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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g date: 2012-01-27 12:39

여자목사제도는 과연 성경적인가?

- 김세윤 교수의 주장을 우려하며 -

 

이광호 목사(실로암 교회)

[Ⅰ]

 

지난해 말 합동측 총회장의 총신대학 '기저귀 발언'(2003.11.12) 이후 교계가 시끄러웠다. 그는 경건회 도중 여자목사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펴면서 '여성의 기저귀'를 들먹여 적절치 못한 표현을 했다. 그가 의도한 것은 여자 목사제도에 대한 견해였지만 그 말을 받아들이는 다수의 사람들은 '기저귀' 라는 용어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것이 여성비하 문제로 확산되었다. 당시 당사자는 용어채택으로 인한 자신의 실언을 사과했지만 기독교 여성단체들에서는 그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여성목사 안수를 허락할 것을 요구하기에 까지 이르렀다.

 

이제 반년을 넘겨 총신 신학대학원 여동문회는 지난 7월 5일 풀러신학교의 김세윤 교수를 초빙해 '성경에 나타난 여성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김 교수는 나름대로 이유들을 나열하며 여자 목사제도의 타당성을 제시했다. 그는 특히 고린도전서 14:34,35의 기록에 대한 사본학적 불안정과 두 구절이 고린도전서 14장의 전체적인 문맥을 끊고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어 후대에 삽입된 것이 확실하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했다("'여자여 잠잠하라'는 후대 편집된 것!", 뉴스앤조이, 제90호, 2004.7.8, 참조).

 

그러나 필자는 우선 고린도전서 14:34,35이 후대에 삽입되었다는 말을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그의 무모한 용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렇다면 동일한 성경저자가 기록한 디모데전서 2:9-14의 말씀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 말할지 궁금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유린당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음을 감추고 싶지 않다. 나아가 한 저명한 신학자의 주장이 한국교회에 끼칠 영향을 생각하면 심히 우려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적으로는 한국의 다수 교단들이 이미 여자목사제도를 도입하고 있으며, 한국 보수주의 교단에서도 여자목사제도를 심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교수나 목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여자목사제도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시대에 부응하는 깨어있는 자로 인식되는 반면 부인하는 자는 그와 반대로 인식되고 있다. 더구나 다수의 교회 지도자들이 원리보다는 사회적 분위기 읽기에 주력하고 있는 점과, 시대에 편승하고 있는 일부 인사들의 자세가 원리적 접근을 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주고 있다.

 

필자는 결코 남성우월주의자가 아니며 여성을 비하하고자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 도리어 남성우월주의적 사고를 가진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의 오만함을 지적하고 싶다. 이 글을 쓰면서 신앙을 가진 여성들에게 호소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교회는 결코 남성이나 여성을 위한 단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주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 가운데 존재하는 직분은 어떤 경우에도 특정인 혹은 특정 부류에게 주어지는 기득권적 권리가 될 수 없다. 만일 직분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이미 교회의 직분자로서 적합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성이나 여성 중 어느 편을 지지하여 기득권적 논쟁을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누구 혹은 특정 부류의 편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입장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고 적용해야 하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Ⅱ]

 

(1) 직분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직분과 직책에 대한 차이를 이해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물론 이런 구분은 용어자체에 대한 구분이 아니라 교회의 직분을 이해하기 위한 편의적인 방편이다. 교회의 직분은 항존하는 필수요건이다. 즉 교회의 목사, 장로, 집사 등의 직분은 단순히 일의 능률을 위해 분담하는 직책이 아니라 교회 가운데 마땅히 있어야 하는 본질적 은사이다. 이는 일반적인 직책이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아니라 조직의 편의나 일의 능률을 위해 두고 있는 임의적 제도라는 점과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

 

교회에서 말하는 직분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사로서 원리상 인간들이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창안하거나 만든 제도가 아니다. 즉 직분은 인간의 선택이나 능력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원리상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것이다. 이에 반해 직책이란 인간의 판단과 능력에 따른 것으로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효율적인 기능을 의미한다.

 

교회에는 다양한 직분들과 직책들이 있다. 목사, 장로, 집사 직분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은사적 방편이라면 남전도회장, 여전도회장, 선교부장, 구제부장, 주일학교 교사 등은 직책에 속한다. 이러한 직책은 조직 혹은 기관으로 부터 맡겨진 일의 능률을 위해 남녀의 성에 관계없이 적절한 사람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직분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사이므로 목사도 이와 동일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제도가 있었는데 제사장은 단순한 개인의 능력에 따른 직책이 아니었다. 모든 제사장은 레위인으로서 아론의 자손 가운데서 세워졌다. 이스라엘 백성 중 레위지파 자손이 아니면서 그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여 아무나 제사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기서 필자는 제사장직과 목사직분을 연관지어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며 제사장이 남성이어야 했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제사장은 하나님의 전적인 뜻과 경륜으로 말미암는 직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직분에는 지위의 높고 낮음이 있는 것이 아니며 거기에 권력이나 외적인 권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런 식으로 직분을 이해하게 된다면 권력이나 권위를 가진 '높은 자리'를 남성들만 가지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지적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직분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특별히 허락한 은사이며 인간들의 명예나 권리를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2) 현재 논의되고 있는 직분 문제에 있어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교회의 직분이 마치 시대의 조류에 맞추어져야 하는 듯한 분위기이다. 이는 교회의 직분이 토론이나 여론을 배경으로 하여 변화 가능한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민주적인 절차에 따른 다수의 견해에 따르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인본주의적 대세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약화되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시대나 지역에 따라 상이한 문화를 가지게 된다. 교회는 항상 그 상이한 문화들 가운데 존재해 왔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바는 교회의 직분은 사회적 분위기나 여론에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역사 속에 상속되어져 온 많은 교회들은 다양한 인간 문화들 가운데서 말씀이 교훈하는 바를 그대로 지키고 보존하려고 애써 왔다.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가 필연적으로 투쟁하고 싸우면서 한편으로 고난을 당해야 할 요소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교회의 직분은 인간들의 토론에 의해 결정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토론은 시대와 문화를 배경으로 할 수 밖에 없으므로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나 분위기에 능숙한 사람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설득력 있게 말을 잘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이에 대해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느냐를 주의 깊게 잘 살펴보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여론의 수렴을 거쳐 직분에 대한 해석이나 방향을 결정하려는 노력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지난해 말, 직분과 여성문제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 총신대학에서는 설문조사를 통해 80% 정도의 학생들이 여자목사 제도를 찬성 혹은 입장을 유보하는 것으로 집계했다(총신대보, 제 256호 2003년 10월 14일. 참조). 그 설문조사에 참여한 많은 학생들은 여자목사제도를 지지하거나 그것이 별문제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신학을 지향하고 있다는 총신대학생들이 그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다면 다른 신학대학이나 많은 기독교 여성 단체들의 그에 대한 생각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대체적인 배경이 하나님의 구체적인 말씀이 아니라 사회 정신적 경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바는 인간들의 경험적 자기 생각이나 판단이 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 진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3) 오늘날 여자 목사제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 근거를 성경에 나타나는 여 사사나 여성들의 활약에 두고 있는 것 같다. 나아가 신약성경을 고등비평하는 자들의 입장도 이제 새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구약성경을 보면, 드보라와 같은 여인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사의 직분을 훌륭히 수행했으며 라합, 룻, 에스더 등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들어 쓰신 믿음의 여성들이다. 물론 신약성경에도 훌륭한 믿음의 여인들이 수없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기억해야할 바는 그 모든 여성들이 그러한 믿음의 지위를 남성으로부터 쟁취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구속사 가운데서 자신의 고유한 뜻에 따라 그 여성들을 특별히 선택하심으로써 놀라운 경륜을 이루어 가셨으나, 남성과 여성에게 하나님의 일을 고르게 분배하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을 단순히 규범적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이려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신약성경의 여성들 또한 교회의 직분적 개념과 더불어 이해되어야 한다. 사도바울은 직분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며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할 것을 언급했는데, 그것은 여성을 무시하기 때문에 한 말이 아니라 주님의 교회를 위한 언약적 가르침이었다. 그는 구약시대에 훌륭한 여 사사와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교회의 감독직분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한 것은 구약 역사에 등장하는 여성 관련 내용들이 단순한 규범이 아니라는 기본 개념 위에서 창조와 연관된 교회의 특이성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 여성과 관련된 구약의 역사적 사실을 우리 시대의 교회의 규범으로 이해한다면 율법과 복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 해석상 많은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여자목사제도를 인정하려는 자들 중에는, 교회 가운데 남성과 여성 사이에 어떠한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인격자로서 인간 사이에 남녀간 아무런 차등이 없다는 것은 옳지만 직분에 대한 구별 자체가 없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남성과 여성은 창조질서 가운데서 분명히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인격이나 능력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질서와 그 가운데 존재하는 본질적인 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첫 언약에서 드러나듯이 자녀의 출산은 여성의 몫이며 외부의 위험을 방어하고 가정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은 남성의 몫으로 그것은 창조질서에 속한 것이다.

