"산에 오르면 대단한 걸 찾을 수 있을 것 같죠? 7천 미터 정도 올라가다 보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 떠오를 수 있을 것 같고, 8천 미터 정도 올라가다 보면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고...."

하지만, 엄 대장은 답한다. "거기서 절대 그런 거 찾을 수 없습니다. 거기서 느낄 수 있는 건 오직 제 자신뿐입니다. 너무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제가 몰랐던 제 모습이 나옵니다. 그동안 쓰고 있던 모든 가면이 벗겨지는 거죠. 보통사람들은 평생 그 맨얼굴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영화는 2005년 엄 대장이 주축이 됐던 '휴먼 원정대'의 히말라야 원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등반 도중 사망한 동료들의 시신을 찾아 내려오기 위한 목숨을 건 원정이었다. "어떤 명예도 보상도 돌아오지 않을" "산악 역사상 그 누구도 하지 않았던 도전"이었다. 원정대를 꾸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엄 대장에게 선배 산악인이 "왜 이러느냐?"고 묻는다. 그를 향해 영화 속 엄 대장은 절규한다. "내려와야지. 거기서 삽니까?"

히말라야는 상당 분량을 네팔과 몽블랑 등 고산지대에서 촬영했다. 산을 배경으로 산악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산악 영화'다. 하지만 웅장한 설산을 정복한 영웅들의 성공담과는 거리가 멀다. 굳이 얘기하자면, 산을 오르려 나섰다가 산속에서 목숨을 잃은 이와 그 이의 시신조차 수습하는데 끝내 실패한 동료들의 이야기다. 그런데도 영화관을 찾는 이들이 줄을 잇는 건 사람살이의 많은 미덕은 성공보다 오히려 실패 속에서 더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바움가르트너가 지적했듯, 인간은 결코 우주와 자연을 상대로 이길 수 없다. 자연을 상대로 한 도전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성공은 그저 살아남는 것뿐이다. 어쭙잖은 등산객들은 자주 '정복'하기 위해 산에 오른다. 하지만 '산쟁이'들은 자연 앞에서 한없이 왜소하고 보잘것 없는 인간의 모습을 직시하기 위해 산에 오른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리 높은 봉우리에 올랐더라도, 이내 다시 내려온다. 인간이 발붙이고 살 곳은 결국 8천 미터 정상이 아니라 땅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영화 히말라야의 미덕은 '휴먼 스토리'다운 뻔한 감동이다. '동료의 시신을 찾기 위해'라는 거창한 명분이 붙긴 했지만, 사실 희생이니 사랑이니 하는 것들은 이미 많은 영화에서 닳고 닳은 상투적이기 그지없는 '감동 코드'다. 그래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선 이의 준엄한 시선으로 내려다 보면 이 영화는 분명 상업적인 신파다.

하지만, 땅으로 내려와서 주변을 둘러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그 상투적인 신파에 담긴 가치보다 더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게 무엇이 얼마나 있을까? 얼마나 거창한 도전이나 성공, 명예나 보상이 그 뻔한 미덕을 능가할 수 있을까?

영화 속에서, 눈보라 치는 설산 속에 무택이 고립됐다는 사실을 들은 선배 산악인은 무택을 구조하러 가 달라는 무전 요청에 주저한다. 눈보라가 잦아지면 팀을 이끌고 정상 도전에 나서야 하는 탓이다. 어렵게 얻은 정상 등정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끝내 구조 요청을 외면하는 그에게 선배 산악인이 무전기를 통해 호통을 친다. "사람이 없으면 산이 뭔 놈의 의미가 있노?" 절규에 가까운 호통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면서 깨닫게 된다. 5천 미터가 됐든 8천 미터가 됐든, 땅에 발 딛고 사는 인간들에게 산은 결국 "내려와야" 할 곳일 뿐인 것을. 정상만 쳐다보며 사는 인간들은 그 쉬운 진실을 너무 쉽게 잊고 산다.

 
출처 : SBS 뉴스
원본 링크 :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339300&plink=SPECIAL&cooper=RSSXML&google_editors_picks=true&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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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난 예수를 따르는 사람, 죽음 두렵지 않아"  (0) 2021.06.04
Posted by 작은샘

org date: 2012-10-20 10:16

 

지금까지 설교할 기회가 별로 없어서 설교할 기회만 있으면 나름대로 잘할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본문에 대한 분석과 묵상 등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준비하는 시간동안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도
경험했다. 

한 때 매주 주일 오전 예배 설교를 준비할 때 잘 아는 본문을 어떻게 새롭게 깊이 있게 묵상하고 
전해야 하는가 하는가 하는 부담때문에 힘든 적은 있었다. 그러나 두렵지는 않았다.

