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삶

org date: 2012-01-27 21:49

 

최갑종 교수 - 고신대(1974, Th.B.)와 고려신학대학원(1977, M.Div.)을 졸업한 뒤 미국에서 리폼드 신학대학원(1982, MA in Biblical Studies), 칼빈 신학대학원(1984, Th.M.), 프린스턴 신학대학원(1986, Th.M.), 덴버대학교·아이립 신학대학원 공동 박사학위(1998, Ph.D.) 등을 나왔다. 현재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 한국기독교학회 회원, 한국개혁주의신학회 회원, 한국복음주의신학회 부회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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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는가?]

                                                                                                             최갑종   /   2008.05.31 22:54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의 진정성을 부인하는 것은 사본학적으로 볼 때 설득력이 약하며 본문 구절을 고대 헬라의 문화-사회학적으로 살펴볼 때 이 구절은 여성의 성직 안수를 반대하는 근거로 보기에는 부당하다.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에서 사도 바울의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교훈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교회 안에서 여성의 성직 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한다. 반면에 여성의 성직 안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만날 때마다 설명하는 일에 적지 않은 부담을 느낀다. 지난해 「목회와신학」에서 여성 안수 문제와 관련한 글이 여러 차례 실렸는데,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에 대한 해석은 항상 논쟁의 한 축이 되어 왔다.


예를 들면, 교회 안에서 여성의 인권 신장과 여성 안수를 지지하는 김세윤 교수(미국 풀러신학교 신약학)는 2004년 5월호에서 “성경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나”(5월호, pp.56~71)와 “서창원 목사의 ‘여성 안수 허용 문제에 대한 이의 제기’에 답함”(11월호, pp.186~199)에서 사본학적 이유를 들어 고린도전서 14절 34~35절을 후대에 삽입된 비 바울적인 본문으로 단정함으로써 논점의 아킬레스건을 피해 갔다.

반면에 서창원 목사(서울 삼양교회 담임)는 김세윤 교수의 주장을 반박하는 “여성 안수 허용 문제에 대한 이의 제기”(10월호, pp.200~207)에서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의 진정성(眞正性)을 거듭 주장함으로써 바울이 여성의 성직(목사, 장로, 감독, 안수 집사)을 명백하게 금하고 있다는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본문 말씀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그것을 후대에 첨부된 비 바울적인 것으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여성의 성직 안수를 명백하게 금하고 있는 바울의 가르침으로 봐야 하는가? 본고에서 두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의 진정성을 부인하는 것은 사본학적으로도 설득력이 약하다는 점이다. 둘째, 본문 구절을 고대 헬라의 문화-사회학적으로 살펴볼 때 여성의 성직 안수를 반대하는 규범적인 성경 말씀으로 보기는 부당하다는 점이다.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의 진정성


과연 본문 말씀은 진정성을 갖고 있지 못하는가? 김세윤 교수를 비롯해 여러 학자들(J. Weiss, C. K. Barrett, H. Conzelmann, G. D. Fee, J. M. Ross, R. W. Allison, P. B. Payne, R. B. Hays)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후대에 첨가된 비 바울적인 본문이라고 단정한다.


첫째, 서방 계열의 사본들인 D, E, F, G, 88, 소수의 라틴 사본들 d, e, f, g, 그리고 4세기 교부 암부로시에스터(Ambrosiaster)가 이 구절을 생략하거나 40절 이후에 배치하고 있다. 둘째, 34-35절에 대해 진정성을 가진 바울의 기록으로 볼 경우, 이것은 바울이 교회 안에서 여성의 기도와 예언 활동을 분명히 허용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1장 5절과 모순을 일으킨다. 셋째, 34~35절은 예언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전후 문맥의 흐름과 일치하지 않는다. 넷째, 34절에서 ‘성도의 교회’라는 말과 바울이 자신의 주장을 ‘율법’에 호소하려는 내용이 바울의 통상적 언어 용법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상당수의 다른 학자들(Antoinette Clark Wire, Curt Niccum, Anthony C. Thisleton, David E. Garland)은 위의 이유들이 설득력을 갖지 못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여성 안수 문제와 관계없이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의 진정성을 계속 유지하려 한다.

첫째, 몇몇 서방 계열의 사본들이 이 본문을 생략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현존하는 대다수의 고대 사본들과 번역본들 이를테면 p46, a, B, A, 33, 88mg, Origen, Chrysostom, Theodoret 등 교부들의 증언과 Vulgate, Old Syriac, Coptic, Armenian, Ethiopic, Georgian, Slavonic 등 역본들과 Lectionaries 그리고 대부분의 다른 사본들이 34~35절의 본문을 유지하고 있다. 사본학적으로 보면 34~35절을 생략하는 증거들은 연대적으로 후대에 속하며, 지역적 분포로 보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서방에 편중돼 있다. 반면에 34~35절을 유지하는 증거들은 연대적으로 훨씬 앞서 있고, 지역적으로도 동방과 서방 교회를 포함해 전 중동 지역에 분포돼 있다. 따라서 사본학적 면에서 34~35절을 생략하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더 설득력을 지닌다. 그래서 현재 학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희랍어 성경, NA 26판 및 27판, UBS 3판 및 4판은 모두 34~35절을 유지하고 있다. UBS 4판은 각주에서 34~35절을 ‘B’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런 평가는 본문의 진정성이 거의 확실하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과 11장 5절의 모순 문제는 양 본문을 어떻게 접근해 해석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답변이 달라질 수 있다. 성경에 보면, 같은 저자의 글이지만 서로 모순인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경우마다 한 본문의 진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나 서로의 모순을 피하기 위해서 다른 본문의 진정성을 배제시킬 수는 없지 않는가? 만일 고린도전서 11장 5절이 여성 전체에 관한 일반적인 원리를 말하고 있고, 반면에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이 어떤 결혼한 여성들의 지나칠 정도의 무례한 행위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한다면, 양 본문이 서로 모순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셋째, 34~35절이 예언의 문제를 취급하고 있는 전후 문맥의 흐름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본문의 몇몇 단어들이 바울의 일반적 언어 용법으로 볼 때 낯설다는 주장도 어떤 관점에서 본문의 주제나 흐름을 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의견이 달라질 수 있다. 몇몇 주석가들(E. Ellis, B. Witherington, A. C. Thiselton)에 의해 세심하게 연구된 것처럼, 34~35절에 나오는 중요 어휘들이 이미 그 앞 절에서 사용되고 있다. 곧 34~35절의 핵심 단어들인 ‘말하다’(14, 32절), ‘잠잠하다’(28, 30, 34절), ‘교회 안에서’(28, 35절), ‘복종하다’(32, 34절)가 그 앞 절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이 후대에 삽입된 비 바울적인 것이라는 주장은 사본학적으로 내외적 증거들로 보아 그 설득력이 매우 약하다. 오히려 사본학적 증거들은 34~35절이 본문의 진정성을 옹호하고 있다. 만일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이 진정성을 가진 바울의 본문에 속한다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바울의 가르침을 여성의 성직 안수를 반대하는 성경적 근거로 삼을 수 있는가? 문제는 바울이 누구에게, 무슨 이유로, 어떤 배경에서, 무엇을 주장하기 위하여 이 말을 했는가 하는 점이다.
 

고대 헬라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

고대 헬라 사회에서 남성은 그 신분과 존재에서 원천적으로 여성보다 우월하며, 따라서 여성은 남성의 지배를 받은 것이 일반적이다. 남성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여러 영역에 관여해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반면에, 여성의 위치와 역할은 남성의 영역에 관여할 수 없었고 주로 가정에 제한돼 있었다. 주전 4세기 아덴에서 여자들은 가까운 친척을 제외하곤 자신의 얼굴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아야 했다. 심지어 결혼하는 처녀는 신랑이 자신의 얼굴을 보는 첫 번째 사람이 되도록 했으며, 결혼한 후에 남편이 자기 아내의 얼굴을 대중 앞에 노출시키게 될 경우에 그는 자신의 얼굴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간주했을 정도다. 고전적인 아덴의 법에 따르면, 아내 된 여자가 가정을 떠나 대중들 앞에 나서게 되면 그 여인은 남편으로부터 부정하게 간주돼 이혼을 당할 수도 있었다(Plutarch, Bride 31, Mor. 142CD).

일반적으로 고대 헬라 세계에서 정숙한 여자들은 결혼하기 전에는 자기 아버지의 허락 없이, 결혼한 후에는 남편의 허락 없이 일절 집을 나서지 않았다. 결혼한 여자들은 남편이 정치적이든, 사회적이든 혹은 개인적이든 집을 나설 때 따라나서는 것은 금기 사항이었다. 부인이 남편과 동행해 참석한 파티 장소에서 술을 마시게 될 경우, 그것은 남편과 자신에게 모두 수치스러운 일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창녀들만이 남자들과 함께 술을 마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결혼하기 전에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 아래 복종하고 결혼한 후에 남편에게 복종하면서 가사 일에 매달리고 아이를 낳아 양육해야 했다. 그리고 집안에도 외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거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여인의 방’이라는 별채에 머물러야만 했다. 여자들이 부득이 집을 나서게 될 경우, 남자들에게 일절 말을 할 수 없었다. 유리피데스(Euripides)는 “결혼한 여자가 젊은 남자와 함께 서있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자 특히 결혼한 여자가 거리에서 젊은 남자와 함께 있으면, 수치스러운 일을 한 여자나 창녀로 취급받았다.

1세기의 헬라 작가 플루타르크(Plutarch)는 「신부와 신랑에게 주는 충고」라는 책에서 “결혼한 여자는 집안에 머물러야 하며, 손과 발과 얼굴을 제외하고 어떤 신체도 일반 사람들에게 노출시키지 않아야 하며, 밖에서 말을 하지 않아야 하고 매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라고 적고 있다. 여자가 말을 하고 싶으면 자기 남편에게만 하거나 남편을 통해 말해야 하며, 바깥에서 직접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드러내는 수치스러운 일이나 남편을 욕되게 하는 일로 간주되었다.

물론 바울 당대에 마케도니아 여성들은 사도행전 16장 14~15절과 빌립보서 4장 2~3절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고대 헬라 지역의 여성들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렸다. 집안 일은 물론이고 장사를 포함해 시의 관리나 민중의 주요 제사와 국가 제사의 여사제로 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자 종들이나 노예들은 일반 여자들에게 적용되는 사회적 규범이나 제약에 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집안에 있는 여주인을 대신해 외부 세계에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대중들이 사용하는 샘에서 물을 길어오거나 기타 다양한 심부름들을 하기 때문이었다. 시골에서 남편과 함께 농사를 짓는 가난한 농부의 아내들에게도 이 같은 규범들이 엄격히 적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대다수 헬라 여성들은 철저하게 남자들에게 예속돼 있었고, 남자들이 하는 일에 함부로 관여할 수 없었다. 헬라 세계에서 여성들을 남성들에게 종속시키게 된 배경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처럼(Aristotle, Generation of Animals, Ⅱ. 3-4, Pol. 1.2.12, 1254b), 여성들은 존재론적으로 남성들에 비해 불완전하고 하급 존재에 속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이한 것은 세속적 영역에서 종교적 영역으로 방향을 돌릴 경우에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는 점이다. 종교적 영역에서 헬라 여성들의 역할은 보다 개방적이고 적극적이었다. 정치적, 사회적 영역에서 성적 불평등이 종교적 영역에서 거의 사라졌다. 여자 사제들은 남자 사제들과 똑같은 의무와 책임을 갖는다. 모든 여성들은 사회적 신분에 관계없이 성전의 모든 장소에 자유롭게 접근하고 기도와 제사 행위에 참여할 수 있었다. 심지어 어떤 여자 사제들은 국가적 제사를 집전했으며, 신탁의 전달자가 되곤 했다. 따라서 헬라 사회의 여성들 중에 종교 행위 참여를 자신의 신분 상승의 기회로 삼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여자가 종교적 영역을 통해 더 높은 영역 곧 남자의 영역에 속하기 위해 엄청난 장애물을 극복해야만 한다. 여자가 남자의 영역에 도달하기 위해선 성전에 가서 모든 사람들이 성전을 떠난 다음에도 남아서 기도에 전념해야 하며, 감각적이고 육적인 여자의 영역을 벗어나 영적인 남성의 영역에 도달하기 위해 성생활을 멀리하는 금욕적인 생활에 힘써야 했다.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의 의미

앞서 살펴본 것처럼,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의 진정성을 거부하기 어렵다고 한다면, 이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바울은 본문에서 너무나 단호하고 분명하게 “여자는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어떤 면에서 여자가 말할 수 있고, 어떤 면에서 여자가 말할 수 없는지에 대해 선을 긋거나 구분해 말하고 있지 않다. 바울은 교회에서 여자들이 설교나 가르치는 것은 할 수 없고 그 대신에 예언, 방언, 기도 및 찬송 등은 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바울은 아무런 조건을 제시하지 않고 여자들은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구절에서 바울이 모든 여자들은 교회에서 일절 말하지 말고 잠잠해야 함을 가르친다고 봐야 하는가? 만일 우리가 본문을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면, 바울이 이미 고린도전서 11장 5절과 39절에서 여자들이 예배 때에 남자와 마찬가지로 기도와 예언을 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과 정면으로 대립할 뿐 아니라, 바울과 함께 사역한 여러 여성 지도자에 대해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바울 서신에 종종 등장하는 브리스가, 뵈뵈, 순두게, 유니아, 눔바 등 많은 여성 사역자들이 교회 안에서 일절 말하지 않아야 했다면 그들이 어떻게 교회의 지도자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바울이 여자들에게 교회에서 일절 말하지 말고 잠잠해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는 식으로 쉽게 결론을 내려선 안 된다.

또한 본문에서 바울이 어떤 것은 말할 수 있고 어떤 것은 말할 수 없다는 식의 인위적으로 선을 긋고 있는 것처럼 봐서도 안 된다. 여기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바울이 왜 고린도교회 여자들을 향해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가르치는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바울이 여자들에게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는 이유를, 당시 고린도교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여자 성도들 특히 가정을 갖고 있던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 일으킨 분쟁과 예배시의 무질서를 경계하고 예방하기 위함으로 본다. 여기서 바울이 일반 여성 전체를 두고 말하기보다 남편이 있는 기혼 여성들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이 고린도 지역에 복음을 전할 당시 헬라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예속돼 있었고, 남자들이 있는 공중 장소에서 여자들이 함부로 나서거나 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여자들의 활동 영역은 가정에 제한돼 있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 차별이 철폐되고 동등하다는 바울의 복음이 고린도 지역에 선포되었을 때 특히 여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하다. 아마 교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여자들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자신들의 가정과 사회에서 누릴 수 없는 자유 곧 남녀가 동등하게 예배에 참여할 수 있고 방언, 예언 등 성령의 은사에 참여할 수 있으며, 부부 생활에서도 남편과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주어졌다는 가르침을 받았다(고전 7:2~6). 그때 여자 성도들 중에 일부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와 남녀의 동등권을 남용해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세우신 남녀의 신분과 역할의 차이는 물론이고 결혼과 부부 생활까지 거부하며 심지어 가정과 교회를 혼동해 교회 안에서까지 남자와 같이 행동하려는 극단적인 상황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그들은 가정과 교회, 특별히 공중 예배 때에 일부 여성도들이 당시 사회에서 금기로 여겼던 통념을 깨고 자신들의 남편을 제쳐두고 다른 남자들에게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큰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여성도들에게 여자들은 자기 남편들이 함께 있는 교회의 모임 중에는 다른 남자들에게 말하지 말고 잠잠하며 오히려 궁금한 점이 있으면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물어보라는 특수한 교훈을 줘야만 했다.

따라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11장 34~35절의 본문을 바울이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 모든 여자들은 교회에 와서 집으로 갈 때까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일절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는 일반적인 명령을 하는 것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예배 때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고린도교회의 몇몇 기혼 여성도들에게 주는 특수한 명령으로 봐야 한다. 바울이 전후 문맥에서 계속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은 교회 예배의 질서이다. 그는 14장 34~35절의 본문 앞에 예배 질서에 대한 교훈을 주는 문단을 두고 있다. 즉 문단이 시작되는 14장 26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 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면서, 문단이 끝나는 33절에서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라고 가르치고 있다. 교회의 예배에 반드시 질서가 있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아무리 예배 때에 어떤 개인에게 찬송과 말씀과 계시와 방언의 은사가 주어졌더라도 회중에게 덕이 않되면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도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한다(14:27~28). 비록 자신에게 계시가 주어졌더라도 옆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계시가 주어졌으면 잠잠하라고 한다(14:30). 그런 후에 구체적인 실례로서 교회에서 여자들이 잠잠해야 한다고 교훈하고 있다. 그리고 40절에서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면서 14장을 종결한다. 바울은 방언과 계시가 남자들에게만 주어진 특수한 은사라고 말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14장 5절에서 고린도 성도들이 모두 방언과 예언하기를 원한다고 할 때, 또 14장 39절에서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라”고 명령할 때, 바울은 남자만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14장 31절에서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라고 말할 때도 여성도들을 제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방언과 예언과 말씀을 배우는 일에 여성도들이 참여할 수 없다는 점이 아니라 이 모든 일에 질서가 있다는 점이다.

바울이 14장 34~35절에서 교회의 여성도들 특히 결혼한 여성도들이 공예배시에 잠잠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여자로서 할 수 없는 방언과 예언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행위를 통해 공예배의 질서는 물론이고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구분돼 있는 가정의 질서를 어지럽혔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여성도들은 성령 체험을 통해 자신들은 이미 모든 영역에서 남녀의 역할과 신분의 차이를 극복한 자들로 자처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만일 고린도 성도들이 공예배시에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았다고 한다면, 바울은 그런 교훈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바울이 로마교회나 갈라디아교회나 그밖에 다른 지역의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 동일한 교훈을 주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고린도 교회 여성도들이 공예배 때 질서를 어지럽혔다고 한다면, 교회와 가정의 질서 유지를 위해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여성도들이 교회 질서를 혼란하게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그들을 향해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하는 것은 극히 부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에서, 마치 바울이 시대와 장소와 여건을 초월해 여자들에게 무조건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교훈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고린도 교회 여성도들은 어떻게 교회의 예배와 가정의 질서를 어지럽혔는가?

우리는 바울이 14장 35절에서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라고 말하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예배의 질서를 어지럽힌 자가 결혼한 여성도들이라는 것과 그들이 자신들의 남편을 제쳐 두고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남자 교우들)에게 질문을 제기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바울은 집에서 자기 남편과 더불어 사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을, 교회에 와서 다른 남자들과 해결하려는 것은 교회와 자신의 남편을 동시에 부끄럽게 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본문에서 질문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선행 문단이 방언과 예언과 계시에 관해 말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아마 교회 예배 중에 방언과 예언과 계시 혹은 가르침이 주어지고 있을 때 그들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기 위해 소란을 피우면서 질문들을 던진 것 같다. 바울이 제기한 질문을 자신들의 남편들에게 집에서 물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방언, 예언, 계시보다 오히려 말씀에 대한 가르침일 가능성이 더 크다.

만일 그렇다면 여인들의 질문은 마치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님이 예배 중에 말씀을 설교하거나 가르칠 때, 어떤 무식한 여자 교우가 주제 넘는 질문을 던져 예배를 방해하는 일과 유사한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예배 중에 남자들이 아니라 왜 여자들이 질문을 제기했는가 하는 점이다. 바울이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 수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우리는 적어도 여성도들의 남편들은 자신들의 아내들이 궁금해 하는 문제를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여자들은 쉽게 이해할 수 없어서 그와 같은 질문을 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당시에 헬라, 로마, 유대의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거나 제한돼 있었다. 유대 사회에서 여인들은 회당이나 학교에서 율법을 배우는 기회를 갖지 못했으며, 헬라 로마 사회에서 여인들은 가장 기본적인 공교육의 내용인 수사학도 가르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여자들은 대체로 남자들에 비해 이해의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 여성도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남자들보다 이해의 수준이나 능력이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여성도들이 예배 중에 터무니없는 질문도 제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여자들은 본성적으로 남자들보다 이해의 수준과 능력이 뒤떨어진다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바울은 어디까지나 당대의 사회와 문화적 관습 아래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당시 여인들이 대부분의 정보와 지식을 가정에서 남편에게 의존하고 있던 것처럼, 교회의 여성도들도 교회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들에 부딪혔을 때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남편에게 물어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왜냐면 여자들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는 당대의 사회적 문화적 규범으로 볼 때, 여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자신의 남편을 제쳐 두고 다른 남자들에게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일종의 성적 유혹으로 간주될 정도로 자기 남편에게도 대단히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율법에 호소해 남편과 아내 사이에, 남자와 여자 사이에 유지돼야 할 올바른 질서를 회복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왜냐면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에 교회가 부도덕한 집단으로 비쳐져 선교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바울은 복음 안에서 주어지는 남녀 동등함의 자유를 인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자유가 성도들이 살고 있는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환경에서 부도덕한 일로 간주될 때, 그 자유의 사용을 부분적으로 제한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 안수와는 전혀 다른 문제다.

 
나가는 말: 바울과 여성의 안수

여성의 성직 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을 고린도전서 11장 2~15절, 디모데전서 2장 8~15절과 함께 사도 바울의 여성 안수 금지를 위한 규범적인 본문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고린도전서 11장 2~15절과 디모데전서 2장 8~15절도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처럼, 고린도교회와 에베소교회의 여성도들 중에 복음의 자유를 남용하거나 곡해해 남자와 여자의 구분과 남편과 아내의 질서까지 부정해 가정과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선교의 문까지 닫게 하는 위험을 주는 자들에게 주는 바울의 특별 교훈으로 봐야 한다.

우리가 이 구절들을 예배 때 머리에 수건을 쓰라는 권면이나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문안하라는 권면(롬 16:16, 고전 16:20)처럼,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사회적 특수한 정황에 비춰 해석해 그 의미와 메시지를 오늘에 적용시키지 않고 보편적이고 규범적인 구절들로 받아들인다면, 오늘날 교회 안에서 여성이 가르치고 말하는 모든 행위들을 전면 중단해야 한다. 교회는 여성가대원, 주일학교 여교사, 여전도사 등을 세우지 말아야 하고 신학교는 여자 신학도에게 입학을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 또 목사 후보생을 가르치는 여성 신학 교수도 둘 수 없게 된다. 여성들은 교회에 올 때 반드시 머리에 수건을 써서 자신의 얼굴을 노출시키지 않도록 당부해야 하고, 교회 안에서 여성도들은 어떤 경우이든지 말하지 말고 잠잠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물론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 ‘여자들은 예배 때 머리에 수건을 쓰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인사하라’는 권면을 현재 우리 교회 안에서 그대로 적용시키지 않는다고 해서, 이런 구절들을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신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오해해선 안 된다. 바울은 이 구절들을 통해 모든 시대에 적용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 ‘머리에 수건을 쓰라’는 권면에서 예배 때 여자가 갖춰야 할 마땅한 태도에 대한 메시지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인사하라’는 권면에서 성도간의 우의와 사랑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이처럼 ‘교회 안에서 모든 여성도들이 말하지 말고 가르치지 말며 남자를 주관하지 말라’는 교훈에서도 모든 시대를 초월해 선포되는 남녀의 구분과 가정과 교회 안에서 지켜야 할 남녀의 질서에 대한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어떤 성경 구절이 시대와 문화에 매여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가질 수 없다는 것으로 곡해해선 안 됨을 강조하고 있다. 어떤 성경 구절을 문화-사회학적으로 혹은 역사-문학적으로 접근해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와 영감에 도전하는 일로 오해하는 것은, 마치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강조를 신성에 대한 도전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점이다. 예수님의 인성에 관한 올바른 이해 없이 예수님의 메시아적 인격과 사역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성경에 대한 역사-문화적, 문화-사회학적 접근 없이 성경의 메시지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이런 해석학적 관점과 동시에 우리가 염두에 둬야 할 것은, 바울 서신의 특수한 구절들을 해석할 때 그것을 바울의 일반적이고 통일성 있는 교훈과 연관시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바울의 서신에서 이해하기 힘든 다양한 교훈들을 만나더라도, 바울이 스스로 모순을 범하고 비논리적이며 비체계적인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일관성과 통일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우리가 느끼는 모순과 비일관성은 어떤 면에서 바울의 문제이기보다 접근하는 우리 자신의 문제로 일어나는 것이다.

필자는 바울 신학을 제시하면서 바울 신학 전체를 묶는 어떤 일관성과 통일성을 가진 중심 사상이 있음을 확인한 바 있다. 그것은 바로 ‘창조’, ‘타락’, ‘구속’, ‘재창조’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속사에 입각한 종말론과 그 종말론의 내용을 형성하고 있는 기독론과 성령론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이런 관점에서 인간과 세계 역사의 모든 문제들을 보고 있다. 교회 안에서 여성의 역할 문제도 예외가 아니다. 바울은 남녀 관계를 포함해 모든 인간 사회의 문제들이 아담의 범죄로 타락하고 죄로 오염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속되었고, 이제 그리스도와 그의 보내신 성령 안에서 새롭게 회복되는 새 창조 사역이 이뤄지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바울에게 새 창조는 단순히 아담의 타락 이전으로 복귀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있다. 그것은 타락 이전보다 더 고차원적인 새로운 창조이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원문의 뜻은 ‘새로운 창조’)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선언할 때, 이것은 그야말로 옛 창조와 대비되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창조를 의미한다. 또 갈라디아서 6장 15절에서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원문의 뜻은 ‘새 창조’)만이 중요하니라”라고 선언할 때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새 창조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리고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서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바울의 가르침은 신약 교회 안에서 여성의 역할 문제를 첫 창조나 구약 시대의 관점에서만 보아선 안 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여성의 역할 문제를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이뤄지고 있는 새 창조의 관점에서 볼 것을 시사한다.

사실상 바울은 자신의 목회와 선교 사역에서 그가 살고 있던 헬라와 로마와 유대의 가부장적이고 남성 위주의 문화를 뛰어넘어 적지 않은 여성 사역자들을 동참시킴으로써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이뤄지고 있는 새 창조를 이미 부분적으로 적용하고 실천했다. 다시 말해 새 창조는 ‘아직’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미래적인 것만이 아니라, 비록 그 완성은 주님의 재림으로 ‘이미’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오심으로 지금 여기서 이뤄지고 있는 현재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14장과 디모데전서 2장에 나타나 있는 바울의 강하고 부정적인 교훈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도 바울의 구속사적이고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이해해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새 창조를 말하고 있더라도 새 창조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옛 세계와 함께 공존한다. 다시 말해 ‘이미’(새 창조 세계)와 ‘아직’(옛 창조 세계)이 함께 공존한다. 이런 사실 때문에 비록 어떤 것이 ‘이미’의 관점에서 보면 가능하더라도, ‘아직’이라는 세계와 문화와 역사의 구조를 함부로 뛰어넘을 수는 없을 뿐더러 때로 제약을 받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고린도 교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 교우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과 성령 체험을 통해 자신들이 마치 이 세상을 초월할 수 있는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착각하면서 부부 생활과 결혼까지 거부하고, 당시 고린도 교회가 처해 있던 문화와 사회적 정황을 혁명적으로 뛰어넘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구조를 교회 안에서 만들려고 했다. 이것은 결국 가정의 파괴와 교회의 무질서는 물론이고 교회의 선교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여성 교우들에게 특별 교훈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원리적으로 여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와 차별 없이 동등하게 되었더라도 여자들이 누릴 수 있는 원리적 자유 됨이 특수한 교회의 상황에서 오히려 부작용을 초래할 경우에 그것은 유보되거나 제한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면 여성에 관한 바울의 ‘이미’와 ‘아직’에 관련된 교훈이 서로 상치될 때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떤 교훈을 우선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교회와 교단 그리고 교단이 서 있는 시대적 정황에 따라 다소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아직’에 대한 교훈을 ‘이미’에 대한 교훈의 빛 아래서 이해하고 적용하고 그 반대라면 안 된다는 점이다. 즉 고린도전서 12, 14장, 디모데전서 2장에 나타나 있는 여성의 역할과 위치에 관한 부정적 교훈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 고린도후서 5장 17절, 고린도전서 12장 13절의 긍정적 본문에 비춰 해석해야지 그 반대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옛 창조가 새 창조의 빛 아래서, 특별한 교훈이 보편적인 교훈 아래서, 과거가 미래의 빛 아래서 해석돼야지 그 반대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른편으로 돌아가는 시계의 시침이 왼편으로 되돌아 갈 수 없는 것처럼, 옛 창조는 새 창조를 향해 ‘아직’은 ‘이미’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지 그 반대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주후 1세기 헬라-로마-유대의 남존 여비와 가부장적 사회 구조 안에서도 초기 기독교가 여성의 문제에 관해 혁명적이라고 할 만큼 ‘이미’ 앞섰다면, 지금 남녀평등과 여성의 인권이 보장된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가 일반 사회보다 ‘아직’ 뒤떨어져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이제 한국 교회는 여성의 성직 안수를 포함해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을 제한하는 모든 제도와 법을 과감하게 개선하고 오히려 사회를 선도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이 땅에서 인종과 신분과 성차별이 없는 새 창조와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진정한 주역이 될 수 있다.