 

 

 

[Ⅲ]

 

(1) 신약성경을 살펴보면, 가르치는 교사로서 여성을 교회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진리의 계시임을 믿는다. 이미 잘 알고 있는 바대로,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고전 14: 24,25)고 이야기했다. (그 말씀을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 주장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고린도전서 14장은 특별히 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한 은사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여자로 하여금 교회에서 잠잠하도록 요구한 것은, 율법 즉 구약성경을 근거로 하여 은사와 관련된 직분적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바울을 통해 허락하신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시임을 잘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이 본문은 여성과 관련된 일반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당시의 문화나 관습을 배경으로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즉,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바울의 요구가 일반 생활이나 논의에 있어서 침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 뿐더러 소위 교회 안에서 '여성다움'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는 교회의 직분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하는 이유가 율법에 근거해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율법을 근거로 한 것은 성전과 제사장 직분과 연관된 것이다. 여성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제사할 수 없었다.) 물론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않음'의 의미가 '여자답게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으라'는 권면이 아니라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직분이 허락되지 않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칫 고린도전서 14:24의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가르침을 '남성은 교회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는 말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다. 우리가 여기서 얻는 교훈은, 교회의 교사직분이 남성에게 맡겨졌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직분을 남성에게 주어진 어떤 특별한 권리로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바울의 기록은, 교회의 상속이 구약의 율법을 바탕으로 한 교사 직분을 통해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교회에는 그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고유한 질서가 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가르치는 목사직은 개인의 의사에 따라 스스로 성취할 수 있는 직분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 세워지는 직분이다.

 

바울은 또한 디모데전서 2:11-14에서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디모데전서는 이른 바 목회서신으로 교회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특히 디모데전서 2장은 직분에 관련된 기록을 하고 있다.

 

바울은 위 본문에서, 여자가 가르치는 목사의 직분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를 창조질서와 인간이 범죄한 초기 과정에서 찾고 있으며, 그런 연유로 인해 그 직분을 허락하지 않노라고 선언하고 있다. 즉 성경에서 여성들이 교회의 가르치는 직분을 가지는 것을 허락지 않는 이유가 여성 비하나 여성의 지적능력에 대한 불신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역할을 창조질서와 연관하여 더욱 본질적인 것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본문에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이라는 목사의 교사사역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남자를 주관하는 것'이라는 말은 감독의 직분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2) 성경은 이렇듯이 여자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직분, 즉 목사의 직분을 가지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여권주의자들이나 시대적 여성옹호론자들이 여자 목사제도를 인정하려고 애쓰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시대적 페미니즘의 영향 때문이다. 현대에 이르러 많은 여성들과 여성옹호론자들이 남녀 평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역사 가운데 있어왔던 남성들의 잘못된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적 사고로 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사상은 급기야 교회 가운데도 들어와, 직분에 있어서도 성경의 구체적인 가르침을 살피기에 앞서 여권회복의 차원에서 논의의 틀을 제공하고 있다. 여자가 결코 남자보다 못하거나 부족한 것이 없으니 성적 차별이 불필요하며 모든 직분은 남녀가 공평하게 가질 수 있다는 논리이다. 나아가 그들은, 과거 남성들이 여성 위에 군림함으로써 모든 직분과 권위를 독점해 왔으므로 이제 빼앗긴 여성의 직분적 권리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시대에 있어서 많은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이 목사의 직분을 권력 및 권위와 연관된 '높은 자리'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이는 직분을 정치적인 직책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결과이다. 그러므로 왜 그 높고 힘있는 자리에 여자들은 올라갈 수 없고 남자들만 올라가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느냐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은 목사들의 잘못된 권위주의와 교회를 무시했던 악한 행태가 그런 분위기를 만들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남성이 목사의 직분을 맡도록 허락된 것은 결코 남성이 여성보다 성품이 우수하다거나 지적으로 유능해서가 아니다. 만일 누군가 그렇게 생각하다면 그것은 잘못된 남성우월주의적 사고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능력 면에서 볼 때 남성보다는 오히려 여성들이 더 섬세하고 정확한 면이 있을 수 있다. 나아가 남성들은 어떤 경우에도 성적인 차별성으로 인해 여성들을 무시하거나 멸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목사제도가 허용될 수 없음을 지적하는 이유는 성경의 원리적 가르침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교회 가운데 여자 목사를 금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주님 오실 그 날까지 지켜야할 규범이며 그것을 통해 배워야할 분명한 교훈이 있는 것이다. 교회의 직분은 결코 시대적 조류에 맡겨질 수 없으며 인간의 이성적 합의에 의해서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 하나님께서는 하와의 유혹으로 인해 죄가 이 세상에 들어 왔음을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으며, 그것을 직분과 연관 짓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가 여자를 목사로 허락하지 않는 것은, 남성이 여성 위에 군림할 수 있다거나 여성이 남성에게 군림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진정한 의미는 교회가 목사직분을 남성에게 허락함으로써, 여성을 통해 이 세상에 들어 온 죄악을 다스려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교회의 존재를 묵시적으로 선포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목사 혹은 교사직분이 여성에게는 금지되고 남성에게만 허용된 이유이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많은 여성들이 지도자의 위치에 있지 않았느냐는 사실을 내세우며 여성 목사를 인정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여자 목사를 인정하는 모범적인 근거로 사용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각 시대에 여성들을 들어 사용하신 것과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우신, 죄에 승리하는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의 직분은 분명히 서로 다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마다 여러 여성들을 들어 사용하셨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구약시대 뿐 아니라 사도교회 시대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도 마찬가지이다. 드보라, 기생 라합, 룻, 마리아, 엘리사벳, 한나, 막달라 마리아 등 수 없이 많이 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윤리적 결함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윤리성 여부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쓰임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에 따라 그들을 선택하여 쓰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시대에도 많은 여성들을 주님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사용하고 계신다. 목사의 직분을 오용하며 주님을 욕되게 하는 남성들도 많고 그런 직분을 가지지 않았지만 훌륭한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 여성들이 많이 있다. 목사가 되면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는 것이고 목사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지 않는다는 식의 논리는 성립될 수 없으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은 그 자체로서 아무런 차등 없이 매우 소중하다. 하나님께서 남자를 여자보다 더 사랑하고 계심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러나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의 직분을 허락하시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의 뜻이며 몫이다. 여권주의자들이나 여성 옹호론자들은 시류의 영향으로 인해, 여자들도 남자들 처럼 목사가 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우려 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교회 안의 성숙한 여성들은 교회의 목사, 즉 교사로서 직분을 담당하는 형제들을 위해 권면하며 그들의 온당한 순종을 위해 기도하는 자세를 가짐으로써 주님의 교회가 온전히 잘 세워져 갈 수 있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필자의 이런 말에 대해, 현실 교회에서 여성들이 가르치고 있는 문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묻는 사람들이 혹 있을지 모른다. 목사가 있지 않은 작은 교회나 주일학교 같은데서 여성들이 실제로 가르치는 것에 대한 지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자가 독립된 교사로서 성도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목사, 즉 교사의 지도를 받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이는 비단 여전도사 뿐 아니라 남자 전도사나 주일학교 교사들도 마찬가지이다.