그런데 요즘 매주 정기적으로 설교하면서 두려움을 느낀다.  특히 히브리서에서 한 인물의 삶이 
한 줄로 요약되는 것을 보고 짧은 구절에 압축되어 담긴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풀어내야 하는가 하는 
것 때문에 두렵다. 

설교 한 편 준비하는데 2,3일 정도의 시간은 부족하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4,5일은 있어야 충분한 
준비와 묵상이 될 것 같다. 설교문 작성과 교정에만 이틀을 잡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겨우 틀을 갖추어 
다듬는 정도 밖에 안 된다.  항상 아쉬웠다.  더 임팩트를 주고 더 통찰력있는 메시지로 다듬을 수 있는데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다. 

아직 담임하는 교회도 없지만 이제 중견 목회자의 나이가 되어서 책임감이 느껴진다.
성경을 강해하고 설교할 때 수박겉핡기 식의 어설픈 묵상을 더 이상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봐주는 
사람은 없지만 이제 후배 목사들에게 본이 되고 이끌어 가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더 이상 선배 목사
들만 바라보고 갈 수는 없다. 원문 분석도 해 보아야 한다.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견해와 자료도
덜 신뢰해야 할 것 같다. 내가 그 나이가 되고 보니 그들의 부족함과 실수, 어설픔이 보인다. 

그래서 더 시간을 내서 연구하고 분석해야 할 부담이 느껴진다. 

 

한편 설교 준비만 해도 시간이 많이 필요한다.  그런데 여러가지 일에 신경쓰면서 목회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는지 잘 이해가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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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샘

org date: 2012-01-27 21:49

 

최갑종 교수 - 고신대(1974, Th.B.)와 고려신학대학원(1977, M.Div.)을 졸업한 뒤 미국에서 리폼드 신학대학원(1982, MA in Biblical Studies), 칼빈 신학대학원(1984, Th.M.), 프린스턴 신학대학원(1986, Th.M.), 덴버대학교·아이립 신학대학원 공동 박사학위(1998, Ph.D.) 등을 나왔다. 현재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 한국기독교학회 회원, 한국개혁주의신학회 회원, 한국복음주의신학회 부회장으로 있다.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RkzJ/14484

 

[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는가?]

                                                                                                             최갑종   /   2008.05.31 22:54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의 진정성을 부인하는 것은 사본학적으로 볼 때 설득력이 약하며 본문 구절을 고대 헬라의 문화-사회학적으로 살펴볼 때 이 구절은 여성의 성직 안수를 반대하는 근거로 보기에는 부당하다.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에서 사도 바울의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교훈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교회 안에서 여성의 성직 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한다. 반면에 여성의 성직 안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만날 때마다 설명하는 일에 적지 않은 부담을 느낀다. 지난해 「목회와신학」에서 여성 안수 문제와 관련한 글이 여러 차례 실렸는데,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에 대한 해석은 항상 논쟁의 한 축이 되어 왔다.


예를 들면, 교회 안에서 여성의 인권 신장과 여성 안수를 지지하는 김세윤 교수(미국 풀러신학교 신약학)는 2004년 5월호에서 “성경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나”(5월호, pp.56~71)와 “서창원 목사의 ‘여성 안수 허용 문제에 대한 이의 제기’에 답함”(11월호, pp.186~199)에서 사본학적 이유를 들어 고린도전서 14절 34~35절을 후대에 삽입된 비 바울적인 본문으로 단정함으로써 논점의 아킬레스건을 피해 갔다.

반면에 서창원 목사(서울 삼양교회 담임)는 김세윤 교수의 주장을 반박하는 “여성 안수 허용 문제에 대한 이의 제기”(10월호, pp.200~207)에서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의 진정성(眞正性)을 거듭 주장함으로써 바울이 여성의 성직(목사, 장로, 감독, 안수 집사)을 명백하게 금하고 있다는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본문 말씀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그것을 후대에 첨부된 비 바울적인 것으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여성의 성직 안수를 명백하게 금하고 있는 바울의 가르침으로 봐야 하는가? 본고에서 두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의 진정성을 부인하는 것은 사본학적으로도 설득력이 약하다는 점이다. 둘째, 본문 구절을 고대 헬라의 문화-사회학적으로 살펴볼 때 여성의 성직 안수를 반대하는 규범적인 성경 말씀으로 보기는 부당하다는 점이다.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의 진정성


과연 본문 말씀은 진정성을 갖고 있지 못하는가? 김세윤 교수를 비롯해 여러 학자들(J. Weiss, C. K. Barrett, H. Conzelmann, G. D. Fee, J. M. Ross, R. W. Allison, P. B. Payne, R. B. Hays)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후대에 첨가된 비 바울적인 본문이라고 단정한다.