주(註)1. 이 글은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 아래 수행 중인 “고대 헬라-로마-유대 사회와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관한 연구”에 부분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밝혀 둔다.
                                                                                        

                                                                                                               최갑종 | 2005. 7.

Posted by 작은샘

org date: 2012-01-27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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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안수에 대한 김세윤 교수의 반박에 대한 재반박 ]

 

                                                                                                                                                          서창원 목사

 

성경도 제대로 읽을 줄도 모르고 신학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식한 불초 소인을 대신학자께서 매섭게 질타해주심에 대해 먼저 감사하는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그동안 속에 담아둬 온 자신의 명백한 실체를 여성안수 문제와 관련해 용기 있게 밝혀 주신 대학자의 양심에 박수를 보내드린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쳐 주셨다. 하지만 그것이 가부장적 사회에 있었던 남성 위주의 가르침이고 모두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여’라고 기도하는 여성 신학자들과 여권주의자들의 집요한 여성안수 허용 제기를 환영하면서 그들의 대변인임을 자청한 김 교수의 논리를 이해하려 했으나 무식한 필자로선 납득할 수가 없다.

 

본인은 김 교수의 지적처럼 무식한 목사이요 모순투성이의 글밖에 쓸 줄 모르는 자로서, 세계적인 대학자요 인생의 선배이신 김 교수께 다시 한번 무식한 반론을 제기할 수밖에 없음을 밝힌다.

 

성경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는 학자의 주장이기 때문에 겸손하게 받아들이고자 읽어보았지만 안타까운 생각뿐이다. 성령의 온유한 열매를 위해 기도하면서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워낙 김 교수의 명성과 학문의 업적 때문에 마치 그런 주장이 성경을 제대로 읽는 제정신의 소리인양 우매한 자들의 생각을 굳게 할까 봐 우려하는 아픔을 무식하게(?) 표현하고자 한다.

 

더구나 오늘도 한 영혼, 영혼들을 가슴에 끌어안고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수많은 개혁주의 목사들을 이단시하며 그동안 남성들만 누려온 특권을 여성에게도 그 직책을 수여하는 것만이 교회의 참된 개혁인양 부르짖는 대학자의 논지는 처절하기 짝이 없다.

 

현대 신학의 흐름과 학자들의 학문 그리고 신앙 인격은 분명 별개의 것임을 김 교수의 논지가 증명하고 있다. 현대 학문의 장은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 믿지 않고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유의 주재자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요 죄인의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탁월한 학문적 업적을 이룰 수 있는 풍토이다. 학문이라는 또 다른 권위(우상) 아래 교회를 성경 진리에서 이탈하게 하는 모든 불순 세력들에게 임하실 주님의 징계를 두려워한다.

 

지금까지 학문이 교회를 이끌어온 것은 아니다. 교회로 하여금 수없이 많은 장애를 딛고 역경 속에서 하늘을 향해 여전히 서 있게 한 것은, 성경 진리에 대한 굳건한 신앙이었다. 영원불변의 진리인 성경 말씀이 종교적 전문가의 주장에 의해 퇴색하고 변조되는 우가 발생하고 있음에 대해 경각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만인 제사장론에 대한 반론

 

필자가 이전의 글에서 만인 제사장론에 대해 언급한 것은, 김 교수께서 그렇게 주장하였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김 교수의 글을 반박하면서(참고로, 필자가 글을 썼을 때는 김 교수의 책이 출판되기 전이었다. 필자는 5월호에 실린 김 교수의 글을 보고 글을 써서 원고를 보낸 상태에서 김 교수의 책이 출판되었다는 소식을 「목회와 신학」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일부 여권운동주의자들이 만인 제사장론을 들고 나온 것을 거기에 첨부한 것뿐이다. 문맥상 그렇게 비쳐졌는지는 몰라도 실지로 그것이 김 교수의 주장이라고 말하지 않았음을 먼저 분명히 밝힌다.

 

그러나 만인 제사장론을 토대로 여성안수 문제와 관련해 한마디 언급한다면, 마치 보수주의 목사들만 스스로 제사장으로 간주하여 구약의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오도하는 김 교수의 글은 분명 잘못이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성도들은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을 읽어보지 못했는가? 그리고 마태복음 5장 20절 말씀을 읽었다면, 개혁주의자들을 율법주의자들이라고 함부로 정죄하지 못할 것이다.

 

필자는 보수주의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차라리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의로운 모습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런 소리를 듣는다면 영광이겠다. 그렇지 못한 필자를 그렇게 불러주니 황송할 따름이다. 그러나 율법주의가 무엇인가? 적어도 구원에 있어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과는 달리, 우리의 공적을 드러내고 강조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보수주의자들이 어떻게 율법주의자란 말인가?

 

우리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교훈을 따라 주 예수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임을 어느 신학자들보다 명확하게 천명하는 사람들이다. 율법주의는 배격하지만, 율법은 여전히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다.

 

 

 

다수 보수주의자들과 가정 사역 전문가들이 유교적 가부장적 생활을 한다(?)

 

유교적 가부장적 생활이 비성경적이고 개신교 신학 전통에 어긋난다는 김 교수의 지적은 옳다. 그러나 가부장적 흐름은 한국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이 아니다. 구약에서 이미 발견되는 가장 오래된 사회 제도이기도 하다. 실지로 나쁜 의미로 가부장적 영향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지, 성경은 좋은 측면에서 올바른 제도임을 지지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남자를 먼저 만드시고, 다음에 여자를 만드셨다. 타락이전에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남자인 아담하고만 말씀하셨다(창 2:15절 이하).

 

더구나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었는데,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경에서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권위를 가리킨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동·식물들을 다스리고 번성케 할 책임을 가진 권위자라는 의미이다. 놀라운 것은 아담의 이름은 하나님이 직접 지어주셨지만, 여자인 하와의 이름은 아담이 지었다는 사실이다(창 2:23).

 

히브리인들의 이름은 그 사람의 성품이나 역할을 나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하와의 이름을 지어줄 때 그것 역시 여자에 대한 아담의 머리 즉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부분을 시사한다. 그것이 타락 후에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되어진 것처럼 말하는 김 교수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억지이다(김 교수의 책, p18).

 

때로 구약에서 어머니들이 자녀들의 이름을 지어주기도 하는데, 그것은 자녀들을 통솔하는 권위를 나타내는 일이다. 어머니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부모로서 자녀들에 대한 권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지어 주셨다는 점이다. 창세기 5장 2절은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고 말씀하신다.

 

특별히 남자(아담)와 관련되는 또는 여자와 구별되는 단어로 인간의 이름을 지어주신 것은 남자에게 속한 리더십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것을 가부장적 유교 사상으로 치부하는 것은 비난하기 위한 비난에 불과한 것이다. 또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선악과를 따 먹고 타락한 후에 누가 따 먹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금지의 열매를 먹은 하와를 먼저 불러 말씀한 것이 아니라 아담을 먼저 불러 말씀하셨다.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을 아담에게 물으신 것이다.

 

즉 가정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첫 번째 책임자로 바로 남자인 아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김 교수가 지적하는 여성의 남성에 대한 종속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창세기 3장 16절 이전에 있었던 사실임이 의미심장한 것이다.

 

그리고 하와가 범한 죄와 관련해 성경 어디에서도 하와가 범죄하여 세상에 죄가 들어왔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죄 가운데 출생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하와에게 주어지지 않은 역할인 인간에 관한 ‘머리’를 가리킨다. 이 때문에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쓴 편지에서 여자의 머리가 남자임을 천명하고 있는 이유이다. 여성의 리더십 문제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지 결코 문화적 양보에 의한 것이라거나 덕을 세우기 위한 측면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더구나 저주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 새로운 역할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타락 이전의 아름다운 관계를 더욱 왜곡시켜버린 것이다.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벌을 보라. 거기에 어떤 새로운 역할이나 기능들을 소개해 주지 않았다. 단지 그들이 이전에 가졌던 기능들에 대한 고통과 뒤틀림을 내렸을 뿐이다. 하나님은 하와에게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와가 남편의 권위를 빼앗으려고 하는 그릇된 욕망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관계 속에 어떤 갈등 구조가 생긴 것과 아담의 권위에 대항하여 반역하려는 하와의 욕망을 억제시키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은 무너진 창조 질서를 새롭게 확증하는 것이다. 죄와 저주의 결과로 주어진 고통스러운 관계가 새롭게 회복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베드로는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으로 알고 함께 하늘나라를 유업을 받을 자’임을 상기시키면서 남편의 권위가 무자비한 것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아내의 순종이 남편의 권위를 세워주는 것임을 확증하고 있는 것이다(벧전 3:7).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의 삶에서도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엡 5:22~23). 복종이라는 단어 자체가 의미하는 것과 주께 하듯하라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분명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는 것은 남자의 권위 아래 여자가 속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타락으로 말미암은 남자의 종속적 관계가 아니라 창조 이전부터 구속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창조 질서 틀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다름을 설명하고 있다.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순종하는 것이 주 안에서 마땅한 일이다(골 3:18).

 

그릇된 가부장적인 관습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제거돼야 할 것임이 분명하지만, 가정에서 남편의 리더십 곧 아내의 머리로서 남편의 권위는 존중돼야 한다. 남자가 가족과 종족을 대표하는 우두머리로서의 역할을 맡는 것은 여자가 열등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아론과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이끈 지도력은 그들이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월등한 존재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임명하셨기 때문이다(민 16:11).

 

아론과 모세의 지도력을 거부한 고라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온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온 회중 중에 계시다고 주장하였지만(민 16:3), 그들의 주장은 하나님에 의해 거부됐다.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되는 것은 인격적 우월성이나 신체적 혹은 지적 능력의 탁월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른 것이었다.

 

이처럼 필자가 남녀의 역할과 기능까지 무시하는 ‘동등성’과 그 역할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평등성’을 구분한 것을 가지고 개혁주의자들의 ‘언어유희’로 몰아붙이면서 남녀 동등성을 펼치는 김 교수의 논리야말로 빈약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지음 받았기 때문에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은 아니다. 그렇다고 김 교수의 지적처럼 늦게 지음 받은 여자가 남자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p17)은 그야말로 얼토당토 않는 주장이다.

 

여성을 남편보다 “더 연약한 그릇”(벧전 3:7)이라는 말씀도 거꾸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단연코 우열의 문제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질서와 권위 차원에서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 있음을 왜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가? 그것이 교회 리더십에서도 나타나는 것임을 부인하려고 왜 그렇게 막무가내인가?

 

 

 

고린도전서 11장 2~16절에 대한 김 교수의 해석은 학문으로 위장한 억지 논리다

 

김 교수는 남녀간의 질서를 가르치는 교훈이 아니라, 여자들이 교회의 공 예배 시간에 기도하거나 예언(설교)할 때 머리에 수건을 쓰고 하라는 가르침이라고 해석하면서 성경을 제대로 읽어달라는 충고를 하셨다. 무식한 목사의 눈에 비친 고린도전서 11장의 내용은 아무리 보아도 김 교수가 결론을 미리 내리고 거기에 짜맞추는 해석을 하는 억지 논리이다. 바울 사도는 2절에서 자신이 “전하여 준 대로 그 유전”을 고린도교회가 지키고 있다는 것을 칭찬하고 있다. “그 유전”은 11장 23절과 15장 1, 3절의 내용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성도들이 알아야 할 것들 중에 여자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기도하고 예언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여성 그리스도인에게도 차별이 없이 동일한 성령의 은사를 부어주심에 대한 요엘 선지서의 성취를 나타내며 그 안에서 여성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자유를 사용하되, 권위 아래서 사용할 것을 가리키고 있다.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것을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7 절의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라는 말씀에서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남자의 영광”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바울은 적어도 고린도교회에 18개월이나 머물렀다. 에베소에서 밤낮으로 쉬지 않고 가르친 3년간의 사역을 생각하면 고린도에 머물 때 18개월 동안 바울이 태만하게 사역한 것이 아니다. 분명히 철저하게 가르치고 훈련시켰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떠나고 난 후에 저마다 은사를 받았다고 난리치고 있는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난 무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가르침이라는 배경에서 11장을 이해해야 한다. 고린도에 머물면서 바울 사도는 분명 교회의 기본적인 규범(Christian ground rules)을 제정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규범을 어기고 무질서하게 행하는 것들에 대해 여성이 그 일을 할 경우, 10절을 염두에 둘 것을 말씀하고 있다.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에 대해 좀 더 살펴보면 두건을 쓰는 것 자체를 권세(exousia)로 표현한 점이다. 이는 기독교인의 자유를 언급하는 차원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권세 있는 자임을 나타내는 것이다(F. W. Grosheide, NICNT, 「고린도전서 주석」, p257). 그래서 RSV에선 권세를 상징하는 표시로 수건으로 번역하고 있고, ASV에선 권세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여성에게 하나님께 접근하도록 허락하시되, 그런 자격이 있는 자의 표시로 머리에 수건을 쓰라고 하신 것이다. 또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그분의 진리를 말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다. 다시 말해, 복음 전하는 사명이 남자 성도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여자 성도들에게도 주어진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나 선지자 혹은 목사와 장로로서 그런 직임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선지자라는 직책과 아울러 여자도 안수하여 장로나 목사를 세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 심지어 초대 교회 역사를 보면, 여성 집사들에 대한 기록이 많이 있음을 본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바실, 데오도레 및 에피파니우스의 문헌 참조). 심지어 니케아 종교회의(325년) 문헌에도 여성 집사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러나 그들을 교회 직임자와 구분되는 평신도로 간주했다.

 

칼세돈 종교회의에서는 그들의 안수 문제를 언급하면서 나이는 40세가 넘어야 하고 미혼이어야 한다고 규정한 것을 본다. 그러나 5세기에 열린 오렌지 종교회의에서 작성된 케논 25조항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여성 집사는 절대적으로 안수 받아선 안 된다. 만일 아직도 안수 받은 여성 집사들이 있다면 그들을 회중에게 주어지는 축도를 받도록 고개를 숙이게 하라.”

 

김교수는 ‘머리’론만 언급하면서 문맥의 어색함을 들어 바울 사도가 논리를 중단하였다고 하면서 ‘권세’(exousia)에 대한 언급은 지나치고 있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나온 것임을 누가 목격하였는가? 천사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 증인들인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에 두라고 11장 10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들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격자가 됨을 표시하는 것이다.

 

김교수는 고린도전서 11장을 자신이 이미 결론 내린 논리대로 해석하기 때문에 14장의 가르침이 모순 되게 보일 것이다. 11장의 가르침이나 14장의 주장은 바울에게 있어서 전혀 논리적 모순이 없다. 남자의 머리론을 말하다가 말발이 안서기 때문에 어정쩡하게 갑자기 중단한 것이 아니다. 머리를 짧게 깎는 것이 남자에게는 자연스러우나 여자에게는 그렇지 않아서가 아니다. 여자가 남자의 권위 아래 있기 때문에 주장하는 ‘머리론’이다. 그것 때문에 남자들이 여성들을 무시할까 봐 11절과 12절을 언급한 것이다. 이 사실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에베소서 5장에서 부부 관계나 골로새서 3장에서 지적한 것과 아주 잘 어울리는 논리이다.

 

더욱이 바울의 일관된 이 주장은 디모데 전서의 주장과도 일치한다. 디모데전서의 내용을 김 교수가 “후대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김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하워드 마샬 같은 복음주의 대부(大夫)격인 분이 바울의 저작을 부인한다고 해서 성경의 영감설을 믿지 않는다고 아무도 주장하지 않는다고 하는데(그런 주장을 하는 자들은 근본주의자들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있다) 만약 김 교수도 그렇게 믿고 있다면 하나의 학설에 불과한 것을 마치 그것이 참된 잣대인양 들이대는 오만을 버려야 한다.

 

그런 주장은 분명 성경의 정경론을 부인하는 행위이며 영감론을 경시하는 학자의 오만이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경 목록에서 바울의 목회서신으로 알고 있는 이 성경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삭제되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돕는 배필”과 여성안수에 대한 김 교수의 해석

 

김교수가 돕는 배필을 해석하면서 인용한 전도서 4장 어디에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돕는 배필이라는 말이 없다. 어쩌면 잘못된 인용 구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돕는 자라고 해서 하나님이 나보다 열등한 분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남자의 돕는 배필이라고 해서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성경 전체를 보고 말해야지 한두 구절만 갖고 그것이 전체 해석의 열쇠인양 말하는 것은 성경학자로서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이다. 하나님이 먼저 아담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그를 에덴동산에 두시면서 에덴동산을 다스리고 지키도록 하시고 또 그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에 관한 규범도 주셨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그의 형상대로 창조한 남자를 자신을 대표하는 피조물의 머리로 삼고,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릴 권위와 책임을 부여하셨다.

 

그후에 하나님은 아담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부여하신 피조물에 대한 권위와 책임을 잘 이행할 수 있도록 그를 위해 돕는 배필, 즉 여자를 창조하셨다. 이러한 남녀 창조와 권위와 책임 부여의 순차는 여자에 대한 남자의 권위를 분명하게 해준다. 이것은 여자를 남자의 돕는 배필로 창조했다는 데서 더욱 분명해진다.

 

‘돕는 배필’이란 원문에서 ‘돕는 자’란 말과 ‘그와 상응하는 자’ 그리고 ‘그와 일치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두 단어의 합성어다. 이를 종합하면, 여자는 남자와 일치하면서도 남자를 조력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자가 남자와 일치한다는 것은 여자의 외모가 남자와 일치한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실과 일치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자도 남자와 동등한 하나님의 형상임을 가리키며, 따라서 남자와 여자는 존재론적으로 동등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평등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남자가 갖는 존재론적 존엄과 가치에 있어서 여자는 남자와 동등함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돕는 자’란 양자 사이의 질적 양적 우열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양자 사이 관계에서 한 사람이 주도하는 것에 대해 그와 관계한 사람이 그를 도와 그가 해야 하는 모든 일의 목적을 올바르게 성취하도록 하는 보조적 기능이 있음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하나님과 그의 언약의 백성들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그들의 돕는 자로 호칭되는 것에서 이점이 잘 들어나고 있다. 이러한 호칭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 혹은 언약의 백성이 주도적으로 하는 일에 하나님이 도와서 그 목적을 올바르게 성취하도록 하는 것을 나타낼 뿐, 하나님이 그들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돕는 자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여자를 창조하여 남자의 돕는 자가 되게 하신 것은 남자가 여자에 대하여 우월하거나 여자가 남자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남자가 주도하는 일에 여자가 참여하여 그 일의 목적을 온전하게 성취하도록 해야 한다는 여자가 남자에 대하여 갖는 기능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를 남자의 돕는 배필로 창조하신 것은 남자와 여자가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동등성을 갖지만(존재론적 동등성), 하나님께서 피조물에 대하여 남자에게 주신 권위와 그 책임 이행과 관련해 남자의 주도권에 여자가 참여하여 보조적 역할(기능적 종속성)을 하도록 남녀의 관계를 설정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그들을 한 몸이 되게 하심으로써 양자가 결혼의 관계를 가지면서 인격적으로 일체가 되어 존재론적 동등성과 기능적 종속성이 완전하게 균형을 이루도록 하신 것이다. 이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하나님의 존재론적/기능적 관계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즉 존재론적으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동등하시지만, 기능적으로 성부가 중심이 되어 성자 하나님을 그의 종으로, 사도로 세상에 보내셨기에 성자는 성부에게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그의 사역자로 세상에 보내었기에 성령은 성부와 성령이 이루신 구원을 피조물의 삶에 실제적으로 구현하는 일을 하신다. 그러면서도 성부, 성자, 성령 삼위는 인격적 일체를 이루어 한 하나님이 되신다. 이러한 인격적 일체 속에서 성 삼위 하나님의 존재론적 위엄과 권위, 기능적 역할이 가장 균형 있고 지혜로우며 능력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와 남녀 인간의 창조와 가정이라는 제도를 창설하시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남자가 여자에 대하여 권위를 가지면서 가정의 가장으로서 역할을 하도록 하신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남자가 가정에 대해 갖는 가부장적 위치와 기능은 문화의 유산이나 당시의 문화적 표현을 빌려 묘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과 전통은 비록 타락의 과정을 거치지만 구속 역사의 전 과정에서 여전히 유지되었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성취되었으며 영광스러워졌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피조의 세계를 구원하시고, 그것을 재창조하신 것이다.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였을 뿐 아니라, 그 영광을 이루신 것이다. 바울은 구약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학자로서 에베소서 5장과 골로새서 3장에서 이점을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천지 창조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남녀의 관계를 일관성 있게 그의 모든 서신에서 반영하고 있지, 모순 된 글을 개진시키는 자가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에 대해 그들이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도록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한 몸이 되도록 창조하였다.

 

창세기 1장 26-28절과 쌍벽을 이루는 구절로 갈라디아서 3장~28절을 들고 있는데, 이것 역시 김 교수께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두 구절 모두 남녀 동등성을 강조하기 위해 주신 말씀이 아니다. 더욱이 후자의 선언은 구원의 대상에 있어서 차별이 없음을 말씀하는 것이지, 그것이 어떻게 여성안수 허용에 대한 주된 판단 구절로 사용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선언문의 적용에 있어서 교회 직분을 수여함과 관련하여 누구도 차별하지 말고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김 교수는 스스로 성경 문맥을 파악하지 못하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그리스도의 몸(교회) 안의 관계들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구성원이 되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자격을 그리스도안에서 모두가 하나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것이 몸 안의 지체들 간에 아무 구별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남녀는 평등하다. 하나님은 구원의 은총을 남녀노소 차별 없이 수여하신다. 그러나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가 있듯이, 이스라엘과 비이스라엘의 구분이 있다. 신약의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구별이 있다. 지체들 간의 구별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그 구별 때문에 하나님은 결코 공의하지 않고 자비하지도 않는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부르고 싶은가? 하나님의 공의가 김 서방이나 김 서방의 공의보다 못한 것인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하심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 테두리 안에서만 적용될 뿐이다.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는 저자거리의 김 서방이나 이 서방이 이해하는 공의와 자비하고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거리가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라는 소명은 목사들만의 것도 아니요, 여성들만의 것도 아니다.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받은 은사를 갖고 하나님을 섬기는 특권을 지니고 있다.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부르심을 받은 소명이 있다.

 

더욱이 복음을 전파하라는 소명은 어린아이 신앙인들에게도 주어진 명령이다. 그것이 목사직의 근거가 아니다. 남성들에게서도 자신이 받은 소명이 확실히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장로회에서 점검하고 신학교에 보내 신학 훈련을 받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의 직임에 해당하는 소명감은 성경 어디에서도 여성에게 허락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천명한다.

 

빌립의 네 딸들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그들은 예언하는 자들로서 선지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좀더 정확하게 지적한다면, 여선지자란 호칭은 예언하는 여자들에게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칭호라는 점이다. 단 누가복음 2장 36절에 안나 여선지자만이 그리스도를 선포한 사실에 근거하여 칭호가 주어졌을 뿐이다. 이것도 안나 여선지자를 구약의 연장선상에 있는 특수한 상황으로 간주한다면, 실제로 신약 교회가 세워진 이후 그 어느 여자에게도 여선지자라는 칭호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훗날 2, 3세기에 있었던 몽타니즘(Montanism)을 신봉하던 브리스길라와 막스길라 두 여인이 선지자로 나서면서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이 있은 후 점차적으로 예언 및 선지자라는 명칭들이 교회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신약의 정경이 형성된 것과 묘한 연관이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Dictionary of N. T. Theology, Vol 3. pp74~89 참조). 초대 교회 문헌들에 나타난 여성들의 활동은 남자들 못지않은 귀중한 것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교회 직임을 받아 남자를 주관하여 가르치고 다스리는 일들은 이단들 집단에서 허용한 것 외에 필자가 살펴본 문헌들에선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있었던 랍비 학자들에 대한 언급(p26)이나 사본학과 역사 비평에 대한 김 교수의 지적은 자신의 박학다식함을 과시하려는 듯하나, 구약의 어디에서도 두 학파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유전을 가르치는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율법의 바른 정신을 심어주신 주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율법을 온전케 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다.

 

중세 1,000년의 암흑기에 교회의 전통과 유전으로 사람들을 억압한 교권주의자들과 오늘날 개혁 교회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김 교수는 간과하고 있다. 개혁주의자들은 칼빈을 완벽한 신학자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믿어야 할 도리와 바른 교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칼빈의 가르침은 그 어떤 것보다 월등하다는 것으로 간주할 뿐이다.

 

중세 시대에는 성경을 일반 신자들에게 주지도 않았고 심지어 상당수의 신부들조차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루터가 복음서를 설교할 때 그들은 복음서를 루터의 저작이라고 말할 정도로 무식했다. 그러나 오늘날 개혁 교회 목사들은 그렇게 무식한 사람들이 아니다. 성도들도 모두 자기 집에 성경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토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종교 개혁자들이 물려준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다.

 

사본에 의해서 아니라, 정경인 성경에 의해서 ‘개혁된 교회는 날마다 개혁돼야 한다’는 구호를 사용하고 있다. 랍비들의 전통으로 돌아가 보자. 그들은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는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말했다. 여성 비하 발언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여성들에게 율법도 가르치지 않았다. 사실이다. 그런 전통 아래서 예수님께서 혁명적인 일을 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이미 율법에서 가르치고 있는 일을 예수님께서 제대로 실천하신 것이다. 율법을 온전케 하시는 분으로서 말이다.