 

 

 

[Ⅳ]

 

우리시대의 연약한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교훈이 아니라 세속적 시류의 영향을 받고 있는 점은 매우 안타깝다. 목사 직분을 감당하는 남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순종적인 목회가 아니라 권위주의를 앞세운 인본적인 목회를 함으로써 그러한 잘못된 욕구들이 더욱 강하게 분출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말씀에 충실하지 못한 목사들이 성도들 위에 군림하려는 잘못된 모습에서 기인한 부끄러움일 것이다. 그렇잖아도 말씀이 사라져 가는 안타까운 시대에,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해야 할 학자들마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앞의 김세윤 교수는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왜 이제서야 갑작스럽게 그런 주장을 펴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금 묻고 싶다. 이전에는 모르고 있다가 최근에 들어와서 고린도전서14:34,35의 삽입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말인가? 이번 주장도 한국의 여성단체에서 초빙하지 않았으면 말하지 않았을 내용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그는 신학자로서 자질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바라기로는 교회 가운데 교사로 세움을 받은 목사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올바른 목회를 함으로써, 주님의 몸된 교회가 현대 페미니즘의 시류에 휩쓸리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남성이기 때문에 여성보다 우월하다든지 여성이기 때문에 목사보다 신앙이 못한 것이 아니다. 목사 직분을 가진 남성들 보다 특별한 직분을 가지지 않은 일반 여성들이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얼마든지 많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목사라는 직분으로 인해 더 나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교회가 허락한 직분이므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직분을 수행해 갈 따름이다.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잘못 세워진 목회자들이 많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교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자들이 신학교를 졸업했다는 이유와 남성이라는 이유로 쉽게 목사가 되어 있다는 사실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말씀에 나타나는 원리 자체를 무시하거나 바꿀 수는 없다. 남성이 교회의 교사인 목사직분을 맡는 것이 성경적이라 하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 전통을 보존하기 위한 수구적 견해 때문이 아니다. 직분과 관련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단순히 시대에 따른 문화적 특성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주님의 말씀은 그가 다시 오실 그 날까지 교회의 중심에 온전히 받아들여야 할 진리의 교훈이다.

 

하나님 앞에서 남성과 여성의 능력에 따른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목사라고 해서 천국에서 영웅이 된다거나 더 많은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니며 더 많은 상급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직분을 잘 감당하지 못함으로 인해 더욱 엄한 책망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지상에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며 직분을 기득권의 한 형태로 이해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교회에서 기득권을 주장하는 자라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누구라도 주님의 뜻을 오해하고 있는 자들일 것이다. (뉴스앤조이, 2004.7.24)

Posted by 작은샘

org date: 2012. 1. 27. 12:36

 

▲신반포중앙교회에서의 한국성경신학회 제28차 정기논문 발표회 모습 ©뉴스미션

 

상당수의 교단이 여성 교직, 곧 여성 목사와 여성 장로 안수제도를 도입한 가운데 아직도 이를 채택하지 않는 교단들은 디모데전서 2장 13, 14절을 마지막 방파제로 삼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여성 안수 금지는 선명한 명령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예장고신, 대신, 합신 신학자들의 모임인 한국성경신학회(회장 박형용)는 22일 오후 서울 신반포중앙교회에서 ‘목회서신에 대한 주해와 설교’를 주제로 ‘제28차 정기논문 발표회’를 개최했다.

 

이날 발표회에서는 4명의 발제자 중 2명이 디모데전서 2장 13, 14절을 중심으로 ‘여성 안수’ 문제에 대해 논문을 발표해 관심을 모았다.