첫째, 서방 계열의 사본들인 D, E, F, G, 88, 소수의 라틴 사본들 d, e, f, g, 그리고 4세기 교부 암부로시에스터(Ambrosiaster)가 이 구절을 생략하거나 40절 이후에 배치하고 있다. 둘째, 34-35절에 대해 진정성을 가진 바울의 기록으로 볼 경우, 이것은 바울이 교회 안에서 여성의 기도와 예언 활동을 분명히 허용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1장 5절과 모순을 일으킨다. 셋째, 34~35절은 예언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전후 문맥의 흐름과 일치하지 않는다. 넷째, 34절에서 ‘성도의 교회’라는 말과 바울이 자신의 주장을 ‘율법’에 호소하려는 내용이 바울의 통상적 언어 용법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상당수의 다른 학자들(Antoinette Clark Wire, Curt Niccum, Anthony C. Thisleton, David E. Garland)은 위의 이유들이 설득력을 갖지 못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여성 안수 문제와 관계없이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의 진정성을 계속 유지하려 한다.

첫째, 몇몇 서방 계열의 사본들이 이 본문을 생략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현존하는 대다수의 고대 사본들과 번역본들 이를테면 p46, a, B, A, 33, 88mg, Origen, Chrysostom, Theodoret 등 교부들의 증언과 Vulgate, Old Syriac, Coptic, Armenian, Ethiopic, Georgian, Slavonic 등 역본들과 Lectionaries 그리고 대부분의 다른 사본들이 34~35절의 본문을 유지하고 있다. 사본학적으로 보면 34~35절을 생략하는 증거들은 연대적으로 후대에 속하며, 지역적 분포로 보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서방에 편중돼 있다. 반면에 34~35절을 유지하는 증거들은 연대적으로 훨씬 앞서 있고, 지역적으로도 동방과 서방 교회를 포함해 전 중동 지역에 분포돼 있다. 따라서 사본학적 면에서 34~35절을 생략하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더 설득력을 지닌다. 그래서 현재 학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희랍어 성경, NA 26판 및 27판, UBS 3판 및 4판은 모두 34~35절을 유지하고 있다. UBS 4판은 각주에서 34~35절을 ‘B’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런 평가는 본문의 진정성이 거의 확실하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과 11장 5절의 모순 문제는 양 본문을 어떻게 접근해 해석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답변이 달라질 수 있다. 성경에 보면, 같은 저자의 글이지만 서로 모순인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경우마다 한 본문의 진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나 서로의 모순을 피하기 위해서 다른 본문의 진정성을 배제시킬 수는 없지 않는가? 만일 고린도전서 11장 5절이 여성 전체에 관한 일반적인 원리를 말하고 있고, 반면에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이 어떤 결혼한 여성들의 지나칠 정도의 무례한 행위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한다면, 양 본문이 서로 모순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셋째, 34~35절이 예언의 문제를 취급하고 있는 전후 문맥의 흐름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본문의 몇몇 단어들이 바울의 일반적 언어 용법으로 볼 때 낯설다는 주장도 어떤 관점에서 본문의 주제나 흐름을 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의견이 달라질 수 있다. 몇몇 주석가들(E. Ellis, B. Witherington, A. C. Thiselton)에 의해 세심하게 연구된 것처럼, 34~35절에 나오는 중요 어휘들이 이미 그 앞 절에서 사용되고 있다. 곧 34~35절의 핵심 단어들인 ‘말하다’(14, 32절), ‘잠잠하다’(28, 30, 34절), ‘교회 안에서’(28, 35절), ‘복종하다’(32, 34절)가 그 앞 절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이 후대에 삽입된 비 바울적인 것이라는 주장은 사본학적으로 내외적 증거들로 보아 그 설득력이 매우 약하다. 오히려 사본학적 증거들은 34~35절이 본문의 진정성을 옹호하고 있다. 만일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이 진정성을 가진 바울의 본문에 속한다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바울의 가르침을 여성의 성직 안수를 반대하는 성경적 근거로 삼을 수 있는가? 문제는 바울이 누구에게, 무슨 이유로, 어떤 배경에서, 무엇을 주장하기 위하여 이 말을 했는가 하는 점이다.
 