 

신명기 6장에 있는 이스라엘의 대헌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말씀을 아는가? 거기 어디에도 여성에게 율법을 가르치지 말라고 명령한 것이 없다. 도리어 남녀를 떠나 모든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 진리를 왜곡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가르침을 바르게 해석하고 실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렇다면 여성 안수 문제도 지금까지 남성 위주의 목사들이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억압하고 있는 것을 이제 김 교수와 같은 대학자가 나서서 해방시켜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이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한 개혁 교회 목사의 한심한 작태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기초는 명백하다. 그 원리는 만고불변의 원리이다. 종교개혁 시대에 개혁자들이 교회론을 성경에서 회복시킨 것은 원리 자체였다. 그러므로 그 원리에 입각한 개혁 교회 전통은 지금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교회로서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지켜야 아름다운 것이다. 주님께서 하셔야 할 일을 교회가 하고 나선다는 것은 월권이다. 힘을 잃게 된다. 지지를 받을 수도 없게 된다. 교회 역사가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19 세기 말을 전후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역사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들이 역사 비평과 아울러 사본 비평을 수용하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교회가 한 일은 여성안수 허용 문제였다. 자유주의 신학의 틀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거기서 출발한 장로교회는 결국 가톨릭과 손을 잡게 되고 세계교회협의회(WCC)운동의 태동을 열게 되었다.

 

필자는 김 교수에게 한국 교회도 그런 전철을 밟도록 권장하고 싶은지 묻고 싶다. 교회 성장에 대한 이해는 김 교수의 이해와 별 다를 바 없다. 이전의 글에서 던진 필자의 질문은 ‘과연 여성을 안수하여 목사로, 장로로 세운 교단과 교회들이 김 교수가 지적한 것과 같은 영적 성숙함을 이루고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역사가 그렇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고 우리의 현실이 교회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더구나 교회 직임은 교회가 설정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성령께서 각각의 성도들에게 주신 은사에 따라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을 한다. 그러나 안수하여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으신 일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규례에 따라 안수하여 세우는 목사(혹은 장로)와 집사로 한정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들에 의해 규정된 가르침을 준수하는 것이 교회가 할 일이다. 오늘날 누구도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제자들인 사도들이 하지 않은 것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

 

 

 

막달라 마리아가 설교자였다고?

 

마리아가 유대 사회에서 주님의 부활하심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었다는 기록이 어디에 있는가? 여자들의 증거는 도리어 제자들에게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사도들은 저희의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눅 24:11). 명백한 사실은 여자들이 사도들로서 어떤 공적 역할을 소유했다거나 열두 제자와 견줄 수 있는 역할을 했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앞의 글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그 사실을 마치 기자가 독자들의 알 권리를 위해 기사를 쓰듯 제자들에게 알려주라는 것이었다. 만일 막달라 마리아가 설교자로 나서도록 주님께서 허락하셨다면, 예수님의 부활의 첫 증인인 막달라 마리아가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가장 먼저 일어서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사실을 증언하도록 청함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막달라 마리아가 그 사이에 숨을 거뒀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그녀와 함께 간 다른 여성들은 왜 나서지 않았는가?(눅 24:10).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의 부탁을 못 들었기 때문이었는가?

 

예를 들어, 누군가가 미국 땅에 있는 김 교수의 소식을 필자에게 와서 말한다고 하자. 그것을 설교라고 하는가? 비록 초대 교회 복음의 핵심이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한 것이었을지라도, 그 내용들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말해야 하는 복음인 것이다. 그리고 스승의 죽음으로 인해 자기들도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면서 일종의 대책이나 세우고자 있던 제자들의 모임을 ‘공교회’ 모임으로 본다는 김 교수의 주장은 참으로 억지가 아니고 무엇인가? 자신의 성경읽기만이 완벽한 것이라는 생각은 학자의 오만이다.

 

그리고 고린도교회에서 여자들이 예언한 부분에 대한 것을 보면, 김 교수는 “성령의 영감에 호소하면서 성경을 해석하고 성도들을 권면하는 것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로 요즘 말로 하면 설교”라고 했다(p60). 그러나 고린도교회에서 실시된 추상 명사로서 예언(propheteia)은 신약 성경에서 총 19번 사용된 것 중에 5번 언급된 단어이다.

 

베드로나 마태에 의한 기록은 구약의 예언적 말씀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된 데 비해, 바울 사도만 성령의 은사로서 사용하는 예언임을 말하고 있다. 동사 사용은 고린도전서에서만 총 11번 사용되었는데, 기본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즉 성경 해석(구약에 대한)보다 하나님이 방언이나 예언을 통해 성도들에게 주시는 새로운 계시의 말씀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예언을 한 여성들도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여선지자라는 호칭으로 부른 적이 없다는 점이다. 즉 여자들이 예언의 은사를 사용했다고 해서 그것이 장로나 감독의 직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선지자들은 사도들과 더불어 교회의 기초이다(엡 2:20). 오늘날 사도직과 선지자직이 교회 안에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더 이상 그런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계시를 주셔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즉 계시 중단 사상, 다시 말해 신·구약 성경이 정경으로 정해진 이상 더 이상 계시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자기 백성에게 계시해 주시던 구약의 방법은 이미 끝났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 1항). 그 계시는 오직 신·구약 성경 66권에만 포함돼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은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으로 받으며 교회와 신학적 논쟁에서 “최고의 권위”를 지닌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예언’ 혹은 ‘예언하다’는 말을 통틀어 종합할 때, 고린도교회에서 여성들의 예언 활동은 공식적인 선지자 직함을 받아 한 일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부어주시는 성령의 은혜에 힘입어서 성도들이 하나님께 받은 진리를 함께 나눈다는 차원에서 이해돼야 한다.

 

고린도 교회에 허락한 은사 사용함에서 김 교수의 주장을 따르면 오늘날 모든 성도들을 다 안수하여 목사와 장로로 세울 수 있다고 비약시킬 수 있다.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더구나 고린도전서 12장 28~30절과 로마서 12장에 언급된 은사 부분을 말씀한 가르침들과 어긋나는 죄를 범하게 된다.

 

 

 

사본학적 비평이 성경 해석의 원리인가?

 

교회가 언제부터 성경 해석을 위해 사본학을 해석의 열쇠로 받았는가? 사본학이 올바른 성경 이해에 도움을 주는 것에 대해 필자 역시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본 비평이란 학자들의 학설에 불과한 것이지, 사본에 근거한 성경 해석을 가지고 오늘날 교회의 모든 교리와 가르침을 뒤집으려고 해선 안 된다. 그것이 학문하기를 좋아하는 분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도구는 될지 몰라도 정경 해석의 열쇠는 아니다. 김 교수는 한국 교계에 반포돼 있는 주석들을 모두 싸잡아 공해라고 비난하고 있다.

 

김교수가 말하는 ‘월드 바이블 주석, NICNT, NICOT, BST 및 Black NTC’ 등의 주석류들을 필자도 종종 사용하고 있음을 밝힌다. 그렇다고 사본의 내용들 때문에 정경에 수록된 사실들을 감히 변경하여 설교하는 오만함은 나타내지 않는다. 김 교수의 주장이 마치 모든 판단의 정설인양 억지를 부리는 태도는 바르지 못하다. 사본이란 어디까지나 하나의 학설에 불과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에 대한 후대 삽입설을 주장하는 사본이 있다고 하는 김 교수의 주장은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그런 견해를 뒷받침하는 성경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몇몇 사본들이 그 본문을 그 장의 뒷부분(40절 이후)에 놓으려는 경향을 보이기는 하지만, 어떤 사본도 그 본문을 삭제하고 있지는 않다. 그 본문이 난해한 것이긴 하지만, 그 본문을 제거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김 교수가 그 본문을 만족스럽게 다룰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본문을 난도질하는 태도는 학문하는 자의 자세가 아니다.

 

모든 성경학자들은 성경의 정경을 존중하고 신앙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정경이 잘못된 것이라면 공교회가 연합하여 김 교수의 지적 야욕을 만족시켜 주는 새로운 정경 작업을 하루 속히 서둘러야 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먹고 사는 자들의 의무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께서 교회를 온전케 하는데 있어서 신·구약 성경 66권을 정경으로 주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은사를 받아 일하는 목사는 그 진리를 전파하고 가르치며 지키는데 힘을 다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성경을 자기 입맛에 맞게 그리고 시대적인 흐름에 짜맞추기 위한 김 교수의 수고는 학자로서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여권 운동을 줄기차게 주장하는 이들을 제외하곤 결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일이다. 정경을 정할 당시 편집자들이 다른 사본에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있는 것을 없다고 할 만큼 오류를 범했다고 보진 않는다. 교회의 제도와 원리에 관한한 이미 주어진 계시와 그 계시에 대한 성경 해석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훗날 김 교수와 같은 분을 세우셔서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한 그 엄청난 일을 발견케 하여 정경을 수정해야 할 만큼 당시 공회가 죄악을 범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사본 비평에서 얻어지는 생략된 문자, 말, 구절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근본 진리가 바뀌어야 할만한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고린도전서 14장은 사본 비평에 의해서 여성 안수 문제를 허용하여 교회 직분자로 세워야 할 만큼 삭제돼야 할 삽입 구절이 아니다. 필자의 주장이 김 교수의 눈에 무식한 자들의 반열에 서서 무식한 발언을 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정신 차린 말을 하는 것이다. ‘다양한 사본들로 뜻이 달라지고 기독교 교리 체계까지 심각한 영향을 주는 사본들’이 이제까지 발견되지 않아서 편집자들이 성경을 정경으로 잘못 채택했다는 주장을 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스스로 성경 기자와 성경보다 우위에 놓는 오만함이다.

 

김교수의 주장대로 한다면 지금까지 잘못된 성경을 믿고 가르쳐서 이 땅에 교회를 남기고 간 선진들은 모두 ‘성경 해석을 한 번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사람들’의 대표들이 아닌가? 그 들이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친 모든 내용들이 모두 쓰레기란 주장을 어찌 감히 할 수 있단 말인가?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피 흘리신 선배들을 모욕하는 발언은 삼가야 한다. 김 교수의 주장대로 한다면, 그들은 거짓된 해석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잃은 불쌍한 영혼들이란 말인가? 그들의 유산을 따먹고 있는 김 교수는 그들의 무덤 앞에 가서 사죄할 생각이 없는가?

 

사본 비평이나 역사 비평을 공부하여 성경의 바른 해석을 하고 싶으나 “근본주의적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목이 졸리는 상황에서 실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목신, 11월호 p191)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자신의 글을 반박하는 사람에게 독설에 가까운 필력을 휘두르는 것이 전부란 말인가? 김 교수는 히브리서 11장 24~26절을 읽어 보기는 했는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를 위해 능욕 받는 일을 미국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길 용기가 없다면 진리를 위해 목숨을 버린 앞서간 선진들을 욕하고 한국 교회를 어지럽히며 보수주의 교회들을 뒤흔들려는 악의에 찬 발언을 삼가 주기를 부탁드리고 싶다.

 

성경의 정경성은 무엇보다 사도성이다. 만약 신약의 목회 서신이 사본 비평에 의해 바울 사도의 저작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세우신 교회를 위해 남기신 성경이 잘못된 것이고 결국 하나님의 오류라는 오명까지 덮어쓸 수 있게 하는 무서운 죄악이다. 외경으로 간주하는 다다케나 클레멘트전서 그리고 헤르마스의 목자서 등이 정경의 목록에서 제외된 배경은 그것이 사도들이 쓴 것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다.

 

필자가 알기로 정경성의 표지들은 다음과 같다. 사도들이 원저자여야 한다. 혹은 사도들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 초대 교회에 의해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확실하게 정경으로 받아들여지는 다른 책들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교회는 정경을 창출해 내지 않았고 단지 책들이 정경성을 지니고 있다고 인식하고 받아드리며 그것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 인정으로 말미암아 그 책들은 교회 안에서 권위 있는 것이 된다. 이때 종교회의에서 교회가 사용한 말은 ‘레시피무수’(recipimus)였다.

 

즉 ‘우리는 받아드린다’는 뜻이다. 그래서 교회의 제도와 직제 및 예배와 모든 가르침은 모두 정경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저작이 아니라고 한다면, 정경으로서 가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가 지금까지 허망한 것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였으니 그 죄를 어찌 다 씻으란 말인가?

 

 

 

여성 처우에 대한 개혁 교회가 고쳐야 할 일들

 

여성안수를 금하고 있으면서 실지로 개혁 교회는 여성들을 신학교에서 받아들여 훈련시키고 있고, 일부 교회에선 여전도사들에게 때로 설교도 시키고 성경 공부도 시키고 있다. 주일학교 교사들도 여성들이 훨씬 더 많다. 그러면서 안수 문제만큼은 안 된다고 하는 완고함이 있다는 비평은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안수하여 세운 근거가 없기 때문에 할 수는 없을지라도 브리스길라나 뵈뵈가 한 일들, 사도들에게 탁월한 여자로 알려진 유니아가 한 일들은 교회 안에서 얼마든지 하고 있는 것이다. 동일한 학교에서 동일한 교수들 밑에서 동일한 수업료를 내고 신학을 공부한 여성들에 대한 교회에서의 대우가 반드시 달라져야 한다. 그들의 수고와 땀을 교회가 인정하고 남자 목사들이 받는 사례와 차이가 나지 않도록 고쳐한다.

 

필자가 시무하는 삼양교회에도 여전도사들이 있다. 시무 여전도사를 둔 적도 있었다. 그리고 여성들에게 머리에 두건을 쓰라고 강조한다. 개혁 교회나 김 교수의 주장을 수용하는 교회나 이 세상에서 완벽한 교회는 한 곳도 없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에 근접한 바른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노력은 개혁 교회들이 더 앞서고 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개혁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순교자들을 배출해 왔다. 자유주의 교회들에서 대각성 운동이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김 교수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안수 문제를 떠나서 성도는 주님께서 주신 은사를 갖고 주님의 교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여 섬겨야 한다. 상은 우리의 수고한 대로 대목자장께서 주실 것이다(고전 3:8). 이 땅에 최저 생활비도 안 되는 사례비를 받고 교회를 섬기는 목사들도 많이 있다. 그런 자들이나 그렇지 않은 자들이나 모두 주님께서 보시고 있다. 여성안수 문제로 왜 남자 목사들이 다투고 있느냐는 소리도 듣는다. 하나님이 여성들을 목양의 대상으로 주지 않았다면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동일한 상속자들이기에 그들을 위한 수고는 곧 주님을 위한 수고인 것이다. 필자는 여성들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존중한다. 그들의 헌신과 눈물과 봉사로 인해 눈물을 지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목사보다 상을 더 많이 받을 여인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필자는 여성들을 안수하여 세울 수 있는 권한을 주님께로부터 받지 못했다. 이 세상의 누구도 그런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무식한 목사의 글을 읽어주신 독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한다. 허다한 무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탁하게 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한다(고후 2:17).

 

                                                                                       

                                                                                                                 서창원 | 2004. 12.

Posted by 작은샘

org date: 2012-01-27 21:24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RkzJ/14483

[ 서창원 목사의 “여성안수 허용 문제에 대한 이의 제기”에 답함 ]

                                                                           

                                                                                                          김세윤/ 풀러신학대학원 교수

 

 

 

남녀가 창조론이나 구원론적으로는 동등하되 기능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고 하는 판에 박힌 주장이 언어유희에 불과하며, 실제 성경의 여러 본문들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필 자의 책 「하나님이 만드신 여성」의 논지에 대한 서창원 목사의 반론 (「목회와 신학」 2004년 10월)에 답하라는 「목회와신학」의 요청을 받았다. 그것을 위해 필자는 서 목사의 글에서 먼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것들을 찾아 칭찬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그런 것들을 찾을 수 없어 유감이다. 서 목사의 글은 필자가 늘 우려하던 대로 한국 보수주의자들이 성경무오설이나 성경의 절대권위를 구호로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성경을 제대로 보지 않고 그 대신 자신들의 화석화한 교리에 맞추어 성경을 “해석” (즉, 자신들의 신학적 입맛에 맞게 “요리”)하는 경향을 잘 보여준 글이다. 이것도 공로/상급 신학과 사제주의적 목사 이해와 함께 한국의 보수 개신교가 중세 가톨릭교로 환원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현상이다.

 

 

 

이상한 오해

 

서 목사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보고 올바른 해석학을 동원하여 해석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도그마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설명할 수 있겠지만, 왜 필자의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가에 대해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서 목사는 필자의 책 전체가 마치 여성안수에만 관한 것으로 착각하고, 심지어 필자가 이른바 만인제사장론에 근거해 여성안수를 주장하는 “무식”한 일을 한 것으로 내세우기까지 한다. 필자는 두란노서원이 「하나님이 만드신 여성」이라고 제목을 붙여 출판한 책 (그리고 「목회와신학」 5월호에 그 책의 내용을 일부 간추린 상태로 낸 글)에서 남녀관계 전반에 대한 예수님과 바울 사도의 가르침을 살피며, 교회 내에서 여성의 지도적 역할뿐 아니라 부부관계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논했다.

 

필자가 “만인제사장론”을 언급한 것은 여성안수 문제와 관계해서가 아니라, 요즘 한국의 다수 보수교회 목사들과 “가정사역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남편/아버지(만)이 가정의 “제사장”이라고 가르침으로써 조성하는 유교적 가부장적 가정생활이 비성경적이고 개신교 신학 전통에 어긋남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서 목사가 왜 그런 엉뚱한 오해를 하게 되었을까? 혹 그가 여기에 자신의 “여성안수” 에 대한 공포심과 목사는 “제사장”이라는 자신의 사제주의적 신념을 투사한 결과가 아닌가?

 

필자의 책은 원래 두 시간짜리 대중강연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그 길이가 짧고 어려운 전문용어나 기술적인 세세한 논의를 피하고 쉬운 구어체로 되어있어 웬만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쉽게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책이다. 그런데도 서 목사는 그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흔적들이 그의 글 도처에서 발견된다.

 

 

 

판에 박아 되풀이되는 “역할 차이”론의 허구.

 

필자의 책에서 남녀가 창조론이나 구원론적으로는 동등하되 기능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고 하는 보수주의자들의 판에 박힌 주장이 언어유희에 불과하며, 실제 성경의 여러 본문들의 가르침에 어긋남을 자세히 논했는데도, 서 목사는 이러한 필자의 여러 논거들에 대한 점검은 하나도 하지 않고, 그 판에 박힌 기능 차이론만을 언급하면서, 이제 “동등성”과 “평등성”이 다르다는 또 하나의 언어유희를 첨가하여 그런 주장의 허구성을 더욱 잘 드러내고 있다.

 

필자는 필자의 책에서 그런 성경의 진리와는 거리가 먼 언어의 유희가 한국인들의 가정생활에서나 교회생활에서 여자를 굴종시키기 위해 널리 악용되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워 좀 강하게 이렇게 썼다: “우스꽝스러운 현상은 그런 이른바 ‘역할의 차이론’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불이익을 당하는 여자들은 그 이론은 남녀동등이라는 신약성경의 기본 가르침을 헛되게 하는 말장난에 불과하며 속임수라고 거부하는데, 그 이론으로 이익을 보는 남자들은 그것이 남녀동등의 원칙에 합치하며 성경적이라고 우겨대고 있는 것입니다”(p.74). 그런데도 서 목사는 계속 남자의 기득권 보호 차원의 그런 우겨대기를 계속할 뿐 아니라, 심지어 “개혁교회는 교회에서 여성을 추호도 굴종시켜 본적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고 항변하기까지 한다.

 

한국의 보수 개혁교회가 서 목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남성의 교회 내에서의 설교권과 지도력에 대한 독점을 옹호하고 여성의 설교와 지도력에의 참여를 불허하는 상황 속에서 여성의 굴종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서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의 여성들은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씀과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은 절대 어겨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하도 철저히 교육을 받아서(이런 것을 “세뇌교육”이라고 함) 그들이 당회 등 교회의 주요 의결과 치리 기관들에 참여도 못하고 가정에서 남편에게 순종을 강요당하면서도 스스로 굴종되고 있지 않다고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성경을 옳게 보게 된 서 목사가 졸업한 총신 여자 동문들 상당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필자에게 직접 확인해 주었다. 그러니 필자는 서 목사에게 제안하고 싶다. 한국의 여러 개혁교회들의 여성 전체를 대상으로 교회 내에 여성의 굴종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사회과학적 조사를 한번 해보시라고. 그것이 너무 번거로우면, 서 목사의 총신 여자 동문들에게만이라도 그 질문을 한번 해보시라고.

 

 

 

보수주의 목사들은 공의와 자비에 대한 의식도 없는가?

 

만약 어떤 목사가 자신은 한 교회의 목사로서 설교권을 비롯한 모든 지도권을 독점하는 가운데 자신과 같은 신학교에 하나님나라를 섬기라는 같은 소명을 받고 입학하여 3년이나 같이 공부한 동료가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겨우 “전도사”로서 모든 점에서 열악한 대우를 받고 있는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런 목사가 과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영을 제대로 받은 사람인가? 그런 목사는 분명 필자가 아는 복음과는 다른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이고, 필자가 아는 예수의 정신과는 다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다.

 

목사라는 사람이 저자 거리의 김 서방, 이 서방보다도 공의와 자비에 대한 의식이 없다면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의 보수 목사들은 차별받는 약자들에 대한 일반인의 의협심도 없는가? 과연 “목사”란 무엇인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성경에 계시된 “율법”이니 할 수 없다고? “율법”이 공의나 자비보다 앞선다고? 그것이 예수의 가르침인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안 읽어 보았는가?

 

 

 

고린도전서 11장 2~16절을 제대로 보라.

 

필자는 고린도전서 11장 2~16절이 남녀 간의 “질서”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여자들이 교회의 공 예배에서 기도나 설교할 때 머리를 수건으로 가리고 하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의도를 가진 것임을 강조하였다. 서 목사가 필자의 책에 이의를 제기한다면서도 필자의 책을 제대로 읽고 반론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도 유감이지만, 그보다 더 유감인 것은 성경을 제대로 보고 해석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고전 11장 2~16절의 문단 중 몇 구절들만을 문맥에서 임의로 추출하여 그들이 남녀 간의 질서를 세우기 위한 것으로 왜곡한다.

 

고린도전서 11장 2~16절이 너무나 명백함으로, 그리고 필자의 책에 비교적 소상히 다루었음으로, 여기에서 길게 말할 필요가 없어 몇 마디만 하고 지나가고자 한다. 첫째, 그 본문은 남녀 간의 “질서”를 가르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니다. 둘째, 그 본문은 공교회의 공예배에서 여자들에게도 설교를 허용하는 본문이다. 셋째, 그 본문은 공예배에서 여자들이 설교할 때 복장을 단정히 하라는 가르침을 주는 본문이다.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을 제대로 보라.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을 다룸에 있어서도 서 목사의 성경해석에 있어 근본적 무지가 잘 드러난다. 필자는 그 본문이 사본학적으로 불안한 점, 고린도전서 14장 26~39절에 있어 문맥을 끊고 있는 점, 바울이 바로 앞서, 즉 고린도전서 11장 2~16절에서 여자들의 교회내의 공예배에서 설교를 허용하는 가르침과 모순되는 내용,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신과 그의 모범을 잘 이어 받아 표현하는 바울의 남녀 관계에 대한 전체적 가르침과 어긋나는 내용, 후대의 가르침인 디모데전서 2장 11~12절과 언어와 사상에서 유사한 점 등을 들어, 그 본문이 후대에 쓰여져 지금의 위치에 삽입되었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서목사는 이러한 논거들에 대한 정확한 점검과 비판이 없이, 자신의 영감설이라는 도그마를 들어 엉뚱하게도 그런 견해는 “성경의 정경론(에)까지 이의를 제기하는 발언”이라고 하며 근본주의자들의 본능적인 방어기재에 호소하는 일만 하고 있다.

 

서 목사가 신학교에서 사본학이나 역사비평 등 성경의 깊은 연구에 필요한 방법론들을 터득하지 못했으면, 지금이라도 한국 교계의 공해인 엉터리 주석들 말고 학문적인 주석들을 참조하여 성경을 연구하기 바란다.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에 관해서는, 하다못해 「목회와신학」 2004년 9월 호에서 장동수 교수의 쉽고 명쾌한 사본학적 설명(pp.204~07) 이라도 참조하기 바란다.

 

이런 기본적인 성경연구의 훈련이 결여된 서 목사는 성경을 기록된 대로 역사적 정황과 언어 또는 문체 등을 분석(즉 역사비평)하여 신약성경의 남녀 관계 또는 여성의 교회 내에서의 지도적 역할 등을 다루는 본문들을 정확하고 깊이 있게 해석하는 대신, “하나님의 말씀이 영감된 정확무오한 말씀임을 믿는다”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천명함으로, 또 “원본”만이 영감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원본”과 다른 “사본만으로도 그 의미가 충분히 전달 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원본을 드리밀지 않으시고 계신다”는 등 논리의 일관성도 없는 주장을 펼치면서 논점을 흐리고 만다.

 

 

 

사본비평은 근본주의자도 환영하는 방법이다.

 

성 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을 기독교 신앙의 근본으로 삼은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20세기 초부터 바로 성경의 원본(만)이 영감되고 정확무오한 것이라고 보았기에, 성경의 많은 사본들을 비평하여 원본에 보다 더 가까운 성경본을 찾으려는 사본비평을 기꺼이 수용한 것이다. 그래서 가장 무지하고 철저한 근본주의자들도 higher criticism 이라 불리던 역사비평은 배격하되 사본비평은 lower criticism 이라 하여 적극 수용하여 온 것이다.

 

다수의 보수 학자들이 참여한 사본비평을 통하여 후대에 바꾸어지거나, 삽입되거나, 생략된 문자, 말, 구절 등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계속 이어져 오늘날까지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은 신학의 초보를 배운 사람들은 다 아는 바이다.

 

그런데 서 목사는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이 다른 이유들과 더불어 사본비평학적으로 봐서도 후대의 삽입절일 것이라는 판정을 성경의 영감을 부인하는 행위이며 성경의 “정경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다(서 목사는 정경론이 무엇인가를 알고나 하는 말인가?). 그래서 그는 명색이 신학을 공부한 목사라는 사람이 그러한 사본비평적 그리고 문서비평적 판단을 “성경의 편집설을 제기하는” 것으로, 무슨 생경하고 위험스런 일이나 저지른 것같이 떠들어대는 무식한 자들의 대열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성경의 편집설”을 우려하는 자들은 성경의 책들을 좀 제대로 연구하여 그들 중 많은 경우 실제로 어떻게 편집되었는가를 배움으로써 그런 무지의 상황에서 어서 벗어나기 바란다). 서 목사는 그의 성경의 영감설과 무오설로 말미암아 사본비평을 받아드리는 근본주의자들보다도 더 철저한 맹목(盲目)주의자가 되려는가?

 

“하나님께서는 사본만으로도 그 의미가 충분히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원본을 드리밀지 않으시고 계신”다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주장은 사본비평이나 진지한 성경해석을 한번도 제대로 해보지 않은 사람이 만용을 부리는 헛소리이다. 성경에는 다양한 사본들로 말미암아 그 뜻이 크게 달라지고, 기독교 교리체계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주는 구절들이 허다하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 서 목사 같은 주장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영감설, 역사비평, 그리고 디모데전후서의 후대성.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저자들을 자신의 영으로 영감하여 그들의 역사적 정황 속에 선포하게 하신 말씀들의 모음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영감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인간의 다양하고 구체적인 역사적 정황들 속에서 인간의 언어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 뜻을 정확히 터득하기 위해 우리는 사본비평뿐 아니라 언어, 문법, 수사, 문체, 문학, 또는 다양한 역사비평 및 사회과학적 비평의 방법들을 동원해 연구해야 한다.