 

김성봉 박사(신반포중앙교회 담임)와 이승구 박사(합신대 교수)는 디모데전서 2장 13, 14절은 여성 안수에 대해 금하는 구절이라는 공통된 성경 해석을 바탕으로 여성 안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김 박사는 “성경에 대한 입장이 비교적 자유로운 교단에서는 여성 안수 문제가 그다지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라며 “사회적 분위기와 함께 기존의 입장을 수정 보완해 가면 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성경에 대한 입장이 비교적 강경한 교단에서는 여성 안수 문제는 곧바로 ‘성경관’과 직결되는 면이 있다”며 “문제가 되는 본문인 디모데전서 2장 13, 14의 앞 절(11, 12절)을 보면 (여성 안수) 금지는 선명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암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는 본문을 두고 달리 말하는 것은 학자의 궤변이 되고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경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하느냐가 관건

 

이렇듯 여성 안수에 대한 금지가 선명함에도 불구하고 여성 안수를 채택하고 있는 교단들이 생기는 것은 선명한 금지의 근거로 제시된 13, 14절을 설득력 있게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느냐 때문이라는 게 김 박사의 견해다.

 

김 박사에 따르면, 여 성 안수를 받아들이는 이들은 디모데전서 자체를 바울이 쓴 것으로 보지 않는다. 따라서 비록 본문이 여성 안수를 금할지라도 그 금지는 사도의 권위가 아니라고 하며, 심하게는 사도의 이름을 빙자한 자들이 사도의 뜻을 거슬러 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한 한편으로는 창조의 순서를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타락의 순서를 말하는 13, 14절과 관련해서 이 구절들의 근거가 되는 △창세기의 저자가 과연 모세인가 △저자 문제는 차치하고 과연 그런 창조가 실제로 있었는가 △그런 타락이 실제로 있었는가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함으로써 권위를 감소시키고 만다.

 

김 박사는 “이러한 무기력한 기초로서는 아무런 파도도 막아낼 수 없음이 자명하다”면서 “어쩌면 여성 안수 문제를 가결한 교단들은 성경관에 있어서 이러한 입장에 서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어 그는 “똑 같은 본문(13, 14절)이 앞서 지적한 바울 저자설, 창세기 모세 저자설, 창조의 역사성, 타락의 역사성을 믿는 무리에게는 현대에 일어나는 (여성 안수) 파도를 막아내는 방파제 역할을 하기에 충분한 기초로 여겨지기도 한다”고 밝혔다.

 

이 승구 박사도 “디모데전서 2장 12-14절을 앞뒤 문맥으로 고려해 읽을 때, 이 구절은 창조질서와 타락의 빛에서 여성의 목사 및 장로로서의 활동을 금하고 있다”며 “그러므로 우리가 이 구절에 과연 참으로 순종하는가를 심각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Posted by 작은샘

org date: 2012-01-27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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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의 여성 사역의 문제에 대한 한 고찰 - 이승구 교수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디모데전서 2:12-14]

교회에서의 여성 사역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과연 어떻게 생각하여야 하는가? 이런 질문이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서도 계속 제기되고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서 편집진에서 이 문제에 대해 개혁 신학적 입장에서의 의견을 밝히는 글을 쓰도록 요청하였기에 이 문제에 대한 간단한 논의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사역”이라고 할 때 많은 이들은 목사와 장로로서의 사역을 중심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이런 현상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해서 필자 자신은 별로 확신이 서지 않는다. 오히려 필자 자신은 “여성 사역” 이라는 말을 좀 더 폭 넓게 생각해야 하고 그런 폭 넓은 의미의 여성 사역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는 교회 안에서 여성은 처음부터 중요하게 사역해 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이 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이 문제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할 때 생각하는 의도인 여성의 목사와 장로로서의 사역의 의미를 염두에 두고 이 논의를 시작해 보고자 한다. 

1.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출발점 

먼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 각자가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든 지를 차치(且置)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하고 있는 부분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해야 이 문제에 대한 논의에서 본질을 흐리게 하지 않는 건전한 논의가 진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논의해 가는 과정 가운데서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지엽적이고 비본질적인 논의와 심지어 감정적인 의견 표명과 의견의 대립으로 나아갈 위험이 있으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논의에서는 먼저 다음 몇 가지 점들을 분명히 하고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여겨진다. 우리의 논의가 진정 그리스도교적인 논의이려면 우리 모두가 함께 동의하고 출발해야 할 점들은 다음과 같은 점들이라고 여겨진다. 

(1)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빛에서 볼 때 남 ․ 여는 그 신분과 지위에 있어서 동등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점에 있어서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러므로 후의 논의에서 이 점을 가지고 서로를 공격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예를 들어서, 여성 사역을 찬성하는 이들이 이를 비판하는 이들에게 대해서 그렇게 보는 것은 여성을 평등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든지 하는 논의를 해서는 안 된다.) 

창조와 구속의 빛에서는 남녀가 평등하다. 타락의 영향 하에서 서로가 투쟁하며 결과적으로 남자가 여자를 다스리게 되는 현상이 발생했으나(창 3:16), 그것은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기보다는 죄악의 결과요 죄에 대한 형벌의 한 부분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상호 지배적이려고 하는 상황은 하나님께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에서 우리에게 주신 관계의 상황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이 후의 논쟁에서 어떤 입장을 지니든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가 평등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논의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여자가 어떤 점에서 부족한 점이 있어서 여성의 교회에서의 사역이 있을 수 없다는 식의 논의는 있어서도 안 되고, 그런 논의가 전개되어서도 안 된다. 

신분과 지위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고 그 은사와 능력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 남자 됨과 여자 됨에 따라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창조와 구속의 빛에서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논의의 전제의 하나이다. 

또한 창조와 구속의 빛에서는 남자와 여자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의도는 남자와 여자가 각기 그들의 특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에 필요한 것이다. 돕는 배필의 의미가 “그에게 상응하는 돕는 자”임을 생각할 때 이 점은 매우 자명하다. 그래서 바울은 “주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고전 11:11)라고 말하고 있다. 

(2) 교회에서의 사역자의 역할은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로서의 역할이 아닌 것이다. 

신약 교회의 직임은 구약 교회의 직임과 직접적 연속성을 지니고 있는 직임들이 아니다. 구약의 직임들은 오실 메시아의 사역을 바라보게 하는 모형론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으나 신약의 직임들은 구약의 직임과 직접적 연속성을 지니고 있지 않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온전한 선지자, 제사장, 왕직의 대리직임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천주교회에서나 일부 성공회 등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을 대리하는 직임에 근거하여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여야 한다는 것은 이 문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논의를 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것인데, 그리스도가 남성이었으므로 교회의 사역자는 남성이어야만 한다는 식의 논의는 선결 문제 오류를 지닌 잘못된 논의가 되는 것이다. 신약 교회의 직임은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직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 교회의 직임은 그리스도 직임의 대리자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면서 논의해야 한다. 

(3) 신약의 선지자들이 있는 상황은 과도기적인 현상이었지, 선지자가 교회 안에 항상 있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신약의 선지자들 가운데서는 남자 선지자들과 함께 여선지자들이 있었다(행 21:9; 고전 11:5?). 그러나 그런 직분이 신약 교회에 지속적으로 있게 하지 않으신 것이다. 새로운 계시가 교회 안에 지속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4)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논의는 순전히 성경이 항상 있을 교회의 모습을 향해 어떻게 말하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되어져야 한다. 