고대 헬라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

고대 헬라 사회에서 남성은 그 신분과 존재에서 원천적으로 여성보다 우월하며, 따라서 여성은 남성의 지배를 받은 것이 일반적이다. 남성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여러 영역에 관여해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반면에, 여성의 위치와 역할은 남성의 영역에 관여할 수 없었고 주로 가정에 제한돼 있었다. 주전 4세기 아덴에서 여자들은 가까운 친척을 제외하곤 자신의 얼굴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아야 했다. 심지어 결혼하는 처녀는 신랑이 자신의 얼굴을 보는 첫 번째 사람이 되도록 했으며, 결혼한 후에 남편이 자기 아내의 얼굴을 대중 앞에 노출시키게 될 경우에 그는 자신의 얼굴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간주했을 정도다. 고전적인 아덴의 법에 따르면, 아내 된 여자가 가정을 떠나 대중들 앞에 나서게 되면 그 여인은 남편으로부터 부정하게 간주돼 이혼을 당할 수도 있었다(Plutarch, Bride 31, Mor. 142CD).

일반적으로 고대 헬라 세계에서 정숙한 여자들은 결혼하기 전에는 자기 아버지의 허락 없이, 결혼한 후에는 남편의 허락 없이 일절 집을 나서지 않았다. 결혼한 여자들은 남편이 정치적이든, 사회적이든 혹은 개인적이든 집을 나설 때 따라나서는 것은 금기 사항이었다. 부인이 남편과 동행해 참석한 파티 장소에서 술을 마시게 될 경우, 그것은 남편과 자신에게 모두 수치스러운 일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창녀들만이 남자들과 함께 술을 마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결혼하기 전에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 아래 복종하고 결혼한 후에 남편에게 복종하면서 가사 일에 매달리고 아이를 낳아 양육해야 했다. 그리고 집안에도 외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거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여인의 방’이라는 별채에 머물러야만 했다. 여자들이 부득이 집을 나서게 될 경우, 남자들에게 일절 말을 할 수 없었다. 유리피데스(Euripides)는 “결혼한 여자가 젊은 남자와 함께 서있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자 특히 결혼한 여자가 거리에서 젊은 남자와 함께 있으면, 수치스러운 일을 한 여자나 창녀로 취급받았다.

1세기의 헬라 작가 플루타르크(Plutarch)는 「신부와 신랑에게 주는 충고」라는 책에서 “결혼한 여자는 집안에 머물러야 하며, 손과 발과 얼굴을 제외하고 어떤 신체도 일반 사람들에게 노출시키지 않아야 하며, 밖에서 말을 하지 않아야 하고 매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라고 적고 있다. 여자가 말을 하고 싶으면 자기 남편에게만 하거나 남편을 통해 말해야 하며, 바깥에서 직접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드러내는 수치스러운 일이나 남편을 욕되게 하는 일로 간주되었다.

물론 바울 당대에 마케도니아 여성들은 사도행전 16장 14~15절과 빌립보서 4장 2~3절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고대 헬라 지역의 여성들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렸다. 집안 일은 물론이고 장사를 포함해 시의 관리나 민중의 주요 제사와 국가 제사의 여사제로 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자 종들이나 노예들은 일반 여자들에게 적용되는 사회적 규범이나 제약에 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집안에 있는 여주인을 대신해 외부 세계에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대중들이 사용하는 샘에서 물을 길어오거나 기타 다양한 심부름들을 하기 때문이었다. 시골에서 남편과 함께 농사를 짓는 가난한 농부의 아내들에게도 이 같은 규범들이 엄격히 적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대다수 헬라 여성들은 철저하게 남자들에게 예속돼 있었고, 남자들이 하는 일에 함부로 관여할 수 없었다. 헬라 세계에서 여성들을 남성들에게 종속시키게 된 배경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처럼(Aristotle, Generation of Animals, Ⅱ. 3-4, Pol. 1.2.12, 1254b), 여성들은 존재론적으로 남성들에 비해 불완전하고 하급 존재에 속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이한 것은 세속적 영역에서 종교적 영역으로 방향을 돌릴 경우에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는 점이다. 종교적 영역에서 헬라 여성들의 역할은 보다 개방적이고 적극적이었다. 정치적, 사회적 영역에서 성적 불평등이 종교적 영역에서 거의 사라졌다. 여자 사제들은 남자 사제들과 똑같은 의무와 책임을 갖는다. 모든 여성들은 사회적 신분에 관계없이 성전의 모든 장소에 자유롭게 접근하고 기도와 제사 행위에 참여할 수 있었다. 심지어 어떤 여자 사제들은 국가적 제사를 집전했으며, 신탁의 전달자가 되곤 했다. 따라서 헬라 사회의 여성들 중에 종교 행위 참여를 자신의 신분 상승의 기회로 삼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여자가 종교적 영역을 통해 더 높은 영역 곧 남자의 영역에 속하기 위해 엄청난 장애물을 극복해야만 한다. 여자가 남자의 영역에 도달하기 위해선 성전에 가서 모든 사람들이 성전을 떠난 다음에도 남아서 기도에 전념해야 하며, 감각적이고 육적인 여자의 영역을 벗어나 영적인 남성의 영역에 도달하기 위해 성생활을 멀리하는 금욕적인 생활에 힘써야 했다.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의 의미