 

이러한 연구 결과 대다수의 신약학자들은 디모데전서 등 목회서신들은 바울이 직접 썼다고 보기 어렵고 바울의 신학과 신앙 유산을 이어받은 그의 제자들이 그의 그 유산을 자신들의 언어로, 자신들의 정황에 적용하여 쓴 문서들이라고 보는 것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복음주의” 신약학자들 중 다수는 그들의 전래된 성경의 영감설에 대한 신념 때문에 목회서신들을 바울이 직접 쓴 것들로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지난 30~40년 동안 다수의 복음주의자들이 성경의 영감성에 대해서 좀더 성숙한 이해를 갖게 되고 성경의 영감성을 믿으면서 동시에 역사비평 방법론을 긍정적으로 활용하는 법을 터득하여, 목회서신들에 대한 위와 같은 견해에 동의하게 된 것이다. “복음주의”를 빙자하여 역사비평을 거부하고 성경의 깊은 연구를 불가능하게 하는 거짓 보수주의를 극복하고, 그런 진정한 보수 복음주의적 학문을 꽃피운 사람을 하나 예로 든다면, 영국의 탁월한 신약학자로서 현재 세계의 복음주의 신약학자들의 “대부”라고 불러도 마땅한 하워드 마샬(I. Howard Marshall)이 제일 적절할 것이다.

 

그는 성경의 영감성도 믿기에 그것에 대해 좋은 단행본도 출판하였거니와, 최근에는 목회서신들에 대한 가장 뛰어난 학문적 주석 (ICC)을 출판하였다. 그 주석에서 그가 목회서신들의 바울 저작설을 부인했다하여 그를 성경의 영감성을 부인하는 자유주의 학자로 몰아대는 복음주의자는 적어도 영국과 미국에는 없을 것이다. 혹 그렇게 하는 근본주의자들은 더러 있을지 몰라도 말이다.

 

 

근본주의 신학의 한계는.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을 “복음주의자”들이라 부르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러한 호칭이 세계적 추세에서 보면 30~40년 전에는 합당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의 세계적 관점에서 볼 때는 아직도 역사비평에 대해 무지에서 비롯한 저항을 계속하고 있는 한국의 보수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복음주의자”들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들에게 합당한 칭호는 “근본주의자”이다.

 

근래에 구미에서 구약과 신약에 대한 깊은 연구로 박사학위를 하고 한국으로 돌아간 젊은 학자들 중 적어도 일부는 그들의 논문에서 역사비평의 방법론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그런 방법론을 써야 하고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솔직히 인정한 일부 교수들이 근본주의적 동료들과 교단의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엄청난 수난을 당하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신념을 그냥 숨기고 움츠리고 있는 경우들을 간혹 본다.

 

필자는 그들의 어려운 처지에 동정한다. 아마 그들 중 더러는 스스로에게 물을 것이다. 그것이 과연 성경의 진리에 대한 올바른 헌신인가, 그리고 그것이 한국교회와 그들이 속한 신학교의 올바른 발전에 기여하는 길인가? 근본주의적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목이 졸리는 상황에서 실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 그들에게 이렇다 할 도움을 줄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그들의 어려운 처지에서 비껴서있는 사람으로서 필자가 그들을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 한국 보수신학교들과 교회들이 근본주의를 벗어나 신학적으로 보다 성숙하고 바르게 되어야 한다고 부르짖으며 그들의 고충을 드러내주는 것 외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한국의 근본주의자들은 깨달아야 한다. 문서비평이나 역사비평 등의 성경해석 방법론들을 외면하고 근본주의적으로만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들은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그래서 실제로 성경에 무지한 목사들만을 배출하게 되어있다는 것을 말이다.

 

 

 

마리아와 고린도교회의 여자들은 “공교회”가 아니라 사교집단에서 설교하였는가?

 

서창원 목사의 “이의제기”에 대한 답변으로 돌아가자. 서 목사는 필자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몇 여자들을 첫 복음 선포자들로 세우신 것(마 28:1~10; 눅 24:1~12; 요 20:1~18)을 중시하여 오늘 여자들에게 설교를 못하게 하는 것은 예수의 정신에 어긋난다는 논지를 편 것을 반박한답시고 논리적 일관성이 없는 장황한 말을 늘어놓고 있다.

 

그의 문장들 간의 논리적 모순과 일부 성경의 사실들에 대한 주장의 그릇됨은 독자들이 이미 간파하였으리라 믿고, 다만 그가 마리아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알린 것은 “공교회” 앞에서 설교자로 세움 받아 “공식적”으로 한 것이 아니니, 여자들은 “공교회”에서 설교하면 안 되고 “일상생활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증인의 역할” 정도는 할 수 있다고 하는 그의 주장의 문제점만 지적하고 자 한다.

 

이 주장은 당장 서 목사가 무엇을 “공교회”로 이해하며, “설교”를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의아스럽게 한다. 첫 부활절 아침에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의 공동체 외에 또 무슨 “공교회”가 있었는가? 그 공동체가 “공교회”가 아니면 무엇이 “공교회”인가? 신학교 문전에도 가보지 못한 성도들도 설교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신약신학개론만 배운 사람도 사도적 교회의 첫 복음 선포(kerygma; 설교)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이었음을 알고, 그것이 “복음”의 핵심인 것을 안다.

 

그런데도 서 목사는 마리아 등이 첫 부활절 날 제자들의 공동체 앞에서 “예수가 부활했다”는 기쁜 소식을 알린 것은 “공교회” 앞에서의 “설교”가 아니라 하고,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하신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는 그들을 “설교자”로 세움이 아니라 한다. 이런 신학적으로도 맞지 않고 논리적으로도 뒤틀린 주장을 더 탓하여 무엇하랴! 다만 서 목사는 스스로 묻기를 바란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렇게까지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며 억지 주장을 펼치게 하는가?

 

서목사는 고린도전서 11장 2~16절을 제대로 보면 여자들은 “공교회”에서는 설교해서는 안 된다는 그의 주장이 틀렸음을 감지하였을 것이다. 그가 반박한다는 필자가 그 본문을 중시하여 다루었고 그 본문에 근거하여 여자들에게 교회의 공예배에서 설교하게 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강조하였으니 말이다. 아마 그러기에 서 목사는 그 본문의 정작 핵심은 피하고 앞서 본 바와 같이 바울 스스로 포기하고 마는 그의 몇 마디에 호소하여 그 본문을 남녀간의 질서를 정리하는 것으로 왜곡하는 것이다. 서 목사가 필자를 반박하려면 고린도전서 11장 2~16절 전체를 직시하고 필자의 그 본문 해석이 왜 틀렸는가를 지적해야 한다.

 

그것도 하지 않고 그 본문의 핵심도 외면하면, 서 목사는 결국 자신의 도그마에 거침돌이 되는 성경의 본문은 무시해버리는 사람이 아닌가? 서 목사는 사도 바울이 세운 고린도의 교회를 “공교회”로 보지 않고 무슨 사교 집단으로 보는가? 서 목사는 고린도의 “사도적” “공교회”에서 여자들이 예언(요샛말로 하면, 설교)을 했고, 바울이 그들이 머리에 너울을 쓰는 한 계속 예언하도록 허용했다는 것을 부인하는가? 그들은 “공교회”에서 설교를 하지 않고 어디서 무엇을 했단 말인가?

 

 

 

여성들의 예언사역.

 

서목사의 성경 해석의 수준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신약 성경에 분명 여성들 중 선지자들이 있다. 빌립의 네 딸들이 그러하며 (행 21:9) … 그러나 빌립의 네 딸들이 무슨 예언을 했는지 전혀 언급이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학자들의 의견이 다르지만 전통적으로 해석되어 온 것은 남자 사역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그들이 사역자로 나설 이유가 특별히 없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서 목사가 어떤 학자들의 의견을 참조하였는지, 도대체 그 “전통적인 해석”이라는 것이 어디서 유래하였는지는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그런 해석을 하는 학자를 또는 책을 본 일이 없다.

 

 마 정신이 올바로 박힌 “학자”치고 그런 해석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해석을 하는 사람은 “남자 사역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그들이 사역자로 나설 이유가 특별히 없었던” 상황인데도 그 여자들이 예언의 사역을 감당하는 잘못을 저질렀고, 또 누가는 그들의 그런 불미스러운 또는 죄스러운 행위를 자신의 “사도들의 행적들”이라는 책에 기록해두는 미친 짓을 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니 말이다.

 

성령의 다분히 기계적인 성경 영감설을 믿는 듯이 보이는 서 목사는 이 해괴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왜 성령께서 “남자 사역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그들이 사역자로 나설 이유가 특별히 없었던” 상황인데도 그 여자들이 해서는 안 될 예언의 사역을 하였음을 누가를 통하여 성경이 될 책에 기록되게 하셨는가? 신약시대 “예언”은 성령의 영감에 호소해 하였던 설교였다.

 

왜 성령은 이 여자들에게 영감을 주시어 해서는 안 될 예언을 하게, 즉 범죄하게 하셨을까? 한마디로 말해, 이런 우스꽝스런 “해석”은 초대교회에서의 “예언”과 “선지자”의 현상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 신약의 본문 - 초대교회에서 여자들이 활발히 설교 활동에 참여하였음을 보여주는 본문 -을 있는 그대로 보기를 거부하고 여자는 설교할 수 없다는 자신의 도그마에 맞추어 “요리”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인 것이다. 교회의 전통 (도그마 등)에 맞추어 성경을 해석하는 중세 가톨릭 스콜라 신학에 반발하여 성경의 올바른 해석에 의해 교리를 세우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며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칙을 내세운 종교 개혁자들의 후예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신약교회에서 여자들은 리더로 활동하지 않았다.

 

서목사는 신약교회에서 여자들을 장로나 감독직에 안수하여 세우는 예가 없음을 들어 여성의 교회 내에서의 지도자 됨을 배격한다. 그러나 그가 신약을 조금만 깊이 공부했더라면, 신약시대, 특히 바울 당대까지에 있어 교회들의 직제가 얼마나 미숙하고 비조직적인 상태에 있었으며 지도자 세움이 얼마나 카리스마틱한 것이었는지, 목회서신들에 나타나는 장로와 감독 세움은 거의 1세기 말에나 점차 조직화되어 가는 교회의 지도자 세움의 제도 확립과정을 보여 준다는 것 등을 알았을 것이다.

 

또 서 목사는 요새 상당수의 학자들이 로마서 16장 1~16절에 나타나는 뵈뵈를 비롯한 여성 지도자들에 대해서 주목하고, 특히 바울이 여자 유니아를 “사도”로 부르는 것(16:7)을 중시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더 나아가서 여성에 대한 태도뿐 아니라, 율법이나 전통 등 신학 전반에 걸쳐 바울 이후 유대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이방 교회들까지 보수화하여 예수와 바울의 해방의 정신이 율법주의로 전환되고, 예수와 바울의 은혜의 복음이 행위와 공로의 신학으로 전환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행위 구원론과 율법주의가 성 아우구스티누스 등 예외적 소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14세기 동안이나 대체로 지배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16세기 초에 종교 개혁자들이 성경의 진정한 가르침을 새롭게 발견하여, 특히 예수와 바울의 가르침을 새롭게 깨달아 은혜의 복음을 회복하고 교회 개혁을 이룬 것이다. 예수와 바울의 은혜의 복음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여성에 대한 가르침도 율법주의적으로 왜곡되어 교회 내에서의 여성 리더십 불허는 최근까지 교회의 굳건한 전통이 되어 버린 것이고, 성경에 대한 재해석을 통하여 예수와 바울의 은혜의 복음을 회복하여 신학과 신앙의 다방면에서 개혁을 이루었던 루터나 캘빈도 여성에 대해서는 예수와 바울의 정신을 제대로 천명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예수는 전능하셔서 문화적 양보를 하실 필요가 없었다.

 

서목사는 필자가 예수께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여 새롭게 창조하고 모은 새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도록 하기 위해 옛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12 족장들에 상응하는 “열둘” 제자들을 세움에 있어 여자들은 그 속에 하나도 포함시키지 않은 것을 예수의 당시 상황에 대한 문화적 양보라고 설명한 것에 대해“어차피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인데 유대인들의 문화와 전통과 관습을 거역하는 일을 그 전능하신 분이 왜 못하였는가? 성령의 능력은 문화와 전통과 관습을 뛰어넘는다. 복음의 효과적인 열매를 위해 문화적 양보를 하셨다는 것은 신학자의 궤변이다”라고 강변한다.

 

이것은 공관복음서들을 한 번도 제대로 읽지 않고, 그들이 증언하고 있는 예수의 가르침과 행태에 대해서 진지한 연구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자로서, 다만 역사적 예수의 실재와 긴밀히 연결시키지 않으면 도케티즘 (Docetism)으로 흐를 위험을 항상 내포하고 있는 전통적인 기독론적 도그마에서 출발하여 연역하는 식으로만 사고하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서 목사가 역사적 예수에 대한 거창한 연구는 고사하고, 마태복음 17장 24~27절만 제대로 읽었더라면 그렇게 스스로의 무지를 드러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주장은 사도 바울의 목회와 선교의 실제, 그의 서신들에 있어서의 가르침들, 그리고 그 외의 신약의 책들의 가르침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 하는 공허한 주장인 것이다. 서 목사는 성경을 그렇게 중시한다면서도 바울의 선교적 원칙 하나를 천명하는 그 유명한 고린도전서 9장 19~23절도 읽어 보지 못했는가? 또 서 목사는 “열 둘”을 뽑을 때 문화적 양보를 한 예수가 왜 마리아를 복음의 첫 선포자로 세울 때는 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며 필자가 자가당착에 빠졌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아들로 대가 이어지는 것으로, 즉 가부장적으로, 사고하던 당시의 유대인들이 “열 둘” 중에 여자들이 끼어 있으면 그들이 새 하나님의 백성 (새 이스라엘)의 조상들이라는 상징성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그것을 피한 것과, 이미 예수로부터 여성에 대한 존중의 가르침과 행태를 배워 왔고 그들의 예수 운동에 있어 하나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온 막달라 마리아를 잘 아는 베드로 등 예수의 제자들에게 그 마리아를 첫 복음 선포자로 세울 때는 그런 문화적 양보가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은 무슨 자가당착인가?

 

 

 

문자주의와 율법주의적 성경관의 자가당착

 

서목사는 필자가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선언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질적 표현인 반면에 고린도전서 11장 2~16절에서 여자들더러 교회의 공예배에서 머리에 수건을 쓰고 설교하라는 가르침은 상황적인 것이고 비본질적인 것이라고 한데 반발하여, 후자도 “성경에 기록된 것 그 자체로만 해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를 가진다. …

 

그런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나누어서 말한단 말인가? 비본질적인 것은 소홀하게 다룬다든지 혹은 우리가 임의대로 혹은 우리들의 편리대로 각색하여 사용하면 된단 말인가?” 고 묻는다. 이런 질문은 해석학의 초보도 모르면서 문자주의적 성경 이해만 가지고 있으며,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가운데 그 사고가 기본적으로 율법주의적으로 고착된 사람들이 하는 질문이다.

 

서목사가 신약성경을 조금만 연구했더라도 예수님도 바울도 구약성경을 그런 식으로 다루지 않았으려니와, 바울이 주 예수의 말씀들도 그렇게 율법주의적으로 다루지 않았음을 알았을 것이며, 예수나 바울도 본질적인 것들과 비본질적인 것들을 구분하여, 예컨대 사랑의 이중 계명은 본질적인 것으로 다루되 음식이나 정결 따위에 관한 계명들은 비본질적인 것으로 다루었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서목사는 다시 한번 성경 자체가 실제 어떻게 가르치는가를 자세히 그리고 정확히 보는 것은 도외시 하면서 성경의 영감성과 권위라는 자신의 도그마에 의존하여 성경을 외부로부터 정의하려 하고 성경의 사용 방법을 규정하려 한다. 그것의 어리석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필자의 머리에 떠오른 한 가지 궁금한 질문으로 서 목사의 자가당착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리라 본다. 그래서 목사는 그의 지론에 따라 그의 교회의 남녀가 함께 참여하는 공예배에서 고린도전서 11장 2~16절에 기록되어 있는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자들에게도 설교를 하도록 하는가? 하면, 그들에게 꼭 머리에 두건을 쓰고 하도록 하고 있는가? 아니라고? 그러면 그가 성경을 그렇게 “임의대로 혹은 [그]의 편리대로 각색하여 사용하면 된단 말인가”

 

 

 

2000년 동안이나 없었던 여성성직을 왜 이제 와서 주장하느냐고

 

서목사는 또 이런 주장도 한다: “만약 여성성직 허용과 같은 중대한 사항을 지난 2천년 가까운 세월 동안 주님께서 방치해 두시고 오늘날 누구보다도 똑똑한 일부 신학자들에게 발견케 하여 교회에 소개하라고 하셨다고 한다면 계시의 점진성의 원리로 이해하고자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모순된 존재라고 말하는 불경죄에 빠진다. 더 이상 계시가 주어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이미 주어진 신구약 성경 66권으로도 충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주장 자체가 모순된 논리를 담고 있음을 독자들은 이미 간파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얼마나 미숙한 이해를 담고 있는가이다.

 

많은 학자들과 더불어 필자가 주장하는 바는 가정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여성의 남성과 동등함은 무슨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1900여 년 전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과 신약의 다른 남녀 복음 선포자들을 통해서 신약성경에 계시해 놓으신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의 성령에 의한 영감을 믿는 사람들은 그 성령의 성경 해석자에 대한 조명(illumination)도 믿는다. 성령이 지난 1900년 동안 교회의 남성 지도자들에게 신약의 그 계시를 잘 조명해주시어 그 진리를 이해하도록 하셨는데, 심장이 완악한 남성 지도자들이 그 조명을 무시하고 그 계시를 보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서 목사를 위시한 한국의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주 예수께서 여자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한 것도 평가절하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사도 바울이 여자들에게도 교회의 예배에서 설교하도록 하며 뵈뵈나 브리스길라 그리고 유니아 같은 여자 지도자들을 세운 것도 눈을 가리고 안쳐다보려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백한 계시를 온갖 구실과 온갖 혼탁한 논리를 다 들이대며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 아니라 전통에 호소하는 한국의 “개혁신학자”들

 

한국에서 스스로를 “개혁 신학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일부가, 서 목사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하여, 교회 내에서의 리더십 행사를 남성에게만 허락하고 여성의 안수 또는 리더십 행사를 부인한 것은 교회가 지난 2000년의 역사에서 지켜온 전통이므로 이제 와서 여성안수를 부르짖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을 펴는 모양이다. 그런 사람들은 기독교 가정과 교회 내에서의 여성에 대한 정당한 대우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현금의 세상적 시류에 영합하는 것으로 낙인찍으려 하며, 시류와 관계없이 오로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그 문제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유교적 가부장주의와 군사문화의 권위주의적 잔재가 아직도 대세를 이루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주로 구약에서 볼 수 있고 신약에도 일부 잔재가 남아 있는 이른바 “성경적 가부장주의”를 고수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자신들이 시류에 영합하고 있는지, 아니면 주 예수와 사도 바울의 정신을 따라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시류에 영합하고 있는지의 문제는 여기서 따질 여유가 없다. 그러나 하여간 시류와 관계없이 오로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여성성직 참여의 문제를 결정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옳다.

 

그래서 필자는 필자의 소책자에서 남녀관계와 여성 리더십에 관한 주 예수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두루 살핀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과연 성경의 가르침을 포괄적으로 연구를 하느냐? 그렇지 않다. 그들이나 서 목사는 필자가 주 예수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신약의 본문들을 해석해 놓은 글을 비판한다면서도 필자의 그 해석을 제대로 점검하는 일도 하지 않고 자신들의 대안적 해석도 내놓지 않으며, 그냥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는 공허한 구호만 되풀이 한다.

 

그들이 기껏 한다는 것이 주 예수께서 마리아를 첫 복음 선포자로 세우신 것을 담고 있는 복음서들의 본문들이나 여자들의 설교 활동을 보여 주는 사도행전 18장 26절, 21장 9절이나 그것을 계속 허용하는 고린도전서 11장 2~16절 같은 명백한 본문들은 완전히 무시하고 그들과 모순을 일으키는 디모데전서 2장 11~12절과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에만 호소하는 것이다.

 

그들은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이 후대의 삽입절들이고 디모데전서 2장 11~12절이 후대의 특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해석을 제대로 반박하지도 못하면서 그냥 성경 영감설과 무오설에 호소하여 그렇지 않다고 우겨대는 것만으로 여성 리더십에 관한 자신들의 부정적인 견해를 “성경적으로” 성립시키고 반대되는 견해를 무효화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명백한 본문들은 무시하고 그렇게 불확실하고 문제 많은 두 본문들에만 호소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렇게 그들이 여성의 성직 참여를 불허한 교회의 지난 1900년간의 전통이 성경적이었다는 선입관에만 매달리면서, 그 전통이 과연 성경적인가를 알기 위해 실제로 신약성경을 포괄적으로 연구하는 일은 등한시 하는 것이다.

 

그런 전통주의자들이 성경의 영감설과 무오설 및 절대 권위는 소리 높여 외쳐대면서 실제 성경을 제대로 보고 깊이 해석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는 역설은 필자의 책에서 뿐 아니라 이 글에서도 서 목사를 예로 들어 누누이 보여주었으므로 더 논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필자는 여기서 또 다른 쓰디쓴 역설 앞에서 서글픔을 금할 수 없다. 언제부터 “개혁 신학자”라는 사람들이 성경을 무시하고 “2000년간의 교회의 전통”에 호소하여 신학 논쟁을 벌여 왔는가? 시류에 영합해서는 안 되고 오로지 성경의 가르침에 의해서만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왜 성경은 제쳐두고 교회의 전통에 호소하는가? 또 그들의 논조대로라면 행위 구원론과 사제주의는 교회가 1400여년이나 지켜온 전통이었으니 그것들에 대항하여 16세기 초에 루터와 캘빈 등 개혁자들이 은혜의 복음과 만인 사제론을 주장한 것은 큰 오류를 범한 것이 아닌가?

 

“개혁 신학자”라는 사람들이 이른바 “개신교 스콜라 신학”에 사로잡혀 성경의 책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메시지를 발하지 못하게 하고 그들의 스콜라 신학 방법으로 짜 놓은 자신들의 “조직신학” 체계에 합당하게만 말하게 하는 우를 범하여 중세 카톨릭 신학 방법으로 환원하고 있음은 심히 우려스러운 일이다. 일부 “개혁신학”을 한다는 학자들과 목사들이 마치 캘빈이 성경해석을 다 마쳐버리고 그와 그의 후계자들이 신학작업을 완성해버리고, 과거 화란과 미국의 몇 학자들과 국내의 모 박사들이 그 완성된 신학을 좀 더 갈고 닦은 것으로 생각하여, 우리는 이제 그 신학을 고수해야 하며 거기에 겨우 해설이나 각주들이나 달아 가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리하여 한국의 보수 개혁교회들의 신학과 신앙은 화석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여간, 일부 “개혁 신학자”들이 교회 내에서의 여성의 리더십에 관한 논쟁에서도 똑같이 성경의 가르침에 보다는 자신들의 전통 에 더 무게를 두고 그 전통에 근거해 성경을 “요리”하려 하는 것이다. 오늘 그런 “개혁 신학자”들의 그러한 논법은 종교개혁 당시 반개혁적 가톨릭 신학자들이 루터나 캘빈에 대항하여 썼던 논법이다.

 

가톨릭 신학의 전통 사상과 스콜라 신학 방법에 대항하여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기치를 높이 들고, “개혁 교회는 항상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개혁해가는 교회”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라는 구호를 소리 높여 외친 개혁자들의 일부 후예들이 이제 교회의 전통에 호소하면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새롭고 보다 정확한 이해에 따라 교회를 개혁하려는 노력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실상이 이러하기에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을 저버린 그들이 “개혁 신학자”라 자처하며 그런 구호들을 지금도 외쳐대는 것을 볼 때마다 그 공허함, 아니 그 희극적-비극적 연극에 서글픔을 금치 못하는 것이다.

 

 

 

여성안수 하는 교단들이 부흥하는가?

 

마지막으로, 서 목사는 과거에 교회 내에서 여성 리더십을 허락하지 않은 때에도 교회는 부흥했는데, 오늘날 여성안수를 하는 교단들이 그렇지 않는 교단들보다 더 부흥한다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며, 교회가 여자들의 리더십 참여를 허락하여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들을 활발히 사용하게 하면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되리라는 필자의 견해를 반박한다. 물론 필자는 서 목사가 무엇을 진정한 교회 부흥이라고 보는지 모른다.

 

서목사의 글은 전체적으로 율법주의적인 목회를 하면서 성경은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못하고) 교회의 가부장적 전통을 고수하는 분으로 인상을 남기는데, 필자는 율법주의에다가 기복신앙 및 상급 신학의 요소를 가미하고, 신앙을 신비화시켜 이성의 건전한 비판 능력을 마비시킨 상황에서 원시적 성경공부를 제공하여 회중을 우중(愚衆)으로 묶어 두며, 구약의 제사장 제도에 호소하여 사제주의적 목사관을 주입시키고 유교의 가부장적 그리고 군사 문화적 권위주의로 몰아붙여 양적으로 크게 “부흥”하는 교회들을 많이 보았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 은혜의 복음을 대체한 공로/상급 신학과 율법주의의 교회, 자유와 사랑과 화평보다는 속박과 갈등과 불안감 (anxiety; Aengstlichkeit)을 더 많이 가져다주는 교회, 하나님에 대한 의존과 순종 대신 맘몬 우상숭배를 더 북돋우는 교회, 섬김의 리더십 대신에 권위주의적 리더십이 “성공”하는 Sado-Masochism의 교회, 성령의 진정한 열매들 대신에 성령을 빙자한 미신을 조장하는 교회가 수천, 수만 명의 “신자”들을 모으고, 그런 교회가 수백, 수천이 있다 한들, 한국사회에 하나님나라의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의 구원을 실재화 하는데 과연 무슨 힘을 발휘하는가?

 

필자에게는 복음을 이렇게 저렇게 왜곡하여 수를 잔뜩 늘린 교회보다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올바로 선포하고 교회 공동체의 삶을 복음에 합당하게 이루며, 성도들로 하여금 성령의 열매들을 맺는 성화의 삶을 살게 하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들을 이루게 하며, 세상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는 교회가 올바로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이다.

 

이런 교회를 위해서는 교회에서 성경적으로 남녀관계에 대해서도 올바로 가르치고 실행하여, 성도들이 건전한 기독교 가정을 이루게 하고, 사회 계층적 차별이나 갈등과 마찬가지로 성적 차별과 갈등도 없이 모두가 각자 받은바 성령의 은사들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모두가 모두를 섬기는 그리스도의 몸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도록 하는 것이 여러 요건들 중 하나라고 본다. 이런 성경적 이상을 추구하는 교회는 한국적 문화 상황에서 수적으로 크게 “부흥”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런 교회가 작더라도 참다운 교회로서 한국사회는 물론 온 세상에 “언덕 위에 세운 도성”같이 빛나서 그리스도의 계시와 구원의 참다운 전달자가 되리라고 확신한다(마 5:13~16). 왜냐 하면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고 사도들의 가르침이며, 본질적으로 옳기 때문이다.

