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삶

org date: 2012. 1. 11. 22:50

 

마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주는데 익숙하지 않다. 예수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내어주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십자가의 복음의 의미이다.  복음을 전한
다고 하면서 말로만 하고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의 사랑,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을 보여
주지 않으니 복음의 능력이 발휘되지 못한다. 전도를 당하는 사람들은 전도지를 나누어주
면서 전도하는 사람, 들이대는 사람들을 뭔가 자신들로부터 뺏어가는 사람으로 인식하기 
쉽다. 내 시간, 내 돈, 가정의 평화를 뺏어가고 오래동안 지켜온 내 가치관이 판단받고 무시
당하는 것 같을 것이다.

지금의 교회의 전도에 대한 인식이 뭔가 뺏는 것이라는 것은 교회 내에서도 마찬가지로 여겨
진다.  교회간의 수평이동이 그것이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개척교회부터 뭔가 번듯하게
건물을 세우고 안정을 취하고 싶은 100 -200 명 정도의 교인 수의 교회들은 절박하다. 

한 사람, 한 가정이 아쉽다.  그래서 전도가 뺏는 생존경쟁으로 비추어지는 것이 불편한 진실
이다. 각종 편의 제공과 익명성의 잇점이 있는 대형교회들은 더욱 많은 교인을 빨아들인다.
그러고도 중형교회들로 나누어지기를 거부한다. 

'뺏는' 목회는 약육강식의 세상과 닮아 있다. 세상은 점점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더욱 
뺏는 것이 정당화되고 있다.  시장경제가 더욱 그렇다.  능력있는 자가 더 많이 차지하는 것
이 당연시 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뺏는'목회는 아무런 설득력도 없고 기독교 정신도 아니다. 복음은 사랑이다.
나 자신까지 내어주는 사랑이 예수님의 복음을 잘 표현한다.  뺏으려는 탐욕을 감추고 사랑을
가장하면 상대방은 그것을 알아챈다.  그냥 조건없이 주어야 한다. 

주는 것은 내가 가장 못하는 것이다.  그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 여기고
주는 것도 사양하고 내가 잘 주지도 못한다. 이런 내가 사랑의 목회로 교회를 시작한다면 
얼마나 어려울까?  나도 이렇게 어려운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는 사랑으로 전도하고 
그 사람이 또 그 같은 사랑을 보여주기를 기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그래도 그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이고 전도의 바른 길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생존에
얽매이지 않고 사랑에 집중하고 사랑의 복음 사역에 집중하는 교회를 세워갈 수 있을 것 같다. 
수에 얽매이지 말고 동역하는 사람이 있는 한 계속해서 사랑의 사역에 힘쓰는 교회라면 끝까지
해볼만 하지 않은가? 주위의 교회를 긴장시키지 않아도 된다. 경쟁이 아니라 사랑으로 대하면
된다.  내 교회 주위에 많은 교회가 있으면 어떤가? 사랑의 사역을 하는 교회는 많아서 나쁠
것도 없다. 크기가 작아도 할 일은 있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서로 도우면 된다. 
번듯하게 이름을 내고 폼을 잡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작은 교회들이 
나아가야할 방향이 아닐까? 

개척교회 목회자들은 많이 지쳐있다. 매일 생계를 걱정해야 한다. '뺏는'목회의 현실에서 사
랑을 베풀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 모른다.  좀 경제적 여유가 있는 교회에서 
이런 개척교회들을 도우면 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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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