앞서 살펴본 것처럼,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의 진정성을 거부하기 어렵다고 한다면, 이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바울은 본문에서 너무나 단호하고 분명하게 “여자는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어떤 면에서 여자가 말할 수 있고, 어떤 면에서 여자가 말할 수 없는지에 대해 선을 긋거나 구분해 말하고 있지 않다. 바울은 교회에서 여자들이 설교나 가르치는 것은 할 수 없고 그 대신에 예언, 방언, 기도 및 찬송 등은 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바울은 아무런 조건을 제시하지 않고 여자들은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구절에서 바울이 모든 여자들은 교회에서 일절 말하지 말고 잠잠해야 함을 가르친다고 봐야 하는가? 만일 우리가 본문을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면, 바울이 이미 고린도전서 11장 5절과 39절에서 여자들이 예배 때에 남자와 마찬가지로 기도와 예언을 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과 정면으로 대립할 뿐 아니라, 바울과 함께 사역한 여러 여성 지도자에 대해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바울 서신에 종종 등장하는 브리스가, 뵈뵈, 순두게, 유니아, 눔바 등 많은 여성 사역자들이 교회 안에서 일절 말하지 않아야 했다면 그들이 어떻게 교회의 지도자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바울이 여자들에게 교회에서 일절 말하지 말고 잠잠해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는 식으로 쉽게 결론을 내려선 안 된다.

또한 본문에서 바울이 어떤 것은 말할 수 있고 어떤 것은 말할 수 없다는 식의 인위적으로 선을 긋고 있는 것처럼 봐서도 안 된다. 여기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바울이 왜 고린도교회 여자들을 향해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가르치는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바울이 여자들에게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는 이유를, 당시 고린도교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여자 성도들 특히 가정을 갖고 있던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 일으킨 분쟁과 예배시의 무질서를 경계하고 예방하기 위함으로 본다. 여기서 바울이 일반 여성 전체를 두고 말하기보다 남편이 있는 기혼 여성들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이 고린도 지역에 복음을 전할 당시 헬라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예속돼 있었고, 남자들이 있는 공중 장소에서 여자들이 함부로 나서거나 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여자들의 활동 영역은 가정에 제한돼 있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 차별이 철폐되고 동등하다는 바울의 복음이 고린도 지역에 선포되었을 때 특히 여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하다. 아마 교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여자들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자신들의 가정과 사회에서 누릴 수 없는 자유 곧 남녀가 동등하게 예배에 참여할 수 있고 방언, 예언 등 성령의 은사에 참여할 수 있으며, 부부 생활에서도 남편과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주어졌다는 가르침을 받았다(고전 7:2~6). 그때 여자 성도들 중에 일부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와 남녀의 동등권을 남용해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세우신 남녀의 신분과 역할의 차이는 물론이고 결혼과 부부 생활까지 거부하며 심지어 가정과 교회를 혼동해 교회 안에서까지 남자와 같이 행동하려는 극단적인 상황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그들은 가정과 교회, 특별히 공중 예배 때에 일부 여성도들이 당시 사회에서 금기로 여겼던 통념을 깨고 자신들의 남편을 제쳐두고 다른 남자들에게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큰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여성도들에게 여자들은 자기 남편들이 함께 있는 교회의 모임 중에는 다른 남자들에게 말하지 말고 잠잠하며 오히려 궁금한 점이 있으면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물어보라는 특수한 교훈을 줘야만 했다.