신약 성경이 교회 안에서의 사역에 대해 서 빛을 비춰 주는 것이 우리의 최종적 판단 근거가 되는 것이다. 

(5)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 우리의 문화 현실이나 우리의 현실에 대한 요구로부터 도출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현실이 이 문제를 판단하는 준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서 교회 안에서 남자들과 똑같이 교육받은 여성들이 차별 받고 있다는 현실로부터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의견을 이끌게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 문화의 요구가 이 문제를 판단하는 준거가 되어서도 안 된다. 

1세기 교회의 문화적 정황이 우리의 교회의 원칙을 규제하도록 해서도 안되고, 그와 반대로 오늘날의 문화적 상황이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좌지우지하도록 해서도 안 된다. 

오늘날에는 여성들의 참여가 사회 전반에 일반화되어졌으므로, 또한 교회 안에서는 여성이 더 많으므로 당연히 여성이 교회 안에서 중요한 직임을 감당하여야 한다는 식의 오늘의 문화와 현실에 근거한 논의가 우리의 사유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 

다시 한번 더 말하지만 신약 성경이 신약 교회의 이 문제에 대해서 말하는 것만이 우리의 최종적 판단 근거가 되어야 한다(sola scriptura!). 

(6) 그렇기에 오늘 우리의 상황에서는 똑같이 교육받은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 전도사나 교 육부서 등에서 사역할 때 경제적 처분 (예) 사례에서나 존경받음에 있어서 남성들과 차별 받지 아니하도록 하는 모든 외적인 준비가 이루어져 나가야 한다는 것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해야 하고 이를 이루어 가기 위해서 함께 노력해 가야 한다. 

(7)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성경의 규범적 의미에 대해서 우리가 다 순종하려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복종해야한다.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 하지 않는 것은 비성경적인 태도이다. 그러나 혹시 성경을 존중하면서 서로 달리 해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서로가 성경을 존중하는 태도를 확인 할 수 있으면 그것을 인정하면서 서로 존중히 여기면서, 성경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에 대해서는 재미있게 토론하며 함께 하나님의 바른 뜻이 어떤 것인지를 추구하여 가야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서로 인신 비방하거나 서로를 이단시하는 태도로 발전되어 가서는 안된다. 물론 성경의 가르침에 복종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강한 비판을 해야 한다.다시 말해서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에 복종하려고 하면서 그 성경의 가장 바른 뜻이 어떤 것인지를 함께 찾아가는 동료 해석자들로서 서로를 존중하고 귀히 여기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다시한번 더 강조하자면, 우리의 모든 판단의 최종적 근거는 성경의 가르침이어야만 한다. 

2. 이 문제에 대한 신약의 해당 구절과 그 의미 

그렇다면 우리는 일차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결정적인 논의를 하는 신약 성경의 구절이 있는 지를 확인해야 한다. 먼저 이 논의와 관련해서 많이 언급되는데 실상 여성의 교회 사역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구절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첫째로, 고린도전서 11:2-16의 맥락을 잘 살펴보면 그 본문은 직접적으로 여성의 교회 안 에서의 사역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 구절 안에 있는 예언에 대한 언급은 당시에는 여선지자들이 아직까지 있었다는 것에 근거하여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언급에 근거해서 당시에 예배 가운데서 예언하는 여선지자가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오늘날도 교회 안에 그런 일을 하는 이들이 허용될 수 있으리라 고 하는 것은 계시사의 발전에 유의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로, 고린도전서 14:34-36도 여성의 교회 안에서의 사역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은 아니라 고 판단된다. 이는 예배 중에 소란스럽게 하거나, 특히 옆 사람에게 묻기 위해 말 하는 것을 지적하면서, 바울이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 지니라”(고전 14:35)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그렇게 보아야만 이 구절들에게 바울이 말하는 요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여성들이 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던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서 예배가 소란스러워지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적당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는 권면의 한 부분으로 주어진 말씀으로 생각해야지, 이를 여성 사역에 대해 직접적 함의를 지닌 말씀으로 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 가운데서 이 문제와 관련하여 직접적인 연관성을 지닌 구절은 디모데전서 2:9-14의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서는 그 맥락이 교회의 예배적 상황이라는 것은 바로 위에 있는 구절인 디모데전서 2:8의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고 말하는데서 찾아 질 수 있다. 이는 각 가정에서 기도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기보다는 예배처에서의 의식적 기도 행위를 언급하는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런 예배적 맥락에서 여인들이 과연 어떻게 자신들을 치장할 것인지를 말하고(2:9-10), 이런 예배적 상황에서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고 한 뒤(11절, 여기까지는 말씀은 고전 14:34-36의 의미와 상통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하고 있다(12절). 

그러므로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여성의 교회 안에서의 목사와 장로로서의 사역에 대한 찬반 양론이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 본격적 쟁점

“디모데 전서 2:12-14을 과연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 구절과 관련된 중요한 논점은 다음 세 가지 일 것이다. 첫째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12절)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둘째로, 이 금령은 당시의 문화적 상황에 따른 1세기적 정황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니면 주께서 오실 때까지의 상황 전체를 지배하는 것인가? 셋째로, 이 말씀을 바울의 글로 믿는 지, 아닌 지의 여부이다. 

이 세 가지를 하나하나 논의해 보기로 하자. 

첫째,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12절)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이 말의 표현 형태는 다른 곳에 사용된 용어들과 비교할 때 가르치는 것은 교회에서의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것과 연관된 것이고(딤전 1:3; 3:4; 4:11, 13, 16; 5:17; 6:3; 딤후 2:2, 24; 4:2), 따라서 다른 곳에서 “목사 즉 교사”(엡 4:11)라고 언급된 이들의 사역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주관하는 것”도 교회 안에서 공식적으로 다스리는 것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이는 다른 곳에서 “장로들”이라고 언급된 이들이 하는 사역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게 보면 이 말씀은 여자가 교회 안에서 공식적인 가르치는 직무인 목사의 역할을 하는 것과 다스리는 직무인 장로의 역할을 하는 것을 금하는 구절이라고 해석되는 것이다. 

둘째, 이 금령은 당시의 문화적 상황에 따른 1세기적 정황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니면 주께 서 오실 때까지의 상황을 지배하는 것인가? 

만일에 1세기 정황에서의 이야기라면 이 말씀은 1세기 성도들에게는 구속력을 지니는 것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구속력이 없는 말씀인 것이 된다. 만일 그런 것이라면, 교회 모임과 관련하여 여자는 머리에 수건을 쓰라는 금령이(고전 11:2-16) 1세기 고린도 교인들에게만 적용되고 오늘 우리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과 같이, 디모데 전서의 이 금령도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금령으로 여겨져야 할 것이다. 