 

 

 

맺는 말 : 신학적 성숙과 성경적 개혁

 

서목사는 지금까지 다룬 것들 외에도 몇 개의 주장들을 더 한다. 그러나 그것들도 여기서 다룬 것들과 마찬가지로 한결같이 그의 성경에 대한 무지와 신학적 사고의 빈곤 그리고 기본적인 논리적 사고와 논증 능력의 결여만을 드러내는 것들이어서 더 다룰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아마 한국의 많은 보수 교회들의 목사들이 서 목사와 비슷한 견해, 태도, 경향 등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래서 원래 그의 글이 응대할 가치가 없는 것임을 밝히며 기껏해야 한 면 정도만 쓸려고 하였는데, 생각을 바꾸어 편집자의 주문량을 넘어가며 이렇게 길게 썼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엄청나게 도전 받고 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의 보다 핵심적인 면들에 대한 연구에 몰두해야 할 상황에서 그것을 중단하고 이러한 유치한 논쟁에 여러 시간을 써야 하는 것이 그렇지 않아도 여러 가지 원천적으로 불리한 여건들 (handicaps)을 안고 작업해가야 하는 한 후진국 출신 학자의 서글픈 숙명임을 내내 한탄하면서 말이다.

 

필자는 서 목사 같은 한국의 보수주의 목사들과 신학자들에게 다시 한번 호소하는 바이다. 그들의 성경 영감설, 무오설, 절대 권위설 등의 구호들을 지금과 같이 성경에 대한 진지하고 깊은 연구를 훼방하는 도구들로 쓰지 말고 도리어 그것을 적극 북돋우는 동력으로 삼으라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리로 믿으면 복음을 더 바르고 깊이 터득하여 율법주의 등 모든 왜곡들을 극복하고 복음을 온전히 그리고 포괄적으로 선포하라고.

 

그들이 성경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면, 근본주의적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하라고. 기독론에서 뿐 아니라 성경론에 있어서도 사실상의 도케티즘(Docetism)의 이단에 빠지지 말고, 성경의 신적 영감성과 함께 인간성/역사성도 인정하여 역사비평등 유용한 성경 연구 방법론들을 동원하여 성경을 보다 바르고 깊이 연구하라고.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며 복음의 진리를 드러내는 교회를 이루고 사역을 해가라고.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들로서 그들이 즐겨 외치는 자신들의 오직 성경(sola scriptura)과 “개혁 교회는 항상 개혁해가는 교회”(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의 구호들에 충실하라고. 이 두 원칙들에 충실하여, 이제 새롭게 터득하게 된 남녀관계와 여성 리더십에 대한 신약의 가르침에 따라 성도들의 가정과 교회를 개혁하라고.

 

한국의 보수 신학교들은 언제나 근본주의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학생들에게 성경과 신학을 제대로 가르쳐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고 복음을 올바로 선포하는 목회자들로 키워 내보내게 될까? 그들이 신실하지 못한 자유주의의 위험을 피하면서 근본주의를 극복하고 신학적 성숙을 이루어야 하는 이 시대적 소명을 잘 감당하기를 간절히 빈다.

 

                                                                                       

                                                                                                                        김세윤 | 2004. 11.

Posted by 작은샘

org date: 2012-01-27 21:22

 

http://www.duranno.com/sl/detail.asp?CTS_ID=8242

여성안수 허용 문제에 대한 이의 제기

서창원 | 2004. 10.

편집자주 : 김세윤 교수의 여성안수에 대한 반응으로 야기된 찬반론을 다룬다. 지난 호에서는 김 교수가 쓴 「하나님이 만드신 女性」(두란노, 2004)에 대한 평가와 사본학적 탐구를 통해 여성안수에 대한 찬성을 다루었다. 이번 호에서는 김세윤 교수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 서창원 목사의 반론을 싣는다.

유독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하다고 느끼는 곳이 아직도 존재한다고 하면 그곳은 전통적인 보수층 교회들이라고 말한다. 여성목사를 세우는 것이 시대적 사명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는 이때에 보수층의 어느 교단장의 ‘기저귀 발언’ 사건을 시발점으로 여성 성직허용에 대한 논쟁은 그 어느 때보다 과열되고 있다. 지난 7월 5일 여성안수 문제에 대한 성경적 견해를 논하는 세미나에 강사로 초청된 미국 풀러신학교 김세윤 교수는 여성안수 불허는 비성경적이고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라고 톤을 높였다. 거기에다 성경의 정경론까지 이의를 제기하는 발언을 하여 보수계층 목사들과 학자들을 당혹케 했다.

1. 여성과 남성의 관계는 우열문제가 아니라 질서 문제로 보아야 한다.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가? 성경에서 남녀관계는 동등성(sameness)이 아니라 평등성(equality)을 가르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동등하시듯 남성과 여성의 본질(substance)이 같을 때 우리는 동등성을 말할 수 있다. 남성과 여성은 만들어진 재료가 다르다. 남자는 흙을 빚어 만들었지만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존재다. 물론 이것이 우열관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남자와 여자라는 호칭의 구분이 있다. 예수와 하나님은 호칭이 다를지라도 하나님으로서 같은 분이시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는 결코 동등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는 역할과 기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측면에서 남성이나 여성이 다 평등하지만 기능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다. 타락 이전에도 그 차이는 존재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말씀하셨고 하와는 아담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존재였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인 남자를 언급하면서 남자가 여자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다고 했다. 그리고서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위해 지음 받았기 때문에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두라고 했다(고전 11:7~10). 여자의 머리가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다(고전 11:2).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동등하시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분명 권위와 질서문제를 염두에 둔 말씀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는 “권세 아래 있는 표”를 머리에 두라고 말한다.
그것도 “천사들을 인하여”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한다. 이 말씀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구속함을 받은 주의 백성들을 수종들어 섬기는 위치에 있는 존재임을 감안할 때 적어도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속하여 섬겨야 할 자임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할 때만이 여성들의 섬김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그 표시로 여성은 머리에 뭔가를 써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권위하에 있는 공교회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들이 임재하여 하나님이 받으시기 합당한 예배가 집전되는 곳에서 여자가 머리에 베일을 쓰지 않고 기도하거나 예언한다는 것은 마치 창녀들이 남자같이 하고 다니는 그 당시 부정한 자, 머리를 민자들과 같은 것이 되어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고전 11:6). 그 연장선상에서 남자에게 종속되어 있는 여자가 남자들 앞에서 가르치고 남자를 주관하는 일들은 옳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 말씀과 디모데전서 2장 11절이 언급되었다고 본다.
남성에게 복종하는 것은 문화에 따른 것이 아니라 율법의 가르침대로 하는 것이다(고전 14:34).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다(엡 5:22). 이것은 남성과 관련하여 여성의 위치에 대한 설명도 내포한다. 세상에서 나타나는 여성들의 두각이 교회에서도 나타나야 한다는 법은 없다. 교회는 세상과 구분되는 독립된 영적 공동체다. 하나님의 법이 최우선하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조직된 유무형 교회인 것이다. 성경에서 다루고 있는 남녀 관계는 지위의 우열문제가 아니라 질서 차원의 권위 문제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동등이 아닌 평등관계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의 머리뼈나 발가락뼈가 아닌 갈비뼈에서 여자를 만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이야기하고 있듯이 남자나 여자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하나인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진리다. 인간은 누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같은 평등한 지위에 있다. 부자와 가난한 자,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이 다른 것이 아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동일한 성도들이다. 이것은 주님의 구원의 은총에 있어 차별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누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위를 가진 주님의 백성이다.
고린도교회나 갈라디아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구원에 차별이 없는 것이지 믿는 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교회 공동체의 위계질서에 차이가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나 구분이 없는 동등성만 있다고 하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다: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니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딤전 6:1~2). 위계질서를 무시하고 모든 사람이 법 앞에서 평등하기 때문에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2. 문화적 양보가 아닌 하나님의 의도된 뜻이다.

여성안수 허용론자들은 여성에게 안수하는 것이 남녀평등을 추구하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 말한다. 김세윤 교수의 지적처럼 여성안수를 허락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교회가 더 성장할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한가? 과거 여성들이 성직에 전혀 나서지 않았을 때에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왕성하게 성장했는가? 작금의 교회성장 추세를 보자. 그토록 탁월한 여성 인력들을 전면에 내세우며, 예전에 비해 여성목사들과 장로들이 분명 눈에 띄게 많아졌다. 과연 교회가 더 활력이 넘치고 주님의 교회로서 교회의 역할을 더 잘 감당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는가? 김 교수에 따르면 예수는 ‘문화적인 양보’ 때문에 오직 12제자만 택했다고 한다(「목회와신학」, 2004년 5월호, p.64).
김 교수의 주장대로 갈라디아서 3장 28절이 그야말로 동등성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차피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인데 유대인들의 문화를 거역하는 일을 그 전능하신 분이 왜 못하셨는가? 성령의 능력은 문화와 전통과 관습을 다 뛰어넘는다. 복음의 효과적인 열매를 위해 문화적 양보를 하셨다는 것은 신학자의 궤변이다. 유대인들에 의해 핍박 받게 될 제자들임을 뻔히 아시는 주님께서 처음부터 남녀 동등성을 주장하시며 사역의 동등성과 같은 중요한 가르침을 왜 문화적인 영향력 때문에 양보하였겠는가? 그가 12사도 속에 여성을 넣지 않은 것은 성직에 있어서, 교회 조직에 있어서 여성은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 놓여 있는 존재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의도된 뜻이었다. 이것은 예수의 주장이나 사도 바울의 주장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 바른 가르침이다.
교회에서 여성에게 성직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남성과 여성의 성적 차별을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만 하나님이 하시지 않은 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로 세우시지 않은 일, 그리고 더구나 갈라디아서 3장 28절을 그토록 확신있게 주장하는 사도 바울도 그를 따르는 그 많은 여성들 중에 공식적으로 교회 지도자로 안수하여 세우거나 임명한 일이 없는 것을 우리가 무슨 권위로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오늘날 일부 교회와 김 교수와 같은 신학자들이 예수님과 사도들보다 더 권위 있는 존재인가? 사도들이 하지 않은 일들을 우리가 해도 된다고 교회의 머리이신 주께서 위임해 준 일이 어디 있는가? 교회의 모든 구조와 가르침 및 예배는 다 기록된 말씀, 즉 성경에 근거하는 것이라야 한다. 몇몇 사람들의 주장이나 세상의 흐름에 편승한 제도개선이 가능하다면 성경이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3. 부활소식을 전한 여성들, 선지자로서 예언하는 일들을 한 여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복음의 메시지, 하늘나라 가르침을 듣고 배워서 구원의 반열에 들어서는 일은 남녀가 따로 없다: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벧전 3:7). 구원의 은총에 여성들이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면 구약에서부터 명백하게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출애굽 사건에서 보듯 남녀노소가 다 홍해를 건너갔다. 율법의 가르침은 유대인들의 잘못된 전승으로 인하여 여자들을 제외시킨 것이지 그 유명한 쉐마 교육 헌장이 내포하고 있듯이(신 6장) 남자아이나 여자아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주의 말씀 혹은 토라를 가르치고 강론할 것을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혁명적인 일을 하신 것이라기보다는 율법의 가르침을 따라 마리아를 남자들과 함께 예수의 발밑에 앉아서 가르침을 받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여성을 사도의 숫자에 들어가게 하도록 한 것은 아니다. 사도들도 가룟 유다 대신에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여인을 사도 수에 가입시킨 것이 아니었다. 복음의 은총은 ‘차별’이 없어도 교회를 세워 가심에 있어서, 즉 직분 수여 문제에 있어서는 분명 ‘구분’하신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 그 부활의 첫 소식을 여성에게 허락하셨는가? 복음의 증인, 혹은 부활의 증인은 김 교수의 지적한 대로 여성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도 그 일을 막달라 마리아에게 허용한 것은 복음의 증인은 이미 요엘서에서 예견한 대로 예수를 주로 믿고 섬기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임하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내주하신다. 그것이 말씀 선포자인 설교자로서 자격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증인이지만 모두가 다 사도요 선지자요 전도자인 것은 아니다. 즉 공교회 앞에서 여성을 설교자로 세우시는 것이 아닐지라도 일상생활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증인의 역할은 차별이 없다. 지금 우리가 논하는 것은 공교회 앞에서 하는 일이다. 예수께서 복음의 효과적 설득을 위하여 단지 문화적 양보를 하셨다고 말하면서 복음의 분명한 역효과가 남에도 불구하고 막달라 마리아를 부활의 증인으로 삼았다고 주장하는 것은(「목회와신학」, 2004년 5월호 p.61) 앞뒤가 맞지 않는다. 베드로는 마리아의 지시대로 부활의 메신저가 된 것이 아니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무덤으로 달려가 빈 무덤을 직접 확인했다. 그리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를 만나 뵙고 부활의 증인으로 나서게 된 것이다. 더욱이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 사실을 예루살렘으로 가서 제자들에게 고하라고 하였지(요 20:18) 이 사실을 만민에게 선포하라는 명령을 주신 것이 아니다. 여자들은 공식석상에서 부활의 증인으로 나선 적이 없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눅 24:9~10).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고 해서 여성들의 설교 사역을 인정했다는 주장은 억지에 불과하다.
특히 고린도교회의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기억할 것은 아직 성경의 정경이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성령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임하여 기도하고 예언하는 특별한 은사들을 사용하신 점이다. 그때 무질서하게 여성들이 나서게 되는 상황을 사도 바울이 정리하고 있는 것이 고린도전서 11장의 내용이다. 여성들이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것은 교회의 질서를 세우는 것이요 남성과 천사들의 권세하에 있는 자들임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신약성경에 분명 여성선지자들이 있다. 빌립의 네 딸들이 그러하며(행 21:9) 아기 예수를 기다리던 안나 할머니가 그러하다. 후자는 구약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할 때 특수한 상황에서 미리암을 비롯하여 훌다와 드보라와 같은 여선지자들의 활동으로 이해한다면 신약에서 선지자들이라는 공식적 칭호가 전자에게 주어진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빌립의 네 딸들이 무슨 예언을 했는지는 전혀 언급이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학자들의 의견은 다르지만 전통적으로 해석되어 온 것은 남자 사역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그들이 사역자로 나설 이유가 특별히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성들이 없는 상황에서는 여성들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이 일반적인 규범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말하게 하시면 여자만이 아니라 누구도 할 수 있다. 발람 선지자를 태우고 간 나귀도 말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공교회가 조직된 이후, 특히 성경의 정경이 완성된 이후에 계시가 주어지는 특별한 예언이나 방언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 고린도전후서가 기록된 연대는 대체로 주후 56년경으로 본다. 그리고 바울의 목회서신에 해당되는 디모데전후서를 기록한 연대는 사도행전 28장 이후로서 바울의 죽음을 앞에 둔 때로 본다면 주후 65년 이후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는 이미 신약교회가 그 틀을 다 잡아가고 있던 때이기 때문에 안정된 상황에서 교회를 어떻게 목회해야 하는지를 다룬 그의 서신에 교회 직분자들을 다루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지하는 것처럼 장로직이나 혹은 감독직에 여성을 언급한 적이 있는가? 도리어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조항은(딤전 3:2, 딛 1:6) 분명 여성에게 허락하지 않은 직분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해석의 논란이 있는 “여자들도”(딤전 3:11)라는 문구가 일부 학자들의 주장처럼 여성 감독을 의미한다면 굳이 그렇게 불분명하게 표현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떠날 때에 오라고 한 장로들 가운데는 여성이 하나도 없었다. 더욱이 바울이 그토록 애지중지 여기고 동역자로(행 18:2)까지 간주한 브리스길라도 장로로 세움을 받은 적이 없었다. 바울이 여성 혐오자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의 목회서신에서 장로도 집사도(딤전 3:12) 다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적어도 교회의 직책에 있어서는 남녀의 기능적 차이에 대한 구분이 분명하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디모데전서 2장 11~12절은 분명 엄청난 모순이 된다.

4.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과 디모데전서 2장 11~12절은 후대에 삽입된 글인가?

고린도전서 14장은 일부 학자들과 더불어 김 교수의 주장처럼 후대 사람이 삽입한 것이 아니다. 디모데전서도 몇몇 학자들의 의견처럼 1세기말에 물의를 일으켰던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은 여성들에 대한 경계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근본적으로 바울의 저작설을 의심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감동에 의해 주어진 말씀임을 부인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후세에 삽입했다고 할 때 왜 고린도전서 11장에다 할 것이지 14장에 해서 논란이 되게 했을까? 고린도전서 14장 사건은 김 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논리적 모순덩어리가 아니다. 방언이나 예언은 그 당시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을 ‘계시’하여 주는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하였다(O. P. Robertson, The Final Word, The Banner of Truth, Edinburgh, 1993). 따라서 자연스럽게 너도나도 성령이 임하신다고 해서 중구난방으로 예언하거나 방언하는 무질서를 바로잡고 질서 있게 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특히 여성들은 앞의 11장에서 남성에게 복종하는 권위 문제와 관련하여 공교회에서 잠잠할 것을 가르친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특히 35절은 34절과 구분되게 심지어 교회에서 질문하는 것조차도 허락하지 않고 집에서 남편에게 배우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도 설교를 할 수 있다 없다가 초점이 아니다. 여성들이 장로 혹은 감독 및 집사직분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하다.
김 교수는 ‘여성들을 굴종시켜 얻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한국교회만큼 여성들의 활동이 많은 교회도 없다. 비록 안수하여 목사나 장로 및 안수집사직은 허락하지 않는다 할지라도(개혁교회에 해당되는 말이지만) 교회 내에서 여성들의 활동은 초대교회 여성들의 활동 못지않게 허용되고 있다. 단지 안수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여성들을 굴종시키는 것인가? 여성 목사와 장로를 허용한 교단들은 근본주의적 캘빈주의(?) 교단들에 비해 더욱 든든해졌고 세계선교도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통계가 있는가? 역사적으로 세계선교가 활발하게 일어난 시대에도 여성이 사역자로 나서지 못하여 교회성장이 제한되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성령의 은사들이 제한되지 않고 한량없이 부어져 복음의 물결이 출렁거릴 때도 여성 목사가 있어야 한다는 주님의 내적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우리보다 더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게 살았던 대각성과 부흥의 시대에 그들에게서 여성 안수 불허가 성경적이지 못하다는 주님의 직접적인 음성이나 성경해석의 여지를 불러일으킨 기록도 하나도 없다. 지금의 논란들은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과 함께 세속적인 여권신장 운동의 영향을 교회가 받아 요동치고 있는 것이다. 김 교수는 성경 진리를 위해 몸부림치고 바른 교회를 세워가기 위해 땀 흘리고 있는 순결한 사람들을 거짓 보수주의자로 몰아 붙이고 있는 것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 개혁교회는 교회에서 여성을 추후도 굴종시켜 본적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다만 그리스도와 사도들께서 하지도 않았고 초대교회 성도들도 요구하지도 않은 것을 우리가 무슨 권위로 해야 하는가를 묻고 싶은 것이다.
옷차림에 대한 문제나 머리에 두건을 써야 하는 일이나 신자들의 자유에 대한 남용적인 문제들은 결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해서(「목회와신학」, 2004년 5월호 p.69)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성경에 기록된 것 그 자체로만 해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를 가진다. 한쪽 구석에 있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 안 된다. 사도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이 한 설교가 어찌 신약성경에 수록된 것이 전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약 27권만을 주신 것은 그 모든 내용들을 함축하여 정수(精隨)만 주셨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나누어서 말한단 말인가? 비본질적인 것은 소홀하게 다룬다든지 혹은 우리 임의대로 혹은 우리들의 편리대로 각색하여 사용하면 된다는 의미인가?
김 교수는 성경의 영감설을 믿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영감된 정확무오한 말씀임을 믿는다. 물론 이는 원본을 의미한다는 것은 다 안다. 그러나 원본이 없는 상황이지만 사본만으로도 그 의미가 충분히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원본을 들이밀지 않고 계신 것이다. 성경 번역 작업에 감동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말씀의 참의미가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전달되는 일에 부족함이 없도록 역사하시는 것도 믿는다. 이를 ‘하나님의 섭리적 은총’이라고 말한다. 만약 여성 성직 허용과 같은 중대한 사항을 지난 2천년 가까운 세월 동안 주님께서 방치해 두시고 오늘날 누구보다도 똑똑한 일부 신학자들에게 발견케 하여 교회에 소개하라고 하셨다고 한다면 계시의 점진성의 원리로 이해하고자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모순된 존재라고 말하는 불경죄에 빠진다. 더 이상 계시가 주어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이미 주어진 신구약 성경 66권으로도 충분한 것이기 때문이다.

5. 만인제사장 교리가 여성의 성직을 허용하는 가르침인가?

만인제사장 교리가 무엇인가? 아무나 성직자가 된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럼에도 만인제사장 교리이기 때문에 여성에게도 성직을 주어야 한다는 논리는 그야말로 무식한 사람들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그 논리가 맞다 한다면 아이들에게는 성직을 왜 허용 못하는가? 그들도 만인제사장들인데 말이다. 왜 여성에게만 말하는 것인가? 중고등 학생들은 안 되는가? 누구나 성직자가 된다는 말은 앞에서 지적한 바 있는 고린도전서 12장 29~30절과 모순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인제사장 교리는 천주교의 사제제일주의에 반하여 사제를 통하지 않고도 성도라면 누구나 직접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지 성직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젠 누구든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성직 수여교리로 주장하는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종교개혁자의 가르침을 왜곡해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만인제사장이기 때문에 설교도 성도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하여 실지로 그렇게 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런 것이 현대적 조류요 현대 감각이 있는 신선한 목사라고 한다면 필자는 결코 목사가 되지 않을 것이다. 김 교수는 ‘복음이 올바로 선포될 때는 항상 하나님나라의 구원의 현실화로 노예해방과 여성해방을 가져왔고 약자를 보호하였으며 만민의 인권을 증진하였다’(「목회와신학」, 2004년 5월호 p.71)고 했다. 여성에게 성직을 수여하는 것만이 여성해방인가? 지금 보수주의 교회에서는 여성들이 종살이하고 있는가? 이미 그들도 만인제사장으로서 남성들과 평등하게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간다. 종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로서 나아가는 것이다. 여성들이 교회 내에서 남자를 주관하여 가르치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과 잠잠하라고 하는 성경적 가르침은 주님이 다시 올 때까지 지켜져야 할 가르침이다.

결론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 보겠다. 첫째로 남성과 여성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평등한 자이지만 수행할 역할 차원에서 결코 동등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질서의 구분을 나타내는 권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여성 안수는 성경적으로 그리고 교회 역사적으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니다. 문화적 양보가 아니라 하나님이 의도하신 영원한 뜻으로 말미암은 계시인 것이다. 교회 밖의 여권신장 운동을 주장하는 이들이 교회를 공격하는 빌미로 사용하는 것에 휩쓸려 시대적 조류에 편승하려는 일부 신학자들과 목사들의 현란한 지적 논리로 교회를 혼란케 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로, 부활소식을 처음 접한 여성들이었다고 해서 그것이 부활의 메시지를 전파할 설교권까지 여성에게 허락한 것은 아니었다. 교회 내에서 여성들이 할 일들은 여전히 열려 있다.
주님께서 주신 은사에 따라 얼마든지 주님의 교회를 섬길 수 있다. 다만 필자의 논지는 성경에 명확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 증거가 전혀 없는 성직 허용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일꾼이 아니다. 넷째로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과 디모데전서 2장 11~12절은 후대의 어떤 사람이 삽입한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 성령께서 영감으로 주신 주님의 명령이다. 교회 제도와 교리는 이미 주어진 계시에 의해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으로 믿는 성경에 기초할 뿐이다. 다섯째로 만인제사장 교리가 여성안수를 허락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직 문제가 아니라 다른 중보자 없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발람 선지자가 탄 나귀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고 해서 나귀에게도 성직을 주자고 하는 것은 너무나 빗나간 비약이지 않겠는가?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고후 13:8). 바울 당시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수다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기록된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이 시대적 문화나 가치관이 성경해석의 열쇠가 아니다. 성경은 성경으로만 해석할 뿐이다. 진리를 거스르는 거짓 선지자 노릇은 하지 말자. 오직 이 땅에 주님의 이름이 높임 받으시는 그 영광의 날이 속히 임하기를 사모하며 이 글을 마친다.

Posted by 작은샘

org date: 2012-01-27 21:11

 

聖經에 나타난 女姓의 役割        

http://blog.daum.net/cccsw1224/2249

                                                                                            (김세윤 미국 풀러 신학교 신약학 교수)


구약 : 창세기에 나타난 남녀 관계
창세기1:26~3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천명하는데 남자와 여자라고 부연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차별화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형상의 기본적인 의미는 인간이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로서 하나님의 대표자 혹은 대리자로 세워졌다는 뜻이다. 창2:18~25절은 아담이 주가 되고 여자가 아담에게 종속되는 것으로 보지만 돕는 배필이 열등하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돕는 배필이라고 성경은 언급하기도 한다(전4:9~10, 12).
적어도 창세기3:16절부터는 타락의 질서 속에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남자 우월적이고 여성 종속적인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으며 전반적으로 구약은 남자의 우월성과 주권을 천명하고 여자들은 남자보다 열등하고 남자에게 종속된 존재로 설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신약의 복음
그런데 그리스도의 새 창조의 질서에서는 “유대인도 없고 헬라인도 없고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고 상전도 없고 노예도 없다. 모두 하나다.”라는 것이다. 첫 창조에서 하나님께서 남녀를 공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이 땅에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우셔서 자기의 통치권을 대행하게 하셨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를 통해 옛 세상의 대표적인 구분들, 인종적 구분, 성적 구분, 신분적 구분을 극복하게 하셨다. 첫 창조(창1장)와 새 창조의 위대한 천명(갈3:28)은 그리스도인들의 남녀 관계 이해에 있어 원칙이요, 열쇠로 작용해야 한다.

예수님을 통해 본 남녀의 위치
여 성에 대한 보호는 예수의 가르침에서부터 시작된다. 여자를 인격체로 보지 않았던 유대 사회에 혁명적인 일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을 복음의 첫 설교자들로 세우셨다. 유대교에서는 여자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면 안 되었고 어떤 랍비는 아침에 일어나서 이방인, 노예, 그리고 여자로 창조되지 않는 것에 대해 감사하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여성에게도 토라를 가르쳤고 부활하신 후에는 첫 증인으로 마리아를 세웠으며 복음서도 당시의 문화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마리아를 부활의 첫 증인으로 내세웠다. 

 

예수의 이혼 금지에 담긴 남녀 동등성의 원리
예수의 이혼 금지에 대한 가르침은 일부일처제를 확립하여 여자를 보호하는 뜻도 함축되어 있다(막10:11~12; 마5:31~32; 마19:8~9; 눅16:18). 일부일처제를 창조의 원리로 삼음으로써 일부다처제가 가져오는 여성의 종속과 여성의 재산화, 남편의 소유물로 변질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다.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원리로 남편과 아내를 동등한 상황 속에서 짝지어 준 것이기 때문에 남편이 아내를 성적으로 소유하듯이 아내도 남편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아내를 버리면 아내의 남편에 대한 성적 소유를 박탈하는 것이므로 간음하는 것이다(고전7:2~6). 


예수는 왜 열둘 속에 여자를 끼워 넣지 않았는가?
12 명의 제자를 남자로 세운 것은 옛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12족장들에게 상응하는 새 언약에 의한 새 하나님의 백성의 12기둥들을 상징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보다 본질적인 구원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 본질적인 메시지가 신뢰를 얻고 설득력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는 이런 문화적인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도 바울을 통해 본 남녀의 위치
갈라디아서3:28 새 창조 질서의 원칙 : 남녀의 동등성
이 구절은 “유대인도 없고 헬라인도 없으며, 종도 없고 자유자도 없으며,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다. 왜냐하면 너희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로 번역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속과 새 창조의 질서 속에서는 불평등과 불의를 가져오는 이 세상의 모든 차별들이 해소되었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7:2~16 부부 생활 그리고 이혼 : 부부의 동등성과 상호주의
바 울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 갈라디아서3:28의 원칙을 부부관계에 적용하고 있다. “... 이와 같이 남편도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아내가 한다. 서로의 (성적)권리를 빼앗지 말라(고전7:2~5).” 바울은 이어서 기도에 집중하기 위해서 성관계를 중단할 수 도 있는데 그때는 서로 합의해서 하라고 말하고 있다. 남편과 아내의 철저한 동등성과 상호주의가 나타나고 있다. 고린도전서7:10~16에서 이혼에 관한 가르침도 남녀동등을 주장하고 있다. 