따라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11장 34~35절의 본문을 바울이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 모든 여자들은 교회에 와서 집으로 갈 때까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일절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는 일반적인 명령을 하는 것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예배 때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고린도교회의 몇몇 기혼 여성도들에게 주는 특수한 명령으로 봐야 한다. 바울이 전후 문맥에서 계속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은 교회 예배의 질서이다. 그는 14장 34~35절의 본문 앞에 예배 질서에 대한 교훈을 주는 문단을 두고 있다. 즉 문단이 시작되는 14장 26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 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면서, 문단이 끝나는 33절에서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라고 가르치고 있다. 교회의 예배에 반드시 질서가 있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아무리 예배 때에 어떤 개인에게 찬송과 말씀과 계시와 방언의 은사가 주어졌더라도 회중에게 덕이 않되면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도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한다(14:27~28). 비록 자신에게 계시가 주어졌더라도 옆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계시가 주어졌으면 잠잠하라고 한다(14:30). 그런 후에 구체적인 실례로서 교회에서 여자들이 잠잠해야 한다고 교훈하고 있다. 그리고 40절에서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면서 14장을 종결한다. 바울은 방언과 계시가 남자들에게만 주어진 특수한 은사라고 말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14장 5절에서 고린도 성도들이 모두 방언과 예언하기를 원한다고 할 때, 또 14장 39절에서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라”고 명령할 때, 바울은 남자만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14장 31절에서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라고 말할 때도 여성도들을 제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방언과 예언과 말씀을 배우는 일에 여성도들이 참여할 수 없다는 점이 아니라 이 모든 일에 질서가 있다는 점이다.

바울이 14장 34~35절에서 교회의 여성도들 특히 결혼한 여성도들이 공예배시에 잠잠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여자로서 할 수 없는 방언과 예언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행위를 통해 공예배의 질서는 물론이고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구분돼 있는 가정의 질서를 어지럽혔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여성도들은 성령 체험을 통해 자신들은 이미 모든 영역에서 남녀의 역할과 신분의 차이를 극복한 자들로 자처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만일 고린도 성도들이 공예배시에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았다고 한다면, 바울은 그런 교훈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바울이 로마교회나 갈라디아교회나 그밖에 다른 지역의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 동일한 교훈을 주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고린도 교회 여성도들이 공예배 때 질서를 어지럽혔다고 한다면, 교회와 가정의 질서 유지를 위해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여성도들이 교회 질서를 혼란하게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그들을 향해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하는 것은 극히 부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에서, 마치 바울이 시대와 장소와 여건을 초월해 여자들에게 무조건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교훈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고린도 교회 여성도들은 어떻게 교회의 예배와 가정의 질서를 어지럽혔는가?

우리는 바울이 14장 35절에서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라고 말하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예배의 질서를 어지럽힌 자가 결혼한 여성도들이라는 것과 그들이 자신들의 남편을 제쳐 두고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남자 교우들)에게 질문을 제기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바울은 집에서 자기 남편과 더불어 사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을, 교회에 와서 다른 남자들과 해결하려는 것은 교회와 자신의 남편을 동시에 부끄럽게 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본문에서 질문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선행 문단이 방언과 예언과 계시에 관해 말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아마 교회 예배 중에 방언과 예언과 계시 혹은 가르침이 주어지고 있을 때 그들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기 위해 소란을 피우면서 질문들을 던진 것 같다. 바울이 제기한 질문을 자신들의 남편들에게 집에서 물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방언, 예언, 계시보다 오히려 말씀에 대한 가르침일 가능성이 더 크다.

만일 그렇다면 여인들의 질문은 마치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님이 예배 중에 말씀을 설교하거나 가르칠 때, 어떤 무식한 여자 교우가 주제 넘는 질문을 던져 예배를 방해하는 일과 유사한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예배 중에 남자들이 아니라 왜 여자들이 질문을 제기했는가 하는 점이다. 바울이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 수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우리는 적어도 여성도들의 남편들은 자신들의 아내들이 궁금해 하는 문제를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여자들은 쉽게 이해할 수 없어서 그와 같은 질문을 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당시에 헬라, 로마, 유대의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거나 제한돼 있었다. 유대 사회에서 여인들은 회당이나 학교에서 율법을 배우는 기회를 갖지 못했으며, 헬라 로마 사회에서 여인들은 가장 기본적인 공교육의 내용인 수사학도 가르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여자들은 대체로 남자들에 비해 이해의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 여성도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남자들보다 이해의 수준이나 능력이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여성도들이 예배 중에 터무니없는 질문도 제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여자들은 본성적으로 남자들보다 이해의 수준과 능력이 뒤떨어진다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바울은 어디까지나 당대의 사회와 문화적 관습 아래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당시 여인들이 대부분의 정보와 지식을 가정에서 남편에게 의존하고 있던 것처럼, 교회의 여성도들도 교회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들에 부딪혔을 때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남편에게 물어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왜냐면 여자들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는 당대의 사회적 문화적 규범으로 볼 때, 여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자신의 남편을 제쳐 두고 다른 남자들에게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일종의 성적 유혹으로 간주될 정도로 자기 남편에게도 대단히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율법에 호소해 남편과 아내 사이에, 남자와 여자 사이에 유지돼야 할 올바른 질서를 회복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왜냐면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에 교회가 부도덕한 집단으로 비쳐져 선교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바울은 복음 안에서 주어지는 남녀 동등함의 자유를 인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자유가 성도들이 살고 있는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환경에서 부도덕한 일로 간주될 때, 그 자유의 사용을 부분적으로 제한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 안수와는 전혀 다른 문제다.