만일 이 디모데 전서 2장의 본문이 12절로 마쳐지고 있다면 이와 같은 해석의 가능성도 상당히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본문에는 디모데 전서 2:13-14이 따라 붙어 있으므로 결코 그렇게 해석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말씀에 의하면 이 말씀의 인간 저자는 창조의 순서에 근거해서(12절), 그리고 타락의 순서의 근거해서(14절) 여자가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가르치며 주관하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논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의 질서와 타락의 문제가 있는 상황 가운데서는 이는 계속 적용되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이 논의의 방식을 깨지 않는 한 우리는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창조의 질서가 계속되는 한, 교회에서는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12절)이 허락되지 않는다. 

셋째, 이 말씀을 바울의 글로 믿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논의해 보기로 하자. 

필자는 이 말씀을 바울 자신이 쓴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바른 해석이라고 여긴다. 본문 자체가 사도 바울이(딤전 1:1; 1:13; 2:7) 디모데에게(1:2, 18; 6:20) 구체적인 정황 가운데(딤전 1:3) 있는 그에게 목회의 지침을 주기 위해 기록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1세기 정황에서 사도의 이름을 빌어 바울의 제자 격되는 존재가 이런 편지를 쓰는 것이 오늘날과 같이 위조나 이름 도용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당대의 관습적인 관례였다는 설명을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렵다고 본다. 

그러나 백 번 양보해서 혹시 그렇다고 해도 적어도 그 인간 저자가 이 글을 쓰는데 성령께서 영감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져야 한다. 

그렇다면 위의 논의에 의해서 이는 오늘 우리를 규제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이 부분의 인간 저자가 누구이든지 이 말씀에 따라서 우리는 교회에서는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12절)을 허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을 바울이 쓴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그렇게 논의하시는 분들은 과연 만일 이것이 바울이 친히 쓴 것이라면 이 말씀을 따라서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그런 논의를 하는 것인가? 혹시 이 말씀에 따르고 싶지 않은 마음이 그들을 이 말씀은 바울이 쓴 글이 아니라는 해석에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닌지를 묻고 싶다). 

4. 결론 

이상에서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여성의 교회 안에서의 사역 문제를 다루는 유일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는 디모데 전서 2:12-14에 근거해서 판단할 때 여자가 교회 안에서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일을 하는 것(목사직)과 다스리고 주관하는 일을 하는 장로직은 허락되지 않았고, 이 구절의 내포에 따라 그것은 창조의 질서가 존재하는 한 지속되는 교훈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런 성경의 가르침이 있는 한 우리는 이 말씀에 근거해서 교회 안에서 목사직과 장로직을 여성에게 허락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외에 폭 넓은 의미의 여성 사역은 교회 안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고 격려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신약의 가르침에 우리가 복종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이 능력이 부족하다거나 열등하다는 생각에서 그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님에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순전히 성경이 지시하는 가르침에 충실하려고 하는 마음에서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사역에 대해서, 그것도 목사직과 장로직에 대해서만 이런 금령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 여성이 가르치는 것을 이 성경은 금하지 않는다. 또 다른 사회적 맥락에서 여성이 주관하는 자와 치리하는 자와 재판하는 자가 되는 것을 이 성경은 금하지 않는 것이다. 

여성이 잘 다스릴 수 있는 은사가 있다면 다른 사회의 영역에서 그와 부합한 하는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일의 한 부분이 될 것이다. 또한 여성이 잘 가르치는 은사가 있다면 이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잘 가르치는 일을 효과적으로 해야 할 것이고, 그리스도인 여성이 그리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2:12-14의 의미에 대한 우리의 주해가 유지될 수 있다면 교회의 맥락에서는 여성이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목사직을 수행하는 것과 다스리는 장로직을 수행하는 것이 허용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서 언급하고 있지 않은 집사직에 대해서는 여성이 그 집사직을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로마서 16:1과 디모데전서 3:11에 대한 주해를 참조할 때도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물로 이것은 그 자체로 또 깊은 주해적 논의를 필요로 하는 문제이다.) 

또한 고래로부터 칼빈을 비롯한 많은 개혁신학자들도 여성의 집사직은 허용적인 태도를 가져 왔다. 이는 집사직이 목사직이나 장로 직에 비해 낮은 직임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교회의 모든 직임의 평등성은 장로교회의 큰 가르침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장로교 헌법에 허용하지 않고 있을 때는 총회에서의 연구와 논의를 거쳐서 헌법이 수정된 후에야 시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여성의 교회 안에서의 목사와 장로로서의 사역 가능성의 문제는 디모데 전서 2:12-14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부디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에 충실해서 이 말씀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한다.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이 어떻게 되든지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근자의 논의 중에서 가장 성경적이며 개혁파적 전통에 충실하며 이 글의 입장과 가장 유사한 논의로 Edmund Clowney, The Church(Leicester: IVP, 1995), 제 15장의 논의를 참조하라. 
또한 이와 가까우면서도 집사직도 여성이 감당하지 않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논의로는 Robert L. Reymond, A New Systematic Theology of the Christian Faith (Tennessee: Thomas Nelson, 1998), 제 23장 각주 9, 10을 보라. 


출처 :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

Posted by 작은샘

org date: 2012-01-27 11:24

 

http://www.reformednews.co.kr/986

평등과 복종의 원리에서 본 여성안수 문제

소재열

<크리스찬연합신문사>(9월 2일자 신문)에서 연속기획특집 이슈논단으로 여성안수 문제를 취급했다. 여성안수를 찬성한 조동호 목사와 이종윤 목사, 여성안수를 반대한 손석태 목사와 소재열 목사의 글이 연재됐다. 본 글은 여성안수 반대의 글을 제기한 소재열 목사의 글을 <크리스찬연합신문>의 양해를 받아 싣게 되었다(리폼드뉴스 편집부). 여성안수를 둘러싼 논쟁은 복음주의자 안에서도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사안으로 화해가 불가능할 정도가 되어 버렸다. 이제 여성안수의 문제는 신학자의 개개인의 차이와 논쟁을 뛰어넘어 교단별로 뚜렷한 양자택일의 입장을 취함으로써 지금까지 교단을 구분했던 교리적인 차이보다 여성안수의 문제가 다른 어떤 교리보다 더욱 상징성을 가진 교단의 구분을 위한 범주가 되어 가고 있다.