고린도전서11:2~16 여자들도 교회에서 설교를 하되 복장을 단정히 하고 하라
바 울은 갈라디아서3:28의 원칙을 교회 생활에서도 적용했다(고전11:2~16). 바울은 회당예배와 달리 남녀 구분 없이 같은 방에서 예배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공 예배에서 여자들도 대표기도와 예언(성령의 영감에 호소하며 구약을 해석하면서 성도들을 권면하는 것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 설교)을 하도록 했다. 갑자기 자유를 얻은 고린도 교회의 여자들은 남자들과 평등하게 예배에 참여하면서 공적인 기도도 하고 설교도 하면서 굉장히 시끄럽게 했으며 머리에 쓰던 너울조차 벗어 던지고 떠들어 대니 예배의 분위기가 아주 어지럽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질서를 잡아야 했으며 여자들에게 설교하지 말라고 명령하기보다 계속하되 머리에 수건을 쓰고 하라고 명한 것이다. 그는 교회가 헬라인, 유대인 어느 누구에게나 거침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고전10:32; 14:23; 고후8:21; 살전4:12). 여기서 바울이 “머리”론을 펴다 중단하는 것 (고전11:11~12)은 어디까지나 여자들에게 머리에 수건 쓰도록 하기 위해서이지 이를 일반화 하여 남편이 아내의 권위노릇을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에베소서5:21~33 가정생활-동등성과 상호주의
바 울은 갈라디아서3:28의 원칙을 가족 윤리 또는 가족 간의 상호 의무 조항을 규정하는 것에도 적용한다(엡5:21~33). 그런데 이 문맥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사람들은 22절 즉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라는 말씀부터 읽었다. 그러나 사실 바울이 의도한 것은 21절 즉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이다. 이 부분이 부부관계에 대한 가르침 전체에 대한 큰 제목이다. 그 원칙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22절에서 “아내들이여 남편들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라고 하고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23~24절에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25절에서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하고 26~33절에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말하는데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을 두 번 더 되풀이 한다. 당시 남편 우위의 고대 사회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보편적이었기에 두어 마디로 끝낼 수 있었지만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데는 특별한 설득이 필요했으므로 거듭 강조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바울이 여자에 대해서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동사를 썼고 남편에 대해서는 아내를 “사랑하라”는 동사를 썼으니까 남편은 위고 아내는 아래로 보고 있다. 그러면 본문은 갈라디아서3:28의 말씀과 근본적으로 모순을 일으킨다. 기능적 차이만을 인정하는 어떤 이들은 남녀는 본질적으로나 구원론적으로 동등하나 5:21절의 “서로 복종하라”는 기본 논지를 무시한다. 복종은 일종의 자기희생이지만 사랑은 복종을 포함하는 더 총체적 자기희생(자기를 내어줌: 자아포기의 삶)이다. “머리”, “복종”이라는 표현을 붙들고 자신의 아내에게 복종을 강요한다면 그는 그 행위로 자신의 아내에 대한 사랑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베소서5:21~31의 말씀을 더 이상 가부장적 부부관계를 지탱하는데 오용되어서는 안 된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함으로 모든 것을 아내와 상의하여 결정하되 의견이 상충할 때는 최종 결정권은 남편이 가져야 하고 아내는 거기에 순복해야 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아내가 더 많은 지혜를 받을 수 있는데 말이다. 율법주의적으로 남편의 “머리됨” 또는 “대표권”을 내세우는 것이 과연 예수와 사도 바울의 정신에 합당한 것이며 가정에 유익한 것인가?

 

고린도전서14:34~35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고 전14:34~35(개역성경)는 갈라디아서3:28과 정반대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그러나, 이 두 구절은 사본학적으로 불안정하다. 어떤 사본들에는 이 절들이 40절 이후에 놓여 있다. 또 그들은 문맥을 끊고 있다. 당시 고린도 교회의 예배 도중 중구난방으로 방언하고 예언하여 무질서한 상황이 이루어진 것을 바로잡고 있는 중이다. 
고린도전서14:32~38을 보면, 34~35절이 나중에 선지자들에 대한 바울의 타이름의 문맥을 끊고 삽입된 것임이 드러난다. 34~35절을 제쳐놓고 32~33절에서 36~38절로 직접 이어 읽어 보라. 스스로 선지자라고 주장하면서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에게 영감하므로 자신들은 예배 질서에 아랑곳없이 계속 예언해야겠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타이르는 내용으로 일관되지 않는가? 
34~35절과 어휘나 사상이 같은 본문이 디모데전서2:11~15에도 나타난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구절들은 디모데전서가 쓰일 1세기 말 무렵의 영지주의 여자들이 교회에서 상당한 물의를 일으키는 상황에서 질서를 잡기 위해서 쓰여 졌다고 본다. 고린도전서14:34~35도 그 무렵 영지주의의 여자들이 교회의 공 예배 때 성경 해석이나 교리에 대해 질문하고 논쟁을 벌이는 시끄러운 상황(고전14:35)을 바로잡기 위해서 기록되어 고린도전서14장에 삽입되었다고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바울의 남녀관계에 대한 전체적인 가르침, 특히 바로 앞에서 썼던 고린도전서11:2~16의 가르침과도 완전히 모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생활에서 남자의 독점적 리더십을 옹호하려는 사람이 고린도전서14:34~35과 디모데전서2:11~15을 바울의 진짜 가르침으로 받아들인다면 성경의 권위는 실추되고 만다. 

맺는말 : 올바른 해석학의 중요성
교 회가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복음을 왜곡하여 선포할 때는 해방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억압을 가져오는 것이다. 해석자는 자신의 취향에 따라 몇몇 구절만 인용해서 그들을 율법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 전체를 살펴야 한다. 특히 원칙적이고 중심적인 가르침과 문화적이고 주변적인 요소들을 구분하여 해석해야 하며 성경 말씀의 문자보다는 그 정신을 따라야 한다(고후3:6). 따라서 갈라디아서3:28과 고린도전서14:34~35 중 어느 구절이 그리스도 복음에 더 정확한 표현인지 생각해야 한다. 
완성된 계시인 신약을 저버리고 예비 계시였던 구약의 율법으로 돌아가서 성전 예배 의식에서 여성을 완전히 차별하는 규정들을 들이대며 오늘의 교회에서도 여성들의 역할을 억제하려 하기도 한다. 이는 가정으로 연계되어 성경과 거리가 먼 유교주의에 빠져 있다. 가정에서 가부장적 권위를 행사하며 자기 명령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가정을 화평한 가정이라고 생각하고 순종 잘하는 아내로부터 대접받고 사는 남편은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단견이다. 사실상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착취하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적인 무지에서 나오는 주장은 심히 우려가 된다.  유교의 족쇄를 풀고 여성의 해방을 가져온 한국교회가 이제는 남자의 가부장적 리더십과 여자의 순종을 강조하여 사실상 유교윤리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버린 셈이다. 여자들이 잠잠하라고 억눌림을 받고 있다니 이 얼마나 씁쓸한 역설인가?

Posted by 작은샘

org date: 2012-01-27 20:26

 

  http://blog.naver.com/jim2008/110097277897

여성 목사 제도 어떻게 볼 것인가?

                       (원제 : 여성 목사 제도 허용할 수 없다)

 

                                                                       서창원 목사(삼양교회 담임) 

최근 여성 목사 안수와 관련된 논란이 뜨거워지고 있다. 특히 K교수는 성경편 집론까지 제기하며 여성 목사의 안수에 대한 논란의 불을 지핀 바 있다. 이 문제와 관련 서창원 목사의 글을 다음의 순서에 따라 게재한다. 서창원 목사는 삼양교회를 시무하고 있고 총신대학 신학대학원에서 겸임교수로 있으며 한국개혁주의 설교 연구원 대표와 '진리의 깃발지'를 발행하고 있다. 

1. 여성과 남성의 관계는 우열 문제가 아니라 질서 문제로 보아야 한다. 
2. 여성 안수를 허용하는 것만이 남성과 여성이 신분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고 동등한 것인가? 
3. 고린도 전서 14:34-35와 디모데 전서 2:11-12은 후대에 삽입된 글인가? 


들어가는 말 

유독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하다고 느끼는 곳이 아직도 존재한다고 하면 그곳은 교회라고 한다. 전통적인 보수층 교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성목사를 세우는 것이 시대적 사명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는 이 때에 여성 성직허용에 대한 논쟁은 그 어느 때보다 과열되고 있다. 

지 난 7월 5일 여성 안수 문제에 대한 성경적 견해를 논하는 공청회 자리에서 강사로 초청된 K 교수는 여성안수 불허는 비성경적이고 거짓교사들이라고 톤을 높였다. 거기에다 성경의 영감설까지 이의를 제기하는 발언을 하여 보수계층의 목사들과 학자들을 당혹케 하는 말까지 하였다. 그 이후로 교단적인 대응을 기다려온 필자는 실망한 마음을 가지고 K 교수의 글에 대한 부당성을 제기하고자 펜을 들게 되었다. 

1. 여성과 남성의 관계는 우열 문제가 아니라 질서 문제로 보아야 한다.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가? 성경에서 남녀관계는 동등성(sameness)이 아니라 평등성(equality)을 가르친다. 동등하다는 말 자체는 본체가 같다는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동등하시듯 남성과 여성의 본질(substance)이 같을 때 우리는 동등성을 말할 수 있다. 

창세기를 보면 남성과 여성은 만들어진 재로가 다르다. 남자는 흙을 빚어 만들었지만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존재이다. 물론 이것이 우열관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남자와 여자라는 호칭 자체가 다르다. 예수와 하나님은 호칭이 다를지라도 하나님으로서 같은 분이시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는 호칭이 다르며 결코 동등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는 역할과 기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측면에서 남성이나 여성이 다 평등하지만 기능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타락이전에도 그 차이는 존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에게 말씀하셨고 하와는 아담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존재였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인 남자를 언급하면서 남자가 여자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다고 했다. 그리고서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두라고 하였다(고전 11:7-10). 그 전에는 여자의 머리가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고 하였다(고전 11:2).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동등하시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분명 권위 문제를 염두에 둔 발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는 "권세 아래 있는 표"를 머리에 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천사들을 인하여"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한다. 이 말씀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서 구속함을 받은 주의 백성들을 수종들어 섬기는 위치에 있는 존재임을 감안할 때 적어도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속하여 섬겨야 할 자임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할 때만이 여성들의 섬김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그 표시로 여성은 머리에 뭔가를 써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권위 하에 있는 공교회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들이 임재하여 하나님이 받으시는 합당한 예배가 집전되는 곳에서 여자가 머리에 베일을 쓰지 않고 기도하거나 예언한다는 것은 마치 창녀들이 남자같이 하고 다니는 그 당시 부정한 자, 머리를 민자들과 같은 것이 되어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고전 11:6). 그 연장선상에서 남자에게 종속되어 있는 여자가 남자들 앞에서 가르치고 남자를 주관하는 일들은 옳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고린도 전서 14:34-35절 말씀과 디모데 전서 2:11절이 언급되었다고 본다. 

2. 성경은 위계 질서를 무시하고 평등하기 때문에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남성에게 복종하는 것은 문화가 아니라 율법의 가르침대로 하는 것이다(고전 14:34).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다(엡 5:22). 이것은 남성과 관련하여 여성의 위치를 설명하는 말씀이다. 세상에서 여성들의 두각이 교회에서도 그러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교회는 세상과 구분되는 독립된 영적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법이 최우선하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조직된 유무형교회인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다루고 있는 남녀 관계는 지위 문제가 아니라 질서 차원의 권위 문제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동등이 아닌 평등관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의 머리뼈나 발가락뼈가 아닌 갈비뼈에서 여자를 만든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이 갈라디아서 3:28절에 이야기하고 있듯이 남자나 여자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하나인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진리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같은 평등한 지위에 있다는 것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이 다른 것이 아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동일한 성도이다. 이것은 주님의 구원의 은총에 있어서 차별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누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위를 가진 주님의 백성이다. 고린도 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구원의 차별이 없는 것이지 믿는 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교회 공동체의 위계 질서에 차이가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나 구분이 없는 동등성만 있다고 하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다: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니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딤전 6:1-2). 위계 질서를 무시하고 모든 사람이 법 앞에서 평등하기 때문에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3. 여성 안수를 허용하는 것만이 남성과 여성이 신분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고 동등한 것인가? 

여성안수 허용론자들은 그 길만이 남녀평등을 추구하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 말한다. K 교수의 지적처럼 여성 안수를 허락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교회가 더 성장할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거 여성들이 성직에 전혀 나서지 않았을 때에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왕성하게 성장을 했는가? 

작금의 교회성장 추세를 보자. 그토록 탁월한 여성 인력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데, 예전에 비해 여성 목사들과 장로들이 그렇게 많아졌는데. 교회가 더 활력이 넘치고 주님의 교회로서 교회의 역할을 더 잘 감당하고 있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K 교수에 따르면 예수는 문화적인 양보 때문에 오직 12 제자만 택하였다고 했다(목회와 신학, 2004년 5월호, p. 64). K 교수의 주장대로 갈라디아서 3:28절이 그야말로 동등성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차피 죽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인데 유대인들의 문화를 거역하는 일을 그 전능하신 분이 왜 못하셨는가? 

성령의 능력은 문화와 전통과 관습을 다 뛰어넘는 것이다. 복음의 효과적인 열매를 위해서 문화적 양보를 하셨다는 것은 신학자의 궤변이다. 유대인들에 의해서 핍박을 받게 될 제자들임을 뻔히 아시는 주님께서 처음부터 남녀 동등성을 주장하시며 사역의 동등성과 같은 중요한 가르침을 왜 문화적인 영향력 때문에 양보하였겠는가? 그가 12사도 속에 여성을 넣지 않은 것은 성직에 있어서, 교회 조직에 있어서 여성은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 놓여 있는 존재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주장이나 사도 바울의 주장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 바른 가르침이다. 

교회에서 성직을 여성에게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남성과 여성의 성적 차별을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만 하나님이 하시지 않은 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로 세우시지 않은 일, 그리고 더구나 갈라디아서 3:28을 그토록 확신 있게 주장하는 사도 바울도 그를 따르는 그 많은 여성들 중에 공식적으로 교회 지도자로 안수하여 세우거나 임명한 일이 없는 것을 우리가 무슨 권위로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오늘날 일부 교회와 K 교수와 같은 신학자들이 예수님과 사도들보다 더 권위있는 존재인가? 사도들이 하지 않은 일들을 우리가 해도 된다고 위임해 준 일 이 어디 있는가? 교회의 모든 구조와 가르침 및 예배가 다 기록된 말씀, 즉 성경에 근거하는 것이라야 한다. 몇몇 사람들의 주장이나 세상의 흐름에 편승한 제도개선이 가능하다면 성경이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4. 부활소식을 전한 여성들, 선지자로서 예언하는 일들을 한 여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복음의 메시지, 하늘나라 가르침을 듣고 배워서 구원의 반열에 들어서는 일은 남녀가 따로 없다: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벧전 3:7). 

구원의 은총에 여성들이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면 구약에서부터 명백하게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출애굽 사건에서 보듯 남녀노소가 다 홍해를 건너갔다. 율법의 가르침은 유대인들의 잘못된 전승으로 인하여 여자들을 제외시킨 것이지 그 유명한 쉐마 교육 헌장이 내포하고 있듯이(신명기 6장) 남자아이나 여자아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주의 말씀 혹은 토라를 가르치고 강론할 것을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혁명적인 일을 하신 것이라기보다는 율법의 가르침을 따라 마리아를 남자들과 함께 예수의 발 밑에 앉아서 가르침을 받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여성을 사도의 숫자에 끼이게 되도록 나아간 것이 아니다. 사도들도 가룟 유다 대신에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여인을 사도 수에 가입시킨 것이 아니었다. 복음의 은총은 차별이 없어도 주님의 교회를 세워 가심에 있어서 직분 수여 문제에 있어서는 분명 구분을 하신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 그 부활의 첫 소식을 여성에게 허락하셨는가? 복음의 증인, 혹은 부활의 증인은 K 교수의 지적한 대로 여성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도 그 일을 막달라 마리아에게 허용한 것은 복음의 증인은 이미 요엘서에서 예견한 대로 예수를 주로 믿고 섬기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임하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내주하신다. 그것이 말씀 선포자인 설교자로서 자격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증인이지만 모두가 다 사도요 선지자요 전도자인 것은 아니다. 즉 공교회 앞에서 여성을 설교자로 세우시는 것이 아닐지라도 일상 생활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증인의 역할은 차별이 없는 것이다. 


5. 바울 사도는 장로도 집사도(딤전 3:12) 다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논하는 것은 공교회 앞에서 하는 일이다. 예수께서 복음의 효과적 설득을 위하여 단지 문화적 양보를 하셨다고 말하면서 복음의 분명한 역효과가 남에도 불구하고 막달라 마리아를 부활의 증인으로 삼았다고 주장하는 것은(목회와 신학, 2004년 5월호 p. 61)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베드로는 마리아의 지시대로 부활의 메신저가 된 것이 아니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무덤으로 달려가 빈 무덤을 직접 확인하였다. 그리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를 만나 뵙고 부활의 증인으로 나서게 된 것이다. 더욱이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 사실을 예루살렘으로 가서 제자들에게 고하라고 하였지(요 20:18) 이 사실을 만민에게 선포하라는 명령을 주신 것이 아니다. 

여자들은 공식석상에서 부활의 증인으로 나선 적이 없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눅 24:9-10).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고 해서 여성들의 설교 사역을 인정했다는 주장은 억지에 불과한 것이다. 

특히 고린도 교회의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기억할 것은 아직 성경의 정경이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성령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임하여 기도하고 예언을 하는 특별한 은사들을 사용하신 점이다. 그 때 무질서하게 여성들이 나서게 되는 상황을 사도 바울이 질서 정리를 하고 있는 것이 고린도 전서 11장의 내용이다. 

여성들이 교회 앞에서 잠잠하라는 것은 교회의 질서를 세우는 것이요 남성과 천사들의 권세 하에 있는 자들임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신약 성경에 분명 여성들 중 선지자들이 있다. 빌립의 네 딸들이 그러하며(행 21:9) 아기 예수를 기다리던 안나 할머니가 그러하다. 후자는 구약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할 때 미리암을 비롯하여 훌다와 드보라와 같은 여 선지자들의 활동으로 이해한다면 신약에서 선지자들이라는 공식적 칭호가 전자에게 주어진 것은 틀림없다. 

빌립의 네 딸들이 무슨 예언을 하였는지는 전혀 언급이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학자들의 의견이 다르지만 전통적으로 해석되어 온 것은 남자 사역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그들이 사역자로 나설 이유가 특별히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성들이 없는 상황에서는 여성들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이 일반적인 규범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말하게 하시면 여자만이 아니라 누구도 할 수 있다. 발람 선지자를 태우고 간 나귀도 말하지 않았는가? 

공교회가 조직된 이후, 특히 성경의 정경이 완성 된 이후에 계시가 주어지는 특별한 예언이나 방언이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린도 전후서가 기록된 연대는 대체로 주후 56년경으로 본다. 그리고 바울의 목회서신에 해당되는 디모데 전후서를 기록한 연대는 사도행전 28장 이후의 사건으로서 바울의 죽음을 앞에 둔 때로 본다면 주후 65년 이후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때는 이미 신약교회가 그 틀을 다 잡아가고 있던 때이기 때문에 안정된 상황에서 교회를 어떻게 목회하여야 하는지를 다룬 그의 서신에 교회 직분자들을 다루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지하는 것처럼 장로직이나 혹은 감독직에 여성을 언급한 적이 있는가? 도리어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조항은(딤전 3:2) 분명 여성에게 허락하지 않은 직분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해석의 논란이 있는 "여자들도"(딤전 3:11)라는 문구가 일부 학자들의 주장처럼 여성 감독을 의미한다면 굳이 그렇게 불분명하게 표현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떠날 때에 오라고 한 장로들 가운데는 여성이 하나도 없었다. 더욱이 바울이 그토록 애지중지 여기고 동역자로(행 18:2)까지 간주한 브리스길라도 장로로 세움을 받은 적이 없었다. 바울이 여성 편력자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의 목회서신에 장로도 집사도(딤전 3:12) 다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적어도 교회의 직책에 있어서는 남녀의 기능적 차이에 대한 구분이 분명하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디모데 전서 2:11-12절은 분명 엄청난 모순이 된다. 
 
6 고린도 전서 14:34-35과 디모데 전서 2:11-12절은 후대에 삽입된 글인가? 

고린도전서 14장은 일부 학자들과 더불어 K 교수의 주장처럼 후대 사람이 삽입한 것이 아니다. 디모데 전서도 몇몇 학자들의 의견처럼 1세기말에 영지주 의자들의 여성들의 물의에 대한 경계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근본적으로 바울의 저작설을 의심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감동에 의해 주어진 말씀임을 부인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후세에 삽입했다고 할 때 왜 고린도 전서 11장에 다 할 것이지 14장에 해서 논란이 되게 했을까? 

고린도 전서 14장의 사건은 K 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논리적 모순덩어리가 아니다. 방언이나 예언은 그 당시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을 계시하여 주는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하였다(O. P. Robertson, The Final Word, The Banner of Truth, Edinburgh, 1993). 따라서 자연스럽게 너도나도 성령이 임하신다고 해서 중구난방으로 예언하거나 방언하는 무질서를 바로잡고 질서 있게 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특히 여성들은 앞의 11장에서 남성에게 복종하는 권위 문제와 관련하여 공교회 앞에서 잠잠할 것을 가르친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특히 35절은 34절과 구분되게 심지어 교회 앞에서 질문하는 것조차도 허락하지 않고 집에서 남편에게 배우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도 설교를 할 수 있다 없다가 문제의 초점이 아니다. 여성들이 장로 혹은 감독 및 집사직분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하다. 

K 교수는 '여성들을 굴종시켜 얻는 것이 무엇인가?' 라고 물었다. 한국 교회만큼 여성들의 활동이 많은 교회도 없다. 비록 안수하여 목사나 장로 및 안수 집사직은 허락하지 않는다 할지라도(개혁교회에 해당되는 말이지만) 교회 내에서 여성들의 활동을 초대교회 여성들의 활동 못지 않게 허용하고 있다. 

단지 안수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여성들을 굴종시키는 것인가? 여성 목사와 장로를 허용한 교단들은 근본주의적 칼빈주의(?) 교단들에 비해 더욱 든든해 졌고 세계선교도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통계가 있는가? 역사적으로 세계선교가 활발하게 일어난 시대에도 여성이 사역자로 나서지 못하여 교회 성장이 제한되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성령의 은사들이 제한되지 않고 한량없이 부어져 복음의 물결이 출렁거릴 때도 여성 목사가 있어야 한다는 주님의 내적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우리보다 더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게 살았던 대각성과 부흥의 시대의 그들에게서 여성 안수불허가 성경적이지 못하다는 주님의 직접적인 음성이나 성경 해석의 여지 를 불러일으킨 기록도 하나도 없다. 

지금의 논란들은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과 함께 세속적인 여권신장 운동의 영향을 교회가 받아 요동치고 있는 일이다. K 교수는 성경 진리를 위해서 몸부림치고 바른 교회를 세워가기 위해 땀흘리고 있는 순결한 사람들을 거짓 보수주의자로 몰아 부치고 있는 것에 대하여 회개해야 한다. 

개혁교회는 교회에서 여성을 추후도 굴종시켜 본적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다만 그리스도와 사도들께서 하지도 않았고 초대교회 성도들도 요구하지도 않은 것을 우리가 무슨 권위로 여성들에게 안수해야 한다고 하는가를 묻고 싶은 것이다. 

옷차림에 대한 문제나 머리에 두건을 써야 하는 일이나 신자들의 자유에 대한 남용적인 문제들은 결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해서(목회와 신학, 2004년 5월호 p. 69)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성경에 기록된 것 그 자체로만 해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를 가진다. 한쪽 구석에 있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 안 된다. 사도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이 한 설교가 어찌 신약성경에 수록된 것이 전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약 27권만을 주신 것은 그 모든 내용들을 함축하여 정수(精隨)만 주셨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나누어서 말한단 말인가? 비본질적인 것은 소홀하게 다룬다든지 혹은 우리 임의대로 혹은 우리들의 편리대로 각색하여 사용하면 된다는 의미인가? 

K 교수는 성경의 영감설을 믿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영감된 정확무오한 말씀임을 믿는다. 물론 이는 원본을 의미한다는 것은 다 안다. 그러나 원본이 없는 상황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본만으로도 그 의미가 충분히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원본을 들이밀지 않으시고 계신 것이다. 

성경 번역 작업에 감동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말씀의 참 의미를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전달되는 일에 부족함이 없도록 역사하시는 것도 믿는다. 이를 '하나님의 섭리적 은총'이라고 말한다. 만약 여성 성직 허용과 같은 중대한 사항을 지난 2천년 가까운 세월 동안 주님께서 방치해 두시고 오늘날 누구보다도 똑똑한 일부 신학자들에게 발견케 하여 교회에 소개하라고 하셨다고 한다면 계시의 점진성의 원리로 이해하고자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모순된 존재라고 말하는 불경죄에 빠진다. 더 이상 계시가 주어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이미 주어진 신구약 성경 66권으로도 충분한 것이기 때문이다. 

7. 만인제사장 교리가 여성의 성직을 허용하는 가르침인가? 

만인제사장 교리가 무엇인가? 아무나 성직자가 된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인제사장 교리이기 때문에 여성에게도 성직을 주어야 한다는 논리는 그야말로 무식한 사람들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그 논리가 맞다고 한다면 아이들에게는 성직을 왜 허용 못하는가? 그들도 만인제사장들인데 말이다. 왜 여성에게만 말하는 것인가? 중 고등 학생들은 안되는가? 누구나 성직자가 된다는 말은 앞에서 지적한 바 있는 고린도 전서 12:29-30절과 모순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인제사장 교리는 천주교의 사제제일주의에 반하여 사제를 통하지 않고도 성도라면 누구나 직접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지 성직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젠 누구든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성직 수여교리로 주장하는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종교개혁자의 가르침을 왜곡해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만인제사장이기 때문에 설교도 성도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하여 실지로 그렇게 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런 것이 현대적 조류요 현대 감각이 있는 신선한 목사라고 한다면 필자는 결코 목사가 되지 않을것이다. K 교수는 '복음이 올바로 선포될 때는 항상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현실화로 노예해방과 여성해방을 가져왔고 약자를 보호하였으며 만민의 인권을 증진하였다'(목회와 신학, 2004년 5월호 p.71)고 했다. 

여성에게 성직을 수여하는 것만이 여성해방인가? 지금 보수주의 교회에서는 여성들이 종살이하고 있는가? 이미 그들도 만인제사장으로서 남성들과 평등하게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간다. 종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로서 나아가는 것이다. 여성들이 교회 내에서 남자를 주관하여 가르치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과 잠잠하라고 하는 성경적 가르침은 주님이 다시 올 때까지 지켜져야 할 가르침이다. 