 
나가는 말: 바울과 여성의 안수

여성의 성직 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을 고린도전서 11장 2~15절, 디모데전서 2장 8~15절과 함께 사도 바울의 여성 안수 금지를 위한 규범적인 본문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고린도전서 11장 2~15절과 디모데전서 2장 8~15절도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처럼, 고린도교회와 에베소교회의 여성도들 중에 복음의 자유를 남용하거나 곡해해 남자와 여자의 구분과 남편과 아내의 질서까지 부정해 가정과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선교의 문까지 닫게 하는 위험을 주는 자들에게 주는 바울의 특별 교훈으로 봐야 한다.

우리가 이 구절들을 예배 때 머리에 수건을 쓰라는 권면이나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문안하라는 권면(롬 16:16, 고전 16:20)처럼,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사회적 특수한 정황에 비춰 해석해 그 의미와 메시지를 오늘에 적용시키지 않고 보편적이고 규범적인 구절들로 받아들인다면, 오늘날 교회 안에서 여성이 가르치고 말하는 모든 행위들을 전면 중단해야 한다. 교회는 여성가대원, 주일학교 여교사, 여전도사 등을 세우지 말아야 하고 신학교는 여자 신학도에게 입학을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 또 목사 후보생을 가르치는 여성 신학 교수도 둘 수 없게 된다. 여성들은 교회에 올 때 반드시 머리에 수건을 써서 자신의 얼굴을 노출시키지 않도록 당부해야 하고, 교회 안에서 여성도들은 어떤 경우이든지 말하지 말고 잠잠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물론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 ‘여자들은 예배 때 머리에 수건을 쓰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인사하라’는 권면을 현재 우리 교회 안에서 그대로 적용시키지 않는다고 해서, 이런 구절들을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신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오해해선 안 된다. 바울은 이 구절들을 통해 모든 시대에 적용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 ‘머리에 수건을 쓰라’는 권면에서 예배 때 여자가 갖춰야 할 마땅한 태도에 대한 메시지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인사하라’는 권면에서 성도간의 우의와 사랑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이처럼 ‘교회 안에서 모든 여성도들이 말하지 말고 가르치지 말며 남자를 주관하지 말라’는 교훈에서도 모든 시대를 초월해 선포되는 남녀의 구분과 가정과 교회 안에서 지켜야 할 남녀의 질서에 대한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어떤 성경 구절이 시대와 문화에 매여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가질 수 없다는 것으로 곡해해선 안 됨을 강조하고 있다. 어떤 성경 구절을 문화-사회학적으로 혹은 역사-문학적으로 접근해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와 영감에 도전하는 일로 오해하는 것은, 마치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강조를 신성에 대한 도전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점이다. 예수님의 인성에 관한 올바른 이해 없이 예수님의 메시아적 인격과 사역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성경에 대한 역사-문화적, 문화-사회학적 접근 없이 성경의 메시지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이런 해석학적 관점과 동시에 우리가 염두에 둬야 할 것은, 바울 서신의 특수한 구절들을 해석할 때 그것을 바울의 일반적이고 통일성 있는 교훈과 연관시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바울의 서신에서 이해하기 힘든 다양한 교훈들을 만나더라도, 바울이 스스로 모순을 범하고 비논리적이며 비체계적인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일관성과 통일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우리가 느끼는 모순과 비일관성은 어떤 면에서 바울의 문제이기보다 접근하는 우리 자신의 문제로 일어나는 것이다.