이제 여성안수를 지지해 준다면 어느 누구와도 연대할 수 있다는 태도가 교회 내의 여권주의주의들과 이 운동을 지지하는 그룹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제 성경의 권위와 보수적인 성경해석을 추구하는 개혁파 교단들끼리도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진영과 찬성하는 진영으로 나누어지는 이런 경향은 어느 정도 전 세계적인 흐름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1. 장로회 각 교단의 여성안수에 대한 역사적 고찰

현재 한국장로교 안에서 고신측과 합동측은 여성안수를 허용하지 않지만 기장측과 통합측은 여성안수를 허용하고 있다. 기장측에서는 1956년 제41회 총회에서 여장로제를 통과시키고 그 다음해인 1957년에 3명의 여 장로가 탄생하였다. 여 목사제는 1974년 제59회 기장총회에서 받아들여졌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측에서는 여성안수 청원은 제46회, 제47회, 제49회, 제50회, 제52회 총회 등 거의 매년 총회에 여성안수를 청원하였으니 총회는 번번이 이를 반려하였다.

1968년 제53회 총회 때는 여 장로 제도만을 청원하였으니 다음해 총회에서 반려되었고, 1971년 제56회 총회에서는 투표에 부쳐져 94:194로 부결되었다(대한예수교 장로회(통합), 제56회 총회, 총회록, 98-99). 제56회 총회 이후로 여성안수 문제는 여성들의 청원으로 거의 매해 투표에 붙여지기는 하나 부결을 거듭할 뿐이었다. 1991년 제76회 총회는 여성안수 부결에 대하여 “향후 3년간은 이 문제에 대하여 헌의도 할 수 없도록 하는 안”까지 통과시켰다. 그러나 그 3년의 기간이 지난 후인 1994년 제79회 총회여성안수의 건이 통과되고 노회 수의를 거쳐 1995년 5월 27일 여성안수에 대한 헌법 개정안이 공고된 이후 1996년 4월 28일 첫 여장로로 안수를 받았고 그해 첫 여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1994년 제79회 통합측 총회에서 “여성 안수 문제”에 대하여 허용하는 결의를 하자, 그 여파가 합동측에까지 확대되면서 이 문제에 대한 성경적 논의의 필요성 때문에 <신학지남>, 1996년 가을호(통권 248호)에서 특집으로 “교회와 여성”이라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들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김의환 박사,“교회내 여성의 기능과 성직의 자격”, 박아론 박사,“여성의 목사안수에 관한 여권주의자들의 주장과 우리의 견해”, 권성수 박사,“딤전 2:11-15에 관한 주석적 고찰”, 김길성 박사,“여성임직에 대한 성경의 교훈”, 다음해인 1997년 가을호(제252호)에서도 심창섭 박사의 “여성안수에 대한 소고”와 정훈택 박사의 “존재론적 평등성, 기능적 종속성”, 이관직 박사의 “성경 속에 나타난 여성안수에 대한 이해”라는 논문이 발표됨으로 합동교단의 신학적 입장은 여성안수가 신학적으로 불가함을 발표하게 되었다. 또한 제83회(1998) 예장합동 총회는 신학적으로 여성안수를 허락할 수 없다고 이를 확증했다.

2. 여성안수 문제에 대한 신학적 논쟁

한국장로교회는 역사적으로 여권문제는 함경북도 성진 중앙교회 김춘배 목사는 1934년 8월 22일자 「기독신보」에 “장로회 총회에 올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의 공개서한을 발표한 일이 있었다. 그는 이 글에서 지난 해 총회시 함남노회에서 여자에게 장로 자격을 주자고 헌의한 건을 부결한 데 대해 유감을 표시하고, 남녀 차별적 헌법에 근거하여 여자에게 치리권을 부여하지 않은 것은 성경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김춘배 목사는 “여자는 조용하라.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고 바울이 기록한 것은, 2천 년 전의 한 지방교회의 교훈과 풍습을 말함이요,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다”라고 선언한 것이 총회에서 문제로 제기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총회는 단호하게 “성경의 파괴적인 비평을 가르치는 교역자들과 성경을 시대사조에 맞도록 자유롭게 해석하는 교역자들을 우리 교회 교역계에 제외하기 위하여 총회는 각 노회에 명하여 교역자의 시취문답을 행할 때에 성경비평과 성경 해석 방법에 관한 문답을 엄밀히 하여 조금이라도 파괴적 비평이나 자유주의 해석 방법의 감화를 받은 자는 임직을 거절케 할 일이오며 이미 임직 받았던 교역자가 그런 교훈을 하거든 노회는 그 교역자를 권징조례 제6장 제42조, 제43조(면직조항)에 의하여 처리케 할 일이다.” 라는 입장을 정리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교단에 속했던 김세윤 교수는 여성안수를 고린도전서 14장이 사본학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점을 들어 후대에 남성우월주의자인 누군가에 의해서 바울의 이름으로 삽입ㆍ편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성경해석은 여성 안수를 지지하기 위한 해석학적인 주요한 유형들 가운데 속하는 것으로서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믿음과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그의 세미나에 참석한 합동교단의 여성도들 다수가 지지하였다. 이에 대해서 서철원 교수는 김세윤 교수의 신학적인 탈선을 중심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박혜근 교수(칼빈대학교 조직신학교수)는 그의 논문 “‘평등 그러나 복종’의 성경적 이해”라는 논문에서 “1970년대를 기점으로 교회 안에서도 페미니스트 운동의 여파로 여성의 독립적인 가치와 남성과 동등한 성직 안수의 권리를 구현하고자 하는 시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라고 말하면서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들이 가진 해석의 지배적인 원리란 남성과 여성의 ‘동등’(equality) 혹은 남성으로부터 여성의 ‘해방’ (liberation)이라는 정치적 사회적 이념”이었으며, “이들 이념적 가치야말로 교회 안과 밖이라는 구분을 떠나 역사적인 모든 유형의 페미니스트들이 실현하고자 했던 공통된 목표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교회와 관련하여 페미니스트들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관심사는 남성이 독점해 온 성직을 여성과 공평하게 나누어 갖자는 것이며, 그 첫 번째 실천적인 과제가 바로 성경을 그들이 가진 이념으로 재편하고 재해석 하는 일”이 문제점이었음을 지적하면서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을 따라 성경을 재구성하지 않는다면 성경은 결코 페미니즘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현재 여성 안수를 둘러싼 논쟁의 본질은 사실은 특정한 성경 본문을 둘러싼 단순한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여성 안수의 이슈를 근본적으로 성경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교회의 고백적 전통에 대한 현대의 이데올로기의 도전이란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성경의 권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전통적인 해석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를 인정하는 건전한 해석의 원칙을 고수하는 일일 것이다.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교회가 일어서고 무너지는 일이 달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1980년대 더글라스 무(Douglas Moo)와 필립 페인(Philip B. Payne)은 여성 안수를 두고 트리니티 저널(the Trinity Journal)을 통해 논쟁의 글을 실었다. 무는 이 논쟁의 글의 결론으로 “여성이 남성을 가르치거나 남성을 다스리는 권위를 행사해서는 안 되며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남성과 여성이 가지는 관계의 구조를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페인은 “디모데전서 2:11-15은 교회에서 여성들을 가르치거나 다스리는 지도자로서의 활동을 금하는 충분한 근거를 주고 있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사도 바울의 특수한 국지적, 문화적 조건 하에 있는 에베소교회에게 그 같이 말하였으나 우주 보편적인 모든 교회에 적용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따라서 오늘날의 교회에까지 영속적인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함으로서 이러한 논리와 논쟁은 이미 한국교회 안에서 역사적으로 첨예하게 대립되는 내용으로 이 문제는 단순히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는 차원이 아니라 성경 해석과 성경의 무오성이라는 측면에서 거론되기도 했다.