나가는 글 

첫째로 남성과 여성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평등한 자이지만 수행할 역할 차원에서 결코 동등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열의 문 제가 아니라 질서의 구분을 나타내는 권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여성 안수가 성경적으로 그리고 교회 역사적으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니다. 교회 밖의 여권신장 운동을 주장하는 이들이 교회를 공 격하는 빌미로 사용하는 것에 휩쓸려서 시대적 조류에 편승하려는 일부 신학 자들과 목사들의 현란한 지적 논리로 교회를 혼란케 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로, 부활소식을 처음 접한 여성들이었다고 해서 그것이 부활의 메시지를 전파할 설교권까지 여성에게 허락한 것이 아니었다. 교회 내에서 여성들이 할 일들은 여전히 열려 있다. 주님께서 주신 은사에 따라 얼마든지 주님의 교회를 섬길 수 있다. 다만 필자의 논지는 성경에 명확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 증거가 전혀 없는 성직 허용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일군이 아니다. 

넷째로 고린도 전서 14:34-35절 말씀과 디모데 전서 2:11-12절 말씀은 후대의 어떤 사람이 삽입한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서 성령께서 영감으로 주신 주님의 명령이다. 교회 제도와 교리는 이미 주어진 계시에 의해서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으로 믿는 성경에 기초할 뿐이다. 

다섯째로 만인제사장 교리가 여성 안수를 허락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직 문제가 아니라 다른 중보자 없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발람 선지자가 탄 나귀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고 해서 나귀에게도 성직을 주자고 하는 것은 너무나 빗나간 비약이지 않겠는가?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 라"(고후 2:17),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고후 13:8). 바울 당시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수다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기록된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이 시대적 문화나 가치관이 성경 해석의 열쇠가 아니다. 성경은 성경으로만 해석할 뿐이다. 진리를 거스리는 거짓 선지자 노릇은 하지 말자. 오직 이 땅에 주님의 이름이 높임 받으시는 그 영광의 날이 속히 임하기를 사모하며 이 글을 마친다.

 

Soli Deo Gloria

Posted by 작은샘

org date: 2012-01-27 12:39

여자목사제도는 과연 성경적인가?

- 김세윤 교수의 주장을 우려하며 -

 

이광호 목사(실로암 교회)

[Ⅰ]

 

지난해 말 합동측 총회장의 총신대학 '기저귀 발언'(2003.11.12) 이후 교계가 시끄러웠다. 그는 경건회 도중 여자목사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펴면서 '여성의 기저귀'를 들먹여 적절치 못한 표현을 했다. 그가 의도한 것은 여자 목사제도에 대한 견해였지만 그 말을 받아들이는 다수의 사람들은 '기저귀' 라는 용어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것이 여성비하 문제로 확산되었다. 당시 당사자는 용어채택으로 인한 자신의 실언을 사과했지만 기독교 여성단체들에서는 그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여성목사 안수를 허락할 것을 요구하기에 까지 이르렀다.

 

이제 반년을 넘겨 총신 신학대학원 여동문회는 지난 7월 5일 풀러신학교의 김세윤 교수를 초빙해 '성경에 나타난 여성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김 교수는 나름대로 이유들을 나열하며 여자 목사제도의 타당성을 제시했다. 그는 특히 고린도전서 14:34,35의 기록에 대한 사본학적 불안정과 두 구절이 고린도전서 14장의 전체적인 문맥을 끊고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어 후대에 삽입된 것이 확실하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했다("'여자여 잠잠하라'는 후대 편집된 것!", 뉴스앤조이, 제90호, 2004.7.8, 참조).

 

그러나 필자는 우선 고린도전서 14:34,35이 후대에 삽입되었다는 말을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그의 무모한 용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렇다면 동일한 성경저자가 기록한 디모데전서 2:9-14의 말씀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 말할지 궁금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유린당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음을 감추고 싶지 않다. 나아가 한 저명한 신학자의 주장이 한국교회에 끼칠 영향을 생각하면 심히 우려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적으로는 한국의 다수 교단들이 이미 여자목사제도를 도입하고 있으며, 한국 보수주의 교단에서도 여자목사제도를 심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교수나 목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여자목사제도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시대에 부응하는 깨어있는 자로 인식되는 반면 부인하는 자는 그와 반대로 인식되고 있다. 더구나 다수의 교회 지도자들이 원리보다는 사회적 분위기 읽기에 주력하고 있는 점과, 시대에 편승하고 있는 일부 인사들의 자세가 원리적 접근을 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주고 있다.

 

필자는 결코 남성우월주의자가 아니며 여성을 비하하고자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 도리어 남성우월주의적 사고를 가진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의 오만함을 지적하고 싶다. 이 글을 쓰면서 신앙을 가진 여성들에게 호소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교회는 결코 남성이나 여성을 위한 단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주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 가운데 존재하는 직분은 어떤 경우에도 특정인 혹은 특정 부류에게 주어지는 기득권적 권리가 될 수 없다. 만일 직분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이미 교회의 직분자로서 적합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성이나 여성 중 어느 편을 지지하여 기득권적 논쟁을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누구 혹은 특정 부류의 편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입장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고 적용해야 하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Ⅱ]

 

(1) 직분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직분과 직책에 대한 차이를 이해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물론 이런 구분은 용어자체에 대한 구분이 아니라 교회의 직분을 이해하기 위한 편의적인 방편이다. 교회의 직분은 항존하는 필수요건이다. 즉 교회의 목사, 장로, 집사 등의 직분은 단순히 일의 능률을 위해 분담하는 직책이 아니라 교회 가운데 마땅히 있어야 하는 본질적 은사이다. 이는 일반적인 직책이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아니라 조직의 편의나 일의 능률을 위해 두고 있는 임의적 제도라는 점과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

 

교회에서 말하는 직분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사로서 원리상 인간들이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창안하거나 만든 제도가 아니다. 즉 직분은 인간의 선택이나 능력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원리상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것이다. 이에 반해 직책이란 인간의 판단과 능력에 따른 것으로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효율적인 기능을 의미한다.

 

교회에는 다양한 직분들과 직책들이 있다. 목사, 장로, 집사 직분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은사적 방편이라면 남전도회장, 여전도회장, 선교부장, 구제부장, 주일학교 교사 등은 직책에 속한다. 이러한 직책은 조직 혹은 기관으로 부터 맡겨진 일의 능률을 위해 남녀의 성에 관계없이 적절한 사람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직분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사이므로 목사도 이와 동일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제도가 있었는데 제사장은 단순한 개인의 능력에 따른 직책이 아니었다. 모든 제사장은 레위인으로서 아론의 자손 가운데서 세워졌다. 이스라엘 백성 중 레위지파 자손이 아니면서 그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여 아무나 제사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기서 필자는 제사장직과 목사직분을 연관지어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며 제사장이 남성이어야 했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제사장은 하나님의 전적인 뜻과 경륜으로 말미암는 직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직분에는 지위의 높고 낮음이 있는 것이 아니며 거기에 권력이나 외적인 권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런 식으로 직분을 이해하게 된다면 권력이나 권위를 가진 '높은 자리'를 남성들만 가지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지적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직분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특별히 허락한 은사이며 인간들의 명예나 권리를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2) 현재 논의되고 있는 직분 문제에 있어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교회의 직분이 마치 시대의 조류에 맞추어져야 하는 듯한 분위기이다. 이는 교회의 직분이 토론이나 여론을 배경으로 하여 변화 가능한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민주적인 절차에 따른 다수의 견해에 따르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인본주의적 대세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약화되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시대나 지역에 따라 상이한 문화를 가지게 된다. 교회는 항상 그 상이한 문화들 가운데 존재해 왔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바는 교회의 직분은 사회적 분위기나 여론에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역사 속에 상속되어져 온 많은 교회들은 다양한 인간 문화들 가운데서 말씀이 교훈하는 바를 그대로 지키고 보존하려고 애써 왔다.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가 필연적으로 투쟁하고 싸우면서 한편으로 고난을 당해야 할 요소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교회의 직분은 인간들의 토론에 의해 결정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토론은 시대와 문화를 배경으로 할 수 밖에 없으므로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나 분위기에 능숙한 사람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설득력 있게 말을 잘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이에 대해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느냐를 주의 깊게 잘 살펴보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여론의 수렴을 거쳐 직분에 대한 해석이나 방향을 결정하려는 노력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지난해 말, 직분과 여성문제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 총신대학에서는 설문조사를 통해 80% 정도의 학생들이 여자목사 제도를 찬성 혹은 입장을 유보하는 것으로 집계했다(총신대보, 제 256호 2003년 10월 14일. 참조). 그 설문조사에 참여한 많은 학생들은 여자목사제도를 지지하거나 그것이 별문제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신학을 지향하고 있다는 총신대학생들이 그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다면 다른 신학대학이나 많은 기독교 여성 단체들의 그에 대한 생각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대체적인 배경이 하나님의 구체적인 말씀이 아니라 사회 정신적 경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바는 인간들의 경험적 자기 생각이나 판단이 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 진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3) 오늘날 여자 목사제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 근거를 성경에 나타나는 여 사사나 여성들의 활약에 두고 있는 것 같다. 나아가 신약성경을 고등비평하는 자들의 입장도 이제 새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구약성경을 보면, 드보라와 같은 여인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사의 직분을 훌륭히 수행했으며 라합, 룻, 에스더 등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들어 쓰신 믿음의 여성들이다. 물론 신약성경에도 훌륭한 믿음의 여인들이 수없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기억해야할 바는 그 모든 여성들이 그러한 믿음의 지위를 남성으로부터 쟁취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구속사 가운데서 자신의 고유한 뜻에 따라 그 여성들을 특별히 선택하심으로써 놀라운 경륜을 이루어 가셨으나, 남성과 여성에게 하나님의 일을 고르게 분배하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을 단순히 규범적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이려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신약성경의 여성들 또한 교회의 직분적 개념과 더불어 이해되어야 한다. 사도바울은 직분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며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할 것을 언급했는데, 그것은 여성을 무시하기 때문에 한 말이 아니라 주님의 교회를 위한 언약적 가르침이었다. 그는 구약시대에 훌륭한 여 사사와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교회의 감독직분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한 것은 구약 역사에 등장하는 여성 관련 내용들이 단순한 규범이 아니라는 기본 개념 위에서 창조와 연관된 교회의 특이성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 여성과 관련된 구약의 역사적 사실을 우리 시대의 교회의 규범으로 이해한다면 율법과 복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 해석상 많은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여자목사제도를 인정하려는 자들 중에는, 교회 가운데 남성과 여성 사이에 어떠한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인격자로서 인간 사이에 남녀간 아무런 차등이 없다는 것은 옳지만 직분에 대한 구별 자체가 없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남성과 여성은 창조질서 가운데서 분명히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인격이나 능력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질서와 그 가운데 존재하는 본질적인 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첫 언약에서 드러나듯이 자녀의 출산은 여성의 몫이며 외부의 위험을 방어하고 가정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은 남성의 몫으로 그것은 창조질서에 속한 것이다.

 

 

 

[Ⅲ]

 

(1) 신약성경을 살펴보면, 가르치는 교사로서 여성을 교회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진리의 계시임을 믿는다. 이미 잘 알고 있는 바대로,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고전 14: 24,25)고 이야기했다. (그 말씀을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 주장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고린도전서 14장은 특별히 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한 은사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여자로 하여금 교회에서 잠잠하도록 요구한 것은, 율법 즉 구약성경을 근거로 하여 은사와 관련된 직분적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바울을 통해 허락하신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시임을 잘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이 본문은 여성과 관련된 일반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당시의 문화나 관습을 배경으로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즉,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바울의 요구가 일반 생활이나 논의에 있어서 침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 뿐더러 소위 교회 안에서 '여성다움'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는 교회의 직분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하는 이유가 율법에 근거해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율법을 근거로 한 것은 성전과 제사장 직분과 연관된 것이다. 여성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제사할 수 없었다.) 물론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않음'의 의미가 '여자답게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으라'는 권면이 아니라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직분이 허락되지 않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칫 고린도전서 14:24의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가르침을 '남성은 교회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는 말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다. 우리가 여기서 얻는 교훈은, 교회의 교사직분이 남성에게 맡겨졌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직분을 남성에게 주어진 어떤 특별한 권리로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바울의 기록은, 교회의 상속이 구약의 율법을 바탕으로 한 교사 직분을 통해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교회에는 그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고유한 질서가 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가르치는 목사직은 개인의 의사에 따라 스스로 성취할 수 있는 직분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 세워지는 직분이다.

 

바울은 또한 디모데전서 2:11-14에서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디모데전서는 이른 바 목회서신으로 교회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특히 디모데전서 2장은 직분에 관련된 기록을 하고 있다.

 

바울은 위 본문에서, 여자가 가르치는 목사의 직분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를 창조질서와 인간이 범죄한 초기 과정에서 찾고 있으며, 그런 연유로 인해 그 직분을 허락하지 않노라고 선언하고 있다. 즉 성경에서 여성들이 교회의 가르치는 직분을 가지는 것을 허락지 않는 이유가 여성 비하나 여성의 지적능력에 대한 불신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역할을 창조질서와 연관하여 더욱 본질적인 것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본문에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이라는 목사의 교사사역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남자를 주관하는 것'이라는 말은 감독의 직분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2) 성경은 이렇듯이 여자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직분, 즉 목사의 직분을 가지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여권주의자들이나 시대적 여성옹호론자들이 여자 목사제도를 인정하려고 애쓰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시대적 페미니즘의 영향 때문이다. 현대에 이르러 많은 여성들과 여성옹호론자들이 남녀 평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역사 가운데 있어왔던 남성들의 잘못된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적 사고로 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사상은 급기야 교회 가운데도 들어와, 직분에 있어서도 성경의 구체적인 가르침을 살피기에 앞서 여권회복의 차원에서 논의의 틀을 제공하고 있다. 여자가 결코 남자보다 못하거나 부족한 것이 없으니 성적 차별이 불필요하며 모든 직분은 남녀가 공평하게 가질 수 있다는 논리이다. 나아가 그들은, 과거 남성들이 여성 위에 군림함으로써 모든 직분과 권위를 독점해 왔으므로 이제 빼앗긴 여성의 직분적 권리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시대에 있어서 많은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이 목사의 직분을 권력 및 권위와 연관된 '높은 자리'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이는 직분을 정치적인 직책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결과이다. 그러므로 왜 그 높고 힘있는 자리에 여자들은 올라갈 수 없고 남자들만 올라가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느냐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은 목사들의 잘못된 권위주의와 교회를 무시했던 악한 행태가 그런 분위기를 만들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남성이 목사의 직분을 맡도록 허락된 것은 결코 남성이 여성보다 성품이 우수하다거나 지적으로 유능해서가 아니다. 만일 누군가 그렇게 생각하다면 그것은 잘못된 남성우월주의적 사고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능력 면에서 볼 때 남성보다는 오히려 여성들이 더 섬세하고 정확한 면이 있을 수 있다. 나아가 남성들은 어떤 경우에도 성적인 차별성으로 인해 여성들을 무시하거나 멸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목사제도가 허용될 수 없음을 지적하는 이유는 성경의 원리적 가르침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교회 가운데 여자 목사를 금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주님 오실 그 날까지 지켜야할 규범이며 그것을 통해 배워야할 분명한 교훈이 있는 것이다. 교회의 직분은 결코 시대적 조류에 맡겨질 수 없으며 인간의 이성적 합의에 의해서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 하나님께서는 하와의 유혹으로 인해 죄가 이 세상에 들어 왔음을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으며, 그것을 직분과 연관 짓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가 여자를 목사로 허락하지 않는 것은, 남성이 여성 위에 군림할 수 있다거나 여성이 남성에게 군림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진정한 의미는 교회가 목사직분을 남성에게 허락함으로써, 여성을 통해 이 세상에 들어 온 죄악을 다스려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교회의 존재를 묵시적으로 선포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목사 혹은 교사직분이 여성에게는 금지되고 남성에게만 허용된 이유이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많은 여성들이 지도자의 위치에 있지 않았느냐는 사실을 내세우며 여성 목사를 인정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여자 목사를 인정하는 모범적인 근거로 사용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각 시대에 여성들을 들어 사용하신 것과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우신, 죄에 승리하는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의 직분은 분명히 서로 다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마다 여러 여성들을 들어 사용하셨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구약시대 뿐 아니라 사도교회 시대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도 마찬가지이다. 드보라, 기생 라합, 룻, 마리아, 엘리사벳, 한나, 막달라 마리아 등 수 없이 많이 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윤리적 결함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윤리성 여부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쓰임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에 따라 그들을 선택하여 쓰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시대에도 많은 여성들을 주님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사용하고 계신다. 목사의 직분을 오용하며 주님을 욕되게 하는 남성들도 많고 그런 직분을 가지지 않았지만 훌륭한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 여성들이 많이 있다. 목사가 되면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는 것이고 목사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지 않는다는 식의 논리는 성립될 수 없으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은 그 자체로서 아무런 차등 없이 매우 소중하다. 하나님께서 남자를 여자보다 더 사랑하고 계심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러나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의 직분을 허락하시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의 뜻이며 몫이다. 여권주의자들이나 여성 옹호론자들은 시류의 영향으로 인해, 여자들도 남자들 처럼 목사가 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우려 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교회 안의 성숙한 여성들은 교회의 목사, 즉 교사로서 직분을 담당하는 형제들을 위해 권면하며 그들의 온당한 순종을 위해 기도하는 자세를 가짐으로써 주님의 교회가 온전히 잘 세워져 갈 수 있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필자의 이런 말에 대해, 현실 교회에서 여성들이 가르치고 있는 문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묻는 사람들이 혹 있을지 모른다. 목사가 있지 않은 작은 교회나 주일학교 같은데서 여성들이 실제로 가르치는 것에 대한 지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자가 독립된 교사로서 성도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목사, 즉 교사의 지도를 받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이는 비단 여전도사 뿐 아니라 남자 전도사나 주일학교 교사들도 마찬가지이다.

 

 

 

[Ⅳ]

 

우리시대의 연약한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교훈이 아니라 세속적 시류의 영향을 받고 있는 점은 매우 안타깝다. 목사 직분을 감당하는 남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순종적인 목회가 아니라 권위주의를 앞세운 인본적인 목회를 함으로써 그러한 잘못된 욕구들이 더욱 강하게 분출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말씀에 충실하지 못한 목사들이 성도들 위에 군림하려는 잘못된 모습에서 기인한 부끄러움일 것이다. 그렇잖아도 말씀이 사라져 가는 안타까운 시대에,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해야 할 학자들마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앞의 김세윤 교수는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왜 이제서야 갑작스럽게 그런 주장을 펴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금 묻고 싶다. 이전에는 모르고 있다가 최근에 들어와서 고린도전서14:34,35의 삽입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말인가? 이번 주장도 한국의 여성단체에서 초빙하지 않았으면 말하지 않았을 내용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그는 신학자로서 자질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바라기로는 교회 가운데 교사로 세움을 받은 목사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올바른 목회를 함으로써, 주님의 몸된 교회가 현대 페미니즘의 시류에 휩쓸리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남성이기 때문에 여성보다 우월하다든지 여성이기 때문에 목사보다 신앙이 못한 것이 아니다. 목사 직분을 가진 남성들 보다 특별한 직분을 가지지 않은 일반 여성들이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얼마든지 많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목사라는 직분으로 인해 더 나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교회가 허락한 직분이므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직분을 수행해 갈 따름이다.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잘못 세워진 목회자들이 많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교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자들이 신학교를 졸업했다는 이유와 남성이라는 이유로 쉽게 목사가 되어 있다는 사실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말씀에 나타나는 원리 자체를 무시하거나 바꿀 수는 없다. 남성이 교회의 교사인 목사직분을 맡는 것이 성경적이라 하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 전통을 보존하기 위한 수구적 견해 때문이 아니다. 직분과 관련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단순히 시대에 따른 문화적 특성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주님의 말씀은 그가 다시 오실 그 날까지 교회의 중심에 온전히 받아들여야 할 진리의 교훈이다.

 

하나님 앞에서 남성과 여성의 능력에 따른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목사라고 해서 천국에서 영웅이 된다거나 더 많은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니며 더 많은 상급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직분을 잘 감당하지 못함으로 인해 더욱 엄한 책망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지상에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며 직분을 기득권의 한 형태로 이해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교회에서 기득권을 주장하는 자라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누구라도 주님의 뜻을 오해하고 있는 자들일 것이다. (뉴스앤조이, 2004.7.24)

Posted by 작은샘

org date: 2012. 1. 27. 12:36

 

▲신반포중앙교회에서의 한국성경신학회 제28차 정기논문 발표회 모습 ©뉴스미션

 

상당수의 교단이 여성 교직, 곧 여성 목사와 여성 장로 안수제도를 도입한 가운데 아직도 이를 채택하지 않는 교단들은 디모데전서 2장 13, 14절을 마지막 방파제로 삼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여성 안수 금지는 선명한 명령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예장고신, 대신, 합신 신학자들의 모임인 한국성경신학회(회장 박형용)는 22일 오후 서울 신반포중앙교회에서 ‘목회서신에 대한 주해와 설교’를 주제로 ‘제28차 정기논문 발표회’를 개최했다.

 

이날 발표회에서는 4명의 발제자 중 2명이 디모데전서 2장 13, 14절을 중심으로 ‘여성 안수’ 문제에 대해 논문을 발표해 관심을 모았다.

 

김성봉 박사(신반포중앙교회 담임)와 이승구 박사(합신대 교수)는 디모데전서 2장 13, 14절은 여성 안수에 대해 금하는 구절이라는 공통된 성경 해석을 바탕으로 여성 안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김 박사는 “성경에 대한 입장이 비교적 자유로운 교단에서는 여성 안수 문제가 그다지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라며 “사회적 분위기와 함께 기존의 입장을 수정 보완해 가면 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성경에 대한 입장이 비교적 강경한 교단에서는 여성 안수 문제는 곧바로 ‘성경관’과 직결되는 면이 있다”며 “문제가 되는 본문인 디모데전서 2장 13, 14의 앞 절(11, 12절)을 보면 (여성 안수) 금지는 선명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암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는 본문을 두고 달리 말하는 것은 학자의 궤변이 되고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경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하느냐가 관건

 

이렇듯 여성 안수에 대한 금지가 선명함에도 불구하고 여성 안수를 채택하고 있는 교단들이 생기는 것은 선명한 금지의 근거로 제시된 13, 14절을 설득력 있게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느냐 때문이라는 게 김 박사의 견해다.

 

김 박사에 따르면, 여 성 안수를 받아들이는 이들은 디모데전서 자체를 바울이 쓴 것으로 보지 않는다. 따라서 비록 본문이 여성 안수를 금할지라도 그 금지는 사도의 권위가 아니라고 하며, 심하게는 사도의 이름을 빙자한 자들이 사도의 뜻을 거슬러 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한 한편으로는 창조의 순서를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타락의 순서를 말하는 13, 14절과 관련해서 이 구절들의 근거가 되는 △창세기의 저자가 과연 모세인가 △저자 문제는 차치하고 과연 그런 창조가 실제로 있었는가 △그런 타락이 실제로 있었는가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함으로써 권위를 감소시키고 만다.

 

김 박사는 “이러한 무기력한 기초로서는 아무런 파도도 막아낼 수 없음이 자명하다”면서 “어쩌면 여성 안수 문제를 가결한 교단들은 성경관에 있어서 이러한 입장에 서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어 그는 “똑 같은 본문(13, 14절)이 앞서 지적한 바울 저자설, 창세기 모세 저자설, 창조의 역사성, 타락의 역사성을 믿는 무리에게는 현대에 일어나는 (여성 안수) 파도를 막아내는 방파제 역할을 하기에 충분한 기초로 여겨지기도 한다”고 밝혔다.

 

이 승구 박사도 “디모데전서 2장 12-14절을 앞뒤 문맥으로 고려해 읽을 때, 이 구절은 창조질서와 타락의 빛에서 여성의 목사 및 장로로서의 활동을 금하고 있다”며 “그러므로 우리가 이 구절에 과연 참으로 순종하는가를 심각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Posted by 작은샘

org date: 2012-01-27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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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의 여성 사역의 문제에 대한 한 고찰 - 이승구 교수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디모데전서 2:12-14]

교회에서의 여성 사역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과연 어떻게 생각하여야 하는가? 이런 질문이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서도 계속 제기되고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서 편집진에서 이 문제에 대해 개혁 신학적 입장에서의 의견을 밝히는 글을 쓰도록 요청하였기에 이 문제에 대한 간단한 논의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사역”이라고 할 때 많은 이들은 목사와 장로로서의 사역을 중심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이런 현상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해서 필자 자신은 별로 확신이 서지 않는다. 오히려 필자 자신은 “여성 사역” 이라는 말을 좀 더 폭 넓게 생각해야 하고 그런 폭 넓은 의미의 여성 사역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는 교회 안에서 여성은 처음부터 중요하게 사역해 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이 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이 문제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할 때 생각하는 의도인 여성의 목사와 장로로서의 사역의 의미를 염두에 두고 이 논의를 시작해 보고자 한다. 

1.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출발점 

먼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 각자가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든 지를 차치(且置)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하고 있는 부분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해야 이 문제에 대한 논의에서 본질을 흐리게 하지 않는 건전한 논의가 진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논의해 가는 과정 가운데서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지엽적이고 비본질적인 논의와 심지어 감정적인 의견 표명과 의견의 대립으로 나아갈 위험이 있으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논의에서는 먼저 다음 몇 가지 점들을 분명히 하고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여겨진다. 우리의 논의가 진정 그리스도교적인 논의이려면 우리 모두가 함께 동의하고 출발해야 할 점들은 다음과 같은 점들이라고 여겨진다. 

(1)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빛에서 볼 때 남 ․ 여는 그 신분과 지위에 있어서 동등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점에 있어서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러므로 후의 논의에서 이 점을 가지고 서로를 공격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예를 들어서, 여성 사역을 찬성하는 이들이 이를 비판하는 이들에게 대해서 그렇게 보는 것은 여성을 평등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든지 하는 논의를 해서는 안 된다.) 

창조와 구속의 빛에서는 남녀가 평등하다. 타락의 영향 하에서 서로가 투쟁하며 결과적으로 남자가 여자를 다스리게 되는 현상이 발생했으나(창 3:16), 그것은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기보다는 죄악의 결과요 죄에 대한 형벌의 한 부분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상호 지배적이려고 하는 상황은 하나님께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에서 우리에게 주신 관계의 상황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이 후의 논쟁에서 어떤 입장을 지니든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가 평등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논의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여자가 어떤 점에서 부족한 점이 있어서 여성의 교회에서의 사역이 있을 수 없다는 식의 논의는 있어서도 안 되고, 그런 논의가 전개되어서도 안 된다. 

신분과 지위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고 그 은사와 능력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 남자 됨과 여자 됨에 따라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창조와 구속의 빛에서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논의의 전제의 하나이다. 

또한 창조와 구속의 빛에서는 남자와 여자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의도는 남자와 여자가 각기 그들의 특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에 필요한 것이다. 돕는 배필의 의미가 “그에게 상응하는 돕는 자”임을 생각할 때 이 점은 매우 자명하다. 그래서 바울은 “주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고전 11:11)라고 말하고 있다. 

(2) 교회에서의 사역자의 역할은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로서의 역할이 아닌 것이다. 