필자는 바울 신학을 제시하면서 바울 신학 전체를 묶는 어떤 일관성과 통일성을 가진 중심 사상이 있음을 확인한 바 있다. 그것은 바로 ‘창조’, ‘타락’, ‘구속’, ‘재창조’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속사에 입각한 종말론과 그 종말론의 내용을 형성하고 있는 기독론과 성령론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이런 관점에서 인간과 세계 역사의 모든 문제들을 보고 있다. 교회 안에서 여성의 역할 문제도 예외가 아니다. 바울은 남녀 관계를 포함해 모든 인간 사회의 문제들이 아담의 범죄로 타락하고 죄로 오염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속되었고, 이제 그리스도와 그의 보내신 성령 안에서 새롭게 회복되는 새 창조 사역이 이뤄지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바울에게 새 창조는 단순히 아담의 타락 이전으로 복귀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있다. 그것은 타락 이전보다 더 고차원적인 새로운 창조이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원문의 뜻은 ‘새로운 창조’)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선언할 때, 이것은 그야말로 옛 창조와 대비되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창조를 의미한다. 또 갈라디아서 6장 15절에서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원문의 뜻은 ‘새 창조’)만이 중요하니라”라고 선언할 때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새 창조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리고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서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바울의 가르침은 신약 교회 안에서 여성의 역할 문제를 첫 창조나 구약 시대의 관점에서만 보아선 안 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여성의 역할 문제를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이뤄지고 있는 새 창조의 관점에서 볼 것을 시사한다.

사실상 바울은 자신의 목회와 선교 사역에서 그가 살고 있던 헬라와 로마와 유대의 가부장적이고 남성 위주의 문화를 뛰어넘어 적지 않은 여성 사역자들을 동참시킴으로써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이뤄지고 있는 새 창조를 이미 부분적으로 적용하고 실천했다. 다시 말해 새 창조는 ‘아직’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미래적인 것만이 아니라, 비록 그 완성은 주님의 재림으로 ‘이미’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오심으로 지금 여기서 이뤄지고 있는 현재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14장과 디모데전서 2장에 나타나 있는 바울의 강하고 부정적인 교훈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도 바울의 구속사적이고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이해해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새 창조를 말하고 있더라도 새 창조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옛 세계와 함께 공존한다. 다시 말해 ‘이미’(새 창조 세계)와 ‘아직’(옛 창조 세계)이 함께 공존한다. 이런 사실 때문에 비록 어떤 것이 ‘이미’의 관점에서 보면 가능하더라도, ‘아직’이라는 세계와 문화와 역사의 구조를 함부로 뛰어넘을 수는 없을 뿐더러 때로 제약을 받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고린도 교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 교우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과 성령 체험을 통해 자신들이 마치 이 세상을 초월할 수 있는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착각하면서 부부 생활과 결혼까지 거부하고, 당시 고린도 교회가 처해 있던 문화와 사회적 정황을 혁명적으로 뛰어넘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구조를 교회 안에서 만들려고 했다. 이것은 결국 가정의 파괴와 교회의 무질서는 물론이고 교회의 선교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여성 교우들에게 특별 교훈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원리적으로 여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와 차별 없이 동등하게 되었더라도 여자들이 누릴 수 있는 원리적 자유 됨이 특수한 교회의 상황에서 오히려 부작용을 초래할 경우에 그것은 유보되거나 제한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면 여성에 관한 바울의 ‘이미’와 ‘아직’에 관련된 교훈이 서로 상치될 때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떤 교훈을 우선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교회와 교단 그리고 교단이 서 있는 시대적 정황에 따라 다소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아직’에 대한 교훈을 ‘이미’에 대한 교훈의 빛 아래서 이해하고 적용하고 그 반대라면 안 된다는 점이다. 즉 고린도전서 12, 14장, 디모데전서 2장에 나타나 있는 여성의 역할과 위치에 관한 부정적 교훈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 고린도후서 5장 17절, 고린도전서 12장 13절의 긍정적 본문에 비춰 해석해야지 그 반대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옛 창조가 새 창조의 빛 아래서, 특별한 교훈이 보편적인 교훈 아래서, 과거가 미래의 빛 아래서 해석돼야지 그 반대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른편으로 돌아가는 시계의 시침이 왼편으로 되돌아 갈 수 없는 것처럼, 옛 창조는 새 창조를 향해 ‘아직’은 ‘이미’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지 그 반대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주후 1세기 헬라-로마-유대의 남존 여비와 가부장적 사회 구조 안에서도 초기 기독교가 여성의 문제에 관해 혁명적이라고 할 만큼 ‘이미’ 앞섰다면, 지금 남녀평등과 여성의 인권이 보장된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가 일반 사회보다 ‘아직’ 뒤떨어져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이제 한국 교회는 여성의 성직 안수를 포함해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을 제한하는 모든 제도와 법을 과감하게 개선하고 오히려 사회를 선도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이 땅에서 인종과 신분과 성차별이 없는 새 창조와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진정한 주역이 될 수 있다.


주(註)1. 이 글은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 아래 수행 중인 “고대 헬라-로마-유대 사회와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관한 연구”에 부분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밝혀 둔다.
                                                                                        

                                                                                                               최갑종 | 2005. 7.

Posted by 작은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