이러한 논쟁의 대립들은 역사적 정통신학을 결정짓는 신앙과 신학의 유일한 원천인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있으며, 특히 성경의 무오성과 영감, 권위에 대한 해석의 문제로 대립되었다. 그 대립의 한 중앙에 성경의 무오성과 영감을 부인하고 성경의 신적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탈선적 해석방법들로 대한 전통적인 해석방법과 현대신학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어쩌면 이러한 대립과 충돌, 논쟁과 대결은 성경과 신학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나타내기 위한 필요한 조치들이라 할 수 있다.

3. 신학적 근거에 의해 여성안수를 반대한 이유

신학이란 곧 성경해석의 원리이자 성경해석에 근거한 사상적 체계이다. 따라서 신학이란 신앙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회가 지금까지 교회를 양육해 온 바른 신학을 성경의 이정표로 삼는 일은 자유주의 현대주의적 폐해가 만연한 지금에 더욱 중요한 일이다. 즉 신학적 탈선은 언제나 병든 신앙의 문제로 이어진다. 신학의 내적 원리는 믿음이라면, 외적 원리는 성경이다. 따라서 성경 본문의 의미가 우리의 삶에 어떤 함축성을 갖는가 라는 질문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성경이 교회의 신앙과 모든 실천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여성안수의 문제 역시 성경을 정경으로 전제하는 건전한 성경해석의 원리를 채택하는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문제는 이 문제가 양성평등주의, 비성경적인 성차별주의에 편승한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출발해서는 안된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입장에서 여성안수를 반대한다.

첫째, 김세윤 교수는 여성안수를 고린도전서 14장이 사본학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점을 들어 후대에 남성우월주의자인 누군가에 의해서 바울의 이름으로 삽입ㆍ편집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를 거부한다.

어느 누구든지 성경 권위를 훼손하는 비평적인 접근은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바울서신 중에서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성경의 본문에 대해서 바울의 저작을 부정하는 식의 주장이나 성경의 저자들이 틀렸다고 주장하거나, 성경도 문화나 환경의 영향을 받는 상대적인 문서일 뿐이라는 유형의 해석에 동의할 수 없으며 이를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니콜(Roger Nicole)은 다양한 성경해석의 입장을 소개하면서 여성안수를 긍정적으로 보면서 “성경의 본문이 항구적이고 우주적인 구속력을 갖는다는데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내용은 인정할 수 없다.

둘째, 성경과 전통의 관계에서의 문제 때문이다. 개혁주의 교회는 특별히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있어서는 “규범적 원리”라고 불리는 독특한 해석적 원리를 발전시켜 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Ⅰ:Ⅵ에 나타난 대로 성경의 절대성과 충분성, 충족성에 대한 신앙에 근거해서 성경에서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하게 가르치지 않는 것은 교회론의 영역에 일체 도입하지 않았다. 반드시 성경으로부터 확정적인 지지를 받는 것만을 교회의 조직과 예배모범의 요소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규범적 원리는 종교개혁자 칼빈에 의해서 처음 제안되었다. 이러한 규범의 원리들은 성경의 권위를 보존하고자 하는 열정과 의도가 근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원리에 따르면 여성안수에 관한 한 여성의 안수를 위한 성경의 승인을 확보해야 한다. 왜냐하면 여성안수를 허용해야 할 것인지, 금해야 할 것인지는 전적인 성경적인 근거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즉 여성안수 허용의 정당성은 성경의 근거와 함께 분명하게 증명되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이같은 증명의 의무는 여성안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이유를 반대하는 식으로 여성안수를 증명하여 성경적 권위의 근거로 삼는 것은 옳지 않다.

셋째, 창조와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여성의 문제 때문이다. 남녀 창조의 기사에서 남자와 여자가 책임과 권한에서 동등하지 않다. 남녀가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사람이라는 존재론적으로는 동등하다. 그러나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고 이브가 있기도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았고 행위언약의 당사자가 되었다. 아담의 위치는 ‘먼저’로써 특징 지워진다. 먼저 됨은 존재의 순서를 말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양식을 말하는 것이다. 즉 아담이 언약의 대표자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아담은 이브를 포함한 모든 인류를 위한 언약의 머리가 됨으로써 단순히 시간적으로 먼저 지어진 존재 이상의 이부에 앞서는 권위를 가진 존재가 된 것이다. 남녀간의 권위와 복종의 이슈는 일반적으로, 근본적으로 창조시 언약적 질서에 속한 문제이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과 관련하여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아무런 역할의 차별이나 구분이 없어야 한다고 해석하면서 이 구절이 남자와 여자 사이의 일정한 역할의 구분을 규정하는 다른 성경과 충돌하는 것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여성안수자들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 28절이 보편적 교회에 영속적인 원리라고 믿었다고 보고, 표면적으로 이 성경과 충돌하는 모든 성경은 거부되어야 한다고 믿는 입장이다. 브루스나 그 브루스의 입장을 취한 김세윤 교수는 갈라디아서 3장 28절과 반대되는 주장을 담고 있는 다른 성경을 다룰 때 전자를 취하고 후자를 부정한다.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이러한 입장은 결코 지지를 받지 못한다.

우리는 “성경은 아무런 내적인 모순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수용한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서의 자유와 여자에 관한 제한규정이라는 상호 모순되는 것 같은 두 가지 언급을 설명하고자 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평등과 일체성의 선언은 교회 안에서의 역할의 구분과 차이에 대한 명령과 아무런 모순 없이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며 오늘날의 교회에도 여전히 권위적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할 수 있다.

4. 결론

결론적으로 여성안수를 금해야 한다는 주장은 성경이 명확하게 가르치는 바라고 믿으며, 여성의 성직안수 금지는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라는 규범을 존중하는 해석적 노력의 결과로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이다. 성경은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의 소유자로서는 동등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과의 언약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권위와 복종의 질서가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러한 남녀의 언약적 권위와 복종의 질서를 무효화 하거나 소멸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며, 이는 이미 밝힌바 예장 합동교단의 신학적 입장이기도 하다(*) 

 

* 일부 오자를 수정하였습니다.  

영성안수 -> 여성안수

Posted by 작은샘