신약 교회의 직임은 구약 교회의 직임과 직접적 연속성을 지니고 있는 직임들이 아니다. 구약의 직임들은 오실 메시아의 사역을 바라보게 하는 모형론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으나 신약의 직임들은 구약의 직임과 직접적 연속성을 지니고 있지 않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온전한 선지자, 제사장, 왕직의 대리직임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천주교회에서나 일부 성공회 등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을 대리하는 직임에 근거하여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여야 한다는 것은 이 문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논의를 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것인데, 그리스도가 남성이었으므로 교회의 사역자는 남성이어야만 한다는 식의 논의는 선결 문제 오류를 지닌 잘못된 논의가 되는 것이다. 신약 교회의 직임은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직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 교회의 직임은 그리스도 직임의 대리자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면서 논의해야 한다. 

(3) 신약의 선지자들이 있는 상황은 과도기적인 현상이었지, 선지자가 교회 안에 항상 있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신약의 선지자들 가운데서는 남자 선지자들과 함께 여선지자들이 있었다(행 21:9; 고전 11:5?). 그러나 그런 직분이 신약 교회에 지속적으로 있게 하지 않으신 것이다. 새로운 계시가 교회 안에 지속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4)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논의는 순전히 성경이 항상 있을 교회의 모습을 향해 어떻게 말하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되어져야 한다. 

신약 성경이 교회 안에서의 사역에 대해 서 빛을 비춰 주는 것이 우리의 최종적 판단 근거가 되는 것이다. 

(5)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 우리의 문화 현실이나 우리의 현실에 대한 요구로부터 도출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현실이 이 문제를 판단하는 준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서 교회 안에서 남자들과 똑같이 교육받은 여성들이 차별 받고 있다는 현실로부터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의견을 이끌게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 문화의 요구가 이 문제를 판단하는 준거가 되어서도 안 된다. 

1세기 교회의 문화적 정황이 우리의 교회의 원칙을 규제하도록 해서도 안되고, 그와 반대로 오늘날의 문화적 상황이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좌지우지하도록 해서도 안 된다. 

오늘날에는 여성들의 참여가 사회 전반에 일반화되어졌으므로, 또한 교회 안에서는 여성이 더 많으므로 당연히 여성이 교회 안에서 중요한 직임을 감당하여야 한다는 식의 오늘의 문화와 현실에 근거한 논의가 우리의 사유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 

다시 한번 더 말하지만 신약 성경이 신약 교회의 이 문제에 대해서 말하는 것만이 우리의 최종적 판단 근거가 되어야 한다(sola scriptura!). 

(6) 그렇기에 오늘 우리의 상황에서는 똑같이 교육받은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 전도사나 교 육부서 등에서 사역할 때 경제적 처분 (예) 사례에서나 존경받음에 있어서 남성들과 차별 받지 아니하도록 하는 모든 외적인 준비가 이루어져 나가야 한다는 것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해야 하고 이를 이루어 가기 위해서 함께 노력해 가야 한다. 

(7)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성경의 규범적 의미에 대해서 우리가 다 순종하려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복종해야한다.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 하지 않는 것은 비성경적인 태도이다. 그러나 혹시 성경을 존중하면서 서로 달리 해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서로가 성경을 존중하는 태도를 확인 할 수 있으면 그것을 인정하면서 서로 존중히 여기면서, 성경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에 대해서는 재미있게 토론하며 함께 하나님의 바른 뜻이 어떤 것인지를 추구하여 가야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서로 인신 비방하거나 서로를 이단시하는 태도로 발전되어 가서는 안된다. 물론 성경의 가르침에 복종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강한 비판을 해야 한다.다시 말해서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에 복종하려고 하면서 그 성경의 가장 바른 뜻이 어떤 것인지를 함께 찾아가는 동료 해석자들로서 서로를 존중하고 귀히 여기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다시한번 더 강조하자면, 우리의 모든 판단의 최종적 근거는 성경의 가르침이어야만 한다. 

2. 이 문제에 대한 신약의 해당 구절과 그 의미 

그렇다면 우리는 일차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결정적인 논의를 하는 신약 성경의 구절이 있는 지를 확인해야 한다. 먼저 이 논의와 관련해서 많이 언급되는데 실상 여성의 교회 사역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구절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첫째로, 고린도전서 11:2-16의 맥락을 잘 살펴보면 그 본문은 직접적으로 여성의 교회 안 에서의 사역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 구절 안에 있는 예언에 대한 언급은 당시에는 여선지자들이 아직까지 있었다는 것에 근거하여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언급에 근거해서 당시에 예배 가운데서 예언하는 여선지자가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오늘날도 교회 안에 그런 일을 하는 이들이 허용될 수 있으리라 고 하는 것은 계시사의 발전에 유의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로, 고린도전서 14:34-36도 여성의 교회 안에서의 사역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은 아니라 고 판단된다. 이는 예배 중에 소란스럽게 하거나, 특히 옆 사람에게 묻기 위해 말 하는 것을 지적하면서, 바울이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 지니라”(고전 14:35)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그렇게 보아야만 이 구절들에게 바울이 말하는 요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여성들이 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던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서 예배가 소란스러워지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적당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는 권면의 한 부분으로 주어진 말씀으로 생각해야지, 이를 여성 사역에 대해 직접적 함의를 지닌 말씀으로 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 가운데서 이 문제와 관련하여 직접적인 연관성을 지닌 구절은 디모데전서 2:9-14의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서는 그 맥락이 교회의 예배적 상황이라는 것은 바로 위에 있는 구절인 디모데전서 2:8의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고 말하는데서 찾아 질 수 있다. 이는 각 가정에서 기도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기보다는 예배처에서의 의식적 기도 행위를 언급하는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런 예배적 맥락에서 여인들이 과연 어떻게 자신들을 치장할 것인지를 말하고(2:9-10), 이런 예배적 상황에서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고 한 뒤(11절, 여기까지는 말씀은 고전 14:34-36의 의미와 상통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하고 있다(12절). 

그러므로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여성의 교회 안에서의 목사와 장로로서의 사역에 대한 찬반 양론이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 본격적 쟁점

“디모데 전서 2:12-14을 과연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 구절과 관련된 중요한 논점은 다음 세 가지 일 것이다. 첫째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12절)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둘째로, 이 금령은 당시의 문화적 상황에 따른 1세기적 정황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니면 주께서 오실 때까지의 상황 전체를 지배하는 것인가? 셋째로, 이 말씀을 바울의 글로 믿는 지, 아닌 지의 여부이다. 

이 세 가지를 하나하나 논의해 보기로 하자. 

첫째,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12절)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이 말의 표현 형태는 다른 곳에 사용된 용어들과 비교할 때 가르치는 것은 교회에서의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것과 연관된 것이고(딤전 1:3; 3:4; 4:11, 13, 16; 5:17; 6:3; 딤후 2:2, 24; 4:2), 따라서 다른 곳에서 “목사 즉 교사”(엡 4:11)라고 언급된 이들의 사역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주관하는 것”도 교회 안에서 공식적으로 다스리는 것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이는 다른 곳에서 “장로들”이라고 언급된 이들이 하는 사역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게 보면 이 말씀은 여자가 교회 안에서 공식적인 가르치는 직무인 목사의 역할을 하는 것과 다스리는 직무인 장로의 역할을 하는 것을 금하는 구절이라고 해석되는 것이다. 

둘째, 이 금령은 당시의 문화적 상황에 따른 1세기적 정황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니면 주께 서 오실 때까지의 상황을 지배하는 것인가? 

만일에 1세기 정황에서의 이야기라면 이 말씀은 1세기 성도들에게는 구속력을 지니는 것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구속력이 없는 말씀인 것이 된다. 만일 그런 것이라면, 교회 모임과 관련하여 여자는 머리에 수건을 쓰라는 금령이(고전 11:2-16) 1세기 고린도 교인들에게만 적용되고 오늘 우리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과 같이, 디모데 전서의 이 금령도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금령으로 여겨져야 할 것이다. 

만일 이 디모데 전서 2장의 본문이 12절로 마쳐지고 있다면 이와 같은 해석의 가능성도 상당히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본문에는 디모데 전서 2:13-14이 따라 붙어 있으므로 결코 그렇게 해석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말씀에 의하면 이 말씀의 인간 저자는 창조의 순서에 근거해서(12절), 그리고 타락의 순서의 근거해서(14절) 여자가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가르치며 주관하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논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의 질서와 타락의 문제가 있는 상황 가운데서는 이는 계속 적용되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이 논의의 방식을 깨지 않는 한 우리는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창조의 질서가 계속되는 한, 교회에서는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12절)이 허락되지 않는다. 

셋째, 이 말씀을 바울의 글로 믿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논의해 보기로 하자. 

필자는 이 말씀을 바울 자신이 쓴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바른 해석이라고 여긴다. 본문 자체가 사도 바울이(딤전 1:1; 1:13; 2:7) 디모데에게(1:2, 18; 6:20) 구체적인 정황 가운데(딤전 1:3) 있는 그에게 목회의 지침을 주기 위해 기록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1세기 정황에서 사도의 이름을 빌어 바울의 제자 격되는 존재가 이런 편지를 쓰는 것이 오늘날과 같이 위조나 이름 도용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당대의 관습적인 관례였다는 설명을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렵다고 본다. 

그러나 백 번 양보해서 혹시 그렇다고 해도 적어도 그 인간 저자가 이 글을 쓰는데 성령께서 영감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져야 한다. 

그렇다면 위의 논의에 의해서 이는 오늘 우리를 규제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이 부분의 인간 저자가 누구이든지 이 말씀에 따라서 우리는 교회에서는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12절)을 허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을 바울이 쓴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그렇게 논의하시는 분들은 과연 만일 이것이 바울이 친히 쓴 것이라면 이 말씀을 따라서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그런 논의를 하는 것인가? 혹시 이 말씀에 따르고 싶지 않은 마음이 그들을 이 말씀은 바울이 쓴 글이 아니라는 해석에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닌지를 묻고 싶다). 

4. 결론 

이상에서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여성의 교회 안에서의 사역 문제를 다루는 유일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는 디모데 전서 2:12-14에 근거해서 판단할 때 여자가 교회 안에서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일을 하는 것(목사직)과 다스리고 주관하는 일을 하는 장로직은 허락되지 않았고, 이 구절의 내포에 따라 그것은 창조의 질서가 존재하는 한 지속되는 교훈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런 성경의 가르침이 있는 한 우리는 이 말씀에 근거해서 교회 안에서 목사직과 장로직을 여성에게 허락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외에 폭 넓은 의미의 여성 사역은 교회 안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고 격려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신약의 가르침에 우리가 복종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이 능력이 부족하다거나 열등하다는 생각에서 그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님에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순전히 성경이 지시하는 가르침에 충실하려고 하는 마음에서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사역에 대해서, 그것도 목사직과 장로직에 대해서만 이런 금령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 여성이 가르치는 것을 이 성경은 금하지 않는다. 또 다른 사회적 맥락에서 여성이 주관하는 자와 치리하는 자와 재판하는 자가 되는 것을 이 성경은 금하지 않는 것이다. 

여성이 잘 다스릴 수 있는 은사가 있다면 다른 사회의 영역에서 그와 부합한 하는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일의 한 부분이 될 것이다. 또한 여성이 잘 가르치는 은사가 있다면 이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잘 가르치는 일을 효과적으로 해야 할 것이고, 그리스도인 여성이 그리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2:12-14의 의미에 대한 우리의 주해가 유지될 수 있다면 교회의 맥락에서는 여성이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목사직을 수행하는 것과 다스리는 장로직을 수행하는 것이 허용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서 언급하고 있지 않은 집사직에 대해서는 여성이 그 집사직을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로마서 16:1과 디모데전서 3:11에 대한 주해를 참조할 때도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물로 이것은 그 자체로 또 깊은 주해적 논의를 필요로 하는 문제이다.) 

또한 고래로부터 칼빈을 비롯한 많은 개혁신학자들도 여성의 집사직은 허용적인 태도를 가져 왔다. 이는 집사직이 목사직이나 장로 직에 비해 낮은 직임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교회의 모든 직임의 평등성은 장로교회의 큰 가르침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장로교 헌법에 허용하지 않고 있을 때는 총회에서의 연구와 논의를 거쳐서 헌법이 수정된 후에야 시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여성의 교회 안에서의 목사와 장로로서의 사역 가능성의 문제는 디모데 전서 2:12-14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부디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에 충실해서 이 말씀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한다.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이 어떻게 되든지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근자의 논의 중에서 가장 성경적이며 개혁파적 전통에 충실하며 이 글의 입장과 가장 유사한 논의로 Edmund Clowney, The Church(Leicester: IVP, 1995), 제 15장의 논의를 참조하라. 
또한 이와 가까우면서도 집사직도 여성이 감당하지 않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논의로는 Robert L. Reymond, A New Systematic Theology of the Christian Faith (Tennessee: Thomas Nelson, 1998), 제 23장 각주 9, 10을 보라. 


출처 :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

Posted by 작은샘

org date: 2012-01-27 11:24

 

http://www.reformednews.co.kr/986

평등과 복종의 원리에서 본 여성안수 문제

소재열

<크리스찬연합신문사>(9월 2일자 신문)에서 연속기획특집 이슈논단으로 여성안수 문제를 취급했다. 여성안수를 찬성한 조동호 목사와 이종윤 목사, 여성안수를 반대한 손석태 목사와 소재열 목사의 글이 연재됐다. 본 글은 여성안수 반대의 글을 제기한 소재열 목사의 글을 <크리스찬연합신문>의 양해를 받아 싣게 되었다(리폼드뉴스 편집부). 여성안수를 둘러싼 논쟁은 복음주의자 안에서도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사안으로 화해가 불가능할 정도가 되어 버렸다. 이제 여성안수의 문제는 신학자의 개개인의 차이와 논쟁을 뛰어넘어 교단별로 뚜렷한 양자택일의 입장을 취함으로써 지금까지 교단을 구분했던 교리적인 차이보다 여성안수의 문제가 다른 어떤 교리보다 더욱 상징성을 가진 교단의 구분을 위한 범주가 되어 가고 있다.

이제 여성안수를 지지해 준다면 어느 누구와도 연대할 수 있다는 태도가 교회 내의 여권주의주의들과 이 운동을 지지하는 그룹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제 성경의 권위와 보수적인 성경해석을 추구하는 개혁파 교단들끼리도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진영과 찬성하는 진영으로 나누어지는 이런 경향은 어느 정도 전 세계적인 흐름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1. 장로회 각 교단의 여성안수에 대한 역사적 고찰

현재 한국장로교 안에서 고신측과 합동측은 여성안수를 허용하지 않지만 기장측과 통합측은 여성안수를 허용하고 있다. 기장측에서는 1956년 제41회 총회에서 여장로제를 통과시키고 그 다음해인 1957년에 3명의 여 장로가 탄생하였다. 여 목사제는 1974년 제59회 기장총회에서 받아들여졌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측에서는 여성안수 청원은 제46회, 제47회, 제49회, 제50회, 제52회 총회 등 거의 매년 총회에 여성안수를 청원하였으니 총회는 번번이 이를 반려하였다.

1968년 제53회 총회 때는 여 장로 제도만을 청원하였으니 다음해 총회에서 반려되었고, 1971년 제56회 총회에서는 투표에 부쳐져 94:194로 부결되었다(대한예수교 장로회(통합), 제56회 총회, 총회록, 98-99). 제56회 총회 이후로 여성안수 문제는 여성들의 청원으로 거의 매해 투표에 붙여지기는 하나 부결을 거듭할 뿐이었다. 1991년 제76회 총회는 여성안수 부결에 대하여 “향후 3년간은 이 문제에 대하여 헌의도 할 수 없도록 하는 안”까지 통과시켰다. 그러나 그 3년의 기간이 지난 후인 1994년 제79회 총회여성안수의 건이 통과되고 노회 수의를 거쳐 1995년 5월 27일 여성안수에 대한 헌법 개정안이 공고된 이후 1996년 4월 28일 첫 여장로로 안수를 받았고 그해 첫 여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1994년 제79회 통합측 총회에서 “여성 안수 문제”에 대하여 허용하는 결의를 하자, 그 여파가 합동측에까지 확대되면서 이 문제에 대한 성경적 논의의 필요성 때문에 <신학지남>, 1996년 가을호(통권 248호)에서 특집으로 “교회와 여성”이라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들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김의환 박사,“교회내 여성의 기능과 성직의 자격”, 박아론 박사,“여성의 목사안수에 관한 여권주의자들의 주장과 우리의 견해”, 권성수 박사,“딤전 2:11-15에 관한 주석적 고찰”, 김길성 박사,“여성임직에 대한 성경의 교훈”, 다음해인 1997년 가을호(제252호)에서도 심창섭 박사의 “여성안수에 대한 소고”와 정훈택 박사의 “존재론적 평등성, 기능적 종속성”, 이관직 박사의 “성경 속에 나타난 여성안수에 대한 이해”라는 논문이 발표됨으로 합동교단의 신학적 입장은 여성안수가 신학적으로 불가함을 발표하게 되었다. 또한 제83회(1998) 예장합동 총회는 신학적으로 여성안수를 허락할 수 없다고 이를 확증했다.

2. 여성안수 문제에 대한 신학적 논쟁

한국장로교회는 역사적으로 여권문제는 함경북도 성진 중앙교회 김춘배 목사는 1934년 8월 22일자 「기독신보」에 “장로회 총회에 올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의 공개서한을 발표한 일이 있었다. 그는 이 글에서 지난 해 총회시 함남노회에서 여자에게 장로 자격을 주자고 헌의한 건을 부결한 데 대해 유감을 표시하고, 남녀 차별적 헌법에 근거하여 여자에게 치리권을 부여하지 않은 것은 성경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김춘배 목사는 “여자는 조용하라.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고 바울이 기록한 것은, 2천 년 전의 한 지방교회의 교훈과 풍습을 말함이요,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다”라고 선언한 것이 총회에서 문제로 제기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총회는 단호하게 “성경의 파괴적인 비평을 가르치는 교역자들과 성경을 시대사조에 맞도록 자유롭게 해석하는 교역자들을 우리 교회 교역계에 제외하기 위하여 총회는 각 노회에 명하여 교역자의 시취문답을 행할 때에 성경비평과 성경 해석 방법에 관한 문답을 엄밀히 하여 조금이라도 파괴적 비평이나 자유주의 해석 방법의 감화를 받은 자는 임직을 거절케 할 일이오며 이미 임직 받았던 교역자가 그런 교훈을 하거든 노회는 그 교역자를 권징조례 제6장 제42조, 제43조(면직조항)에 의하여 처리케 할 일이다.” 라는 입장을 정리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교단에 속했던 김세윤 교수는 여성안수를 고린도전서 14장이 사본학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점을 들어 후대에 남성우월주의자인 누군가에 의해서 바울의 이름으로 삽입ㆍ편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성경해석은 여성 안수를 지지하기 위한 해석학적인 주요한 유형들 가운데 속하는 것으로서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믿음과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그의 세미나에 참석한 합동교단의 여성도들 다수가 지지하였다. 이에 대해서 서철원 교수는 김세윤 교수의 신학적인 탈선을 중심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박혜근 교수(칼빈대학교 조직신학교수)는 그의 논문 “‘평등 그러나 복종’의 성경적 이해”라는 논문에서 “1970년대를 기점으로 교회 안에서도 페미니스트 운동의 여파로 여성의 독립적인 가치와 남성과 동등한 성직 안수의 권리를 구현하고자 하는 시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라고 말하면서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들이 가진 해석의 지배적인 원리란 남성과 여성의 ‘동등’(equality) 혹은 남성으로부터 여성의 ‘해방’ (liberation)이라는 정치적 사회적 이념”이었으며, “이들 이념적 가치야말로 교회 안과 밖이라는 구분을 떠나 역사적인 모든 유형의 페미니스트들이 실현하고자 했던 공통된 목표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교회와 관련하여 페미니스트들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관심사는 남성이 독점해 온 성직을 여성과 공평하게 나누어 갖자는 것이며, 그 첫 번째 실천적인 과제가 바로 성경을 그들이 가진 이념으로 재편하고 재해석 하는 일”이 문제점이었음을 지적하면서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을 따라 성경을 재구성하지 않는다면 성경은 결코 페미니즘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현재 여성 안수를 둘러싼 논쟁의 본질은 사실은 특정한 성경 본문을 둘러싼 단순한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여성 안수의 이슈를 근본적으로 성경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교회의 고백적 전통에 대한 현대의 이데올로기의 도전이란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성경의 권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전통적인 해석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를 인정하는 건전한 해석의 원칙을 고수하는 일일 것이다.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교회가 일어서고 무너지는 일이 달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1980년대 더글라스 무(Douglas Moo)와 필립 페인(Philip B. Payne)은 여성 안수를 두고 트리니티 저널(the Trinity Journal)을 통해 논쟁의 글을 실었다. 무는 이 논쟁의 글의 결론으로 “여성이 남성을 가르치거나 남성을 다스리는 권위를 행사해서는 안 되며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남성과 여성이 가지는 관계의 구조를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페인은 “디모데전서 2:11-15은 교회에서 여성들을 가르치거나 다스리는 지도자로서의 활동을 금하는 충분한 근거를 주고 있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사도 바울의 특수한 국지적, 문화적 조건 하에 있는 에베소교회에게 그 같이 말하였으나 우주 보편적인 모든 교회에 적용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따라서 오늘날의 교회에까지 영속적인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함으로서 이러한 논리와 논쟁은 이미 한국교회 안에서 역사적으로 첨예하게 대립되는 내용으로 이 문제는 단순히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는 차원이 아니라 성경 해석과 성경의 무오성이라는 측면에서 거론되기도 했다.

이러한 논쟁의 대립들은 역사적 정통신학을 결정짓는 신앙과 신학의 유일한 원천인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있으며, 특히 성경의 무오성과 영감, 권위에 대한 해석의 문제로 대립되었다. 그 대립의 한 중앙에 성경의 무오성과 영감을 부인하고 성경의 신적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탈선적 해석방법들로 대한 전통적인 해석방법과 현대신학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어쩌면 이러한 대립과 충돌, 논쟁과 대결은 성경과 신학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나타내기 위한 필요한 조치들이라 할 수 있다.

3. 신학적 근거에 의해 여성안수를 반대한 이유

신학이란 곧 성경해석의 원리이자 성경해석에 근거한 사상적 체계이다. 따라서 신학이란 신앙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회가 지금까지 교회를 양육해 온 바른 신학을 성경의 이정표로 삼는 일은 자유주의 현대주의적 폐해가 만연한 지금에 더욱 중요한 일이다. 즉 신학적 탈선은 언제나 병든 신앙의 문제로 이어진다. 신학의 내적 원리는 믿음이라면, 외적 원리는 성경이다. 따라서 성경 본문의 의미가 우리의 삶에 어떤 함축성을 갖는가 라는 질문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성경이 교회의 신앙과 모든 실천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여성안수의 문제 역시 성경을 정경으로 전제하는 건전한 성경해석의 원리를 채택하는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문제는 이 문제가 양성평등주의, 비성경적인 성차별주의에 편승한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출발해서는 안된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입장에서 여성안수를 반대한다.

첫째, 김세윤 교수는 여성안수를 고린도전서 14장이 사본학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점을 들어 후대에 남성우월주의자인 누군가에 의해서 바울의 이름으로 삽입ㆍ편집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를 거부한다.

어느 누구든지 성경 권위를 훼손하는 비평적인 접근은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바울서신 중에서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성경의 본문에 대해서 바울의 저작을 부정하는 식의 주장이나 성경의 저자들이 틀렸다고 주장하거나, 성경도 문화나 환경의 영향을 받는 상대적인 문서일 뿐이라는 유형의 해석에 동의할 수 없으며 이를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니콜(Roger Nicole)은 다양한 성경해석의 입장을 소개하면서 여성안수를 긍정적으로 보면서 “성경의 본문이 항구적이고 우주적인 구속력을 갖는다는데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내용은 인정할 수 없다.

둘째, 성경과 전통의 관계에서의 문제 때문이다. 개혁주의 교회는 특별히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있어서는 “규범적 원리”라고 불리는 독특한 해석적 원리를 발전시켜 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Ⅰ:Ⅵ에 나타난 대로 성경의 절대성과 충분성, 충족성에 대한 신앙에 근거해서 성경에서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하게 가르치지 않는 것은 교회론의 영역에 일체 도입하지 않았다. 반드시 성경으로부터 확정적인 지지를 받는 것만을 교회의 조직과 예배모범의 요소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규범적 원리는 종교개혁자 칼빈에 의해서 처음 제안되었다. 이러한 규범의 원리들은 성경의 권위를 보존하고자 하는 열정과 의도가 근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원리에 따르면 여성안수에 관한 한 여성의 안수를 위한 성경의 승인을 확보해야 한다. 왜냐하면 여성안수를 허용해야 할 것인지, 금해야 할 것인지는 전적인 성경적인 근거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즉 여성안수 허용의 정당성은 성경의 근거와 함께 분명하게 증명되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이같은 증명의 의무는 여성안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이유를 반대하는 식으로 여성안수를 증명하여 성경적 권위의 근거로 삼는 것은 옳지 않다.

셋째, 창조와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여성의 문제 때문이다. 남녀 창조의 기사에서 남자와 여자가 책임과 권한에서 동등하지 않다. 남녀가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사람이라는 존재론적으로는 동등하다. 그러나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고 이브가 있기도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았고 행위언약의 당사자가 되었다. 아담의 위치는 ‘먼저’로써 특징 지워진다. 먼저 됨은 존재의 순서를 말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양식을 말하는 것이다. 즉 아담이 언약의 대표자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아담은 이브를 포함한 모든 인류를 위한 언약의 머리가 됨으로써 단순히 시간적으로 먼저 지어진 존재 이상의 이부에 앞서는 권위를 가진 존재가 된 것이다. 남녀간의 권위와 복종의 이슈는 일반적으로, 근본적으로 창조시 언약적 질서에 속한 문제이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과 관련하여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아무런 역할의 차별이나 구분이 없어야 한다고 해석하면서 이 구절이 남자와 여자 사이의 일정한 역할의 구분을 규정하는 다른 성경과 충돌하는 것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여성안수자들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 28절이 보편적 교회에 영속적인 원리라고 믿었다고 보고, 표면적으로 이 성경과 충돌하는 모든 성경은 거부되어야 한다고 믿는 입장이다. 브루스나 그 브루스의 입장을 취한 김세윤 교수는 갈라디아서 3장 28절과 반대되는 주장을 담고 있는 다른 성경을 다룰 때 전자를 취하고 후자를 부정한다.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이러한 입장은 결코 지지를 받지 못한다.

우리는 “성경은 아무런 내적인 모순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수용한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서의 자유와 여자에 관한 제한규정이라는 상호 모순되는 것 같은 두 가지 언급을 설명하고자 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평등과 일체성의 선언은 교회 안에서의 역할의 구분과 차이에 대한 명령과 아무런 모순 없이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며 오늘날의 교회에도 여전히 권위적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할 수 있다.

4. 결론

결론적으로 여성안수를 금해야 한다는 주장은 성경이 명확하게 가르치는 바라고 믿으며, 여성의 성직안수 금지는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라는 규범을 존중하는 해석적 노력의 결과로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이다. 성경은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의 소유자로서는 동등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과의 언약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권위와 복종의 질서가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러한 남녀의 언약적 권위와 복종의 질서를 무효화 하거나 소멸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며, 이는 이미 밝힌바 예장 합동교단의 신학적 입장이기도 하다(*) 

 

* 일부 오자를 수정하였습니다.  

영성안수 -> 여성안수

Posted by 작은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